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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418 추천 수 0 2014.04.22 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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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50:4-9a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749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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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0:4-9a, 사순절 여섯째(종려) 주일, 2014년 4월13일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의로운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정의롭고 동시에 전능한 존재라고 한다면 착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늘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삽니다. 남을 속이고 빼앗고 야비한 짓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습니다. 악은 아주 평범하고, 심지어 세련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반면에 법 없이 살 정도로 착한 사람인데도 평생 불행이 떠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애로 태어나기도 하고, 남에게 속아서 재산을 다 날리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합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방관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그걸 바꿀만한 능력이 없는 걸까요?

 

구약성서를 기록한 유대인들의 신앙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린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았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그런 일들은 반복되었습니다. 가장 큰 사건은 셋입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에 의해서, 기원후 1세기 로마에 의해서, 그리고 20세기 독일 히틀러에 의해서 그들은 극한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삶의 뿌리가 완전히 뽑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신앙적인 위기도 함께 겪었습니다.

 

오늘 사순절 여섯째 주일의 제1독서인 사 50:4-9b는 바벨론 포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시대가 치욕스러운 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이 파괴되었고, 나라가 붕괴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파송된 총독이 그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왕족을 비롯해서 지도급 인사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바벨론 포로 신세가 된 사람 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을 썼습니다. 신학자들은 그를 제2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는 사 1-39장을 쓴 제1 이사야나 사 56-66장을 쓴 제3 이사야와는 다른 시대에 산 사람입니다. 제2 이사야는 익명의 저자로서 영성이 유달리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 상황을 6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아주 짧은 표현이지만 그가 당한 고난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등을 맡긴다.’는 말은 채찍으로 맞는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채찍은 가죽 끈 끝에 납덩이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 채찍에 맞으면 살점이 묻어납니다. 이사야는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모욕이 없습니다.

 

그가 그런 고난을 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만 제2 이사야 전체와 당시 포로 시대를 감안하면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일종의 구원신탁을 선포한 것입니다. 제2 이사야의 예언이 시작되는 사 40:1절 이하에서 이에 대한 암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 40:2a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말은 포로생활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 예언을 거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정권입니다.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왕 때에 가장 잘 나갔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예루살렘을 침략했고, 그 외에 여러 나라를 정복했습니다. 당대를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런 힘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내우외환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지키려고 했던 그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노역의 때가 끝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곧 바벨론 제국이 망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사야를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이런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것이 채찍으로 치기, 수염 뽑기 등입니다. 권력의 속성은 늘 이렇습니다. 자신들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침묵하도록 유무형의 압력을 가합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대한민국도 여러 면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거부하는 세력은 이차적으로 동족, 즉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수십 년의 포로생활에 나름으로 적응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신앙을 회복해야 할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예루살렘에 비해서 앞선 문명 국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재미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거라는 이사야의 말이 이들에게는 불편합니다. 현실성 없는 선동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좀더 실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강하면 강할수록 바벨론에서의 삶은 더 피곤해집니다.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바벨론에서의 삶인데, 그걸 흔들면 서로 불편해질 뿐입니다. 모르긴 해도 이사야의 친구들은 호의로 이사야에게 그만 말하라고, 좀 참으라고, 그래봤자 자네와 주변 사람들만 피곤해진다고 설득했을 겁니다. 그래도 이사야가 예언을 그치지 않자 강제적으로 못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상황이 바로 채찍과 수염 뽑기와 침 뱉음입니다.

 

제2 이사야가 처한 상황은 참으로 곤혹스럽습니다. 지금 자기 동족인 바벨론 포로들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조가 회복될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없으니 제사행위도 없습니다. 주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버텨낼 자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봐준다는 확신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합니다. 바벨론 제국의 체제 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회만 찾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게 모든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소나기 올 때는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니 골치 아픈 일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습니다.

 

이사야도 그런 생각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외면당하는 것을, 즉 하나님 말씀이 침묵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 50: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여기에 이사야의 절박한 마음이 녹아있습니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

 
이사야의 이런 예언을 단순히 종교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즉 기도하지 않는다거나 예배드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던 그 바벨론 포로 시절에도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하나님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제사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안식일에 나름으로 종교행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뭐합니까? 그게 그들의 마음에 아무런 울림도 없었습니다. 패배주의와 무력감에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영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는 참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2천6백 년 전 바벨론 포로 신세로 살던 제2 이사야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는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과 같은 폭력적인 권력을 도처에서 경험합니다. 적당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유혹도 받습니다. 정의와 평화보다는 경쟁력이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강요를 받습니다. 청소년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수능시험 준비를 위해서 학교에 갇혀 있어야만 합니다. 바벨론 포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의 칠십년 가까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 한민족의 실존은 바벨론 포로입니다. 이사야 시대 사람들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현상이 더 이상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해방과 자유를 향한 비전이 없습니다. 타의에 의해서, 그리고 자의에 의해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달랐습니다. 4절에 따르면 주 여호와께서 그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었고, 5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귀를 열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배울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벨론 정권이 듣기 싫어하고, 동족들마저 불편하게 생각하는 말씀을 과감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박해와 모욕을 당해도 이사야가 당당했다는 사실입니다. 몇 번에 걸쳐서 그걸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근거는 여호와께서 도와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그는 7a절과 9a절에서 반복했습니다. 7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여기서 여호와의 도우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자기편을 많이 만들어준다거나 사람들을 압도할만한 초능력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겁니다. 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

 
참으로 놀라운 선포입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하나님께서 ‘네가 옳다.’ 하고 인정하셨다는 겁니다. 이걸 뚫어볼 수 있었기에 이사야는 ‘나와 다툴 자가 있으면 나서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어떤 건지, 느낌이 오지요? 예를 들어, 어떤 초등학교 학급에서 한 아이가 전체 아이들과 옥신각신 다툽니다. 한 아이는 대세에 완전히 밀려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이미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가운데 선생님으로부터 ‘네가 옳은 거야.’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따돌림을 당해도 자신만만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사실에 근거해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인정입니다.

 

이걸 받아들인다 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확실해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다 전자를 토대로 해서 작동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말은 듣는 척하고, 실제로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에 치우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상태가 신앙적으로 불편하니까 이 둘을 일치시킵니다. 예수 잘 믿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 세상으로부터도 인정도 받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속이 편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산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신자들의 영혼이 분열 상태에 빠집니다. 그걸 위선이라고 합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모든 것과는 담을 쌓고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에만 묶여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출가해서 수도승이 된다면 모를까, 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세상에 사는 한 그건 불가능합니다. 또한 어느 정도로 세상의 인정에 마음을 두고, 그리고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인정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실제 삶에서 선을 긋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현실적인 고충을 알고 있는 설교자로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뭔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눈에 들어오는 것만큼 세상에 덜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제3독서인 마 26장에는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유월절 만찬은 기독교에서 행하는 성만찬의 원형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어서 포도주 잔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유월절 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사건입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 편을 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론적 죄와 악을 제거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것이 확증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 사실을 인간 구원의 초석으로 인식하고 믿었고 선포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보내준 <십자가의 발밑에서>라는 찬양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은혜의 강물 흘러넘치네 십자가 밑에서

나는 보네 부활하신 나의 주님 영광의 모습을

그는 이기셨네 죄 사했네

나는 구세주를 찬양하네

세상 유혹이 손짓해도 주만 따르리 나 주의 것

변함없이 무릎 꿇네 십자가 밑에서

은혜의 강물 흘러넘치네 십자가 밑에서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자 종려주일이며, 또한 고난주간이 시작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마지막 절정으로 나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형법에 따라서 채찍을 맞으셨고, 뺨을 맞았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죄인을 향한 형벌 중에서 가장 혹독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네가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다음과 같은 제2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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