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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눅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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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 참고 : | 2014.1.8 주일 http://sungamch.net |
뽕나무에서 내려오시라
눅19:5-6
갈릴리 청년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솟구치던 때인지라 마을에 그가 당도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곳에는 부자였고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도 있었습니다. 부자라고는 하지만 그의 직업이 세리였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그를 죄인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예수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그의 키로는 군중에 쌓인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의 눈에 띄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머물고 싶다.”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단순하게 옛날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고, 만나자는 것이고, 늘 만난다는 것인데,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또는 언젠가는 예수를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묻기 위한 것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는 출세하고 돈 벌고 살아가는 게 일반화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만나 인생의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삭개오는 우선 예수를 보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갑니다. 이걸 잠시 우리는 ‘올라가는 믿음’이라고 해 둡시다. 뭐, 마땅한 표현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건 믿음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서 예수나 진리나 영원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문제에만 매달려 올라가는 상태가 아닙니까? 이때는 그저 뽕나무만 보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기 위해 뽕나무를 내려옵니다. 앞의 장면을 ‘올라가는 믿음’이라고 했으니 이건 ‘내려오는 믿음’이라고 합시다. 뽕나무에서 내려오는 이쯤이 되면 사람이 조금 겸손해지게 됩니다. 뭐든지 하나님께 달라고만 했는데, 염치도 조금 생기고, 응답이 없어도 고마운 마음이 일어나서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한 칸 씩 내려놓는 단계입니다. 우주와 인생사의 물리를 조금 터득해 가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를 만나게 됩ㄴ다.
@그리고는 예수를 모시고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이 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단지 삭개오가 예수를 모셔다가 진지를 대접하고 끝난 게 아닙니다. 심방을 오셨으니 잘 차린 식사나 하시고 축복 기도나 받아서 더 높은 벼슬과 더 많은 재물을 얻게 해달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그의 집으로 모셔 들였다는 것, 심방을 받았다는 것은 인생의 방향이 180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뀌었으니 ‘변화하는 믿음의 단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자신의 가치, 사고, 윤리, 철학 안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러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부터 삭개오는 삭개오가 아니라 삭개오 안에 예수가 사는 삭개오입니다. 이걸 예수가 내 안에 계시는 믿음의 단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좀 더 세분해서 생각해 봅시다.
왜 삭개오는 예수를 보려고 뽕나무로 올라갔나요? 물론 키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삭개오의 키만 문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지 않았다면 키가 작다고 예수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키가 크다고 모두 예수를 볼 수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문제는 키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군중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자 함에 있어서 교회 다니는 이들이 예수를 만날 수 없다면 그건 모두 그들 자신이 키가 작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죠?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건 그의 키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의 믿음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군중과 같은 방해물들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 안에도 예수를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게 하고 만날 수 없게 하는 군중과 같은 방해물이 많기만 합니다.
교회 정치 때문에, 물신주의적인 맘몬이즘 때문에, 신학적인 도그마나 틀린 교리 때문에, 교회의 경쟁체제 때문에, 신앙의 형식주의 때문에, 잘난 체 하는 가라지 같은 교인들 때문에, 교회 안에 파당과 싸움질 때문에 예수를 만나기 어렵다면 이는 모두 삭개오를 가렸던 군중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키가 작아서가 아니라 예수 아닌 것에 둘러싸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뽕나무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삭개오가 올라갔던 뽕나무는 오늘의 뽕나무에 비하면 오르기도 쉽고 예수를 보기도 쉬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뽕나무는 뽕나무에 잎이 너무 많아 올라간다고 한들 예수를 분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뽕나무가 다시 예수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를 보려고, 장로교라는 뽕나무, 감리교라는 뽕나무, 허목사라는 뽕나무, 이목사라는 뽕나무, 전도 집회라는 뽕나무, 기도원이라는 뽕나무, 신유집회라는 뽕나무에 안간힘을 쓰면서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래보았자 거기서 예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뽕나무를 기어오르다가 상처가 나서 곪아 터져 썩기도 하고, 혹은 떨어져 영혼이 절단 나기도 합니다. 예수를 보려고 오르던 뽕나무에서 실족하여 예수를 만나기도 전에 불구자가 되는 겁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수준이라 아직도 초기 믿음의 단계인 ‘뽕나무에 기어오르는 열심’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미숙한 믿음의 단계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걸 이용하는 작자들입니다. 이걸 이용해서 자기 뱃속만 채우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뽕나무 타령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뽕나무는 예수를 만나게 하는 뽕나무가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뱃속을 챙기는 거짓 뽕나무 인 셈입니다. 이런 교인이 많으면 잇속을 챙기는 이는 좋겠지만 정작 교인은 항상 갈증 하게 됩니다. 예수를 밤낮 입으로 부르지만 인격적이고 만나는 실존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늘 헙헙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구경하는 관객으로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구경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늘 뽕나무만 보입니다. 저 뽕나무가 더 좋다, 저 뽕나무가 더 잘 보인다는 정보에만 밝습니다. 그러니 설교도 그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뽕나무에 올라앉아서 예수를 잘 구경’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런 단계에 있는 이들은 이제 내려가야 합니다. 뽕나무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올라가는 믿음이 구경꾼의 믿음이라면, 내려가는 믿음은 다른 사람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예수를 만나는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예수를 만나려면 뽕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어디로 내려 와야 합니까? 예수가 있는 땅으로 내려 와야 합니다. 그것이 삭개오를 향한 예수님의 말이었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모든 만남은 일대일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만약 결혼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선을 보더라도 일대일로 만나야 되지 중간에 누군가 끼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매파가 낀다 해도 곧 빠져야 합니다. 그리고는 당사자 두 사람만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직접 부딪혀야 합니다. 그래야 인격, 진심, 진실의 생명적인 관계를 잇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어떤 혼사도 성사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둘러싼 여러 군중, 자기 외적인 군중이거나 자기 내적인 군중 즉, 지식의 교만이라든지, 부유함의 자만이라든지, 설익은 믿음의 뻐김 같은 뽕나무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나무위에 있지 않습니다. 낮은 땅에 예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슨 굉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와 인격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위해 마음을 맞추기 위해서는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키가 크면 큰 대로, 부자건 가난하건, 학식이 있건 없건, 낮춰 내려오면 되는 겁니다. 지금 이라도 내려오는 사람은 누구든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만나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의 중간 단계입니다. 만나는 믿음의 단계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마음의 본바탕으로 내려가는 것이요, 그 자리에 계신 예수를 만나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난다고 다 끝난 건 아닙니다. 연애를 오랜 기간 동안 했어도 남녀에게 결혼은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겁니다. 자식을 낳고 기르고, 집을 하고 팔고, 사우고 다투며 화해하고...변화를 위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생깁니다. 믿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가 내 안에 모셔 들여졌으면 당연히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삭개오를 보세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다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
얼마쯤 감사 헌금을 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부정과 착취로 살았던 삭개오의 삶의 방식, 인생 철학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대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뽕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를 만나고 영접한 사람으로서의 가장 성숙한 믿음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하기, 예수를 만나서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목표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심방을 받고 그 행위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어떤 외형적인 자세나 태도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이나 정신 속에 예수가 머물러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생존의 가치관에 대 전환이 일어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이냐 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내 놓겠다는 말을 시작할 때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그냥 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만큼이면 칭찬 받을만한지 않느냐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예수의 정신과 실천을 보시라는 겁니다. ‘내 안에 당신 있다’이 말입니다.
이게 기독교가 이상으로 하는 목표입니다. 예수가 믿는 각각 가치 내면에 존재하는 것, 그렇게 되어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 선’을 지향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세상이,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 채현국 선생님의 삶을 잠시 말씀드렸지요. 저는 그 어른을 생각할 때마다 톨스토이가 자꾸 떠오릅니다. 톨스토이는 예수와 만나는 순간 삭개오와 같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즉시 그의 몫으로 돌아올 아버지의 엄청난 유산을 노예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는 평생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었습니다. 톨스토이야 말로 뽕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를 만난 산 증인입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어 예수와 함께 일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마데 테레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녀는 뽕나무 위에서 구경만 하다가 인생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도 뽕나무를 찾으러 다니지 않습니까? 그거 기어 올라가는데 인생을 소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은 뽕나무 위에 올라 앉아 구경이나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벌써 20~30년 되지는 않았습니까? 뽕나무에서 간신히 내려오긴 했습니까? 그런데 예수의 심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뭔가 달라지는 게 두려워 망설이고 있습니까? 삭개오처럼 그렇게 될까봐 겁먹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를 집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생존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는 예수를 받아들이세요. 그 다음에 모두 그분께 맡기세요. 어떤 변화가 일어나던지 예수 만난 이후가 예수 없이 살던 이전보다 나쁠 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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