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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눅15:1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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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 참고 : | 2013.12.24 주일설교 http://sungamch.net |
원(圓)을 그리는 믿음
눅15:11-32
인생은 유아기, 사춘기 청년기를 통하여 마침내 성숙해집니다. 유아기는 부모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타율적인 시기입니다. 사춘기는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율적인 인간이 되려고 애를 쓰는 방황의 때입니다. 청년기는 사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고, 독자적으로 삶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시기입니다. 자율적 인생의 때가 이때 찾아옵니다.
그러면 이걸로 인생이 완성 되나요? 아닙니다. 진정한 성숙은 생물학적인 자율을 넘어서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율 즉 신율(神律)을 통하여 완성이 됩니다. 단지 부모의 곁을 떠나는 자율만이 아니라, 부모를 떠나 이것저것 듣도 보도 못한 세상을 경험하고 그걸 통해 세상과 우주와 삶과 죽음의 이치를 깨닫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게 ‘신율’입니다.
그 예시가 오늘 우리가 읽은 소위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동안 나쁜 둘째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에, 무한하게 용서해 주는 아버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걸 다시 믿음의 발전단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아들이 집을 떠나기 전의 단계는 유년기 믿음입니다.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 아들은 타율에서 자율로 들어서려는 사춘기 방황의 믿음입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 이쁜 여자도 만나고, 술에도 취해보고, 사기도 당해보고 하는 시기는 청년기 믿음입니다. 홀로서 보려는 겁니다. 그러나 인생이 여기서 끝나면 그것은 한 인간의 타락과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은 다시 타율을 넘어서는 과정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산전수전 다 겪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저런 객관의 고백과 자각을 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신율적인 단계 즉, 성숙한 믿음의 완성을 보여주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믿음에는 유년기 믿음, 사춘기 믿음, 청년기 믿음 그리고 이 모든 걸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에 들어서는, 그러나 과거의 그 타율적 존재 자리와는 다른 완한한 자율적 존재의 자리, 신율의 법도에 이르는 완성의 발전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믿음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와도 같다 하겠습니다. 이제 한 해의 마지막에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이 본문에 근거해서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유아기적 믿음은 다 아실 겁니다. 우리가 모두 아이를 길렀거나 손주 손녀들을 보고 있으니까요. 이때는 전적으로 부모의 보살핌에 의존하는 때입니다. 뭐든지 옹야 옹야 해줘야 하는 때입니다. 이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전능환상’이라고 하는 축적된 본능에 의해서만 사는 때입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가 아직도 ‘우는 놈에게 젖 준다’는 식의 유년기식 기억을 복습 시키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인간이나 믿음을 퇴행시킵니다.
이런 유년기 믿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 그냥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은 마냥 유년기 상태로 머물러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진리에 서야하고, 더욱 성숙하고 성장하여 끝내는 부활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을 초극하는 신적인 실제와 합일하는 경지까지 나아가도록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인간 혼의 성장을 도모하는 종교이지 유년기에 머물러 있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춘기 믿음은 어떻습니까?
유년기 믿음이 단순한 믿음이라면 사춘기 믿음은 말 그대로 사춘기입니다. 타율에서 자율로 가기 위해 반항하고 대들고 항의하고 질문하고 어긋나게 행동하는 때입니다. 이걸 한마디로 ‘방황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에서 말합니다. “알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습니까?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려면 알을 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한 영혼이 성장하려면 유년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게 알을 깨는 일입니다. 그러려고 방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렇게 알을 깨지 않으면 창공을 날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춘기적 믿음은 유년기적 믿음의 안전함을 떠나 불확실한 창공의 비상을 그리워하는 들뜬 마음이고 방황하는 마음입니다. 마치 부모만 알던 아이가 이제 다른 여자나 남자를 만나 부모 외에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고분고분하던 마음을 다른 이성에게 바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명령과 사랑 안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단계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졸라서 다른 곳에, 다른 사람에게, 다른 일에 진탕 쏟아 붓습니다. 탕진이 아니라 이 아들에겐 투자입니다. 새로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투자 말입니다. 알을 깨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정신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창공을 날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동안 이걸 비난하기만 했습니다. 이 비유가 믿음의 성숙을 그려 보여주고, 장차 하늘을 나는 존재로의 비상이 뭔지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년기적 믿음은 뭡니까? 앞의 사춘기적 방황이 발전된 결과입니다. 아버지의 알, 생존 관성의 알을 깨고 나와 독립된 개체로써 살아가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누구에게 탓할 수 없는, 스스로 책임지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누구에게 자신의 인생을 핑계대지 못하는 믿음의 발전 단계입니다. 청년기의 믿음은 타율에 대하여 자율을, 부자유에 대하여 자율을, 닫혀진 집에 대해서 열려진 사회를, 가족 윤리보다 사회 윤리를, 비합리적인 정서에 대하여 합리적인 이성에 놓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을 깨고 나간 새라고 죽을 때까지 창공을 날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비유는 비극입니다. 만약 인생이 이렇게 끝난다면 인생 또한 비참한 것입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끝나는 인생이라면, 집나가서 열심히 살아봤자 결국은 돼지우리에 코를 박고 그 찌꺼기를 먹으면 끝나는 인생이라면 뭐 하러 죽어라 살겠습니까? 일찍 죽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비유의 극점은 알을 깨고 창공을 날던 한 마리 새가 남극과 북극을 모두 경험하고 마지막에는 그가 태어난 본래의 자리로 귀향한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봇세는 돌아옴의 여정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다음의 시로 말합니다.
저 하늘
저 산 너머
무지개가 산다 하기에
찾아가 봤건만
눈물 흘리고 돌아왔다네.
이제 이 아들이 돌아가는 집은 유년기의 그 집이 아닙니다. 타율적인 집이 아닙니다. 사춘기 때 방황하던 그 집도 아닙니다. 청년기 때 믿음의 자율성을 높이던 그 집도 아닙니다. 돌아가는 집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이 그린 원 안에 포함하면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넓은 원의 신율적 공간입니다. 이 세상에 대비되는 저 세상 곧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세계는 둘째 아들이 자신의 생애에 획득한 삶을 재료(아버지의 재산, 젊음, 시간 등등)를 써서 획득한 믿음이 완성된 세계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단계, 완전한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유년기적 감정주의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방황하는 믿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공부하고 탐구하지 않는 자들이 자신들의 무식과 게으름을 변호하는데 흔히 동원하는 ‘기복주의’의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지와 정과 의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만남입니다. 이런 믿음의 측면에서 첫째아들의 심술은 그가 아직 ‘유년기 믿음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고, 그게 아마 당신일 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기독교는 ‘둘째 아들 마냥 성숙해지는 것, 그래서 다시 완성된 존재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을 때까지 알속에 있으면 그건 곤달걀입니다. 인생이, 믿음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알에서 나와 창공을 날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 중요한 것은 ‘날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자기 집을 찾아 올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창공을 날았고 다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왔습니다. 공중그네를 타는 사람은 높이 하늘로 오르는 일보다 땅에 사뿐히 내려서는 일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샘킨이라는 신학자가 ‘공중그네를 타는 철학자’에서,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말입니다. 떠나는 일도 어렵지만 돌아오기는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그 어려운 법을 실행해야 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완성입니다. 그것은 미완성으로 떠나서 완성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가 끼워준 금반지를 아십니까? 바로 승리자의 면류관과 같은 것이요, 커다란 원을 그리며 믿음을 완성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자기 몫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면서도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장차 믿음의 승리를 거둔 이들에게 내릴 ‘하나님 나라의 잔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의 원을 그리는 여정입니다. 원을 그리지 못하고 어느 한 점에 머물러 있으면 믿음이 신경마비에 걸린 것입니다. 비유가 보여주는 세계는 완성된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일생을 하나의 원으로 도형화되고, 그 원의 세계는 반지로 형상화되고 축제의 마당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완성해야 할 신율적인 완성의 공간, 지구도 집을 나갔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12월 마지막 주일에, 이 공간에서 우리 믿음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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