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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앞에 나오면(1)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마태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484 추천 수 0 2014.03.30 23: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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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9:1-8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2014.2.2.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예수 앞에 나오면(1)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마9:1-8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남의 방법을 보면 크게 2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만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 만나 예수님의 제자로 삼았고 평생 예수님을 위해 산 사람들입니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앞에 스스로 나온 사람들 중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오늘 나온 중풍병 환자와 그의 친구들처럼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입니다. 둘째 부류는 구경꾼들입니다.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서기관과 같이 예수님의 흠을 잡아 고발하려고 찾아간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처럼 예수님께 나와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 예수님 앞에 나오면 마음의 안심을 얻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본 동네에 들어가십니다. 본 동네는 가버나움을 말합니다(4:13; 막2:1). 가버나움이 갈릴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어느 한 집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때 중풍에 걸린 사람을 친구 네 사람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갔는데 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첫째가 사람의 장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집은 문 앞에도 용신 할 수 없었습니다. 눅5:17에는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 지역 사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구경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 만나는데 사람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먼저 믿은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가 시의성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병원 의사가 진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때였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만나러 교회에 왔는데 교회 나온 날이 장날이라고 건축을 위해 헌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공감을 주는 말씀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장애물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만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든지 예수님 앞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장애물이 핑계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추장스럽지만 계단을 타고 지붕위로 환자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고 그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내렸습니다. 이룰 수밖에 없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든 예수님께만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상식에도 맞지 않고 예의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평상시가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상식이나 예의가 통하지만 목숨이 걸린 전시입니다. 위기상황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숙녀가 있다면 손이 아니라 머리라도 잡아 끄집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긴급성의 문제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중요성의 문제입니다. 절박성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죽어 가는 데 예의만 찾고 상식만 찾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선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다가오면 방법의 한계성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꼭 골리앗을 이기는 데 칼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는데 꼭 배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꼭 성을 부술 대포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38년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환자가 꼭 그 연못에 들어가야만 낫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만나면 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꼭 포도로만 만들지 않았습니다. 물로도 만들었습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몰상식하게 지붕을 뚫고 내리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열심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만 데리고 가면 낫는다는 확실하고 단순한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환자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랑과 행함이 동반된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할 때 즉시 순종하는 그런 순수한 순종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간 사람들에게 하신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작은 자야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소자라는 말은 연장자가 손아래 사람을 다정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책망하지 않고 다정하게 부르시면서 “안심하라”고 합니다. “다르세이”라는 말은 “용기를 가지라. 무서워하지 말라. 확신하라. 안심하라”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제까지 절망 가운데 살았던 중풍병자의 처절한 절망의 파도를 일시에 잠재우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과 걱정의 안개를 일시에 날려 보내는 아침 햇살 같은 말씀입니다. 거센 근심과 걱정의 폭풍을 잠재우는 평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어떤 질병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염려와 걱정,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 평안과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를 보면 예수님께서 안심하라는 말씀을 세 번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 하시고 두 번째는 마태복음 9장 22절의 말씀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는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2년이란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지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 만나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에게 오늘날도 "네 병이 12년이더라도 안심하라", "네 고통의 세월이 길더라도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번 나오는데 마태복음 14장 2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찾아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고 있을 때입니다. 풍랑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 고통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겁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건강이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재정의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나 가정이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의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이 내 인생과 삶의 배 안에 계십니다. 미래의 불확실 성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두려움이 있습니까? 걱정이 있습니까? 근심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2.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오면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너의 죄들이 사함을 받았다”라는 말씀입니다. 진행형이 아니라 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는 순간 모든 죄가 다 용서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질병을 치유 받으러 간 사람이지만 질병보다 먼저 급한 문제가 죄의 문제인데 그 죄의 사함을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중풍병에 걸린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은 죄로 말이암아 온다고 생각하며 문둥병과 같은 부정한 병에 걸리면 격리시키고 상종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사람도 그런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친구들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도 그의 죄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의 죄를 보고 따진 것이 아닙니다. 그 죄를 보며 불쾌하게 생각하고 상종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 피하고 상종하려 하지 않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무슨 죄를 졌는지 그의 죄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방탕과 타락으로 인하여 그것이 원인이 되어 중풍병에 걸렸고 그 후 지난날의 범한 죄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죄 용서를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무서운 질병인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신 것입니다. 분열과 불행, 단절과 죽음의 근원인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육신의 중풍병보다도 더 비참한 것은 영혼의 중풍병인 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영적 죄를 먼저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우리의 죄가 다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보고 정죄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보고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곳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끝없이 인간의 죄를 정죄하며 누가 더 의롭냐라고 의의 싸움을 즐깁니다. 그러면서 조금 자신이 나으면 우월감을 가집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을 보십시오. 3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신성 모독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 2:7)"고 수군대는 것입니다. “아니 인간이 주제에 제가 뭔데 죄사해. 허풍떨구 있네.”라고 수군대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과 생각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어떤 생각입니까? 첫째는 죄용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자신의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받는 것이지 누구도 죄 용서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제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고 제사장이 죄 용서를 선포해야 하는데 성전 의식을 거치지 않고 죄 용서를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 용서 선포는 성전과 율법을 파괴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틀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왔지만 은혜받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찾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에는 병이 나아야 성전에 올라가고 성전에 올라가서 제물을 드려야만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 인자가 온 이 시대는 인자를 믿는 믿음 하나로 그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다 아시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5절을 같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더 쉽겠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둘 다 어렵습니다. 둘 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병을 치료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것입니다. 원하시기만 하신다면 이 세상의 누구든지 다 치료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씀은 예수님에게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일 명분을 찾고 있는 자들에게 그 명분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 주시기 위한 증거입니다. 본질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죄에 매여 죄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을 그 포로에서 풀어 주고 치료해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나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몸에 병을 고쳐달라고 왔지만 예수께서는 병을 고침받기 이전에 죄 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안심하라는 심리학적 영역보다 죄 용서받았다는 신앙의 영역이 더 인생에서는 중요한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죄라는 개념 자체를 거론하기 싫어하고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정신건강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처음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여러 가지 사소한 문제로 나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질병이나 자녀 교육, 인생의 불안, 마음의 소원 등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응급 치료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치료입니다.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주신 피의 권세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송사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수치를 당하고 멸망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 성도님을 사랑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회개하면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양심이 계속 우리를 고자질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 1:7)” 믿습니까?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4)”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죄사하고 주의품에 안기어 편히쉬리라 우리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3. 예수님 앞에 나오면 우리는 치유를 받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6절을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의 능력을 보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경제 상태, 그의 헌금 정도, 그의 열심, 그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 말씀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온 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지체치 말고 즉시 일어나 네 침상을 챙겨 집으로 가라는 생동감 넘치는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중풍 병자를 그 병에서 완전치 치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는 증거를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서기관의 비난을 완전히 제압하고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죄 용서가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죄 용서만 받고 계속 그 침상에 누워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일어나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9장 25절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략되었지만 마가복음에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 5:4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은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달굼"하십니다.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12살 소녀와 죽음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일어서야 합니다. 병을 이기고 일어서야 합니다.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시험당하고 낙심하고 죽은 사람처럼 넘어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떤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인생입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가정도 일어서고, 교회도 일어서고, 직장도 일어서고, 기업도 일어서고, 사업도 일어서고, 자녀도 일어서고, 나라도 일어서야 합니다. 지금 잠잘 때가 아닙니다. 관속에 누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8) 해도 해도 안 된다고 절망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과거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회의적 신앙에 사로잡힌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사람들이 생수의 떡을 먹고 일어서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다 지쳐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0:1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3:6절) 예수를 10년 20년 믿었어도, 교회를 수십 년 다녔어도 잡아끌어야 끌려오고 업어다 놓아야 하는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에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구걸하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같이 기도하려고 했으나 제자들은 모두 잠이 들고 홀로 피와 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고 마지막 군병들이 잡으려고 올 때 제자들을 깨우시며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46절) 역경 앞에 망설이지 말고 사명 붙들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중풍병자가 어떻게 합니까? 7절에 보십시오.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즉각적으로 병에서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의심 없는 절대 순종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체험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능력의 현장으로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나올 때 마다 이런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나의 중풍병은 무엇입니까?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영혼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정신을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풀리지 않는 결혼문제입니까? 어찌할 수 없는 직장 문제입니까? 아무리 해도 좋아지지 않는 만성 질환입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는 사업입니까? 해결할 길이 없는 부채입니까? 아무리 설득해도 변하지 않는 자녀들입니까?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 가지고 예수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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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18 요한복음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복음1 ; 29 - 34  이영화목사  2014-04-02 1754
10517 히브리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 히4:14-16  민병석 목사  2014-04-01 2280
10516 히브리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4:14-16  민병석 목사  2014-04-01 1573
10515 히브리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히4:12-13  민병석 목사  2014-04-01 2832
10514 히브리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히4:12-13  민병석 목사  2014-04-01 1932
10513 히브리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4:10-11  민병석 목사  2014-04-01 1250
10512 히브리서 제 칠일의 성경적 의미 히4:4-9  민병석 목사  2014-04-01 1024
10511 히브리서 가나안 안식의 참 뜻 [2] 히4:2-3  민병석 목사  2014-04-01 1734
10510 히브리서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의 약속 히4:1-8  민병석 목사  2014-04-01 1012
10509 히브리서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의 땅 히3:15-19  민병석 목사  2014-04-01 1006
10508 히브리서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히3:14  민병석 목사  2014-04-01 1225
10507 로마서 복음(3) 복음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롬10:4  김필곤 목사  2014-03-30 1409
10506 로마서 복음(2) 복음은 능력입니다. 롬1:16-17  김필곤 목사  2014-03-30 1955
10505 갈라디아 복음(1)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갈1:6-10  김필곤 목사  2014-03-30 1923
10504 마태복음 예수 앞에 나오면(4) 자리 경쟁하는 제자들 마18:1-14  김필곤 목사  2014-03-3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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