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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민수기 최용우............... 조회 수 2103 추천 수 0 2014.04.09 23:58:55
.........
성경본문 : 민18:1-7 
설교자 : 신윤식 목사 
참고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민수기26강

민18:1-7

제사장

97.8.10


회사가 자기네 상품을 선전할 때 덧붙여서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유사품에 주의하시고 ○○ 마크를 꼭 확인하세요'라는 말입니다. 유사품이란 다른 회사의 상품을 모방한 가짜를 말합니다. 유사품은 정품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정품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유사품을 정품으로 속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가짜와 구별을 잘 못하기 때문이고 또 값이 싸기 때문입니다. 값이 싸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진짜가 아닌 가짜를 구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진짜를 값싸게 샀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유사품은 정품 앞에서는 가짜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유사품이 정품과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유사품 소유자는 자기 것이 정품이라고 우깁니다. 정품을 가진 자 앞에서 '네것이 가짜고 내 것이 진짜다'라고 우기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짜를 진짜라고 우겨도 상품을 만들어낸 회사가 유사품이라고 판정할 때는 할말이 없습니다. 결국 그동안 가짜를 진짜로 여기며 진짜를 값싸게 샀다고 좋아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탄을 하게 될 것이고 진짜를 가짜라고 우겼던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유사품이 여기저기에서 진짜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위조지폐, 위조수표, 가짜 한우, 가짜 꿀, 가짜 참기름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며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가짜들에 속는다고 해도 약간의 물질의 손해를 보는 정도로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장래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유사품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유사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도 유사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도 유사한 복음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고후 11:4절을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합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란 말을 합니다. 이것을 쉽게 사이비 종교를 용납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물론 사이비 종교도 포함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진짜 복음이라고 믿게 만드는 유사 복음입니다. 사이비 종교는 한마디로 조잡한 모방이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이비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는 이리와 같은 유사품은 정품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진짜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사품을 정품이라고 우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사 복음은 결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못합니다. 오히려 멸망으로 빠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갈 1:6-9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 즉 복음을 모방한 유사복음에 대한 심각성을 말합니다. 다른 복음도 예수를 말합니다. 다른 복음도 십자가를 말합니다. 다른 복음에도 성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과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비춰보면 가짜임이 금방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유사품을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갈 1:10을 보면 유사복음은 사람들의 기쁨을 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유사한 복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세상은 유사복음이 진짜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가짜를 진짜라고 우기고 진짜를 가짜라고 우기면서 참된 복음을 멀리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유사복음이 아닌 참된 복음을 알고 있다고 자신합니까? '내가 좇아가는 복음은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주는 참된 복음이다'는 것을 굳게 자신합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은석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참된 것입니까? 신윤식 목사가 전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참된 것입니까? 교회를 보고, 사람을 보고 복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저교회는 진짜 교회답다. 그러니까 저 교회에서 전파되는 복음도 진짜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또 '아무개 목사님은 인격도 훌륭하고 성품도 좋고 욕심도 없고 진짜 목사다운 목사니까 저 목사님이 전파하는 복음은 진짜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이러한 실수를 사람들이 많이 합니다. 교회와 사람에 대한 믿음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그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다른 복음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교회라는 것 하나 때문에 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성령, 십자가, 복 등등 모든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 없다라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석교회는 어떻습니까? 유사 복음이 아닌 참된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교회입니까? 여러분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참된 복음이란 증거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은석교회니까 참된 복음이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팔은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편이라고 은석교회 다니는 교인이기 때문에 내가 다니
는 교회를 편드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유사품과 정품의 구분은 그 상품을 제조한 회사가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단지 눈으로 보고 '이것이 진짜 같다, 저것이 가짜 같다'는 추정을 할뿐이지만 상품을 만들어낸 회사는 '이것은 이러이러해서 진짜입니다'라고 진짜의 조건을 하나하나 들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의 진위 여부도 누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제아무리 유사한 복음을 가지고 내가 진짜라고 주장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르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인과 신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인은 교회가 만들어 내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만들어 냅니다. 교인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이지만 신자는 생명을 소유한 산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인은 주님을 따르지 않지만 신자는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인입니까? 신자입니까? 교인은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돌아가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고 이기주의를 가득 담고 있는 옛사람 그대로이지만 신자는 설교를 듣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되어 돌아갑니다. 자기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연구하고 잘 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앞세우면 신자가 아닙니다. 결국 유사품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게 만듭니다. 십자가도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는 자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인 자기를 앞세우게 하는 것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아니오 십자가가 아닌 유사 복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오늘도 하나님께서 은석교회를 보실 때 유사복음을 말하고 신자가 아닌 교인을 만들어 내는 엉터리 교회가 되지 않고 자기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하고 주님을 따르는 진자 신자들로만 풍성한 교회 되기 위해서 우린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린 모두 죽은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은 '우린 다 죽었다'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살아있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생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죽음의 실체를 보지 못한 자는 생명이 소중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나는 살아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유사 복음은 이렇게 교인에 불과한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죽었다'라는 선포가 아니라 인간을 이모저모로 치장해주는 일을 도와줍니다.


민 18:1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족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가 그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제사장이 있게 합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일을 합니다. 제사장으로 하여금 죄를 담당하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와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고 자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제사장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신이 죽은 지팡이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은 죽은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17:12,13절을 보면 그 모습이 나와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지팡이는 그대로이고 아론이 지팡이만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자신들은 죄로 인해서 죽은 자이고 망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자리에 죄를 대신 담당하는 제사장을 세우심으로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아 가는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죄로 인해서 죽은 자이고, 다 망하여야 할 가치 없고 형편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사랑과 자비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는 결국 유사 복음에서 나온 가짜에 불과합니다. 사랑과 자비는 돈이나 벌게 해주고, 병이나 고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심판 속에 있어야 할 우리를 누군가가 대신 그 죄를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는 생명으로 끄집어내신 것을 사랑이요 자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케 할 분을 세우신 것, 그것을 사랑 자비라고 하는데 그 사랑과 자비가 곧 우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용서는 '그래 네 죄 용서해줄께'하고 말 한마디로 간단히 끝난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란 대신 죄를 담당할 분을 세우신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대신 고생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신 비참한 꼴을 당한 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면 그 말 한마디로 간단히 내 죄가 해결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한번으로 끝났고, 이제는 옛날 2000년전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만 하면 간단하게 죄가 해결된다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이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겠습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만하면 얼마든지 해결되는데 과연 내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용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용서를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내가 죽은 지팡이고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할 자인 것도 모르고,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용서도 쉽게 생각해 버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도 남의 일로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가 더 소중하고 자신을 더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가 아닌 교인의 자리에 머물러 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유일하게 구원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달린 한편 강도입니다. 성경은 무엇 때문에 한편 강도의 구원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까? 구원은 곧 강도와 같은 그런 모습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눅 23:39절에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중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강도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간단히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강도를 통해서 보여진 믿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강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업신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도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자기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를 구원시켜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구원을 기다리는 신자의 모습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사실은 자신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죽은 자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자신은 죽은 자임을 알고 자신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전혀 두지 않는 사람은 오직 주님의 긍휼만 기다립니다.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귀한 줄을 알고 자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다른 강도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한 강도를 꾸짖습니다. 눅 23:41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강도는 자신의 죄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한 일,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는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달린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면서 죽는다는 것을 이 강도는 십자가에 함께 달려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하게 됩니다. 구원시켜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입니다. 나를 생각해 달라는 것은 내 구원은 주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의지할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과 긍휼입니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비워버린 모습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신자의 모습이며 예수님이 찾는 자기 백성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가 이 강도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자의 마음은 자기의 욕심은 다 비워버리고 오직 긍휼과 은혜만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간 탕자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왔을 때 한 말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안자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아버지의 은혜와 자비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어떻습니까? 신자라고 자처하는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품꾼으로 써달라는 것이 아니라 한자리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구원받지 못하면 누가 받느냐'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린 다같이 살 수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할 악한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린 가능성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만 챙기는 이기주의로 가득찬 실패자들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자인할 때, 실패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을 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면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유사 복음이 아무리 사랑과 자비를 말한들 그것이 과연 복음이겠습니까? 이들이 말하는 사랑과 자비는 인간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과 자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성령이 자리할 수 없고 은혜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죽어야 할 옛사람을 새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남을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도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남을 평가할 때도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발견하고 나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다른 복음은 자기에게 가능성을 둡니다.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체를 모릅니다. 열심히 하면 그것이 구원을 가져오는 줄로 압니다. 내 죄를 담당했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옛날에 지나간 사건으로 여겨버립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내 죄를 담당해 줄 필요 없이 인간의 적당한 도덕과 윤리와 선함과 교회에 대한 봉사와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가지고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복음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죽은 자일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하고 죽어야 자신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죄를 누군가가 담당했음을 압니다. 그 은혜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발견합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눈을 뜹니다. 그리고 나는 비록 품꾼으로 살아도 아버지의 품에 있다는 그것만으로 행복해 하고 감사하면서 살게 됩니다. 자신을 채우려고 애 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 쓸데없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음 안에서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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