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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수는 예수다!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455 추천 수 0 2014.04.22 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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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5-26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745794 

jys.jpg 정용섭 목사

영원한 생수는 예수다!

요4:5-26, 사순절 셋째 주일,

2014년 3월23일

 

오늘 설교 본문인 요 4:5-26절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다가 만난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눈 내용입니다. 교회생활을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면 이 본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른다면 초보 교인이거나 아니면 성경에는 관심 없이 교회만 드나든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와 그 의미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분이라 하더라도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더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이전에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던 말씀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읽으려면 여러분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연이 숨어 있는 그림을 보듯이 오늘 이야기의 장면을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는 중이었습니다. 포항에서 대구로 오려면 영천을 거쳐야하듯이 남쪽인 예루살렘에서 북쪽인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당시에도 지역감정이라는 게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낮추어보았습니다. 스스로 정통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말을 섞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유대인들은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유대인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라는 동네에 당도했습니다. 낮 열두 시 점심시간이라 제자들은 먹을거리를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고, 예수님은 피곤하여 쉬고 싶기도 하고, 또 목이 마르기도 해서 우물가로 가셨습니다. 마침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 시간은 광야의 햇살이 뜨거운 대낮이라 물을 길으러 올 때가 아닙니다. 이 여자는 뭔가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할 속사정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목이 마르셨을 겁니다. 이런 장면은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속그림에도 이런 장면은 나옵니다. 한 젊은 남자가 서울로 과거 보러가다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한 처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처자는 그릇에 물을 담아 버드나무 잎을 띄워 줍니다. 급하게 마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합격한 이 남자가 다시 이 여자를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있음직합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자는 9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 여자의 성격이 원래 까칠하거나 자격지심이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다시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또 따져 묻습니다. ‘당신은 두레박도 없으면서 이 깊은 우물에서 어떻게 물을 길어 나에게 주겠다고 큰소리 치냐, 허튼 소리 마라. 이 우물은 우리 조상인 야곱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라는 말이냐.’ 예수님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떠올리는 물을 말씀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의 대화가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당신 안에서 생수가 영원히 흘러넘쳐서 앞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제야 이 여자는 정색을 하고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본문의 전반부인 요 4:5-15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습니까? 생각이 많았을 겁니다. 가장 일반적이고 신앙적인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얻어도 참된 만족이 없고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을 잘 믿어야 우리 내면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듯이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답입니다. 그게 정답이기에 저도 오늘 설교 제목을 ‘영원한 생수는 예수다!’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좀더 정직하게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게 좋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오래 살았는데도 여전히 목마른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영원한 생수는커녕 순간적인 해갈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고 있는 이런 이야기가 그럴듯하기는 하되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와 닿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성경 이야기가 원래 공허하고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그런가요? 아니면 우리가 그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그런가요?


 

본문 이야기를 좀더 따라가겠습니다. 영원한 생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 여자의 귀를 번쩍 뜨게 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이 모여 쑥덕거리는 우물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이 오는 시간을 피해서 한낮에 온 겁니다. 생수를 달라고 한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당황했을 겁니다.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는 남편이 없다고 시치미를 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17,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다섯 명의 남자를 거쳐서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다니, 이 여자는 전형적인 팜므파탈(femme fatale), 즉 요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여러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불쌍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이 여자는 이웃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실제의 삶에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이 여자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지 현대인들은 대개 이런 고립을 경험합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노력하기도 합니다. 다섯 남자를 거치듯이 물건, 취미, 사회적 업적 등, 많은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결국 아무도 모르게 혼자 물을 길으러 다녀야만 합니다. 자신이라는 고립된 성채에 갇힌 공주, 또는 왕자와 같습니다.

 

이런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영화가 <겨울왕국>입니다. 네덜란드의 한 동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공주로 태어난 두 자매가 있습니다. 언니는 손으로 대는 모든 것이 얼음으로 변하는 마술에 걸렸습니다. 그걸 비밀로 지키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발각이 되자 자기 왕국에서 도망가 산속에 들어가서 얼음으로 된 궁을 짓고 삽니다. 그 사이에 그녀의 왕국도 겨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마술에 걸린 그녀를 힘으로 제거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는 얼음의 세계로 더 깊이 도망갑니다. 이 영화의 공주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는 똑같이 고립된 인간 실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 운운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제를 돌립니다. 머리가 좋은 여자인가 봅니다. ‘우리 사마리아 사람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하니, 누가 옳은 겁니까?’ 예수님은 그런 논란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다시 말을 옆으로 돌립니다. 메시아가 오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26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우리말 번역으로는 원래 헬라어 문장의 특징을 따라가기가 약간 어렵습니다. 말이라는 게 ‘아’와 ‘어’가 다릅니다. 어순에 따라서도 뉘앙스가 달라집니다. 헬라어 문장은 이렇습니다. ‘에고 에이미, 호 라론 소이.’ 에고 에이미는 영어로 ‘I am...’입니다. 이런 표현이 요한복음 기자의 글쓰기 특징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양의 문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문장이 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로 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는 이런 문장을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보지 않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당신 자신의 메시아 성을 가능한대로 감추려고 하셨던 예수님이 자신을 이렇게 막 드러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 기자가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행위,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전체 운명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읽고, 인식하고, 경험하고, 그 사실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내가 바로 그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즉 ‘내가 메시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저는 앞에서 예수님을 믿어도 영적인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고 물었습니다. 이제 대답을 찾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달받기는 했으나 그 사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를 다시 보십시오. 오늘 본문 이후에 이 여자의 행동이 더 나옵니다. 이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9절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문장에도 전형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와서 보라.’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면서 ‘와서 보라.’(요 1:46)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와서 직접 보라는 겁니다. 궁극적인 것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은, 거룩한 것은, 즉 하나님은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불립문자이고, 불가언성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물동이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피하고 싶어 하던 겨울왕국인 동네로 들어가서 동네 사람들을 만나, 와서 보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그녀가 그 동네에서 어떻게 살아갔을지 성경이 말하지만 않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제 때에 맞춰 물을 길으러 왔을 것이며, 더 나가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놀랍지요? 그리고 부럽기도 하지요?

 

그런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말하는 거지 우리처럼 밋밋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으니 사마리아 여자와 같은 경험을 하기는 힘들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경우와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수가 메시아 경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런 경험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영원한 생수가 내면에서 솟아나고 있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또는 영원한 생수를 맛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 맛을 어느 순간엔가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건 좀 안타까운 일입니다. 메시아 경험이 무엇인가를 단순히 교리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목이 마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짜게 먹었을 때, 땀을 많이 흘렸을 때, 긴장할 때 목이 마릅니다. 갈증은 몸에 물이 필요하다는 생리적 현상입니다. 갈증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은 죽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한 갈증을 완전히 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실제의 삶도 똑같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뭔가를 채워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채워가는 것을 열거해보십시오. 그걸 이룬다고 해서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한번 물을 마신다고 해서 다시 갈증이 생기지 않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이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에 푹 빠지는 겁니다. 시편을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보십시오. 모든 시편이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노래합니다. 예컨대 시 42:1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도 바로 이런 목마름의 표현입니다. 바울은 고전 16:22절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마라나타’(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썼습니다. 어떤 교우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는 하나님이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에 빠진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게 메시아 경험입니다. 이럴 때 다른 문제들은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은 다른 것으로 인해서 더 이상 목말라 하지 않게 됩니다. 동의가 되는지요?

 

오해는 마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산신령처럼 세상을 초월해서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우리 영혼을 화염처럼 불살라도 세상을 살면서 속상한 일은 많이 겪을 겁니다. 시행착오도 겪고, 그래서 후회도 많이 할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싸우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간혹 화를 내셨고, 바울은 정색하고 이단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위대한 교부들, 신학자와 성인들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살았습니다. 인생살이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고 구름 타듯이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아는 사람은 자기 문제로 인한 목마름에서 벗어납니다. 즉 목마름의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즉 이런 사람은 거룩한 목마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 목마름은, 아니 이런 목마름만이 우리를 근원으로부터 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마리아 여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는 14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26절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즉 그리스도입니다. 이 두 구절이 말하는 가리키는 것은 ‘영원한 생수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믿을 수 있나, 하고 질문하고 싶으신가요? 여기서 구구절절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동네 사람들에게 한 말을 대신 전하겠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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