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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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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 성탄절 설교 http://sungamch.net |
*2013 성탄절 설교
성탄날에 [회개]하라
요7:18
사람은 누구나 의식을 하던 하지 못하던 자기만의 인생관 또는 인생철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꾸지도 꿔주지도 않는’게 인생철학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버는 것보단 쓰는 게’인생철학인 경우도 있고요. 여하간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숫자만큼 자기만의 별별 사고의 틀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마구잡이 인생관이든 개똥철학이든 또는 정리된 인생관이든지를 막론하고 ‘인생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사물이나 사건을 응대하는 자기만의 방법이나 패러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시간 앞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새기고 있는 이 예수에게도 인생관이라는 게 있었을까요? 예수의 인생관은 뭐였을까요? 우리는 그저 덮어놓고 예수를 숭배하기에 바빠서 그의 인생관이 뭐였는지, 그분의 인생관이 나와, 보통 사람들의 인생관과 어떻게 다른지, 다르다면 그의 인생관에 비추어 우리의 인생관을 어떻게 수정하거나 동일시 할 수 있는지를 묻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더라도 예수의 탄생을 말하고 음미하며 환영하는 시간이니 오늘은 예수의 인생관에 대해서 생각의 뜰을 넓혀보고, 그리고 내 인생관을 거기에 맞춰 보면서 우리의 살아갈 방향을 정해 보도록 합시다.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관을 나타내 보인 적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7:18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관은 [독사 doxa]라고 했습니다. [독사]그러니까 살모사 같은 뱀을 말하는 줄 아시지만 그게 아닙니다. 헬라어 [독사]는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독사 곧 영광’이 예수님의 인생관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영광’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자기 생각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영광(독사)을 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독사)을 위해 힘쓰는 사람은 정직하며 그 속에 거짓이 없다.”이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이라고 의역되어 번역된 말이 바로 [독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비록 이 세상에 수많은 인생철학 또는 인생의 독사(영광)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인생관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느냐’의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모든 사람들은 이 둘 중 하나에 인생의 전부를 걸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뭘까요?
‘나’ 개인적인 인생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모든 게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만을 위해 삽니다. 이게 조금 확장된다고 해도 ‘내 새끼’ ‘내 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의 감정이나 신변이 안위 할 때만 그렇지 상황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자식, 아내, 가족도 ‘나’를 위해 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관의 내면에는 개인적인 삶이야말로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인간의 본질이고 실제라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고, 모든 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 욕망의 대상인 부와 명예와 영광이야말로 행복의 척도이며 인생의 목적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갖고 사는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다른 인생관 하나를 말씀합니다.
개인적인 인생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는, 쉽게 말해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며 살아가는 인생관입니다. 이러한 인생관의 내면에는 개체적인 인생은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하는 것으로 변화되고 초극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 말입니다. 이런 인생관은 비단 예수님만의 인생관은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동일하게 이런 인생관으로의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그게 바울에게 큰 기쁨이요 행복이라고도 했습니다.
자, 이제 오늘 아침에 태어나는 예수가 우리에게 보이려는 것은 이겁니다. 그의 벌거벗은 몸도 아니고, 그의 제한적인 육체가 뭐 신비한 요술을 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예수에게 뭘 바치거나 칭송한다고 해서 내게 어떤 물질적인 이로움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그의 탄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의 인생관입니다. 그의 인생관은 무엇입니까? ‘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게 그의 인생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겁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가르친 기도의 내용처럼 하늘의 듯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살아가는 것이 그의 인생관이었습니다. 물론 ‘하늘의 뜻’이란 ‘진리를 힘써 배우고 깨달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인생관을 피력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이 둘 중에 하나에 그의 삶의 기둥을 삶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고, ‘하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가끔 대다수 인생은 ‘자기영광’을 위해 살면서도 그게 옳으려니 하면서 새로운 인생관을 정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 또한 이 두 인생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개인의 영광을 위해 예수를 믿는 겁니다. ‘나’만 잘되면 그게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걸 축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적인 부와 욕망과 명예가 충족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알 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걸 가능케 해주는 것을 축복으로 압니다. 이걸 위해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신적 진리는 자신의 번영과 행복과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다른 명령은 거들떠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태어나는 예수는 이런 인간 군상들에게 전혀 다른 인생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제껏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의당 당연한 줄 아는 개인주의적인 인생관이 너희에게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주었고 사회에 참다운 평화를 가져다주었는지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죽어라고 ‘혼자만 잘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는지 뒤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개인의 것이라고 하는 명예와 부귀와 행복이 결국은 아침에 돋았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요 풀잎처럼 말라 버릴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가 인생의 목표로 삼고 투쟁하고 고통하고 추구하는 것이 결국은 안개와 같은 거 아니냐? 그걸 위해 그렇게 몸부림치며 산다는 말이냐? 더군다나 너희가 너만의 행복을 위해 사는 동안 또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이 아파하겠느냐?
그런 인생관으로 살면 인생들은 ‘만인의 만인에 의한 이리’가 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게 아니냐? 이렇게 너희들의 인생관과 신앙이 너희들이 바라는 행복의 목적과는 전혀 반대 되는 열매를 맺고 있다면 너희들의 인생관과 신앙관이 잘못된 거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들의 오래된, 고정된 인생관과 신앙관을 바리고 새로운 신앙관과 인생관을 가져라. 내가 제시하는 삶과 교훈을 따라가 보라. 내 처방을 실험해 보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관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앙관으로서의 급진적인 방향전환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인생관을 바꾸고, 신앙관을 바꾸라는 급한 신호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우리의 인생관과 신앙관의 회개, 즉 급진적인 방향전환을 하라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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