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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롬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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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4.3.16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복음(3) 복음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서10:4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당시 천주교에서는 면죄부를 팔고 있었습니다.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식도락가였던 분으로 알려진 제 217대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금을 모금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이 죽은 후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속죄의 표라고 선전하면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이 때 면죄부 판매 책임자인 수도사이며 웅변가였던 요한 텟젤은 이렇게 설교하였답니다. “지금은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권세를 받은 교회가 천국과 지옥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이 자리에서 곧 사함을 받을 것이요 회개의 필요 없이 현재 살아 있는 자뿐 아니라 죽은 자나 또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이 표를 사면 그 돈이 헌금 궤 속에 쩔렁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곧 천국으로 올라 갈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면죄부를 샀고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의 오류와 로마 교황청의 무지를 통박하는 반박문 95개 조항을 공개적으로 내걸어놓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외쳤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이 아닌 것을 전하는 사람들은 구원은 무엇인가 의를 행해야 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믿음에 풀러스 무엇이가를 더해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합니다. 이단들은 교주를 구원자로 믿어야, 이긴 자로 믿어야, 보혜사로 믿어야, 감람나무로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자신들 집단 십사만 사천에 속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십사만 사천을 모으는데 열심을 내어 그 일에 동참해야 영원히 죽지 않고 신일합일 되어 영생불사의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다 성경의 진리와는 맞지 않는 거짓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자들은 자력 구원을 말합니다. 다 종교마다 구원받는 방법이 있으니 그 길로 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행위 구원을 말합니다. 자신의 힘에 의해 자신을 비우고, 도를 닦으면 구원을 받을 것처럼 말을 합니다. 자력구원입니다. 자신의 의로 인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런 복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율법의 목적을 이루어 끝이 나게 하였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마침이라는 말은 “텔로스”를 번역한 말로 “목표, 완성, 마침”등으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것을 지킴으로 의롭게 하는 율법의 목적을 이루어 의롭게 하는 율법의 기능이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구원을 위해 자기 의를 내세웠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할례를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왜 죽였습니까? “그가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율법과 성전입니다. 그것이 이방인과 다른 것이고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증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게 성전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도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던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나머지 하나인 율법이 더욱 집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는 더 이상 모일 수 없게 되자 흩어져 있는 지방의 각 회당에서는 모여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매진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율법을 부정하니까 ‘셰모네 이스레이’라는 18개 기도문(축도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축출하기 위해서 회당에서 사용되던 18개 기도문의 12번째에 “나사렛인들(기독교)과 미님(이단들)을 멸하소서(Birkath ha-Minim)”라는 내용을 첨부하였다고 합니다.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초대 기독교인을 핍박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에 대해 충실했고, 또한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태에 있는 자신의 민족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1-3)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도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서도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8:5)”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목적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으며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관계성을 설정해 주는 표라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순종관계를 가지라는 것의 중요한 의미를 모른 것입니다. 신앙이란 복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순종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며 신뢰적인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자기 의를 포기하게 하는 순종을 말하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도 에덴동산에서 실패했습니다. 십계명을 받은 모세도 실패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실패했습니다. 성군 다윗도 실패했습니다. 제 2의 인류의 조상이라는 하는 노아도 실패했습니다. 성경에 나온 누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무리 도를 닦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자신 스스로 의롭게 될 인간이 없습니다. 100개를 지키고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그것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레 5:17)”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0)”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선포합니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그래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는 사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범죄는 대상에 따라 형벌의 정도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이의 뺨을 때리면 감옥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을 때리면 감옥에 갑니다. 만약 대통령의 뺨을 때리면 경호원이 즉각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항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방법을 구약의 제사법을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짐승을 잡아 죽여 마땅히 죽어야 할 자신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리면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어린 양 예수를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을 모형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단번에 번제물로 드림으로 율법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의를 이룸으로 율법의 목적을 수행해 버려 율법의 구원기능을 마치게 한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0)”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룸으로 율법의 목적을 성취해 버려 율법의 목적을 끝을 내 버린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으로 얻을 수 없는 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음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으로 이를 얻으려는 모든 행위와 노력에 종지부를 찍고 끝은 내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을 뿐 아니라 믿음을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의에 이르도록 하는 율법의 기능은 이제 종료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율법의 의를 이루는 기능은 끝났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으려는 노력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끝낸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통해서는 구원을 받으려는 시도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끝내 버린 것입니다.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마침표를 인류 역사 속에 확실하게 찍어 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메시아 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얻는 의를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율법의 기능을 완성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구원 목적을 복음이 마치게 하였기 때문에 이제 율법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 폐기론자들(antinomian)입니다. 이들은 율법론자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는 율법은 이제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의해 구원받았으니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도, 십일조도, 주일 성수도, 헌금도 장로 집사 제도도 다 율법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회개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회개와 성화를 위한 자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법정적 칭의와 그래도 늘 연약한 죄인을 구분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분상의 의인과 실제 삶 가운데 죄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정직한 모습을 무시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도 도외시하고 구원받은 날자와 시간 장소를 알아야 구원받았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자들(legalism)은 선행과 엄격한 종교적 규약에 의해 구원받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선행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넓게는 타력구원이 아니라 자력구원을 주장하는 모든 종교를 말합니다. 범신론, 종교다원주의 등도 다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율법폐기론 자들은 초대교회 말르키온 파를 비롯하여 몬타누스 파 같은 사람들에 기원을 둡니다. 마르키온은 스스로 사도바울의 후계자라고 말하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나누어 구약의 분노와 복수의 하나님을 물질세계를 창조한 유대교 하나님으로 기독교는 유대교와 철저히 결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제 구약의 율법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율법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합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은 영혼에만 국한된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물질이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 밑에 영원한 멸망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몬타누스는 약속된 보혜사(保惠師)인 성령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는 특수한 형태의 예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가 천사로서가 아니라 “내가 곧 아버지요, 아들이요, 보혜사”라고 주장했습니다. 성경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을 외쳤습니다. 이것을 율법을 무시하고 신비주의로 빠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율법 폐기론은 상황윤리로 발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조셉 플레처라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의 결정의 유일한 기준은 사랑이며, 그 외의 기준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율법주의도 반율법주의도 아닌 상황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론적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법은 사랑의 법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쓸모없다는 식입니다. 사랑 외의 모든 것은 상대화하고, 사랑을 이루는 것은 실용적이고 좋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상들은 “신의 사망”으로 이어지는 신신학으로 발전합니다. 인본주의, 실증주의, 실용주의, 상황주의, 다원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증되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율법주의와 율법을 구분하지 못한 오류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 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율법의 요구를 다 완수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율법의 목적을 다 성취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본래 목적인 의와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을 그리스도가 다 이루고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과 율법의 권위는 그리스도에게로 전이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대한 열성을 책망한 것은 율법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책망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선악의 기준이 되려고 하는 행위와 의미적으로 똑같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2-3)”
율법에는 제 1 기능, 제 2 기능, 제 3 기능이 있습니다.
제 1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입니다. 사회적 기능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합니다. 거울과 같은 기능입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5: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선하다는 것입니다(12).
율법의 제 2 기능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기능입니다(갈3:24).
율법이 우리의 죄를 폭로하여 우리가 율법을 지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여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 3:24)” 몽학 선생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그러면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율법이 필요없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의 제 3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는 기능입니다. 성화의 기능입니다. 삶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지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사도 요한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 2:6)”
바울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12장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삶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았으니 방종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이하가 다 구약 율법의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제 네비게이션이 생겼으니 지도는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같은 율법은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화를 위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기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성을 폭로하는 율법의 형벌적 기능은 인간을 정죄하여 예수님께 돌아오도록 권고적 기능으로 발전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공동 사회의 법과 질서를 위해 주신 사회적 기능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를 위해 새롭게 해석되고 적용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위해 성령의 감동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율법을 나누면 도덕법과 시민법과 의식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식법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법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 유대인들에게 죄용서 받는 법을 제사법을 통해 알려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피뿌림을 받은 집은 애굽에서 다 살아납니다. 그 어린양은 예수님을 모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피를 뿌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와 똑같은 원리입니다. 십자가와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다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시대에 죄 용서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그 계시를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담 때 짐승의 가죽 옷을 입혀 주신 것이 무엇이며, 아벨의 제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노아의 방주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것이, 유월절 어린 양이, 성막이, 성전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에 와서 확실하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율법은 구약의 백성을 그것으로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오실 때까지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화목 제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롬3:25).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그래서 그 목적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시민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이방 백성과 구별된 삶을 살게 만들기 위해 주신 사회법입니다. 그 시대 그 문화, 그 시대 의식에 맞게 주신 것입니다. 시대가 변한 지금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왔다고 자신의 아내가 부정한 것을 판별하기 위해 양잿물을 먹이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조롱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왔다고 하여 한센씨 환자들에게 입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고 다니게 하면 정신병자 취급할 것입니다. 이런 시민법은 그 시대에 기능이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법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22)”
오히려 더 강화하였습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답게 살기 위해 지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구원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며 방종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 2:6)”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시 119:15-17)”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나처럼 살지 못한다고 바리새인처럼 교만하게 자신을 자랑하며 연약한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계명은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금간 항아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 어깨에 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답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하나씩의 항아리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왼쪽 항아리는 금이 간 항아리였답니다. 물을 가득 채워서 출발했지만, 집에 오면 왼쪽 항아리의 물은 반쯤 비어있었답니다. 금이 갔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오른쪽 항아리는 가득찬 모습 그대로였답니다. 왼쪽 항아리는 주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요청했답니다. "주인님, 나 때문에 항상 일을 두 번씩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금이 간 나같은 항아리는 버리고 새 것으로 쓰세요." 그때 주인이 금이 간 항아리에게 말했답니다. "나도 네가 금이 간 항아리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네가 금이 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바꾸지 않는단다. 우리가 지나온 길 양쪽을 바라보아라. 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오른쪽 길에는 아무 생명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이지만, 왼쪽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니?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니? 나는 그 생명을 보며 즐긴단다." 많은 사람들이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금이 간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어떤 때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 낙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이 삭막하게 되는 것은 금이 간 인생 때문이 아니라 너무 완벽한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금이 조금 가고, 틈이 있고, 좀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을 황무지로 만드는 것을 오히려 똑똑한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이제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시간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시길 바랍니다.
10절 읽겠습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처지 어떤 형편 어떤 과거가 있다고 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지 않고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차별없이 부요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셔서 부요하게 해 주십니다. 자비와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4.3.16.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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