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율법이란 무엇인가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먼저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와 진리는 대조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허락하시기 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로마서 7장 12절에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나타낸 것이므로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합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거룩하게 살아라, 선하게 살아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의례 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십계명을 복창했으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켜야 천국에 가는 줄 알고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나중에 마태복음 5장을 보면서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1-22).
예수님은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 않았을지라도, 노하기만 해도 심판을 받고 ‘라가’(머리가 빈 놈이라는 경멸과 조롱의 표현)라고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만 해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요한일서 3:15). 왜냐하면 살인의 근본은 미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타난 행동 이전의 것, 곧 근원부터 따지십니다. 사람은 행위로 구체화된 결과를 보고 살인을 규정하지만,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살인할 생각을 했다면 그것이 비록 행위로 나타나지는 않았어도 이미 살인한 것으로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7).
육체로 간음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태복음 5:39-40),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결국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마가복음 12:30-31). 나면서부터 이기적이고 아담의 성품을 이어받은 타락한 죄인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에 대한 율법을 모두 범했으며,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도 다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받으면, “그야 지키라고 주셨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주심은 사람이 하나님의 표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없으며, 죄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나무로 말하자면 나쁜 나무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나면서부터 타락된 마음을 가지고 죄를 짓는데 익숙합니다. 그런 죄인에게 ‘거룩하게 살아라, 선하게 살아라, 의롭게 살아라’고 요구하는 것은 마치 나쁜 나무인 가시나무에게 ‘포도 열매를 맺어라, 귤이나 사과를 맺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2.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케 하는 것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
성경을 통해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속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예레미야 17:9)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바울 사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므로 “(선을 행하기)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일을 행해야 할 줄 알지만, 또한 행하려고 노력도 하지만 할 힘이 없습니다.
악행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악을 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근본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 싶어 나쁜 열매를 맺습니까?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나쁜 나무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싶어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쁜 나무나 마찬가지인 이 타락된 죄인에게서 선한 열매를 기대하시겠습니까?
인간에게 율법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음을 처음부터 잘 아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리란 것을 한 사람에게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모세도 사람을 쳐 죽인 살인자입니다. 누가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렇다면, 지키지도 못하는 법을 하나님께서는 왜 주셨을까요? 율법을 주신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수십 년 교회당에 다니면서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므로 “지키라고 주셨지요. 그러니 지켜야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지킬 수 있으시던가요?”라고 물으면, “지키려고 노력은 해야지요. 그럼 마음대로 어깁니까?”라고 반문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켜지던가요? 결국 지킬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대화하는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선생님!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 살인하지 마십시오. 도덕 캠페인 나왔습니다.” 라고 했다면, 그 행인이 “아! 그것 십계명에 있는 말씀이지요.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내가 살인범처럼 생겼냐?” 며 당장 잡아먹을 듯 할 것입니다.
만일 또 “선생님, 도둑질하지 마십시오” 라고 했다면, “내가 도둑놈인 줄 알아? 도적질하는 것 봤어?” 하며 화를 낼 것입니다. 속으로는 ‘내가 도둑질한 것을 이 사람이 어떻게 알까?’하고 뜨끔해 하는 사람도 아마 있겠지요. ‘도둑질하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신, 도둑놈 같이 생겼다’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신, 도둑질하게 생겼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십시오”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속으로는 ‘내가 뒷집 여자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했을 수도 있겠지요.
또 지나가는 어떤 아가씨에게 “아가씨!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간음하지 마세요.” 이쯤 되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모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그렇게 명령해도 꼼짝 못하는 것이지, 만일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야단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너는 살인하게 생겼다’는 말이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은 ‘너, 도둑질했지? 너, 도둑놈처럼 생겼다’는 말입니다. ‘탐내지 마!’라는 말은 ‘너, 탐내고 있지?’, ‘거짓말 하지 마!’라는 말은 ‘너, 거짓말했지?’,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는 말은 ‘너, 이웃의 아내, 남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라디아서 3:19). 죄를 지어 놓고도 죄인 줄 모르기 때문에 죄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덧붙여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범법함을 인해 율법이 더해진 것이므로 율법을 배우게 되면 지은 죄를 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죄인가를 규정하는 법이 없다면, 범죄자를 벌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그 행위가 죄임을 정하는 법이 없으면,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법이 나타나면 그것이 비로소 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디모데전서 1:9-10).
선한 사람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은 죄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대로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고 죄 있는 사람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19-2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율법에 따른 죄에 대한 심판인)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로마서 5:12)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율법 아래 있으므로,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의 입을 막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큰 소리 칩니다. 사람이 법을 모르면 오히려 담대합니다. 그러나 법을 알게 되면 ‘아! 그런 법이 있었구나’하고 입을 다물게 됩니다. 모든 입을 막는다는 말은 ‘죄 없다’는 소리를 못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제멋대로 운전을 하고, “내 자동차 가지고 내 맘대로 가는데 왜 날 잡느냐?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 있든 파란 불이 켜 있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운전에는 교통법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그 법규를 알았든 알지 못했든 처벌받습니다. 정지해야 할 때는 정지해야 하고, 좌회전 금지 구역에서는 좌회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규정된 법규를 어기고서도 “난 그런 교통법규를 모르는데 왜 날 잡아가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돈끼리 교도소에서 만났습니다. 두 사돈 어른이 교도소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멋적었겠습니까? 한 사돈이 다른 사돈에게 물었습니다. “사돈께서는 어떻게 해서 여기 들어오셨소?” 그러자 질문을 받은 사돈은 “아! 저는 참 억울하게 들어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무슨 죄가 있어서 들어오셨겠지요” “아, 조그마한 죄 하나 있었지요. 어떤 집에서 새끼줄 하나 주운 것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니, 새끼줄 하나 주웠는데 여기까지 오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새끼줄 끝에 황소 한 마리가 달려 있었단 말입니다” 그는 황소 도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한다는 말이 황소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새끼줄만 주워 왔을 뿐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재수 없게 황소가 따라 왔더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돈이 반대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사돈은 어째서 들어왔습니까?” “아, 나도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 왔지요”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서 오셨겠지요” “나는 커다란 잠바 하나 입고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주섬주섬 옷 안에 주워 넣고 나오면서 ‘이것 외상이오’하는 말을 그만 잊고 나왔소” 그는 슈퍼마켓 물건 도둑질하다가 잡혀 온 사람입니다. 법이 그 사람 말대로 ‘그렇다’고 인정하겠습니까? ‘외상이라는 말을 깜빡 잊었다’고 재판기록에 죄목을 적겠습니까? 한 사람은 소도둑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슈퍼마켓 물건 도둑질한 사람입니다. 법대로 판결 내리면 ‘죄가 없다’고 우겨대지 못합니다. 입을 다물고 판결 내리는 대로 벌받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는 소리를 못 하도록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20). 병원에 가면 약부터 주는 것이 아니라 진찰부터 합니다. 진단을 정확하게 내리고 나서 투약을 하든지, 수술을 받게 하든지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고쳐 주시기 전에 ‘왜 구원을 받아야 되는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진찰해 주시며, 그 역할을 맡은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배우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알게 되고 구원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라는 의사의 물음에, 병원에 간 환자가 기껏 대답한다는 것이 “내가 아프긴 어디가 아파요. 멀쩡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의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뭐하러 왔습니까? 가시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뭔가 좀 이상한데 어디가 잘못됐는지 진찰 좀 해 주십시오. 종합검진이라도 받을까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처럼 병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진찰을 받고 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지요. 의사가 “아! 진찰을 빨리 받은 것이 참 다행입니다. 암 초기입니다. 빨리 수술받으면 됩니다”라고 했다면, “아, 그렇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언제 수술받으면 될까요?”하고 대책을 강구할 것입니다. 자기가 병이 있는 줄 알면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어느 부위를 잘라 내자고 하면 그것에 동의하고 수술을 받기 위해 벌거벗고 수술대 위에 눕습니다. 그렇게 해야 낫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진단을 내렸는데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왜 병이 있어요? 나는 멀쩡합니다”라고 고집하면, 의사는 그 사람을 고쳐 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진단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서 들어왔습니다. 이를 본 엄마가 “얘야, 얼굴에 더러운 것 묻었으니까 얼른 가서 씻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 왜 그래요? 엄마는 괜히 나만 갖고 귀찮게 해. 안 씻어요”라고 대꾸한다면, 그 아이가 얼굴을 씻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얘, 가서 얼른 거울을 봐!”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고서야 “아! 더럽구나”하면서 스스로 씻습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 인간이 어떠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의 기준에 우리 자신을 비춰봄으로써, 우리 각자는 얼마나 거짓되고 악하며 비참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율법 앞에서 더러운 죄를 깨닫고 나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 죄를 씻김 받습니다. 거울은 더러운 것을 깨닫게 해 줄 뿐이지 더러운 것을 씻어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 역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줄 따름이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선하게 해 주지도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오직 죄와 그에 따른 심판을 깨닫게 해 줍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드러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가서 죄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3:24).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고 하였는데, 몽학선생은 어린애들의 깨우침을 맡은 초보적인 선생을 뜻합니다. 정식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그 전단계의 가르침을 맡았다가 정식 선생에게 인계해 주는 일이 몽학선생의 임무입니다. 그와 같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서, 그 죄를 씻기실 수 있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서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예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율법 앞에서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가서 그 죄를 씻음 받는다는 뜻입니다. 죄와 심판을 깨달음으로써 예수님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도록 해 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인 성경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없이, 사람들은 오로지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으로 알고 평생 그것들을 지키려고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3.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결국 저주를 받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표준인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평생 죄만 짓는 사람도 많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도 부지기수인데, 이들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니 나쁜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해야 이해하기가 쉬운데, 오히려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이 정한 바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해야 맞을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면 복을 받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만 있다면 복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성을 갖고 태어나 죄악된 세상에서 죄를 범하고 사는 인간이 율법이 규정하는 의와 선을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그대로 항상 행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율법을 범한 것이 죄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23)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것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자에게 주어지는 저주입니다.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가려고 하는 사람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제대로 다 지키면 저주를 받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지킬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몇 가지는 지키고 몇 가지는 못 지키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키려면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야고보서 2:10) 된다는 말씀도 같은 원칙을 설명합니다. 가령 열 개의 고리로 이어져 천국에 걸려 있는 줄을 어떤 사람이 붙잡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줄의 고리가 끊어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합시다. 그 열 개의 고리가 십계명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고리가 몇 개 끊어지면 떨어지겠습니까? 하나 끊어져도 떨어지고, 열 개 다 끊어져도 물론 떨어집니다. 주전자나 솥 밑의 구멍이 열 개 뚫어지나 하나 뚫어지나 사용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 중에 몇 개 범하면 지옥 갑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했는데, 그렇다면 큰 죄값도 사망이고, 작은 죄값 역시 사망입니다. 즉 죽어 심판 받고 불못에 던지우는 것입니다. 꼭 행위로 범죄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도 지옥에 들어갑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입으로 욕설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실제 행동으로도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으로, 말과 행동으로 율법을 이미 철저히 범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은 결국 저주 아래 있습니다.
수영을 잘 한다고 해서 부산항에서 헤엄쳐서 미국까지 건너갈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미국 가는데 비자 받고 비행기표 사고, 그렇게 복잡하게 절차 밟고 돈 들여 갈 것 뭐 있느냐? 나는 수영 잘 하니까 헤엄쳐서 가련다”며 한 100명쯤의 사람이 헤엄쳐서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까지 헤엄쳐서 건너간다면 경비절약이 문제가 아니라 영웅이 될 것이지만, 건너가다 실패하면 죽습니다. 100명 가운데 몇 명쯤이나 건너가고, 몇 명쯤 못 건너갈 것 같습니까? 다 죽습니다. 한 10,000명쯤 출발한다면 몇 명 정도 건너갈 것 같습니까? 그래도 역시 다 죽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출발하면 어떨까요? 물론 다 죽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비겁함도, 어리석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림도 없는 일, 하나마나 뻔한 일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구원의 조건을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선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수영으로 미국까지 건너가려는 사람보다 훨씬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는 말씀과 같이, 그들은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고서도 끝내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까지 쌓았다고 생각되는 공로와 선행이 어떠하든, 또한 그것들이 천국 가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음을 발견함으로 오는 허무함이 어떠하든, 떨쳐 버릴 것은 떨쳐야 합니다. 자기 공로와 생각이 다 깨져야 한다고 해서 억울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밑천을 많이 들인 사업이라도 안 될 것이 뻔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투자한 밑천이 아까워 끝까지 끌고 가다가 결국 다 털어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태인 상술비법’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장사를 시작하여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다시 한 번 해 보고, 그리고 또 한 번 더 시도해 본답니다. 그렇게 세 번 정도 해 봐서 안 될 것 같으면, 얼마의 돈이 투자되었든지 간에 그 일을 치워 버리고 “아이구! 속 시원하다”고 한답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는 한 번 투자하고, 두 번 투자하고, 세 번 투자하고서도 안 되면 네 번째는 가진 것을 아예 싹 쓸어 넣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노름판에서도 처음에는 작은 단위로 하다가 조금씩 돈을 잃게 되면 막판에 가서는 그 손실을 한꺼번에 만회하려고 나머지를 다 거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들어간 밑천 아깝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밀가루 장사를 하는데, 밀가루를 잔뜩 사 놓았습니다. 그런데 밀가루 값이 그만 폭락을 해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까짓 것 내가 망해서 패가망신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어 버려야지”하고, 자살하려고 노끈을 하나 샀답니다. 대들보에다가 노끈을 매놓고 방 한가운데서 목 매어 자살하려고 하는데, 라디오에서 밀가루 값이 갑자기 폭등했다는 뉴스가 나와 자살을 하지 않고 큰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살하려고 산 끈이 아까워 써먹기 위해 그 끈을 사용하고 자살했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어이없는 짓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쓸데없게 된 노끈은 미련 없이 내버릴 것입니다. 아무리 없는 돈에 어렵게 구입했을지라도, 필요없게 된 이상 버려야지요.
이제까지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고자 했을지라도, 그것이 소용없는 일인 줄 알았다면 즉시 포기해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손에 붙잡고 있는 쓸데없는 것을 놓아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놓는다고 천국 가는 줄을 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놓음으로써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의 줄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말씀드리는데도, 수십 년 간 교회 다니며 쌓은 자기의 공로에 미련이 남아서 “그래도 율법을 지켜야죠! 지키는 데까지는 지켜 보아야죠!”하고 고집피우는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산에서 미국까지 헤엄쳐서 갈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도 “내가 이미 많이 왔는데 가는 데까지는 가 봐야지요”라며 계속 헤엄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나갔다가는 돌아오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4. 율법과 은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율법을 지켜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실 이유도 없고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라디아서 3:11-12).
은혜는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고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명합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율법과 은혜를 분별하지 못하고 섞어 놓아 신앙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믿는다’고 하고, 그것도 ‘잘 믿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왜 율법을 지키려 하겠으며,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이유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큰 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이사야 64:6) 우리의 “행위로는 자기(의 수치)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사야 59: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의롭게 되고자 기울이는 노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치 더러운 사람이 더러운 옷을 걸친 것과 같아서 우리의 의는 우리의 죄악의 수치를 결코 가릴 수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문둥이가 걸치고 있는 온갖 병균으로 더럽혀진 다 떨어진 넝마와 같습니다. 그런 것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봐! 하나님이니 영혼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그런 말 듣지 마라. 그건 할 일 없는 인간들이 지어 낸 소리야.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기는 누가 창조했다고 그래. 옛날부터 있었던 거야. 해도 달도 별도 저절로 생겼고, 지구도 다 저절로 생겨서 돌고 있는 거야. 그리고, 아메바가 진화해서 곤충도 되고, 또 더 진화해서 물고기도 되고 날짐승도 된 거야. 그렇게 짐승도 되고 원숭이도 되었고, 원숭이의 꼬리가 슬슬 들어가서 사람도 되고 한 거야.”
또 “사람이 별것이냐? 다 진화해서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사람을 고등동물이라고 하잖아. 인간은 짐승이 조금 발전한 것뿐이야. 영혼은 무슨! 그런 것 있으면 내놔 봐라. 그러니까 자연의 순리대로 짐승들처럼 약육강식으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야. 죽으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야”라고 거짓을 집어넣습니다.
그런 마귀 속임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른 채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이 없으니 육신이 전부인 줄 알고 육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먹고 마시고 합니다. 그리하여 “마시고 또 마시고 이 밤이 지나도록 춤을 춥시다”라며 한없이 마시고, 토하고 또 마시고 인사불성이 됩니다. 하나님이니, 영혼이니 그런 것 생각할 시간을 마귀는 주지 않습니다. 지옥 갈 때까지 막 몰아 붙여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뭐라고 할까요? “너, 예수 믿을래? 그래, 잘 믿고 천당 가라” 그럴 줄 아십니까?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믿지 말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왕이면 열심히 믿어라”고 합니다. 이는 마귀에게는 종교라는 제 2의 무기가 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고 믿을 바에는 열심히 믿어라. 새벽기도도 가고 주일도 지키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돈도 바치고 잘 해라! 교회당 얼마든지 많이 지어라. 목사도 많이 만들고, 집사도 얼마든지 많이 세워라. 성가대도 천사처럼 꾸며라. 경건하게 예배 의식을 행해라”고 부추깁니다. 마귀는 그런 것 전혀 겁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다만 “구원만 받지 마! 거듭나는 것 신경쓰지 마라! 그런 것은 지금 몰라도 괜찮아. 하다 보면, 세월 지나면 알게 돼. 믿는 것이 따로 있나? 교회 나가면 믿는 것이고, 열심히 하면 그것이 잘 믿는 것이야. 너는 큰 상 받을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 게다가 “아무개 집사님은 하나님께 큰 상 받을 것입니다”라고 목사가 부추기기라도 하면, 속으로는 ‘그렇죠. 그렇죠. 나는 큰 상 받을 것입니다’하면서도 겉으로는 “에이 뭘요.”하며 점잔을 뺍니다.
‘비행기 태워’ 어디론가 모르게 끌고 가는데, 그 비행기 운전사가 바로 마귀인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는 목적지는 지옥, 그 비행기 타면 지옥 직행입니다. 목사님이 칭찬해 준다고 하나님께서도 칭찬해 주십니까? 세상 일에는 그렇게도 똑똑한 척 하면서, 사람이 제일 중요한 영혼 문제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물건 하나 사면서도 속지 않으려고 이 집 가서 물어 보고 저 집 가서 물어 봅니다. 그렇게 해서 제일 싼 집에 가서 깎고 또 깎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남보다 비싸게 샀다 싶으면 ‘바가지 썼다’고 기분 나빠합니다. 세상 일에는 그렇게 속지 않으려고 똑똑한 척 하면서, 예수 믿는 것에는 마귀에게 폭 속습니다. 다른 것은 다 속아도, 그래서 물질적인 손해는 좀 보아도 그만이지만, 믿는 데 속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목사님 말이나 부흥강사 설교나 신학박사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성경 말씀과 일치할 때 믿으십시오.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세상 일이 아닌데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인 성경 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남이 믿는다고 무조건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믿어야 합니다.
“구원받아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고 하셨는데도, “거듭나야 천국 간다”고 하면 아주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구원받아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땅히 “아! 그럼요. 거듭나야죠. 어떻게 해야 거듭납니까? 구원받아야 될 텐데, 저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말해야 할 텐데, 오히려 “너만 받았어? 제깟 게 무슨 구원받았다고, 교만하게 말이야. 그리고 남이야 구원받았든지 말았든지 무슨 상관이야. 믿으면 받은 것이고, 받았으니까 믿고, 믿으니까 다니지” 하며 몹시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싫어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는 알지 못한 채 자기 의를 쌓으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열심하는 것, 교회당 다니고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열심, 그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자기 열심,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나님 편에서 다 해 놓으셨습니다. 그 해 놓으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는 찬송처럼, 하나님 앞에 설 때 나의 의가 아닌 구주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의를 세우려고 끝까지 열심히 하다 보니 결국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게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하다가 지옥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께 열심도 내고 지옥에도 가고,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의나 열심,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나 우리의 공로로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것입니다. 울어도 못 하고, 힘써도 못 하고 참아도 못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깊은 물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누가 건져주지 않는 한 죽을 가능성은 100%입니다. 꼼짝없이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지옥 갈 운명에서 조건 없이 건져 주시면 사는 것이고, 건져 주지 않으시면 우리에게는 단지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의 모습인지를 깨닫고,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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