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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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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12.9 주일 http://sungamch.net |
그리스도인의 입체적인 인격에 대해서
엡3:19
지난 주일에 저는 설교 초입에 ‘인생의 목적어’(정철, 리더스북,2013)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과연 기독교인의 목적어는 뭔가를 여러분에게 질문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지난 12월 8일, 그러니까 제가 주일 설교를 하던 그 날 저 멀리 독일에서 축구시합이 벌어졌습니다. 레버쿠젠과 도르트문트라는 독일의 프로축구팀이 대결을 벌였는데, 그 경기에서 우리나라 축구국가대표선수인 손흥민이 1골을 넣어서 1:0으로 레버쿠젠이라는 팀이 승리했습니다. 뭐 그것까지야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손흥민 선수가 독일에서 공을 골대 안으로 밀어 넣자마자 우리나라에 개설된 손흥민 선수의 응원 게시판에 순식간에 3000개의 댓글이 달렸답니다. 여기까지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댓글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영어, 과학, 국어 시험 점수 잘 나오게 해주세요.” “여자 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 “그녀가 다시 내게 돌아오게 해주세요.” “로또 1등 되고 회사 진급시험 붙게 해주세요.” “그녀하고 결혼하게 해주세요.” 같은 것이었답니다. 아니, 축구선수 손흥민의 골하고 자신들의 평소 소원하고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교회도 아니고 사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흥민이 뭐 신령한 종교적인 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댓글을 단 20~30대의 젊은이들이 무의식 속에서 종교적 심리를 쏟아내었던 것입니다. ‘종교하고 무슨 상관이냐. 멀리 독일에 가서 까지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그에게 숟가락 하나 얹어 은총을 나눠받으면 되지’ 그런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게 그동안 기독교가 세상에 퍼뜨린,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기독교적 인격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의 입체적인 인격’에 대해서 성서를 빌어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독교 신앙에는 인격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인격은 입체적 즉 어른답습니까?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만 진정한 ‘사람됨’은 그저 태어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성이 잘못되면 사람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사람이 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말할 때 그걸 ‘인격’ ‘틀’이라고 합니다. 인격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인격은 ‘틀’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거고 닦아야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가 달립니다.
바울은 사람이 되는 조건을 네 가지로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됨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입니다. 넓이는 평면입니다. 높이와 깊이는 평면에 대해 입체입니다. 길이는 시간적인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사람이 인격을 이루면 하나의 구(球)와 같은 입체적인 이미지가 되는 겁니다. 소위 ‘둥글둥글하다’는 것이 그 표현입니다. 사람됨이 ‘둥글둥글한 것’말입니다. 대부분은 나이가 들면 조금씩 모난 것이 둥글어지긴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이 주는 붕괴에 가까운 것이지 갈고 닦아서 얻는 ‘격’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공처럼 둥근, 입체적인 인격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숱하게 말하는 ‘내가 뭣도 알고 뭣도 안다’는 말하는 그 인격입니다. 빈부나 귀천이나, 높음이나 낮음이 매 일반이 되는 그런 경지가 바로 구(球)의 입체적인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넓이는 사람의 사회성입니다.
높이는 사람의 종교성입니다.
깊이는 사람의 자기 성찰의식입니다.
길이는 사람의 시간성입니다.
사람이 넓이를 가지고 때문에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넓이가 줄어든 사람이 ‘자폐’인 것입니다. 높이를 지니기 때문에 종교적인 동물입니다. 깊이를 갖기 때문에 철학적입니다. 길이를 지니기 때문에 시간을 잽니다. 여기서 어느 하나를 빼도 사람됨의 틀은 완전성을 갖지 못합니다. 자폐, 종교, 철학, 시간 그 어느 것을 제외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말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함 사람의 틀, 얼마나 넓은가, 얼마나 깊은가, 얼마나 높은가, 얼마나 시간성인가(하루를 천년으로 바꾸는)를 보여주는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빵을 먹여주는 그런 예수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모델’이라는 겁니다. 그게 예수의 본질적 가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무엇보다 사람들의 올바른 사람 됨, 인격적 인간의 원형이 되고 거울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성찰하는 마음으로 짚어 봅시다.
첫째, 넓이의 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넓이의 인격이란 뭘까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인격입니다. 넓다는 말은 좁다는 말의 반대어입니다. 따라서 넓은 인격이 어떤 건지를 알려면 좁은 인격이 뭔지 알면 됩니다. 좁은 인격은 어떤 겁니까? 나만 아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인격입니다. 자기 가정, 자기 교회, 자기 새끼, 자기가 하는 일, 자기 처지만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이게 좁은 인격입니다. 인격이 이렇게 좁으면 나 외에는 다른 게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고집이 생깁니다. 독선이 일어납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넓은 인격은 그 반대겠죠. 내 말도 말이지만 남의 말도 경청할 줄 알고, 내 처지도 처지지만 남의 처지도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은요 자기가 형성한 사람됨의 틀만큼만의 세계를 갖습니다. 넓은 인격을 지니면 그의 세계는 아주 큽니다. 좁은 인격의 사람은 좁은 세계를 갖습니다.
그런데요 인격의 영토를 넓히는 일은 제국적인 영토를 넓히는 일과는 반대입니다. 땅을 넓히기 위해서는, 욕망을 넓히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지만, 인격의 넓이를 확장하려면 빼앗지 말고 반대로 주어야 합니다. 그걸 영어로 ‘for-give’ 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용서라는 말이 바로 ‘for-give’입니다. 주는 겁니다. 이게 넓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의 두 발 중에 하나는 배우고 깨닫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선 즉 주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예수의 지식과 사랑을 알고 거기서 인간의 넓이를 배우라고 합니다. 이걸 배워야 합니다.
둘째, 인격의 높이는 뭘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입니다. 택리지라는 지리서를 쓴 조선시대의 이중환이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한국에는 천리를 달리는 강과 하늘을 찌르는 산이 없어서 큰 인물이 빈곤할거라고 합니다. 이것이 꼭 맞는 말이라기보다는 인격의 그릇과 자연조건의 함수관계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멀리 보지 않고 높이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이 그러하지 못하니 그런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욥기서에 나타난 욥의 삶에서 그걸 읽을 수 있습니다. 욥의 깨달음은 자식이나 물질이나 육신의 고통에서 얻어진 게 아니라 우주를 묻는 하나님의 물음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서는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이라는 게 고작 우리가 설교 시간에 듣는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훈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질문과, 유한한 것에 대한 통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신념, 내가 무엇 때문에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 같은 것들이 높이를 가져옵니다. 옹졸한 사람은 끝없이 옹졸하게 살다가 죽습니다. 천만금이 있어도 그는 커다란 애완견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물질에 끌려가다가 죽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높은 것의 간직이고 상징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했습니다. 높이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성자라 불리는 가가와도 예수를 믿은 즉시 “예수와 같이 되게 하소서”라는 결심의 기도를 함으로 높이의 인격을 추구했습니다. 로또 복권 맞게 해달라는 게 예수에게 하는 기도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여자와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게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라보되 높은 것을 바라보고, 닮되 높은 것을 닮고, 이르되 높은 것에 이르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도록 힘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의 인격을 닮지 않고 뭘 닮는단 말인가요? 그동안 우리는 그랬나요?
셋째, 깊이의 인격입니다.
이건 자신을 아는 인격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자신을 알지 못해요. 그리고 늘 남만 말해요. 자신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은 모두 아는 것처럼 처신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큰 어리석음입니다. ‘제 눈의 들보는 모르고 남의 눈에 티는’책하는 그런 못난이예요. 자기 성찰이 없는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높이를 알려면 깊어야 하는데, 깊이가 없으니 높이 또한 불가능한 것입니다. 참다운 인격의 그리스도인은 깊이가 있는 인격의 사람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바울의 말입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많이 지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은혜에 이르려면 자기성찰을 깊게 하여 얼마나 자기 속에 죄가 있는지 살펴야 가능하다는, 자기 성찰의 언어입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웬만큼 교회를 다녔거나, 이제 곧 천국에 가실 때가 되었거나, 내 신앙은 이만하면 괜찮다고 착각이 일어나는 분들은 어거스틴처럼 <고백록>을 써 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어거스틴은 이 고백록 ‘나는 누구인가?’를 하나님 앞에 쓴 이후로 인격의 틀을 완성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전해대는 나 말고, 포장을 해서 겉과 속이 다른 나 말고, 자기스스로에게 하는, 하나님에게 하는 <고백록>말입니다. 이 고백도 없이 우리는 덮어놓고 앞으로만 가요. 그래서 깊이가 더해지지 않는 거예요. 깊이가 없으니까 사람이 무거워지지 않아요. 겸손하지도 않아요.
자기 성찰이 일상화되면요 사람이 잔잔해져요. 예수는 고기잡이 어부들에게 말합니다. ‘깊은 곳으로 가라’ 그게 비단 고기 잡는 일에 대한 언질이겠어요? 앞으로 그들은 고기를 잡지도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루려면 길이의 인격을 갖춰야 합니다.
길이는 시간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시간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처음도 있고 중간도 있고 끝도 있는 흐름이지 않습니까? 그 흐름의 본질을 알고 살아가는 게 시간의 인격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아침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황혼의 죽음을 향해 가까이 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통해 삶의 진상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길이의 인격은 시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숙명을 해독하는 인격입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의 시간적인 비밀을 체득하는 인격입니다. 집어등에 모여드는 ‘겨울바다의 오징어 떼’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인격이 없는 것이고, 인격이 없기 때문에 선창가 횟집의 접시에 썰려 있는 것입니다. 죽음 너머 영생까지를 바라본 예수는 바로 길이의 인격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에게서 그걸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곧 인생의 수수께끼에 담긴 비밀을 담대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답할뿐더러 인생의 이전과 이후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을 가진 사람의 증거입니다.
그러나...우리네 삶은 앞에서 들려 드렸던 축구선수 손흥민 선수에게도 자기의 욕망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처럼 성공에 대한 조급함, 삶에 대한 짧은 시야, 그로 인한 불안과 근심에 쌓여 있습니다. 그저 아집과 독선이 난무하고 좁은 인격의 굴레에서 자폐성과 공격성만 기르고 있습니다. 언제든 후려칠 자세를 취하고 경계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틈이 나면 달려들어 빼앗아 자기 주머니에 넣습니다.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낮은 인격,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우둔한 인격, 이렇게 살다보면 인생은 늘 산 너머 산이고 그러다가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맙니다.
이러지 맙시다.
이렇게 예수 믿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처럼 나도,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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