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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스8:1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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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8장 1절-9장 3절.
15절-20절: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일 동안 장막에 유하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자손이 하나도 없는지라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거한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주고 우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수종들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저희가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 아들들과 형제 십 팔 명과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 형제와 저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또 느디님 사람 곧 다윗과 방백들이 주어 레위사람에게 수종들게 한 그 느디님 사람 중 이백 이십 명을 데려왔으니 그 이름이 다 기록되었느니라.
바벨론에서 1차 귀환은 B.C. 537년경에 스룹바벨 그리고 예수아의 인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돌아온 자들이 일반회중이 4만 2천 360명, 노비가 7천 3백 37명, 노래하는 자가 200명, 이렇게 해서 4만 9천 8백 97명이 돌아왔습니다. 이 사실이 1장부터 2장, 4장 24절로 6장 22절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 장 8장은 2차 귀환인데, B.C. 458년 아삭사스다 1세 때에 에스라의 인도로 남자 1천 4백 96명, 레위인 38명, 수종자들이 220명, 이렇게 해서 합계가 1천 7백 54명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1절로 14절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록된 것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의 생명록에 기록이 되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8장 1절로 14절을 보니까 모두 남자만 기록이 되었는데 이들은 에스라와 함께 한 남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적인 범위로 볼 때에 남자는 힘이 있고 건설적이고 정복적이고 어떤 힘 있는 사역적인 의미로 느껴집니다. 그 때 여자가 안 들었을까마는 남자로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은 이제 말씀드린 신앙적 범위로 그렇게 느껴진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한 편 수치감도 저지를 수 있는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이제 읽은 말씀에 보면 아하와 강가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을 출발해서 9일을 걸려서 아하와 강가에 도착이 되었습니다. 이 강가에는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3일 동안 백성들을 불러 모은 거지요.
그런데 에스라가 모이는 백성들을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 그 중에 레위족속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직책을 가지고 수종을 드는 자들인데 다 어디로 갔느냐 그 말이요. 물론 포로로 잡혀간 이방 땅에서는 성전이 없어서 수종을 못 들었다고 하지만 1차로 성전건축이 있었고, 2차로 성전에 관한 일로 고향으로 70년 만에 올라가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다 어디로 갔느냐 그 말이요. 성전에 관한 출발이기 때문에 솔선수범해서 나서야 할 그들인데도 불구하고, 소식을 듣고 먼저 달려와야 할 그들인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말이요.
이게 우리에게 계시적으로 주는 말씀입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을 섬길 자들이라 그 말이요. 그런데 다 어디로 갔느냐 그 말이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짓고 성전에서 봉사하자’ 하고 에스라가 모으는데 레위인들이 ‘예’ 하고 나와야 하는 건데 다 어디로 갔느냐 그 말이요. 아하와 강에 홍수가 나서 다 쓸려 내려간 것인지? 나온 자들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이 참 서글프고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마당에 레위인들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자’ 하는 마당에 하나님을 섬길 자들이 없으면 안 된다 그 말이요.
그래서 명철한 자들을 뽑아가지고 가시바 지방으로 보내어 레위인을 데려오게 했지요. 그래서 레위인 38명, 느디님 사람 220명이 모아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전에서 수종드는 사람들로서, 느디님 사람들은 이방인이면서 레위인들에게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고향에 가자’ 그러면 성도들이 ‘예, 나도 가서 섬기겠습니다’ 하며 따라 올라가야 된다 그 말이요. 그런데 본문을 보니까 없다 그 말이요. 딴 백성들은 같은 이스라엘로서 모이는데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들은 없다 그 말이요. 다 어디로 갔느냐 그 말이요. 성화구원적으로도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21절: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그래, 이제 레위인들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21절로 보면 금식을 선포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7장 6절에 보면 에스라는 자신이 왕에게 구하는 것을 다 받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4천리 길을 가야 하는 험난한 여행길이므로 왕에게 얼마든지 호위병을 청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왕에게 한 말이 있지요. 22절 한 번 보십시오.
22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성경에도 분명히 있지만 에스라는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그랬단 말이요. 그럼에도 청하지 않은 이유는 이 말을 했기 때문에 청하지 않는 거란 말이요. 그러니까 군대들이 필요 없다고 하는 말이 된 거지요.
호위병을 청하려고 해도 에스라 스스로가 한 말이 있기 때문에 양심에 부끄럽다 그 말이요. 다시 말하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게 되면 신앙이 떨어지고, 이스라엘의 긍지가 떨어지고, 하나님을 덜 믿는 어떤 그런 느낌이 든다 그 말이요. 그래서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하나님께 청했다 그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 깨달을 것은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그 길이 아무리 어렵고 험난해도 이 길은 세상 그 누구의 도움과 협조를 얻어서 올라가는 길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가는 이 길은 이질적인 그 어떤 협조가 필요가 없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도움밖에 없다.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되겠어요.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기에 성도가 세상의 무슨 권력이나 권세의 협조를 얻어가지고 그 길을 갈 수 있느냐 그 말이요. 그렇게 해서는 믿음의 길을 갈 수가 없다 그 말이요.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에스라가 한 말을 통해 신앙적으로 그런 점을 발견을 해야 될 줄 압니다.
그 다음에 24절로 36절로 보면 하나님의 전의 기구의 운반대책이 나오는 겁니다.
24절-36절: 그 때에 내가 제사장의 두목 중 십이 인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 형제 십 인을 따로 세우고 저희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기명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내가 달아서 저희 손에 준 것은 은이 육백 오십 달란트요 은 기명이 일백 달란트요 금이 일백 달란트며 또 금잔이 이십 개라 중수는 일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 같이 보배로운 놋그릇이 두 개라 내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기명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의 두목들과 레위사람의 두목들과 이스라엘 족장 앞에서 이 기명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은과 금과 기명을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가려 하여 그 중수대로 받으니라 정월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 쌔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삼일을 유하고 제 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은과 금과 기명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붙이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모든 것을 다 계수하고 달아보고 그 중수를 당장에 책에 기록하였느니라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둘이요 또 수양이 아흔 여섯이요 어린 양이 일흔 일곱이요 또 속죄제의 수염소가 열둘이니 모두 여호와께 드린 번제물이라 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관원과 강 서편 총독들에게 부치매 저희가 백성과 하나님의 전을 도왔느니라.
제사장의 두목들을 따로 세우고 그들에게 금과 은과 기명들을 저울에 달아서 맡겼습니다. 저울에 달아서 그들에게 맡겼어요. 저울에 달아서 맡긴다는 게 뭘 의미할까요?
33, 34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도착을 해가지고 ‘제 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은과 금과 기명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붙이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모든 것을 다 계수하고 달아보고 그 중수를 당장에 책에 기록하였느니라’ 그랬단 말이요. 그러니까 줄 때 달아주고, 와가지고 받을 때 또 달아서 받았습니다.
그러면 저울에 단다는 이게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달아서 줄 때는 관리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거지요. 중도에서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거나 빼앗기거나 함부로 하지 말라는 거지요. 나중에 그대로 회수한다고 하는 그런 뜻이 들어있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분리된 거룩한 기구들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 앞에 수종들고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 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맡겨주신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걸 전부 정확하게 달아서 주시는 것이고, 또 마지막 날 내가 그걸 다 가지고 있는지, 잃어버리지 않았는지를 달아보고 생명책이나 기념책에 기록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맡긴 거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한 그게 있어야 만이 하나님 앞에 봉사를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요.
돌아온 백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왕의 조서가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려져서 그들이 하나님의 전을 위한 일에 물질로 도움을 줬지요. 7장에서 왕께 총독들이 조서를 올린 게 있지요. 그러자 왕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에스라가 그것을 갖고 와가지고 서편 총독들에게 줬단 말이요. 그러니까 총독들이 왕의 명령을 받고 도와준 거지요.
그 다음에 9장으로 넘어갑니다.
1절-3절: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유대백성들의 범죄가 나오는데, 여기의 범죄는 통혼의 범죄입니다. 백성들도 그런 죄를 지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제사장인 레위사람들이 그런 짓을 한 것입니다.
간음은 당사자들끼리 직접적인 죄이지만 통혼은 그 범위가 넓습니다. 어른들의 설득이 있기 때문에, 부모들의 설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통혼은 주로 어른들끼리 이방인의 누구 집 처녀를 보니 아름답다 그 말이요. 그래서 이제 그들의 부모에게 인사를 하게 되고, 인사를 하니 손을 잡게 되고, 손을 잡게 되니 같이 한 자리에 앉게 되고, 한 자리에 앉게 되니 서로 얘기를 하게 되고, 얘기를 하게 되니 이방정신이 감염이 되고, 감염이 되니 그것이 좋아 보이고, 좋아 보이니 딸을 달라 하게 되고. 이래서 통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통혼은 그냥 갑자기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이런 통혼하는 일이나 혹은 간음하는 일들은 고생하고 어렵고 고통을 당할 때는 하나님을 찾느라고 별로 없지만 이제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형편이 조금 펴지니까 이방사람들이 좋아하는 누림성 쪽으로 신경이 가더라 그 말이요. 살기가 좀 편하니까.
간음죄도 무섭지만 통혼 죄는 더 무섭습니다. 본문에 보니 이방여자를 며느리로, 아내로 들여왔습니다. 이걸 이스라엘 쪽에서 볼 때는 사람을 하나 얻었고, 자기 보기 좋은 것을 취하는데 성공한 셈이지. 그러나 이방여인이 며느리로 들어와서 자식을 낳고 살 때에 그 자식 속에 무엇이 들어가겠느냐 그 말이요. 참 문제란 말이요. 그 자식의 머리통 속에는 어머니의 이방사상이 염병처럼 소리 없이 서서히 서서히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 마련입니다.
물론 의식은 아버지를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만 그러나 그 속의 사상은 소원 목적적으로 이방사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의식적으로 겉으로는 하나님을 손색없이 믿고 찾지만 그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신과 인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선민 이스라엘의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가 완전히 망해버리게 됩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건국은 이방민족의 건국의 성질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의와 거룩과 성결로 진실로 이루어진다 그 말이요. 이방민족들은 혼음이 되던 말든 그런 게 필요가 없지요.
간음죄는 윤리나 도덕적으로 죄라고 인식이 되겠지만 통혼은 합법적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죄라고 여기지를 않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 죄를 짓는데 지도자급들이 앞장을 섰다 그 말이요. 그러나 사실은 통혼도 신앙적 의미에서 간음적 삶입니다. 우리는 이걸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이것이 여전히 성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걸 죄인 줄을 모르는 겁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하면 이단으로 몰아붙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교회적으로 지도자의 교훈을 조심해야 됩니다. 심사를 해야 됩니다. 합법이기 때문에.
이제 3절로 보면 에스라가 통탄을 하지요. 통한히 여기지요.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적으로 신신부탁을 했습니다. 무슨 죄? 통혼 죄. 이방민족의 딸들을 자기의 며느리로 삼지 말고, 자기 아들을 믿지 않는 여자들에게 주지 말라고, 그렇게 통혼하지 말라고 신신부탁을 했다 그 말이요. 그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 혼음의 사상에 감염되지 말고 정복을 하라고 한 것이지요.
그 죄를 짓지 않고 거룩으로 보전되어 커지면 영원히 복을 주시마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보면 그 사상 그 죄 때문에 왕가가 망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있지요? 통혼해가지고 왕가가 망한 집안이 있습니까? 대표적으로 아합 왕가가 그렇지요? 그 왕가가 망했잖아요.
또 그 사상 그 죄 때문에 나라가 두 조각이 나버렸습니다. 누가 그 죄를 지었지요? 그 사상 그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유다가 망했잖아요. 역시 북조 이스라엘도 망했고. 또 그 사상으로 그 죄를 지어가지고 70년 동안 이방 땅에 가가지고 그 수치스러운 수욕의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또 그 짓이냐 그 말이요.
그래서 에스라가 가슴을 찢고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에스라가 그 기도에서 한 말이 이제는 기가 막히고 얼굴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다는 거지요.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이냐?
우리는 여기서 이걸 볼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종들은 이 사상적 통혼을 알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역사적 이스라엘을 계시적으로 보고 오늘날 역시 그 재연을 하고 있는 영적 이스라엘을 보고 가슴을 치고 찢는 겁니다.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영적 이스라엘을 위해서.
오늘날 또 어느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서 그 통곡을 하며 가슴을 치겠느냐 그 말이요. 오늘날 또 어느 에스라가 나타나서 그 죄를 보고 자기 가슴을 치겠느냐 그 말이요.
우리가 여기서 보는 눈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것, 세상의 제도, 또 어떤 가견적인 그 무엇, 정치 이런 게 아무리 홍수같이 몰려와도 그런 걸 교회 안에 갖고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좋아서 그걸 교회 안에 갖고 와서 가지고 다니면 그게 통혼이에요. 영적 신앙적 통혼입니다. 우리가 그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구약시대 때 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여자를 자기 며느리로 데려오지 말라고 그랬을까요? 그걸 금한 이유가 뭡니까? 자식을 장가를 보내고 싶으냐? 하나님을 믿는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라 그 말이요. 이방여자를 데리고 오지 말아라. 믿지 않는 처녀를 데리고 오지 말아라. 자기 며느리로 삼지 말아라.
왜 그럴까요? 데리고 오면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어머니 속에 들어있는 그 이방적 우상적 사상, 세상적 사상이 자식에게로 물이 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의 계대의 신앙노선에서, 하나님의 눈앞에서 전부 다 이탈이 돼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축복이 전부 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으로 돼버리고 만다. 그런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우리가 보이는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그 면을 중요시 여겨야 될 줄 압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그 사상적 흐름은 보지 않고 성경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끼리 시집장가 간다고 그럴 때에 큰 손해가 없을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면적인 것을 보고 경계를 해야 되는 겁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옛날에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 속에 무엇이 흘러가고 있는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그 속에 무엇을 흘려놓고 오고 가는지? 내가 앉은 그 자리에서 무엇이 감염이 되고 있는지? 그 면에 대해서 조심할 줄 모르고, 볼 줄을 몰랐습니다.
이걸 볼 줄 모르니 마음이 자동적으로 세상길로 돌려지고, 세상에서 자기 눈에 보기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맞아 들여오고 며느리로 맞아 들여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것은 옛날 선조 조상들로부터 하나님의 명령으로 금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상에 감염이 되어가지고 그 죄를 짓고 가정이 망하고 사람이 망하고 나라가 망한 이런 면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죄를 짓고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돌아온 이 레위족 제사장들이 그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에스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죄를 봤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기독교 종교계에서 옛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었던 그 죄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그 속에 흘러 들어가고 있는 간음죄를 짓는 것을 저희들은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이 죄를 볼 줄 알고, 이 죄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할 줄 아는 이것이 중요한 줄 압니다.
아버지 하나님, 에스라의 그 통곡이 오늘날 우리들의 통곡이 되어 그 죄를 볼 줄 알고 그 죄를 경계하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70년 포로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죄를 다시 재연출하는 그런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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