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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8: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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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4.2.23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예수 앞에 나오면(4) 자리 경쟁하는 제자들
마태복음18:1-14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 교도소에서 어느 날 밤 죄수 한명이 갑자기 소리쳤답니다. "난 다음 달에 대통령이 된다!" 이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죄수가 말했답니다. "그걸 어떻게 아나?"라고 말하자 "신이 나에게 말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죄수가 말했답니다. "내가 언제 그랬어, 짜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남을 지배하기를 좋아합니다. 남의 말 듣기를 싫어하고 독점욕, 지배욕이 강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불러 3년 동안 집중 훈련을 시켰지만 여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자리 경쟁을 하는 예수님 앞에 나온 제자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한 달 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 하시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무엇을 물어 봅니까? 제자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것입니다. 자리다툼, 세속적 권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권을 잡으면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자리다툼은 20장 20절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예수님께 절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니까 뭐라고 대답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한 아들은 좌의정을 시켜 주고 한 아들은 우의정을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이 말은 도무지 참지 못할 정도로 몹시 화를 내며 분개하였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명예욕과 권력욕에 집착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리다툼에 집착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 예수님은 지배욕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라고 말씀합니다.
지배욕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 한 자리씩 보장해 주십니까? 지난 세주에 걸쳐 보았듯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의 필요를 예수님을 채워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질병을 치유 받기 위해 예수님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왔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맹인들은 눈을 뜨기 위해 예수님께 나와 눈도 뜨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딸을 고치기 위해 나온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 딸의 질병을 깨끗하게 치유 받았습니다. 그런데 권력욕을 채우고자 하는 제자들에게는 어떻게 하십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은 여자와 함께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예수님께 인수받으러 나온 어린 아이들을 제자들이 귀찮게 여기며 꾸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어린 아이는 여자와 함께 그 집의 재산 목록에 포함될 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취급을 받는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워 놓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를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누가 높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누가 높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리싸움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는 곳입니다. 교회가 천국이 되지 못하고 지옥으로 변하는 것은 자리싸움 때문입니다. 자리 경쟁을 하는 순간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권력 기관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처럼 서로 밀어 내기 경쟁을 하고 편 가르기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 파, 베드로 파, 아볼로 파를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하나가 된 영적 가족으로 보지 않고 뛰어 머리가 되기 위해 뛰어 넘어야 할 경쟁자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그 마음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위하여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 전인격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까? 부모 없이는 살 수 없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겸손을 말합니다. 멸시, 천대, 굴욕 등을 당하면서까지 낮추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자신이 내려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모든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돌이킴은 바로 믿음과 동일한 의미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이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렘 24:7)”라고 말씀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겔 11:19)”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6)”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사울이 제사장만이 들일 수 있는 제사를 왕이 되었다고 드리려고 하다가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진정 천국에서 큰 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천국에서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통해 한 자리 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본 받아 자신을 낮추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릇은 비워야 채워집니다. 움켜쥔다고 손에 공기가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억지를 부려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남이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섬기게 되면 섬김을 받게 되는 것이고 낮아지고 낮아지면 하나님이 세워주십니다. 겸손한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일컬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 18:12)”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 4:10)”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잠 29:23)”
최고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오늘 날처럼 힘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겸손이란 구시대 유물처럼 보이지만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겸손은 참으로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가운데 성자라고 불릴 만큼 큰 업적과 아울러 흠모할만한 신앙과 인격을 지녔던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질문 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첫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겸손 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럼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였답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라고" 했습니다. 사랑도, 자비도, 충성도, 온유도, 절제도, 인내도, 양성도 겸손이라는 바구니에 들어갈 때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가 상대를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한 생명을 예수님 대하듯하라고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 천국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까? 경쟁자가 아닙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시기와 질투해야 할 대상자가 아닙니다. 찍어내고 편 가르기 할 대상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그들이 예수님께 속한 자라는 이유 한 가지로 푸대접하지 않고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들, 오늘날 말하면 신자들입니다. 신자를 볼 때 경쟁자로 보지 말고 예수님 대하듯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을 영접하느냐 푸대접하느냐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면 영접하는 자의 마음이 이미 예수님께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는데 대인관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고 경영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CEO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으로 '대인지능'을 꼽았답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고 인맥관리를 잘 해야 직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인관계 지능은 하버드대 교육심리학과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 교수가 주창한 인간의 8가지 지능 중 하나로 대인관계 지능은 인생살이에 중요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능지수나 학교시절의 성적이 인생에서의 성공을 예언하는 정도는 20%정도에 불과하답니다(Gibbs). 인간이 깨어있는 시간의 70%를 의사소통하는 데 사용하고 이 가운데 듣기에 45%를 말하기에는 30%, 읽는데 16%, 9%만 쓰는 데 사용한다고 합니다(Rankin 1926).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85%는 들어서 안 것이라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생활하면서 매순간 희로애락을 경험하는데 대인관계 지능이 인생의 행복과 성공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대인관계 지능의 핵심 요소는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기분, 감정, 관점에 대해 민감하고 이해하는 "타인 이해"입니다. 대인관계 지능이 높은 사람은 타인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고, 타인 의견에 공감하며, 타인의 특징을 인식하고, 타인의 동기, 분위기, 의도를 고려해 타인의 관심을 인식하며, 타인과 효과적으로 상호 작용을 잘 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 특히 친구와 형제자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타인과 어울리기"입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고슴도치처럼 상처를 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바보가 될 때 친구가 보인다는 말처럼 어울리는 데는 자기 낮아짐과 공명이 필요합니다. 있는 척, 잘난 척, 똑똑한 척 하면 어울릴 수 없습니다.
셋째,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리더쉽" 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군가를 설득할 때는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에토스는 명성, 신뢰감, 호감 등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측면으로, 설득 과정에 6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파토스는 친밀감을 형성하거나 유머나 연민 등 감정을 자극해 마음을 움직이는 측면으로, 설득에 3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로고스는 논리적인 근거나 실증적인 자료 등의 근거를 제공하는 측면으로, 설득에 1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리더로 성공적인 설득을 하려면 먼저 상대방으로부터 호감을 사고(에토스), 감정에 호소한 다음(파토스), 필요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합니다(로고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나를 대하는 듯 사람들을 대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높임을 받고 인정을 받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너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자기 종처럼 대하면 진정 상대는 자신을 상전으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대해 주면 상대는 자신을 예수님처럼 대해 주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 보이는 목회자 보이는 남편, 보이는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자세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40절에 보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언제가 장애를 가지고 계시는 성도님이 면담을 하러 왔습니다. 면담을 한 후 전도하여 우리 교회에 나오도록 했습니다. 부부가 다 장애인이었습니다. 열심히 섬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집사님께서 "왜 저런 분이 우리 교회에 나와야 하느냐"고 말을 하였습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은 어떤 생명일지라도 질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고귀하신 분이고 그분 한 분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어떤 생명일지라도 예수님처럼 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생명까지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사람들이 싫어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금을 거두는 세무서 직원들, 바람피우며 몸 팔아 돈 버는 창녀들, 귀신들려 헛소리하며 돌아다니는 미치광이들, 문둥병 걸려 고름을 질질 흘리며 추방되어 집단 생활하는 문둥이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병들었다고 생각하는 각종 병자들, 앉은뱅이, 눈먼 자. 혈루증, 중풍병자, 귀머거리 등의 장애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친구가 되어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같이 하고 5명의 남편을 둔 여인을 다정하게 대하여 주었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였으며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문둥이를 고쳐 주었고 혈루증 앓는 자, 눈먼 자, 귀먹은 자 , 앉은뱅이를 고쳐 주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만약에 성도를 실족케 하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까? 실족케 한다는 것은 함정에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심한 괴로움을 겪게 한다는 것입니다. 권력다툼으로 상대를 자신이 가던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죄를 짓게 하며 고난에 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고 무시함으로 고난에 처하게 만들면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달고서 깊은 바다 속으로 자기 몸을 던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나 그리스 형벌로 자신의 부모를 죽이거나 사회의 도덕을 문란케 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형벌입니다. 자살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형제끼리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대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조건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할 바에는 차라리 육신을 포기하고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면하는 것이 났다는 것입니다.
누가 높으냐는 문제가 아니라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실족케 하면 반드시 대가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8절에 보십시오. 만일 네 손발이 범죄하면 찍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장애인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성한 사람으로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났다는 것입니다. 9절에 보십시오. 범죄하게 하면 눈도 빼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손발은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악한 생각이 나오는 것은 마음입니다. 악한 마음의 생각을 잘라내라는 말씀입니다. 고약한 생각을 잘라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썩은 생각을 잘라 내라는 말씀입니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조건을 보고 무시하는 마음을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지배하고 대장노릇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하고, 남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스스로 왕 노릇하고 싶은 마음을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목회자 노릇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으면 과감하게 잘라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맘대로 하고 싶으면 차라리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십시오. 가정에서도 남편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잘라내십시오. 정 남편의 자리에 앉고 싶으면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회사에서도 사장의 말을 듣기 싫고 사장의 자리에 앉고 싶으면 회사를 차려 사장이 되십시오. 자꾸 대장 노릇하고 싶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이고 우리는 섬기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잃은 자를 찾아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비록 세상에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가치 없는 존재로, 버림받은 존재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괄시하고, 능력 없다고 무시하고, 힘없다고 깔보지 말고, 아름답지 못하다고 걸레 보듯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헌금 많이 하는 사람, 봉사 많이 하는 사람, 전도 많이 하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만 사람대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 부목사로 봉사하였던 교회가 있는데 목사님이 집이 있는 성도만 심방하고 관심을 갖고 목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지론은 집이 없이 월세나 전세로 사시는 성도는 쉽게 이사를 가기 때문에 정을 주면 주는 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성도가 스스로 조금 있다 이사 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목회자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교회도 내 교회처럼 섬기지 않는데 목사만 관심을 갖고 정을 주고 기도하고 열심히 다해 섬기다 보면 나중에 정을 준만큼 교회를 떠날 때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이제 요령이 생겨 세를 사는 사람들은 부목사에게 관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시간을 만나더라도 예수님처럼 대하길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가치 없는 존재처럼 보여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자로 그들의 수호천사가 수종들만큼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 천사가 수종들만큼 한 영혼은 고귀한 것입니다.
11절을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에는 많은 사본들이 있습니다. 원본은 없습니다. 원본에서 배겨 쓴 것을 사본이라고 합니다. 그 사본 가운데는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이 권위 있는 사본입니다. 그런데 그 사본에는 이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수리아 사본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본에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없음)이라고 표기한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자리다툼이 아니라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에 대하여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잃어 버렸다”는 것은 속임을 받아 고의로 곁길로 나간 양을 말합니다.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 양입니다. 고집을 부리는 양입니다. 완악한 양입니다. 그런 양도 하나님이 찾으시는데 소자는 아군입니다. 형제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할 교인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왜 다투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배척하고 자리싸움을 하여야 해야 하겠습니까? 왜 소자를 멸시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한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12).
요즈음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컴퓨터 서바이블 게임을 하면서 사람 죽이는 것을 재미로 합니다. 경제나 정치 교육에서 마케팅의 수단으로 사람을 봅니다. 사람은 물질로 따진다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국 일리모이 대학의 해부학 교수 할리. 멘센 박사가 분석에 의하면 보통 사람의 인체는 2.25kg의 칼슘 500g의 인산염. 252g칼륨, 168g의 나트륨, 28g의 마그네슘, 28g이하의 철, 그리고 동으로 이루어졌고 합니다.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89cent에 불과 하다고 합니다. 인신매매 값으로 따지면 인신매매가 왕성했던 로마 시대 백인의 값은 4백~5백 데나리가 상식이었습니다. 요즈음 돈으로 어림하면 1백만 원 남짓이 된다고 합니다. 17세기에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이 미국에다 갖다 판 아프리카 노예 값은 장정 한 사람 당 현지에서 50불씩 주고 샀습니다. 당시 1불의 금값을 요즈음 금값으로 환산하면 이 역시 1백만 원 남짓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고 말씀합니다. 온 천하보다 귀중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9마리를 놓아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면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99마리에 비해 한 마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나선다고 하였습니다. 99마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고귀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전체로 다루지 않습니다. 물량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다루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고귀합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한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 생명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수단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찾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완악함을 접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 한 영혼에 대한 열정을 우리가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 생명을 찾아 살리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14)
잃은 자를 찾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2)"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막 1:38)"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후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관심의 초점이 한 영혼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였지 않습니까? 교회는 극장도, 구경하러 다니는 곳도, 콘써트 홀도, 사교 클럽도, 자격증을 따는 학원도 아닙니다. 한 생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생명을 살려 풍성하게 살게 만드는 곳입니다. 우리는 자리가 아니라 한 생명을 살리는데 우리가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가 바울을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3-14)"
존 낙스(John Knox)는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라고 영혼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배욕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대를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한 생명을 예수님 대하듯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잃은 자를 찾아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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