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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55: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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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
본문: 이사야 55장 8절- 9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히브리어 hokma(호크마)는 지혜라는 뜻과 함께 유모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가장 독특한 차이는 <웃음>입니다. 개도 컴퓨터도 웃지 않습니다.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유모어이고, 유모어는 인스피레이션에서 나옵니다. 인스피레이션은 자기 입장만 외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갑작스럽게 뛰쳐나와 자기가 가는 그 길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때 섬광 같이 떠오르고 비쳐오는 정신적 광채입니다. 그 속에서 여유와 자유 그리고 창조력이 나옵니다.
여기 그런 유모어 하나 읽으며 한번 웃어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들판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맑고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온 산과 들은 파란 초록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종달새, 휘파람새, 갖가지 새들은 목청껏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들판 이곳 저곳에는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밝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한 사람이 그 친구에게 말하였습니다. “아!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시도다. 저기 저 새나 소를 좀보게. 저런 것들을 보아도 우리 하나님의 그 오묘한 솜씨를 잘 알 수 있지 않는가. 여보게 한번 생각해보게. 저 소도 처음에는 작은 송아지였을건데 저렇게 커다란 소가 되지 않았나, 또 저 새를 보게. 저것도 처음에는 알에서 나온 것 아닌가? 참으로 생각 할수록 심비하고 오묘하네. 여보게 안그래?”
“정말 그렇구 말구.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시네. 그런데 말이야, 나는 한 가지 모를 일이 있어. 뭔고 하니, 우선 저 새들을 좀 보게. 저 새들은 몸집이 작으니 뭘 별로 많이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저 소 좀 보게. 소는 몸집이 크니 엄청나게 많이 먹어야 살 수 있지 않나? 안그런가?”
“그야 그렇지 그런데 뭘 모르겠다는 건가?”
“응, 다름이 아니라. 새는 작으니까 조금밖에 먹지 않아도 살고, 소는 몸집이 크니까 엄청 많아야 한다는 말이야. 그런데 새에게는 날개가 있고 정작 날개가 필요한 소에게는 날개가 없다는 점이 나는 이상하단 말이야. 잘 생각해 보게. 새는 조금밖에 먹지 않으니까 주변에 떨어진 먹이로도 충분하니 날개가 그다지 필요 없네. 그러나 소는 많이 먹어야 하니까 이곳 저곳 먹이를 찾아 다닐 수 있도록 날개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다지 필요치 않은 새에게는 날개를 주시고 꼭 필요한 소에게는 날개를 달아주시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게야!”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구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새 한 마리가 스쳐 날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이마에 새 똥을 떨어뜨렸습니다.
“아하! 이제야 알겠다! 역시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본문 이사야 55장 8절- 9절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말씀에 하나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하늘만큼 땅만큼 차이가 난다하셨고 요한복음 3장31~34절에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 없이 주심이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결국 땅에서 났다는 말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사람의 생각은 구원을 받을 수 없겠지요?
요한일서 4장5절에는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는데 결국 세상 말은 구원과 관계없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우상숭배가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나 하나님은 가장 무섭고 큰 죄로 보십니다. 사람들은 수량의 많고 적음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과부의 엽전 한 푼을 부자의 두 렙돈 보다 크게 보십니다.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더 중히 여기십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합니다. 즉 신분(직책), 키(몸매), 얼굴(미모), 인종(흑인종, 백인종, 황인종), 빈부 등을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릇 것, 가치가 있는 것 없는 것을 외모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시고 믿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을 칭찬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시고, 회개하는 세리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다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 6)
사람들은 돈과 물질의 풍요를 기뻐하나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중히 보시지 않으십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1서2:16)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과 현세적인 것을 중시하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영원한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의(義)와 내 의(義)와는 다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옳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전혀 모르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기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호4: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성경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깨달아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 2)
요한복음 6장 38- 40절에 내 뜻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인간이므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보호 밖에 있으며 나의 뜻대로 하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납니다. 나의 뜻은 어떤 방향으로 갑니까? 지내고 보면 항상 후회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에 열정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기쁨으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소원이 있다면 그 기쁨과 즐거움이 계속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신앙은 시들해집니다. 결국, 습관과 타성에 의하여 교회를 나갑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세상과 벗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은 죄는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이웃나라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뻔뻔하게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늘 말하는 것이지만 죄는 우리를 강퍅하게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뉘우치지 않고, 심판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변명을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즐거운 시절로 변명합니다. 신앙에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봉사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렘3:4) 그러나 하나님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은 우리입니다. 이제는 더는 하나님을 청년 시절의 보호자로 보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 번역판을 보면 친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변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반역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의 자비를 핑계 삼습니다. 언제까지 나에게 분노하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뻔뻔하게 “영원토록 노를 거두시지 않으시렵니까?”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입니다. 죄인들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보지 않을 때 임합니다. 뉘우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자비를 거두시고 분노하십니다. 잘못된 긍정이 있습니다. 상황이 자신 때문에 나빠져 가는데, 낙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조건 긍정주의가 좋지 않은 이유는 너무 가볍게 사건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요즘 회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회복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문제가 심각해진 것을 깨닫지 못할 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9:31)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자신의 주관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꿉니다. 설교자들 가운데도 이렇게 멋대로 자신의 신념을 하나님의 섭리로 바꾸어놓습니다. 이런 위험한 설교자들은 결국 쓸데없는 낙관을 성도에게 심어줍니다. 타락한 길을 걷는 자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이나 회개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회개는 연례행사가 아닙니다. 심심할 때마다 설교자가 자신의 영적 죽음을 성도가 회개하지 탓이라고 핑계를 될 때 사용되는 단어여서 안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노를 거두시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달아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핑계 삼아 더 악을 행하며, 욕심을 채웁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란 하나의 도구입니다. 자신이 악을 행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바뀝니다. 이들은 신앙이 있는 척 꾸미나,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교회에 가라지가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과거에 황금 송아지가 있다는 말은 모든 헛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신앙상태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신앙이 좋았다는 말은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걸림돌이 됩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겁니다. 당신이 정의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까? 교회가 심각한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게 아니라 인간의 고집을 내세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교묘히 포장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냅니다. 자신이 범하는 악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의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유대 백성은 자신들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 때문에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나 분노하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제는 분노를 거두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악을 행하고, 욕심을 채웠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거짓으로 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고,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유대의 멸망은 스스로 자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고쳐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 16- 18)
어떤 인생이 행복한 인생일까? 내적으로 기쁨이 충만하고,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고,모든 일이 감사가 된다면 이보다 행복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삶이 바로 항상 기뻐할 수 있고,쉬지 않고 기도하며,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삶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내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믿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들은 과정입니다. 영광의 산에 오르기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기쁨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만들어져가기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손길이 여전히 내 위에 있음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 그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창45:5)"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 그의 인생이 빚어져감을 믿고 그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겨울을 잘 지낸 나무가 다음해에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까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내 욕심이 실패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인하여 기뻐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그렇게 됨을 감사합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 8)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을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내 뜻을 세우기에 앞서 하나님께 여쭈어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 깨우쳐주실 때까지 다른 데 마음 빼앗기거나 졸지 않고 깨어 초초해하거나 서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굽이굽이에서 하나님이 그 마음에 주시는 바를 감사와 감격하는 마음으로 받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고이 잘 간직하며 정성 다해 받들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처럼 듣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처럼 행동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져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괴로움 겪는 것을 피하려하지 않고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 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8)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16:7).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관심이 물질과 출세를 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며 신앙생활의 목표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다윗처럼 이와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다윗의 이 마음을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소망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좋은 일'과 '하나님 뜻'은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믿고 확신합니다만 때로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좋은 일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일이 곧 하나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이 아니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귀찮게 느껴지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막으셨습니다. 그 대신 다윗을 위해 다윗과 그 가문을 지키시겠다는 대단한 일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다윗이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내가 좋은 일보다 하나님 뜻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9: 31)
아브라함 링컨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서 양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의 대표자로 링컨에게 보내어진 사람이 링컨에게 격려의 말을 했습니다. "링컨씨, 우리는 주님이 우리 편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네, 나의 진실된 관심사는 주님이 어느 편에 계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주님의 편에 서 있는 가입니다." 아름다운 신앙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결정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구별해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의의 하나님,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게 하소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아니하고 다른 방법과 해결책을 먼저 구한 것을 고백합니다. 생명 없는 종교 생활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소서. 내가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에 기도함으로 지혜를 얻게 하시고, 어떠한 말씀에도 겸손히 순종하여 행하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며 내 생각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그 크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주님의 뜻대로 행하여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귀한 역사가 있어지게 하옵소서. 너무나 이기적인 우리 삶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통해 이 땅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가 자신의 고집과 독선을 버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못했던 점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 의를 내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시고, 내 판단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게 하시고, 작은 장점이나 성공으로 교만하지 않게 하소서. 순종으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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