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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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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4.3.23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복음(4) 복음은 신령한 복입니다.
엡1:3-12
신문에서 보니까 “낸시랭의 신학 펀치”가 방영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독교 방송에서 방영되는 것으로 난해한 신학적 주제를 예능적 요소를 가미하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튜브를 통해 무슨 내용을 어떻게 풀어주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주제는 "성경에는 왜 불일치하는 게 나오나요?" "세종대왕은 지옥에 가나요?" “창세기 이야기는 왜 다른 신화와 비슷한가요” “요나서는 픽션인가요 다큐멘터리인가요” “지옥의 영원한 형벌, 너무 심하지 않나요?”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 들어 보지는 못해서 전체에 대하여 말씀드릴 수 없지만 “요나서가 픽션인가 다큐멘터리인가요?” “지옥의 영원한 형벌, 너무 심하지 않나요?”를 들어 보았습니다. 두 분의 교수님이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견해가 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나서를 역사적, 사실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문학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요나서의 물고기는 남성과 여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자 물고기와 남자 물고기라는 말을 동시에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적 기록이기보다는 상징적, 문학적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실제 물고기에 들어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은 생명을 살리신다는데 의미를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심 주제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고기 속에 들어가면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실제 요나가 물고기에 들어갔겠냐며 문학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성경 전체의 맥락으로 볼 때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나를 실존적, 역사적 인물로 말씀해주시면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0)”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성경을 신화화, 문학화 하는 것은 궁색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물고기 배에서 사람을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살리지 못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하지요.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려고 하다 보니까 지옥의 실존성을 부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지옥과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것이 천국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것이 지옥이라는 신학적 해석으로 지옥과 천국을 추상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옥을 영원한 형벌이 있는 실존적 세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다 보면 지옥을 만든 공의의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 추방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우리가 분명하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천국이 실존적 세계인 것처럼 지옥도 실존적 세계입니다. 물론 성경을 현대인의 이성에 맞게 해석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신화적 이야기나 문학적 작품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물고기 속에서 살릴 수 없겠습니까? 영원한 정의를 말씀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어 놓으면 모순이겠습니까?
오늘날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영해하여 자신이 감람나무이며 이긴 자, 보혜사, 재림 주라고 미친 소리하는 이단들도 문제이지만 너무나 이성만능론으로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여 성경을 마치 신화책이나 소설책으로 둔갑시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허구적인 신화적 사건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가족도 예수님을 미쳤다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후 예수님의 육신적인 동생인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1: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유다도 유다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유1:1)”라고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누가 지어낸 신화적 사건을 믿으려고 화형을 당하고, 누가 꾸며낸 소설을 믿기 위해 사자 굴에 들어가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진실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성경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18-19)”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7)”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크게 4 가지 다른 성경관이 있습니다.
첫째는 새로운 기독교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입니다. 이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속죄 사역, 부활, 기적,지옥 등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과학 이전 사람들의 신앙고백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언어는 인식 언어가 아니라 고백언어라는 것입니다. 신화, 꾸며낸 영웅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가지고 복음보다는 인간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신자화, 인간화, 사회화에 열정을 가집니다. 이런 성경관은 종교 다원주의로 나타나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재준, 송창근, 변선환, 홍정수, 김경재 교수 등이 대표적인 자유주의 학자입니다.
둘째는 급진주의적인 사람들로 해방신학, 민중신학자들의 성경관입니다. 이들은 조금 더 나아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경전들과 같은 것으로 성경은 다만 우리에게 역사적인 참고서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민중신학을 주장하던 서남동이나 안병무 교수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셋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입니다. 바르트나 부루너 같은 사람에 의해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성과 과학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와 신앙을 중요시하는 정통주의를 절충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때에 해가 늦도록 지지 않았다는 사건을 "과학적인 오류"라고 단정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나, "5병 2어 사건", "예수께서 바다를 걸으신 사건" 등은 모두 신화이며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과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자는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적 모순과 오류가 있지만 개인의 체험을 통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주관성을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지옥의 실제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려는 핵심은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개혁신학자들의 성경관입니다. 조금 의미가 차이가 있지만 복음주의, 보수주의, 정통주의라고도 합니다.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믿고 그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모순같이, 오류같이 보이는 것이 있지만 그것을 오류라고 보지 않고 난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과학이나 역사 교과서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과학이나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요 20:31 등).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아파트 짓는 것 개미에게는 이해가 안 되지만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경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0-21)” 성경은 신화도 아니고 사람이 지어낸 문학책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라고 말씀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이나 급진주의자들은 말할 것 없고 신정통주의 자들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이나 영감성을 부정합니다. 과학과 이성의 비판으로부터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애를 쓰는 신정통주의자들도 성경을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경험한 인간들의 증언으로 보기 때문에 성육신을 주장하지만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지만 창세기 1~11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상징적인 이야기로 해석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구속사는 인정하지만 홍해의 기적은 부인하고, 여리고성의 함락은 실제 사건이 아닌 믿음의 승리로 설명하고, 요나서, 룻기, 에스더는 일종의 종교소설로 간주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면 복음도 인간이 지어낸 신화적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 다니면서도 복음에만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는 복음이 어느 누가 지어낸 신화적인 이야기입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은 노년이 되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3:1; 4:1; 6:20) 그 감옥에서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면서 문안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찬양을 외치는 것입니다. 불평하며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감옥에 있는 바울을 그렇게 찬양토록 만들었겠습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신령한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복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 이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갖은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자유가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에서도 찬양하며 행복감과 만족을 누리게 만들었던 그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복음입니다. 누가 꾸며낸 이야기, 신화적 이야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전하겠습니까?
이 신령한 복, 복음은 무엇이겠습니까?
1. 신령한 복, 복음은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는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하나님의 구속 계획. 4-6)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삼기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뀐 것입니다. 단회적으로 한 번에 하신 것입니다.
1)언제- “창세 전에”
창세전입니다(4). 사람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세상이 만들어 지기 전에 우리를 택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택했습니다.
2)어떻게(방법 4)- "그리스도 안에서"
3)왜(이유 4)-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입니다. 더럽고 추하고 마땅히 책망 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탐욕, 모순, 부조리, 이중인격자인 사람, 공허하고 만족함 없는 사람, 시기하고 분노, 질투하기 좋아하고 쉽게 노하고 쉽게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기 위하여 택하였습니다.
4)근거(5,9)- "하나님의 깊으신 뜻"
우리의 재물, 능력, 외모, 재능, 신앙생활, 성품, 경력 등을 보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얼마나 조건적입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선택해 주신 것입니다. 조건 때문에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5)내용(5)-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택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6)목적(6)-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조건 없이 예정에 따라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지옥의 형벌로부터 면죄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1258장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있어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야곱 같은 사기꾼을 선택하여 축복의 아들로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우상 장사의 아들을 선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살인자를 선택하여 민족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다윗 같은 목동을 선택하여 위대한 왕을 만들었습니다.
"시22: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조성한 나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대통령이 자기의 이름만 알아주어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인기 탤런트나 유명 인사가 자신을 알아준다면 얼마나 행복감에 도취되겠습니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하나님이 아들로 선택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2. 신령한 복, 복음은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성자 예수님의 구속 성취, 7-12)
과거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함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고 고아처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7).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경제문제, 환경 문제, 질병 문제, 인권 문제이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비극이 다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생명의 단절, 교제의 단절이 된 것입니다. 생명의 단절로 영적 죽음, 육적 죽음, 영원적 죽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교제의 단절로 영적 소경, 죄의 지배, 친죄 성향의 인간이 된 것입니다. 죄를 사함 받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진정한 복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 4:7-8)"
무엇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1) 방법(7)- "그의 피로 말미암아"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18-19)"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질의 변화는 수양으로, 훈련으로, 배움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2) 동기(7)-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룬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준 것이니라." "새벽기도 잘 나왔다고, 헌금 많이 했다고, 구제 많이 했다고, 예배 잘 참석했다고, 교사, 성가대, 성경 많이 봤다고, 전도 많이 했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값없이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그 은혜에 감격하여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이 얼마나 복스러운 것입니까?
3) 목적(10,11)-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그 안에서 기업"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로는 우주 안에 불일치가 있지만 때가 차면 이 불일치는 종식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 통일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업은 천국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확실하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까? 육신이 이 땅에 살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육신을 입은 우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자유함을 얻었다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 심령은 하늘나라를 향하지만 우리의 발과 손은 땅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순과 갈등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나라는 동서로 분리되어 통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상은 분리되어 통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과 고통이 있습니다. 지식이 있는 자 지식이 없는 자 갈등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성과 신앙의 갈등이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동시에 존재하여 갈등과 고통이 있습니다. 양심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의 완전한 더 이상 불확실과 불일치 갈등이 존재할 수 없는 통일의 때가 다가오고야 맙니다.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이나 직접 볼 날이 올 것입니다.
(1)이런 우주적인 계획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예정하신 것입니다.(9)"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한 것이니"
(2)누구의 뜻으로 하였습니까?(9) "하나님의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3)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9) " 그 뜻을 우리에게 알리셨음으로(8)" "하나님의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었음으로"(하루살이, 메뚜기, 개구리 예화)
4) 왜(12)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여" 우리의 의를 자랑 않고, 우리의 가짐을 자랑 않고, 우리의 신앙을 자랑 않고, 우리의 직분을 뽐내지 않고, 우리의 지식을 선전 않고 오직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이면 유업을 줍니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7)"
아들이면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
언젠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은 다 씻어 줄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3. 신령한 복, 복음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속을 적용시켜 주신 것입니다(성령 하나님의 구속 적용,13-14)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기업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습니까? 그 객관적 사실이 어떻게 내 일이 되고 내 사건이 되었습니까?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1) 복음을 듣고(13)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객관적인 말씀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2)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13)
듣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인쳐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이 복을 우리에게(11) 너희에게(13)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 영원한 천국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6, 12, 14) 영광의 찬송,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찬양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선택해 주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 있는 바울을 통하여 찬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에 처했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에 처했다고 원망하며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에 처했다고 힘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에 처했다고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에 처하면 처할수록 더욱 찬양하여야 합니다.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찬양받으시기 위해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찬양합니다(행 16:25).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오....울고 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잊었는가 어둠 속의 찬송은 기적을 부른다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오 고통의 문을 찬송 찬송으로 찬송 찬송으로"(복음 찬송1129) 그렇습니다. 고난이 있을지라도 찬송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적이 읽어납니다. 옥문이 열리고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하는 바울 그 고난으로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① 행 23 : 12-35에서는 그를 죽이려고 맹세한 40명의 손에서 건져 주었고, ② 행 25 : 1-5에서는 그를 죽이려고 길에 매복한 자들의 손에서도, ③ 행 27 ; 30-32에서는 난파한 배에서도 ④ 행 27 : 41-44에서는 바울을 죽이려고 하던 군사들의 손에서도, ⑤행 28 : 1-6에서는 독사의 독에서도 그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찬양하면 우리의 마음이 바뀝니다. 찬양하면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찬양하면 우리의 표정이 바뀝니다. 찬양하면 우리의 언어가 바뀝니다. 찬양하면 우리의 앞길이 바뀝니다. 언젠가 우리는 고난 많은 이 세상 다 끝내고 모든 고통을 잊고 하나님 앞에 영광의 찬양을 드릴 때가 옵니다. 계시록에 보십시오. 천군 천사들과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계시록 4장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여야 합니다. "계 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감옥이 있습니까? 질병의 감옥, 경제의 감옥, 습관의 감옥, 걱정의 감옥, 중독의 감옥이 있습니까? 걱정하며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울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신령한 복, 복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건강하고, 장수하고, 자식이 잘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명예를 얻고, 존경받는 것만이 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은 신령한 복이고 그 신령한 복은 바로 복음입니다. 신령한 복, 복음을 받은 우리는 그 신령한 복, 복음으로 말미암아 매일 매일 힘 있게 찬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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