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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2) 복음은 능력입니다.

로마서 김필곤 목사............... 조회 수 1955 추천 수 0 2014.03.30 23: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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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16-17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2014.3.9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복음(2) 복음은 능력입니다.
로마서1:16-17

지난 주 여자 제자반에서 성경 공부를 하는데 요즈음 인터넷에 '성범죄자들은 모두 기독교인'라는 말이 떠돈다고 해서 어떤 것이 떠도는지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았습니다.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 '사실무근', '악의적 조작'이었습니다. 네로 시대 때 로마에 불을 놓은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은 악의적 조작이었습니다. '끔찍한 성범죄자들의 공통점'이란 제목의 글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째, 7명의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연쇄살인범'이자 사이코패스 강호순이 15년 이상 교회를 다닌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매주 같은 교회를 가는 여자들을 납치, 성폭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20명 이상을 살해한 유영철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모태신앙으로 교회 성가대였고, 강간당한 여자에게 하나님 믿느냐고 물어서 믿는다고 하면 살려주고 안 믿는다고 하면 토막 내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안양 초등생 납치·살해 사건의 정성현은 같은 교회에 다니던 혜진이와 예슬이를 교회 오빠라는 이점을 이용해 성폭행,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넷째, 당시 8세 나영이(가명)를 성폭행한 조두순은 자신의 교회로 나영이를 데려가 성폭행했고, 교도소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열혈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들 범죄자들은 주님에게 회개해서 스스로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지금은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마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성범죄자가 모두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고도 죄책감도 없이 태연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부끄럽습니다. 전도할 수 없습니다. 내가 믿는 복음에 대하여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며 철저히 꾸며낸 내용이라고 합니다. '안티기독교' 세력들이 기독교를 폄훼(貶毁)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럴싸하게 포장해 사실로 오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는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강호순은 첫째 아내와 이혼하고 둘째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교회를 따라 나갔다가 결혼 후에는 아내가 교회를 계속 나간다고 이혼했다고 합니다.
모태신앙이라던 유영철은 어려서 무당 할머니에게 자랐고 초등학교 6학년~고등학교 1학년까지 교회를 나갔으나 범죄 후 하나님을 부인하고 불교로 개종했던 것이 유영철의 편지를 통해 밝혀졌다고 합니다.
정성현은 교회 또는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합니다.
'조두순 목사설'을 최초 보도했던 언론사는 오보를 인정하고 사과와 함께 정정보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교회에 나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다면 이런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은 복음 안에 들어온 사람을 그렇게 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3:8)”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을 자신의 로마의 시민권이나 자신의 유대교적 학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것들은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복음의 가치를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합니까? 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합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할까요?
오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1.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까?
1)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16절 앞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고 이 복음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다시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초라한 사람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철학이나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지어낸 전설이나 신화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능력은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능력의 차이가 있고 크기가 다른 것입니다. 부끄러워할 정도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 영어로는 굿 뉴스(Good news) 좋은 소식입니다. 이 말은 전쟁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고대에는 전쟁이 나면 전쟁 소식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전장에서 전령이 달려옵니다. 그러면 나팔을 불고 성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 전령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짐승을 잡아서 잔치를 벌이고 승전하고 돌아오는 군사들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승전의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에 대하여 한 마디로 말씀해 주시는 곳은 고린도 전서 15장 3-4절 말씀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복음이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사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죽음에서 해방시킨 사건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복음을 주제로 대하드라마를 쓰신 것입니다. 구구절절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를 만들어 오시고,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정점으로 오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라고 하셨는데 바로 여자의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와서 옛뱀 사탄의 권세를 십자가에서 무너뜨린 것이 복음입니다. 사망권세를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능력”이라는 말은 뒤나미스(δὐναμις)입니다. 다이나마이트가 여기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뒤바꾸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죽음의 문제를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능력 외에는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M. 루터는 복음의 능력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인간을 죄에서 의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주며, 영생을 주고, 영원한 형벌로부터 영원한 기쁨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능력이다.“

2)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구원을 주신다고 하는데 그 구원이 무엇입니까? 10원에서 1원 부족한 것입니까?
구약에서는 구원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노예에서 풀려나는 것도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모세의 인도로 자유함 받고 해방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병든 자가 병에서 노임받는 것, 환란에서 건짐 받는 것, 잃어버렸던 사람을 다시 찾아내 살리는 것 이런 것이 다 구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한 마디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마1:21; 계21:27).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구원을 말합니다.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 단절이 생겼습니다. 생명의 단절이 생겼고, 교제의 단절이 생겼습니다. 생명의 단절로 말미암아 인간은 영적 사망, 육적 사망, 영원적 사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교제의 단절로 말미암아 영적 소경, 죄의 지배, 친죄 성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성취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구원에 대한 대 서사시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고 영생의 가능성,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함으로 결국 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이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순종함으로 이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죄로부터 모든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받아 예수님을 통해 영적 사망과 영적 소경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정죄의 신분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 양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친죄 성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도 성화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육체적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적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런 구원은 그 무엇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 유대인의 율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복음이 부끄럽겠습니까?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를 보십시오. 얼마나 바울은 감옥에서 이 복음, 신령한 복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습니까?

3)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입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악귀에 들렸던 자들이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행19장, 에베소) 죽었던 유두고가 살아나는 것을 경험을 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점치는 여종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전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회가 갱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라고 말씀합니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 자들은 산에 오르는 길은 많이 있다고 말하며 구원의 길은 다양하다고 말합니다. 사이비 종교와 이단들은 자신의 교주가 구원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고 그것은 충분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성경은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믿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성경을 그렇게 잘 알고 있던 유대인에게도 복음의 참 의미를 모르니까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33살의 젊은 나이로 그 당시 가장 극형이고 수치스러운 나무 십자가에 조롱받으며 돌아가셨습니다. 로마의 권력 앞에 쓰러졌습니다. 많은 백성들 앞에서 벌거벗겨지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 앞에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이 믿은 메시아는 이런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지혜롭다고 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분석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볼 때에 미련하기 그지없는 짓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고, 죽음에서 살아나고, 아무런 대가없이 구원을 준다는 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그들의 지혜로 볼 때 미련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개독교가 되고, 조롱거리가 되고, 독단이 되고 어리석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 댄 브라운(Dan Brown)은 '다빈치 코드'에서 성경은 인간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남성 주도적인 교회가 결혼하는 '인간적인' 예수, 여성을 인정하는 예수를 말하는 복음서를 배척하고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현재의 4복음서만 채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교도인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틴 대제가 의해서 채택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어 부활절 일자, 감독들의 역할, 성례들의 거행,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과 같은 것들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이 만들어진 것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만들어 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 3:16). 예수님의 동생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유다서와 야고보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더욱이 현재의 신약성경을 확증하는 2세기의 고대 신약성경에 관한 문서들은 약 5,000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틴은 신약성경을 만드는 일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책들은 교회가 생긴 이래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늘 있어왔습니다. 최초의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콘스탄틴 시대 훨씬 이전 1-3세기에 이미 정경이 완성되었음을 그의 책에서 여러 회 증명하고 있습니다. 토요일의 예배날을 콘스탄틴이 태양을 섬기는 날인 일요일로 옮겼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성경 여러 군데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의 첫날을 예배 날로 지켜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미스라이즘(Mithraism)에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신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미스라이즘보다 훨씬 이전에 기록된 구약에 예언된 내용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올 것이고(슥 12:10),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이고(사 7:14),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고(시 22편),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이다(시 16:1)는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사단이 어떤 방법으로 유혹을 한다 해도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기 말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은 철학이나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전설이나 신화가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 부한 자, 지식 있는 자, 없는 자, 아름다운 자, 추한 자, 건강한 자, 병든 자, 아무리 마음이 강퍅한 자일지라도 복음이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지어낸 능력이 아닙니다. 로마의 권력정도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힘이 복음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죽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양심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만큼 위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는 죽음의 속박에서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초월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십자가는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며 살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권력을 자랑하던 로마가 복음 앞에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죄를 즐기며 타락한 인생의 늪을 헤매던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이 들어가면 생이 바뀌게 됩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힘으로 사망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죽음을 정복합니다. 죄 용서를 받습니다.

2.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살게 만들어 주는 능력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전파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7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16절도 그렇지만 17절 말씀도 원문에서는 "왜냐하면"(가르)이란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6절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내 자랑하다 낙심하고 추락하면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 힘이 아닙니다. 부끄럽고 추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가 그 구원의 근원입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의란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를 번역한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체데크’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의, 바름, 옳음 등과 같은 윤리적 특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윤리적 특징이기 보다는 관계의 의로움을 말씀합니다. 책임을 이행할 때 의롭다고 합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과 결혼했는데 큰 아들이 죽었습니다. 당시 법은 큰 아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작은 아들을 통해 상속자를 낳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도 죽었습니다. 유다가 생각할 때 다 죽으니까 셋째를 주지 않습니다. 그 형들처럼 죽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말이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를 속이고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더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창 38: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체데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언약 당사자가 책임을 다하는 것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자신이 맺고 있는 어떤 인격적 관계에 의해 자기에게 주어진 요구를 이행하는 자를 의롭다고 합니다. 즉 관계의 올바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정적 맥락에서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더럽고 추해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언약을 파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타나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칼뤼프테타이”라는 말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계속적으로 계시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계시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미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의롭다고 칭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의라고 합니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되신 예수님을 통해 의롭다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만들어 주어 관계를 정상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사용하여 사형 받을 사람을 살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받아야 할 댓가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2)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어떻게 부여됩니까?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역사하시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처음부처 끝까지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들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가 할례를 받아서가 아니고 그가 무엇인가 하나님 마음에 맞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라고 말씀합니다. 이 진리를 바울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4장을 펴 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2)”라고 말씀합니다. 4:3을 보십시오. 믿으매 의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칭해 주신 것입니다. 4장 5절을 보십시오. 11절을 보십시오. 무할례시에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의롭다함을 받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8장 34절을 보십시오.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부족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형편없는 사람을 살아도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를 붙들고 가시는 것입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37-39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가족 내의 중독도 역기능적인 상황들도, 숨기고 싶은 가족의 비밀도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도, 부끄러운 정신적인 조건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직업, 직위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3) 그러므로 복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박국서를 인용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게 망해가는 자신의 나라를 보면서 하박국 선지자가 왜 우리를 이 불의한 나라를 통해 망하게 합니까?라고 하박국이 질문을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심판이 지체치 않고 이루어질 것이며 심판 때까지 인내하고 위로하시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은 “의인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가운데서도 살 것이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18절부터 지적 타락, 정서적 타락, 의지적 타락을 하여 하나님이 심판할 것을 말씀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믿는 사람은 산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개역성경 번역처럼 의인들은 이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믿음을 강조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능력이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완성하게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믿음으로 살도록 신앙을 발전시켜줍니다. 기초적인 믿음에서 성숙한 믿음으로, 이론적인 믿음에서 실제적인 믿음으로, 동의하는 믿음에서 체험하는 믿음으로 발전시켜줍니다. 고백적인 믿음에서 헌신하는 믿음으로 평범한 믿음에서 비범한 믿음으로, 머리 믿음에서 행함있는 믿음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4장 18절 이하를 보시보십시오. 결국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까지 성장하였습니다.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께 옮겨버린 것입니다.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이런 능력있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받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라(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처럼 미래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갈림길에서 결단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삭처럼 순종하여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믿음으로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믿음으로 불의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믿음으로 시련도 견디는 것입니다. 비록 나의 약점과 과거를 가지고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고 흔든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쓰러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때는 살인 방조자였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열정을 부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깨달은 후 그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모세도 부끄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살인자입니다. 야곱도,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불륜의 태어난 아들입니다. 다윗은 간음한 사람입니다. 아들이 반역한 사람입니다. 아들이 그 반역으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배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에 그들은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새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사람들입니다. 결코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가난하면서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위가 낮다고 자신을 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 비하해야 할 것은 지위가 낮으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늙었다고 해서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 한탄해야 할 것은 늙었으면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않고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 슬퍼해야 할 것은 죽음 후에 갈 고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치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34:5)"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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