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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못 다스리면 내가 성전건축에 방해자가 된다.

에스라 궁극이............... 조회 수 1979 추천 수 0 2014.04.05 1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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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스4: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4장 1절-3절. 느 4장 1절-6절.

 

스 4장 1절-3절: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느 4장 1절-6절: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유대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뭘 건축하게 하라고 그랬지요? 성전.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지금 이게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어중떼기들이에요. 진짜배기들이 아니고 가짜라.

 

2절 봐 봐요.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전을 같이 건축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자기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그 말이지요.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앗수르 왕은 이방 왕이지요. 북조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간 왕입니다.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그러니까 앗수르는 그 때 당시 강대국이었으므로 이방민족을 정복을 해서 이민정책을 썼는데 유대남자들을 사마리아로 옮겼다 그 말이지요.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잡혀갔지만 자신들도 하나님을 섬긴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 전을 같이 건축하자 그 말이지요.

 

‘스룹바벨과 에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스룹바벨 예수아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 종들이지요.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런 말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느헤미야 4장을 봅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대사람을 비웃으며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 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그 다음에 4절: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뭘 하는데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그러지요?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전쟁이 나서 잡혀가게 해 달라 그 말이지요. 그 참 저주적인 기도지요? 그러나 이건 알고 보면 옳은 기도입니다.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느헤미야가 지금 기도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데 지금 악하다고 그러지요? 성전을 짓고 성벽을 쌓는 이 일을 방해하기 때문에 느헤미야의 기도가 그걸 악이라고 그러고 있지요.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 죄를 사하지 말아 달라 그 말이지요.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 하였음이니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노를 불러일으킨다 그 말이지요. 참 희한한 말이지요?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성벽을 구역별로 맡아서 자원해서 죽 세웠지요. ‘연락이 되고’: 다 세웠다 그 말이지요.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이렇게 해서 마쳤습니다.

 

여기 방해자들은 산발랏 도비야와 다른 방해자들입니다.

 

우리가 이치를 잘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성도가 이치를 못 깨달으면 만고멍청이가 돼버려요.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에 산수공부를 하는데 공식만 알면 문제를 척척 풀어나가거든요. 그런데 공식을 모르면 정답을 외워놔도 소용이 없어요. 공식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공부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 말이지요. 못 따라간다 그 말이지요. 그런 것처럼 성경은 이치를 깨달아야 됩니다.

 

성도들은 성경이 깨달아져 나가야 되고, 특히 우리 교역자 입장에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도록 해야 되거든요. 그 다음에 신앙생활은 그 이치를 알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안 그러면 예수 헛 믿게 되는 거고, 성경을 헛 알게 되는 거고 그래요. 예수님도 ‘너희들은 가르치고 제자를 삼고’ 그랬거든요. 성경을 가르치라 그 말이지요.

 

어제 저녁에도(10월 28일) 예수가 온다고 난리를 쳤는데(종말론 자들이)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을 보면 교역자부터 문제인데, 그들이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거예요.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계시완성으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줬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이 성경 외에 더 이상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경을 보고 영적인 이치를 깨달아가지고 생활 속에서 자기의 믿음을 잘 이루어 가야지요. 다른 말로 하면 천하 못된 내가 예수 믿는 그날부터 성경을 옳게 배우고 바로 배우면, 옳은 것만 듣고 이치적인 말을 들으면 생각과 마음이 지혜적으로 자꾸 속으로 절여들어요.

 

내가 절간에서 중들하고 같이 있으면 불교의 중이 행하는 것들이 자꾸 내 속에 절여들어요. 내가 노래 잘하는 가수를 따라다니면 노래 부르는 그것이 내 속에 절여들어 간단 말이요. 다른 말로 하면 감염이 된다. 염병처럼 옮아온다 그 말지이요. 그걸 무시하면 안 된다. 절대로 그걸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인간을 만들 때에 그렇게 옮아올 수 있는 특수성자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왜 나를 감염성자로, 옮아올 수 있는 자로, 물이 들 수 있는 자로, 정신이 들어갈 수 있는 자로 만들었는가 하니 하나님과 가까이 해서 하나님을 닮으라 그 말이지요. 확실하지요? 이치입니다. 이거 절대로 무시하면 안 돼요. 마귀는 그걸 무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어둠을 좋아하면 할수록 어두움이 감염이 돼요.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시기 때문에 내가 빛에 가까이 가면 자기는 빛의 혜택을 받지요. 그렇지요? 확실하지요? 하다못해 밤중에 후레쉬라도 들고 가면 자기가 걸려 넘어지지를 않지요. 가는 길이 열리고, 그 다음에 존재가 분별이 되고, ‘저게 누구다, 누구다. 아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이다’ 분별이 되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남자냐, 여자냐’ 이게 다 분별이 되지요? 캄캄하면 나무인지 전봇대인지 도무지 몰라요. 그렇지요? 그러나 빛이 있음으로 해서 분별을 다 해버리지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교역자의 설교가 이치적인 말이 나갈 때에 칠흑 같은 밤중에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 하면 번쩍하는 그 순간에 분별이 탁 되는 것처럼 그 말씀이 번쩍하고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옳은 진리의 말씀이 내 속에서 번쩍하고 확 깨달음이 될 때에 그게 순간인데, 그 순간에서 착 깨달음이 되었지만 조금 지나가면 그게 생각이 나지를 않는 경우가 있어요. 왜 그런가 하니 우리 인간은 보고 듣고 사는 것이 물질에 대한 생각과 마음과 소원을 너무나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영적 면에서 머리가 명석하지를 못하지요.

 

세상살이, 돈 버는 얘기, 정치 얘기 그런 거는 믿는 사람보다 안 믿는 사람이 오히려 더 잘 알아요. 그런데 우리 기독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만 열리면 세계사 돌아가는 것, 정치사 돌아가는 것, 그 다음에 상대방이 말하는 걸 봐서 ‘아, 저 사람이 지금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구나.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구나’ 하는 그걸 알 수가 있어요.

 

이건 점쟁이도 아니고, 마음으로 투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이치에 입각해서 그걸 아는 거요. 그 발걸음을 알아요. ‘빗나가고 있구나. 바로 가고 있구나.’ 또는 ‘이게 가정이 잘못 놓였구나. 쏠리고 있구나. 저렇게 온 가정이 돈돈 하고 돌아가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런 가정은 자식이고 부모고 없어요. 육적 혈육적 족보적으로는 부모자식이 있을 런지 모르지만 정신적 사상적 신앙적인 면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다 이탈이 돼가지고 그 정신이 전부 다 세상으로 포로로 잡혀간 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전쟁이 나가지고 몸이 이북으로 끌려가고, 어디로 끌려가고 하는 그 얘기가 아니고 ‘사람이 정신적인 측면에서 마음이 어디로 빼앗겼느냐’ 하는 그 포로를 안다 그 말이지요.

 

어젯밤에 방송에 나온 그 사람들도(종말론자들) 포로로 잡혀간 거예요. 포로가 돼 놓으니까 부모형제가 가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어요. 울면서 말려도 소용이 없어.

 

그런 가정의 부모들이 부모자식 간에 혈육적이고 인정적인 면에서 얘기해봐야 그 자식을 설득을 하지 못해요. 다시 말하면 포로 된 그 정신 사상을 정복을 해서 빼내올 수가 없는 겁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잘못된 건데, 이걸 나쁜 의미로서 보면 부모의 실력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실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자식들이 잡혀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로다. 아니다’ 하는 것은 아무리 몸은 같이 있더라도 ‘마음이 지금 어디로 빼앗겼느냐’ 하는 이게 문제란 말이요. 믿는 사람은 그걸 빨리 알아야 되는데, 진리에 입각해서 알아야 되는 겁니다. 성경이 그걸 다 가르쳐 주고 있어요.

 

지금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전을 건축하지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백성들이 총 합심해서 전을 건축합니다. 바벨론에서 출발을 할 때에 전을 건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을 해서 이제 도착을 한 겁니다. 그런데 돌아오니까 전을 건축하는 일에 방해자들이 있습니까? 이게 지금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영적인 측면으로 깨닫게 해 주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 예배를 올릴 수 있는 전을 건축할 때도 방해자들이 방해를 했고, 느헤미야가 밤에 나가서 돌아보니까 성벽이 전부 다 허물어져서 그 성벽을 쌓으려고 하니 이때도 산발랏과 도비야와 방해자들이 별별 방해를 다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진리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전을 건축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사상과 정신의 그 진리를 자기 속에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는 벽을 쌓아야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는 아무리 못 살아도, 누가 볼 때에 내가 바보처럼 생겼어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즉,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의 백성이니 내가 믿음이 없어서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 정신 하나만큼은 깡다구 있게 가지고 있어라 그 말입니다. 이해 가요?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깨달을 게 참 많지요. 너무 많기 때문에 다 알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서 우리 믿는 사람은 사랑이 있어야 되는데 어떤 사랑이냐? 아가페 사랑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뭐냐’ 할 때에 ‘무조건 희생이다’ 그렇게 말을 하지만 그런데 그 사랑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하니 거룩도 들어있고 진실도 들어있고 선도 들어있고 의도 들어있고 다 들어있어요.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실하지 못한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 되겠어요? 안 되지요. 거룩한 사랑 안에는 의도 들어있고, 진실도 들어있고 다 들어있어요. 사랑이라고 해서 무조건 무턱대로 하면 안 되는 거지요.

 

옳은 부모는 자식에게 무조건 사랑이 아니에요. 성경에도 있듯이 자녀에게 명령도 하고 견책도 하고 그러지요? 그리고 자식은 부모의 옳은 말에는 반드시 순종이 되어야 하고.

 

그러면 기독교인이 이 사랑을 가지고 사회에서 봉사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랑을 가지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정복을 하는 겁니까? 후자입니까?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고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선악과 외에 다른 과일은 다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과일이 뭐냐 하면 그 때에 선악과가 있고 생명과가 있고, 또 다른 과일이 있었으니까 그게 바로 일반과입니다.

 

그러니까 ‘일반과를 따먹고 생명과를 따먹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 하시면서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랬어요.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에게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을 살려놓고 하시는 말씀이 ‘기독자야. 너는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정복을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정복을 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정복성은 무기를 가지고 정복입니까, 사랑을 가지고 정복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정복을 했습니까, 세상 밑에 들어가서 봉사를 했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죄와 세상과 마귀를 정복을 했습니까, 그 밑에 들어가서 심부름을 했습니까?

 

그 다음에 우리의 구원은 영원 전서부터, 세상을 만들기 전서부터 되어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부터 되어 나오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을 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오너라’ 입니까, 아니면 ‘기독자야, 너는 영이 살아났으니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이 물질세상을 발아래 밟고 부요이던 가난이던 전부 다 이용하고 활용하며 그 사건 환경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오너라’ 그 말입니까?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지식에까지 성장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으로 자라가라는 거지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을 공부하는 거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라다니면 예수님을 닮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시편에도 있는 거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지혜롭고 총명하고 똑똑하고 명철해지는 것입니다. 왜? 만사를 이치적으로 보기 때문에, 분위기에 놀지 않게 때문에, 환경에 휩쓸리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리 지옥 같은 환경이라도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평강이라. 또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지옥 같은 환경이라도 정복이 된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자기가 싫어하는 환경이나 큰 사건이 오면 ‘내가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이 떠나갔나 보다. 하나님이 떠나간 그 사이에 마귀가 와서 나를 못살게 구는가 보다’ 하며 목이 쉬도록 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그러지요.

 

내가 믿음이 있든 없던 모든 사건 환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서 동원을 한단 말이요. 욥기서에 보면 마귀도 사단도 하나님 앞에 있습니까? 신약에도 있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참새도 안 떨어지는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십니까? 이 말의 의미는 좋게 말하면 나를 보호하신다는 그런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주 조밀하고 세밀하고 세심하게 살피셔서 잘못된 것은 심판을 하신다 그 말이요.

 

내가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든지 나를 감찰하고 계신다. 그렇게 때문에 나에게 어려운 사건이 오는 것은 성령님이 주무실 때 마귀가 몰래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로 살다 돌아와서 전을 건축을 하는데 왜 하나님이 능력적으로 보호를 하지 않고 있지요? 당신의 백성들이 전을 건축하면 만능의 능력으로 보호를 해줘야 할 텐데 왜 보호를 해주지 않지요?

 

이건 역설적이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영적 이치를 가르쳐 주시는데,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을 건축하지요? 전을 건축하는 이것이 죄입니까, 의입니까? 의이지요. 악한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방해자들은 지금 선을 행하고 있습니까, 악을 행하고 있습니까? 악.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을 건축을 하도록 시켜놓고 왜 전을 건축을 하는 이걸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를 하지 않습니까? 방해자들이 오면 벼락을 내려서 탁 치워버리든지, 땅이 갈라져서 먹어버리게 하지 왜 가만 두는 겁니까? 하나님이 지금 이걸 모르는 겁니까? 하나님 당신이 이방 왕을 통해서 전을 건축하도록 명령을 했는데 방해자들이 이렇게 야단법석을 치는데도 왜 보호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시는 겁니까? 실력 키워주려고?

 

전을 건축하려면 여기에는 반드시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이다 그럴 때는 그 성전 속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법궤. 그렇지요? 이 법궤 속에는 만나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은 돌판이 들어 있지요. 이게 다 하나님의 역사로서만 된 거지요. 하나님의 교회라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법궤가 있어야 됩니다.

 

이걸 좁혀서 오늘날로 보면 교회를 말하는 건데 교회가 뭐지요? 영이 중생된 성도들의 무리가 교회입니까, 그냥 집이 교회입니까? 성도들의 무리가 교회입니다. 사람 성도들을 보고 교회라고 그러는 거예요. 집은 예배당입니다.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라 그럴 때는 사람인데, 주님께서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함께 있으리라’ 그랬지요? 그러면 교회라 그럴 때에 성도들의 무리인데, 그 가운데는 누가 있어야 되지요? 반드시 주님이 있어야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에는 반드시 진리가 있어야 된단 말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이치가 있어야 된단 말이요.

 

그러면 내가 성도라고 하면 성도 속에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렇지요. 진리의 말씀이 있어야지요. 성도인데도 불구하고 말씀이 없으면 두들겨 맞아요. 그런데도 말씀이 없이 사는 성도가 많아요.

 

그런데 전을 건축하는데 방해자들이 있어요. 이 방해자들은 망하게 돼 있어요.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나 마나 그들은 망하게 돼 있어요. 망하는 자들에게 역시 망하도록 기도를 하면 기도한 대로 망하게 되어있고, 그대로 망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기도한 사람의 기도가 힘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망할 자는 망하는 짓을 하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네가 그 짓을 하고 있고, 네가 그것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니 네가 좋아하는 대로 내가 해 주겠다’ 해서 그대로 되는 거예요. 그러나 전을 건축하고 있는데 만일 누가 와서 그 사람을 저주를 하면 그가 망하겠어요? 그건 아닌 거예요. 오히려 저주를 한 자가 망해요.

 

그러면 이 이치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뭘 가르쳐주고 있느냐 하면 영적 성전을 짓는데, 즉 내가 예수님처럼 닮아가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방해자가 있다는 것과, 이 방해자들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정 반대입니까, 똑같습니까? 정 반대지요. 그러면 영적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고, 하나님 마음을 닮아가는 거고,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이 인격을 닮아볼까?’ 하는 건데, 인격이 고약하고 멍청한 나, 그래서 내가 몰라서 사기당하고 속기도 하고, 그것만이 아니라 내가 똑똑하다고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에게 속는 게 굉장히 많단 말이요. 나는 옳다고 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잘못됐거나 아주 바보스러운 그게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도 그랬을까요? 하나님도 그런 게 있을까요? 우리 주님은,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에요.

 

내가 나의 영적 성전을 짓는 일을 방해를 하는데 어떻게 방해를 하겠습니까? 아까 영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은 육의 생각이라고 그랬어요. 육의 생각이 뭔가 하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실컷 노라리하며 살자’ 하는 거고, 영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볼까?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 뜻대로 살아볼까? 어떻게 하면 성경을 깨달아 볼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 뜻대로 살아볼까’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내가 세상에서 노라리하고 살까’ 하는 이것이 같습니까? 전혀 다르지요. 정 반대. 극대 극이에요.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나는 존재는 한 존재인데 그 속에 두 가지 성분이 있는 걸 지금 가르쳐 주고 있단 말이요.

 

방해자가 볼 때에 육의 생각에 제일 쏠리기 쉬운 자가 누구일까요? 전을 건축을 하면서 불평불만을 하는 자, ‘어떻게 하면 펀하게 살아볼까’ 하는 자들이지요.

 

예수 믿는 내가 영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어오면 현재적인 내가 성전을 짓는 일에 방해자가 될 수 있어요. 세상 육적으로 살아가게 되면 반드시 그렇게 되게 돼 있어요.

 

지금 느헤미야의 기도가 방해자들이 망하길 바라고 있지요? 느헤미야의 기도가 그렇게 나오지요? 나는 존재적으로 이 나라 백성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이 방해자들의 마음과 똑같은 것이 들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방해자들에게 내려진 모든 재앙을 나도 당해야지요. 당하게 돼 있어요. 반드시 당하게 돼 있어요.

 

이 말이 지옥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방해자들은 지옥에 가겠지만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지옥은 안 갑니다. 대신 살아생전에 지옥 맛을 톡톡히 보고 하나님 앞에 기어 올라오게 됩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성경 골로새서에서 보지요.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그걸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이 무엇을 하는 시간입니까? 성전을 짓고 성벽을 쌓는 거지요. 시간 시간마다, 한 이치 한 이치가 나올 때마다 그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를 내 것으로 삼아야지요. 내 것을 삼아야 효력이 있는 거지. 신약과 구약 두 첩을 먹으면 약 효과가 자기에게 나야지요. 안 그래요?

 

그런데 전을 건축하려니까 생활에 어려움이 상당히 많이 왔어요. 방해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유대백성들 근방에 사는데 이 방해자들이 건축하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 ‘전을 건축하지 말고 우리에게 오라’ 그럽니다.

 

건축을 하려면 생활에 어려움이 올 수 있고, 교회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합동작전으로 일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런데 요즘 기독교계에서 합동작전으로 일을 많이 하지요? 합동적전으로 일을 하면 일은 크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고로 각각이 모인 것이기 때문에 성전이 안 세워지는 겁니다. 절대로 안 세워져요.

 

그러면 전을 건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노골적인 방해자들이 얄밉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얄밉습니까? 같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세상에 그럴 수가 없다 그 말이요. 이 말의 의미는 같은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도, 같은 교회인데도 ‘너 뭘 그렇게 어렵게 예수를 믿느냐? 그렇게 어렵게 살지 말고 우리 편으로 와라. 그러면 도와준다’ 그런단 말이요.

 

나중에 보면 유대인들이 전을 건축하면서 방해자들 때문에 무장을 하지요. 한 손으로는 창과 방패를 들고, 한 손으로는 벽돌을 쌓아 올리고 그래요.

 

여러분들, 예수 믿으면서 딴 짓 하지 말아요. 여러분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큰 예배당을 지어서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저는 돈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러지 않겠어요. 영적 성전을 짓는 그 면에 투자를 하겠어요. 여러분들도 이 일을 많이 하세요. 여러분들, 예배당이 없어서 예수를 잘 못 믿습니까, 참 종이 없어서 예수를 잘 못 믿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깨달아야 할런지? 꼭 성경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성벽을 건축하고 망대를 세우는데, 왜 망대를 세웁니까? 원수들이 오는 걸 망보려고 세우는 거지요. 우리의 마음속에 성벽도 쌓고 망대도 세우고 영적 눈이 밝고 주님의 정신으로 튼튼히 무장이 되어 있어야 원수들이 아무리 공격을 해도 쳐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적으로 잘 쏠리는지?

 

무장이라 할 때에 다양적인 면으로 말하고 있는데, 방패도 있고 칼도 있고 진리도 있고 지혜지식도 있고. 그렇지요?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게 복합적으로 들어있는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영적 성전을 짓는 일을,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이 일을 절대로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왜 시험에 들지요? 시험은 왜 듭니까? 왜 얻어맞습니까? 왜 시험이 오고, 왜 얻어맞습니까? 몰라요? 오늘날 성도들이 정말 답답한데, 얻어맞을 때는 잘해서 얻어맞아요, 잘못해서 얻어맞아요? 옳지, 잘못하니까 얻어맞지요.

 

그러면 뭘 잘못해서 얻어맞습니까? 성도들이 의례히 말하기를 ‘잘못해서 얻어맞지’ 라고 하는데, 그 말은 맞는데 ‘그러면 뭘 잘못했느냐’ 하고 구체적으로 물을 때는 난감해요. 하나하나씩 따지면 ‘내가 기도를 게을리 했구나, 내가 뭘 못했구나’ 그저 그런 식으로만 생각을 해요.

 

물론 그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걸 깨달아야 되겠어요. 얻어맞을 때는 왜 얻어맞는가 하니 주님을 닮지를 않기 때문에 얻어맞아요. 알겠어요?

 

내가 행동적으로 남을 미워하는 게 있을 수 있지요? 그래서 얻어맞을 때 ‘내가 남을 미워했기 때문에 얻어맞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요. 그러면 내가 남을 미워하는 그 미움의 마음이 먼저 내 속에 들어온 겁니까, 아니면 내가 예수 닮는 그 일을 안 하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게 된 겁니까? 순서적으로 어느 게 먼저 된 거요? 남을 미워한 게 먼저요? 후자지요.

 

여러분들, 여러분들 앞에 옳은 길이 있고, 잘못된 깃이 있을 때 잘못된 길로 간다면 그 사람은 시험에 걸렸단 말이요. 그러면 잘못된 길로 갔기 때문에 시험에 걸린 거요, 아니면 옳은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기로 가게 된 거고 시험에 걸린 거요? 어느 게 먼저요? 옳은 길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남을 미워하거나 세상적으로 생각이 돌아갈 때는 ‘아차’ 하고 내 마음을 진리로 이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나간 자기의 마음을 빨리 잡아와가지고 진리에 이어라 그 말이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이 번개 같이 빨라요. 사단이 움직이는 것도 번개 같이 빨라요. 그러니까 순간적으로 빨리 나가는 마음을 잡아올 수 있는 능력이 돼야지요. 자기가 바로 깨달아 나가면 그렇게 잡아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내가 진리의 말씀과 탁 끊어지면 나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세상에 연결이 돼요. 그리고 내가 세상으로 나간 마음을 끊고 진리 쪽으로 붙으면 세상이 와서 진리에 붙은 그 마음을 잡아가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자기 자신에 달려 있어요. 안 믿는 사람 말고 우리 기독자에게만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시험에 든 것은 하나님과 끊어진 거지요.

 

우리는 무슨 행동적으로 잘못한 그것이 죄인 것으로만 알지 말고, 그건 나중에 찾아도 도매금으로 와요. 지가가 바른 길로만 가면 남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하는 것은 가면서 고쳐지고 그래요. 이건 하루아침에 완전하게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바른 길은 가지 않고 남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그런 것만 죄인 줄 알고 백날 그런 걸 회개해봐야 길은 딴 길로 가고 있어. 그건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거요.

 

자기가 하나님과 끊어지면, 진리와 끊어지면 딴 짓을 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남을 미워할까, 죄를 지을까’ 그런 염려보다도 내가 적극적인 면으로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이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원수가 올 때에 방패를 갖고 자꾸 막는 이것보다 더 좋은 싸움은 돌격하는 거예요. 이 싸움이 아주 좋아요. 가다가 넘어질지라도 돌격하는 거. 이것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겁니다. 이걸 깨닫고 나가면 성경이 바로 깨달아 집니다.

 

새벽기도 나가려면 안 나가고자 하는 그 마음이 내 속에 있지요? 그 자기는 아주 못된 놈이에요. 한쪽에서는 ‘내가 저 형제를 사랑해야 할 텐데’ 그러면서 마음 한쪽에서는 원수를 한 번 갚아주고도 싶고, 원수를 두들겨 패고도 싶고 한 그런 마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못된 이 자기는 참 자기가 아니에요.

 

자기 속에 거짓 자기가 있고 참 자기가 있는데, 참 자기는 영적인 자기로서 이 참 자기는 ‘어떻게 하면 내가 바로 살아볼까? 잘 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을 닮으면서 옳게 바르게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갈까?’ 그러지요.

 

부자 되기를 원하는 자는 벌써 시험에 걸린 거지요? 특히 오늘날 세상이 시험에 들기기 참 쉬워요. 딴 데로 빠지기가 쉬워요. 여러분들은 절대로 딴 데로 빠지지 마시고.

 

그러면 왜 시험에 빠질까? 만일 믿는 사람이 부자 되기를 바란다면 누구에게 기도를 하겠지? 주님에게 기도를 하겠지요. 그러면 그렇게 기도를 해서 부자가 됐다고 그랬을 때에 그 사람은 ‘아, 내 믿음대로 됐구나’ 할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기도를 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육적인 면에서 잘 살고 육이 살찌고 편안하고 등 따시고 배 부르는 그 면으로는 잘 됐는데 영적인 면에는, 주님을 닮는 그 면에는 완전히 끊어져 버렸습니까? 그게 앙화요 재앙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어떤 벌을 받았다. 홀딱 망했다’ 자꾸 그렇게만 생각을 말고 순간순간마다 시간시간마다 분초찰나마다 내가 하나님의 성품이 지혜지식이 진리지식으로 성장이 되지 못하고 닮아진 것이 없다면 나에게는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앙화라 그 말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요? 그 다음에 얻어맞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재산이 다 날아가고 눈알이 빠지고 팔다리가 부러지고 하는 그건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아까 내가 얘기했지요.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그 일에 이용하고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을 해도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주신 환경을 실컷 활용하고 이용을 해서 일을 하니까 돈은 노력의 대가로 내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를 지을 때 수확을 해서 들어올 돈을 생각하면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겠지. 그렇지 않겠느냐 그 말이요. 그러나 믿는 사람이 농사를 짓는 것은 돈을 생각하고 짓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을 닮는 일에 주신 농토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이용하고 가겠다는 목적으로 열심히 농사를 짓다보면 여기에서 소출이 많이 나올 수도 있고 적게 나올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많이 나오면 돈이 많이 들어올 거 아니요?

 

그러니까 지금 ‘농사를 짓지 말라, 돈을 벌지 말라’ 그게 아니고, 공장에서 일을 하더라도 돈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지 말고 ‘이 공장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으니 내가 기술 것 노력 것 최대한으로 물건을 좋게 만들자’ 하고 물건을 만들어 내니까 물건이 좋을 수밖에. 물건이 좋으니 또 잘 팔릴 수밖에. 그러니 돈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내가 물건을 만들 때 ‘돈을 많이 벌자’ 해서 만든 겁니까? 그건 아니지요. 이런 게 성경에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돈을 생각하면서 물건을 만드니까 날림으로 만들고 그러지요. 그러나 우리 기독자의 일은 그런 게 아니지요.

 

자, 그러면 아침에 왜 밥을 먹습니까? 안 믿는 사람은? 살기 위해서? 그렇지요. 또 먹기 위해서 돈을 벌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는 뭐하려고 밥을 먹어요? 옳지, 예수 잘 믿기 위해서 먹고 마신다 그 말이요. 성경에 앉든지 서든지 망하든지 들어가든지 뭘 하든지 뭘 위해서 하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 말이요. 바로 그 정신이란 말이요.

 

우리가 소출이 많이 들어오면 안 믿는 사람들처럼 그 소출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누립니까? 그게 아니지요. 복음에 투자가 되는 거지요. 그게 물질을 바로 쓰는 거지요. 옳은 정신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옳은 정신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 옳은 정신을 가지고 장사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거지요. 부어주시면 또 복음에 투자하고.

 

이러면 자기는 망합니까, 자꾸 커집니까? 믿음이 커지고, 믿음 좋은 그게 만방에 막 불어납니까? 그러면 자기가 자기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이 막 드러낸단 말이요. ‘자, 이 사람을 봐라’ 하고 하나님이 드러내는 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드러내서 내가 큰 자리에 앉았다 할 때 내 기도가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그게 아니지요. ‘행여나 이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을까’ 하며 자기를 살핀단 말이요. 아브라함이 그랬단 말이요.

 

우리 기독자는 빨리 빨리 자라야 돼요. 시간이 없어요. 나이적으로 볼 때도 시간이 없어요. 아닌 말로 내가 예수님처럼 닮은 게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그게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세상바람에 날려가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와요. 유행바람이 불어오지요, 정치바람이 불어오지요, 전쟁바람이 불어오지요, 물가바람이 불어오지요, 종교바람이 불어오지요, 세상은 바람 투성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바람에 따라 술렁술렁 하지요? 사해바다에 바람이 한 번 부니까 물결이 치지요? 그 바람에 울렁울렁 놀고 있어. 그건 안 된단 말이요.

 

주님이 말씀을 했지요. ‘너희들이 광야에 뭘 보러 나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옷 잘 입은 그런 사람을 보러 왔느냐?’ 그리고 맨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선지자의 말을 들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사는 자체가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돼요. 선지자의 말이 뭐냐 하면 주님의 말씀입니다.

 

(에스라 끝)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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