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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하나님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102 추천 수 0 2014.04.22 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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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4:1-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744713 

jys.jpg 아브라함의 하나님

롬4:1-5, 13-17, 주현절 둘째 주일,

2014년 3월16일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성경 상식에 대한 퀴즈를 내겠습니다. 속으로 대답해보십시오.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을 세 사람만 손에 꼽아보십시오. 역사적으로 후대에 속한 사람부터 시작하면 첫째는 다윗입니다. 그가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통일왕조를 세운 인물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을 때 짱돌 하나로 완전 무장한 전문 격투사 골리앗을 때려눕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둘째는 모세입니다. 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전수받은 장본인입니다. 그 율법은 유대사회를 지배하는 절대규범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헌법을 비롯한 여러 법률을 집대성 한 것과 비슷합니다. 셋째는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첫 인물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받은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선민사상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는 이야기는 창세기에 몇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그 이야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중의 하나인 창 17:1,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언약, 즉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 뒤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할 것이며, 후손을 크게 번성하게 하고, 그의 후손 중에서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약속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은 요즘에도 가나안 땅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원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는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에 걸쳐서 가나안 땅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토지 전쟁을 마다하지 않은 근거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에 월남한 분들의 자손들이 남북통일 후에 북에 두고 온 땅을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가 좀 복잡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의 고향은 원래 가나안이 아닙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 사람입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 머물러 자리 잡고 살다가, 결국 거기서 죽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장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창 12장1절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아내 사래, 그리고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갑니다. 그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성경은 한두 마디로 설명했지만 아브라함의 이런 결정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하란에서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 안정적인 생활을 정리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가나안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기 않으면 안 되는 결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미래가 불투명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제2독서 롬 4장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바울은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인들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모세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기에 유대인이라면 모두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율법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율법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인들, 또는 유대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 율법 행위는 더 이상 구원의 절대 조건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지를 해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꺼내든 겁니다.

 

바울이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근거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 롬 4:3절에서 창 15:6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 구절은 유대인들과의 신학 논쟁에서 핵심적인 겁입니다. 또한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절대화하는 유대인들의 논리를 허물 수 있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절대적인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아브라함도 율법 실천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약속을 받았고,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는 특권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바울은 롬 4:13절에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구절을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성취되는 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성취됩니다. 이게 과연 근거가 있는 주장일까요? 단순한 교리논쟁일까요? 바울은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 보았습니다. 아주 파격적으로 들리는 1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이런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또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기가 막혔겠지요. 자신들이 절대적인 규범으로 생각하는 율법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주장이니까요. 이 문제를 오늘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율법은 개인과 공동체가 건강하게 작동될 수 있는 규범입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을 비롯해서 도로교통법, 형사소송법, 가정법 등, 각종 법률이 곧 유대인들의 율법과 같습니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법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즉 인간을 파괴한다는 겁니다. 이상하지요? 법이 없으면 세상이 무질서한 카오스가 되지 않습니까. 누가 옳을까요?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다는 바울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이건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오면서 차를 운전하셨을 겁니다. 붉은 신호등 앞에서 멈추지 않고 그냥 통과하다가 무인카메라에 찍혔으면 신호 위반으로 8만 원짜리 범칙금을 내야 합니다. 도로교통법이 없었다면 벌금 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사고를 쳐도 잘못한 게 아닙니다. 그 아이들에게는 법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은 가을만 되면 비상이 걸립니다. 멧돼지가 출몰해서 농작물을 헤치기 때문입니다. 멧돼지의 이런 행위를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죄의식이 발생합니다. 이 죄의식이 곧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그럴듯하긴 하되 뭔가 찜찜할 겁니다. 법이 정말 문제라는 말이냐, 법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냐,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게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율법과 할례를 절대화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법치주의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법이 잘못되어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법이 좋아도 그걸 운용하는 사람이 잘못되면 법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법이 악용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법은 인간의 삶을 규정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걸 절대화하면 오히려 삶이 파괴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후손이 될 수 있는 언약을 받았습니다. 이 언약에서 필요한 건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이 명령하는 가나안 땅으로 온 것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아내인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허락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심지어 창 22장에는 백세에 낳은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려고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게 모두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믿음으로 사는 건 어렵기도 하고 비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율법으로 사는 게 오히려 쉽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법은 자기가 이룬 업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거니까 어느 정도 동기유발이 됩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잘했을 때와 못했을 때 스티커를 붙여서 상과 벌을 주는 제도 같은 게 율법입니다. 학생들은 상을 받으려고 억지로라도 노력합니다. 세상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만 작동됩니다. 말 잘 들으면 좋은 보상을 받고, 듣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삶의 질서입니다. 이와 달리 믿음은 선생님과 학생이 상과 벌이 아니라 순전한 신뢰의 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각박하고 살벌한 세상살이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너무 이상적인 주장은 아닐까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겁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믿느니 자기 주먹을 믿겠다는 식으로 살 거고, 실제로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살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천차만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게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고, 나름으로 교회에 헌신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경우는 많습니다. 억지로 하나님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빠져죽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옆에서 도와줘도 수영을 배울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믿음도 은총이라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물속에 들어가도 빠져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특히 잘만하면 사람이 물에 뜬다는 사실을 알아야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맡길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율법에 떨어지거나, 또는 광신에 빠집니다. 성경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7b절의 진술을 들어보십시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며,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만이 사람을 율법과 상관없이, 신분에 상관없이, 업적에 상관없이 믿음만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약속하시며 구원하십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께만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미래를 완전히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너무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귀로는 알아듣지만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활보다는 지금 여기서 즐겁고 바르게 사는 것으로 인생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꽤나 됩니다. 부활 신앙을 미숙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게 성숙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미숙한 겁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는 말은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환생한다는 말이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생명 사건인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과 창조를 같이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무로부터 창조를 가리킵니다. 없다는 것과 있다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컴퓨터는 있는 것의 기술적인 변형에 불과하지 창조는 아닙니다. 보통 ‘저 사람은 창조적이야!’라거나 심지어 창조 경제라는 말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가 아닙니다. 가장 창조적이라 할 예술가들의 행위도 원래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것을 변형하는 것이지 창조는 아닙니다. 무로부터 유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공허한 존재가 아닙니다. 부활과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율법 수행으로 뭔가 인정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쨍쨍 비추는 한 낮에 손전등을 켜놓고 세상을 밝게 했으니 그만한 보답을 해달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바울이 율법주의자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과 창조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믿음입니다. 전적인 신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21세기 율법주의자들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평생 땀 흘려 가면서 율법을 성취해보라고, 그러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요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런 현실에서 우리가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참된 생명의 토대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제3독서인 요 3:15절은 진리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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