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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4: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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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 참고 : | 2014.1.2 주일설교 http://sungamch.net |
예수 믿는 사람이 누릴 행복, 예수
요4:13-14
예수께서 하루는 갈릴리로 올라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남쪽인 예루살렘에서 북쪽인 갈릴리로 가려고 할 때 통과해야 하는 길목이기도 하지만, 바벨론 포로이후 지배계층의 ‘분리주의 정책’에 의해 경멸을 받던 동네입니다. 그 경멸이 심해서 동네를 지나가는 것도 부정한 것이고, 그 동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부정하게 되어 버린 지가 500여 년이나 되던 그 무렵입니다.
그런데 그런 오래된 사회적인 통습을 거부하고 예수님이 그리로 걸어서 이스라엘 위쪽 갈리리로 가신 겁니다. 그러는 중에 사마리아 가운데쯤 있는 수가라 하는 작은 마을에서 쉬고 계셨습니다. 마침 거기는 우물이 있어서 나그네가 쉬기에 안성맞춤 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우물에서 물을 뜰 때 개개인이 두레박을 지참하고 다닌 것처럼 이스라엘의 우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물이 있어도 목마름을 해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 동네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당연히 두레박을 가져왔겠죠. 물론 그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500 여 년 동안이나 같은 민족이 원수지간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 물을 달라는 예수의 말에 여인은 의아해했습니다. 감히 할 수 없는, 보통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그것도 여자에게 부탁을 하다니요? 그래서 여자는 될 법이나 한 소리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당신이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고 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만남 속에서 인간은 무언가 찾고 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있어 우물물은 그의 생존을 지탱하게 하는 근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빵과 같은 육신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물은 물인데 목마르지 않는 물 즉, 육신의 양식 외에 구해야 할 것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장이나 가게에서 돈을 주고 사거나,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로부터 공급된다는 것을,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인 생수 즉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이가 있습니다. 이분이 무슨 말을 하셨는가하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대략 세 부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심미적 단계에서 사는 사람이고, 그 다음 단계가 윤리적인 단계이며, 마지막이 종교적 단계라는 겁니다.
심미적인 단계에서 산다는 말은 뭐냐?
육체적인 즐거움, 기쁨, 행복이 인생의 전부다 그렇게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쁜 여자와 힘센 남자만 보이고, 뭐가 돈이 되는지, 어디서 돈이 벌리는지에만 관심하며 살아가는 인생관의 사람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하는 사람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스트에서 행복을 위해 악마와 거래하는 파우스트를 그립니다. 파우스트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 가면서 행복의 봄을 찾아 나서다가 아름다운 여자 그레첸을 만나죠. 그때 그는 소리칩니다. “행복한 순간이여, 멈추어라!” 이런 육체적인 행복이란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파우스트가 절규하는 겁니다.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만, 이 심미적 행복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게 단점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육체적인 행복을 얻고 싶어 하는 소설처럼, 요즘 사람들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팝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도 상품이 되고, 수치와 혐오와 죄악도 팝니다. 몸이나 영혼을 파는 건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팔건 모조리 팝니다.(신성일 배우의 이야기도, 부끄러움을 파는 상술의 일종)
우리의 눈과 마음을 현혹하는 대부분의 상품광고들은 이 육체적인 쾌락에서 행복이 있다는 유혹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누구를 막론하고 헤엄쳐 나오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느닷없이 우물가 여인의 남성편력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참 어울리지 않는 문장입니다. 조금 엉뚱하다 싶은 이 이야기가 왜 여기 끼어들어 있는 것일까요? 그녀의 심미저긴 인생살이를 말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인생이 행복할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갈증만 증대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의 행복이 이렇게 되는 겁니까? 요4:13처럼, 그럴수록 더욱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의 대화에 이 여인의 부끄럽고 고단한 인생살이가 그대로 등장하는 것은 이 여인을 부끄럽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부정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람의 됨됨이가 달라져서 윤리적인 단계가 되면 어떨까요? 윤리적인 단계라는 것은 남에게 피해 안주고, 나 열심히 일해서 자기와 식구들 편안하게 거두고, 세상 어긋나게 살지 않는 게 가장 행복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단계는 제법 양식이 있다는 이들에게서 발견됩니다. 물론 이런 이들이 건전한 시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윤리적인 단계가 인격으로 고착이 되면 형식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윤리적인 단계의 고착된 상태가 성서에 나타나는 바리새인 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준수합니다. 그리고 그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고, 그 다른 점이 그들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들과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냉소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유대인들이 500년 동안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가졌던 태도입니다. 심미적 단계의 행복이 소멸되는 순간의 행복이라면, 윤리적 단계의 행복은 이기적이고 배제적인 행복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던 말든 나만 반듯하면 그게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차 이들이 지닌 이런 윤리적인 태도를 거부하셨습니다. 이들이 쓰고 있는 가면의식들을 벗기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수도 없이 많은 예수의 말씀들과 행동들을 통해 이 두 단계의 인간성을 극복해야 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시하는 인간 성숙의 단계, 인간이 비로소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단계가 뭘까요?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예수의 진의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게 부활이고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오늘 [생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심미적이지 않고, 윤리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며, 영생하도록 생명을 주는 물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생수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예수그리스도가 생수일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하자’라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영원성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통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인간이 영원하려면 영원한 그 무엇에 붙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한 것은 뭐가 있을까요? 인간 보다 조금 더 영원한 것들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많습니다. 소양강으로 흐르는 물, 교회의 뒷동산인 대룡산은 인간보다 훨씬 영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그 역시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 되는 그 ‘원인자’에 이르지 않고는 ‘영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영원한 원인자’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십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 모든 생명의 현재인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는 행복,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도 “사람이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만화로 보았습니다. 저는 그 손목사님의 생애를 만화로 보면서 이 분이야말로 지극히 종교적인, 자신의 행복을 하나님에게 둔 분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영원한 행복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펼쳐 보이신 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셨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예수입니다.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예수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예수를 알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온전한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로 가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통해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생명을 주는 물이고, 목마르게 하지 않는 물이며, 행복을 보장하는 물입니다. 그게 생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도달하는 법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어찌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허투로 여길 수 있겠으며, 듣기만 하고 곧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냥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게 아니라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도달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성서 본문의 계속된 말씀 중에 34절에 이르면 그런 결론을 성서가 제시합니다. 그러려면 예수의 말과 삶과 생각과 행동과 판단에 모든 걸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가 생수가 되는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행복을 적극적으로 구하며 살았던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물은 마셔야 그 맛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가 말합니다. “나를 먹고 마셔라”
진정한 행복이 여기, 예수를 먹고 마시는데 있음을 다시 한 번 혼에 새기고 길을 떠납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넘어서는 행복에 자신의 거처를 두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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