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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영성
영국교회가 17세기 말 합리주의에 의하여 영적 고갈에 당면하고 영국사회가 도덕적 퇴폐에 빠졌을 때 존 웨슬리는 영국사회를 구하고 생명력을 잃고 형식주의에 빠진 그들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일깨웠다. 그러므로써 그는 영국교회에 새로운 갱신의 운동을 일으켰다.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은 단순히 신앙운동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무너진 도덕과 윤리를 갱신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영적 각성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사회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명예혁명을 가져 올 수 있었다.
존 웨슬리는 영국국교의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의 열다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증조부는 국교에 반대하는 죄목으로 생업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부친 사무엘은 기독교 보수주의를 이어받았다. 존 웨슬리는 이러한 기독교 보수주의의 가문에서 성장했다. 그는 아버지 사무엘로부터 성자의 품성과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어머니 수산나는 "단순히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주간 중에도 틈틈히 경건과 기도의 행위로써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매일 얼마만큼씩 시간을 내어 가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를 하였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처치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726년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대학의 연구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부친의 교회에서 2년간 부목사로 재직했다. 옥스퍼드 시절 그는 진지하고, 경건하고 학구적인 동료들을 모아 클럽을 만들어 신앙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모임은 처음에는 "신성 크럽이라고 일컬어지다가 나중에는 "감리주의자"라고 불리워졌다. 이 들 중에는 그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 친구인 조지 휘트필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1735년 32세의 나이로 존 웨슬리는 복음선교회의 후원으로 동생 찰스와 함께 미국 조지아주의 선교사로 가게된다. 거기서 노예무역과 술을 금지하는 그의 설교와 경험부족은 식민주의자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그는 1737년에 귀국하게 된다. 그는 런던으로 되돌아 와 모리비안 교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생동적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하든중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후 그는 남은 생애를 복음전도사역을 위하여 받치게 된다. 웨슬리는 런던과 브리스톨 지역에 여러 신도회를 조직했으며 그것이 성공함으로써 그는 그들을 연합시키는 "연합신도회"를 조직한다. 1742년 이후 웨슬리는 그의 활동영역을 넓혀 영국 전체를 그의 전도영역으로 삼았다.
1744년 평신도 설교자들의 회의를 열었고 이것은 매년 열려 결국 이것을 위한 법적 제도가 1748년 마련되어 감리교의 기초가 되었다. 그후 감리교는 점차적으로 독립된 조직으로 성장해 나갔고, 미국에도 1768년 감리교회가 뉴욕에서 세워졌다. 따라서 웨슬리가 별세할 당시 영국에는 294명의 설교자와 71,668명의 감리교 신자들이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이 있게되었다. 웨슬리의 결혼생활은 불행했으나 그는 낙천적으로 살았다.
웨슬리의 영성
첫째, 회심의 영성이었다. 웨슬리는 회심의 경험을 갖기까지 구원을 받을 믿음이 부족한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이 사실을 깨닫게 한 사람은 바로 독일 모리비안 교도인 베터 뵐러였다.
둘째, 엄격한 칼빈주의 예정론을 반대하고 개인의 회심적 결단을 중요시했다. 그는 형이상학적 신학을 반대하고 모든 교파에 속한 기독교인들과 우애관계를 형성하고 대중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였다.
셋째, 말씀과 능력전도의 영성을 소유했다. 올리버 크롬웰처럼 웨슬리는 본질적으로 행동의 인간이었다.
넷째, 초자연적인 것을 인정하는 영성을 소유했다. 웨슬리는 악영을 쫓아내는 영력을 소유했다.
다섯째, 합리성과 도덕성과 사회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여섯째, 신자의 완전 즉 성화를 추구했다. 여기서 웨슬리는 완전이란 윤리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일곱째, 신앙적인 열정과는 달리 지성적이며 유모어와 원만한 인간미를 가지고 있으며 생활은 절도가 있었다.
여덟째, 공동체와 조직의 영성이었다.
웨슬리는 감리교운동을 성공회 내의 갱신운동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감리교 운동은 서서히 일관된 발전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성공회로부터 분리될 정도로 큰 모임이 되었다. 그리고 웨슬리의 감리교인들은 성공회에서 서서히 분립하다가 존 웨슬리가 세상을 떠난후 1791년에 결국 분립하여 한 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런던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의 전도자로 외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미친 영향은 비단 감리교의 창설만이 아니다. 18세기 영국사회와 교회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나는 전세계를 나의 교구로 본다"고 말한 그의 복음사역관은 오늘날 우리들의 복음전도관에 도전을 주고 있다.웨슬리의 위대성은 그가 단지 경건한 인물이었고 감리교 창시자라는 데만 있지 않고 영국사회에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자의 성결을 선포하여 경건의
열매를 사회와 개인의 실생활 속에서 맺음으로써 영국사회를 도덕적으로 구원한 역사상 가장 투철한 윤리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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