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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하2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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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종교개혁, 교회개혁
본문: 왕하23:1-3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주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성도들이 “편리성”만을 추구하다 보니, 성전 앞에서 제물을 사고 팔고, 심지어는 환전을 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점점 영성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워진 것 같습니다. 지금의 교회가 이런 모습은 아닐까? 상업화되고, 외식과 형식, 권위주의와 거짓이 판치는 곳은 마귀의 소굴이요, 강도의 굴혈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떠나는 것은 참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갈4:8)
누가복음 19장 45, 46절과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서 채찍으로 장사꾼들을 내몰았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들지 말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채찍으로 내리치셨습니다. 당대의 성전이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채찍을 높이 드신 것입니다. 이 썩어 냄새나는 부패의 상징, 유대교의 상징인 성전을 완전히 개혁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자들은 바로 이 성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전을 독차지하고 있는 저들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일반 백성들 속으로 전파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하는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 성전을 타고 앉아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성전을 다시 재건하시려고 예수님은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고 바른(참된)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요4:23-24)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곳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어떤 집에서 술을 팔면 술집이 되고, 빵을 팔면 빵집이 되고, 예배를 보면 예배당이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배우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훈련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교역자들의 사업장이나, 교인들의 친교장소나 지식을 전하는 강연장이 아니며 더욱이 결혼식장이나 구제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입니다.
둘째,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마21:13)
예수님이 교회를 가르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교회에서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한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 되거나 “강도의 굴혈”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주일 아침마다 온 성도가 모였을 때, 기도소리로 성전을 가득 채워야 한다. 그러면 많은 죽어 가는 영혼이 모여들고 살아나기 시작한다. 교회를 기도로 채우자. 기도가 있는 곳에 능력이 있고, 기도가 있는 곳에 모든 악한 영의 세력은 물러간다.
셋째, 교회는 병든 자를 고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마21:14)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는 병든 자의 치유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영육간의 질병으로 시달립니다. 머리 아픈 자, 실직의 아픔, 실연의 아픔, 인간관계의 고독의 아픔, 사랑 받지 못한 자의 아픔 등등, 교회는 이런 것들을 치유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면 이런 치유가 나타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능력”입니다. 성도에게는 이미 이런 능력이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졌습니다. 마가복음16장17절의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이 바로 성도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서기관은 예수님의 치유의 사역을 이상한 일로 보았습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살리는 일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무력한 자들이 이것저것 따지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영육의 치유와 죄인을 살리는 사역은 ‘이상한 사역’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찬양케 해야 합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21:16)라는 말씀처럼 성도들의 입에서 참된 찬양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성도는 찬송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43장21절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천국의 모습은 찬양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여호사밧은 찬송으로 모압을 물리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찬송으로 옥문을 열었다. 찬송은 성도의 무기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를 찬송이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찬송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짐바브웨 출신의 니프라이스라는 골프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골프를 치다가 슬럼프가 오면 항상 휘파람을 붑니다. 왜?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어려서부터 “어려움이 있을 때는 휘파람을 불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찬송을 불러라. 기쁠 때에든지, 슬플 때에든지 찬송을 불러라. 힘찬 찬송은 마귀를 물리치며, 막힌 곳을 뚫으며,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니라”
다섯째, 교회는 선교하고 봉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열매입니다. 선교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등 불우한 이웃을 돌봐주고, 착한 일을 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다. 그 무엇보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습니다.(고전10:31, 엡1:14)
가정과 학교가 무너져가고 교회의 주일학교에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그냥 내버려두면 이 땅의 수많은 가정과 학교와 교회는 손쓸 수 없는 심각한 영적 공황에 빠질 것입니다. 가정과 학교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본질과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죄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우리민족의 죄를 자복하고 애통하며 여호와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단9:20)
여섯째, 바른 교회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입니다.(롬14: 17)
참된 교회는 의롭고(선하고), 근심, 걱정, 두려움이 없고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충만하고 나눔과 교제가 풍성한 교회, 주님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마22:37-39, 신6:5, 요15:12, 롬13:10)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개혁의 기치를 들었을 때 당시에 교황청의 세력은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아주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한낱 수도사에 불과한 루터 같은 사람은 수천 명도 더 파멸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름스 의회 앞에서 루터가 심문당할 때 그는 으르렁거리는 이리떼 속에 서있는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아무도 그가 거기서 살아 나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는 교황청은 그에게 아무 위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깨우치고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항의문을 내건 다음부터 교황청은 무서운 원수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의 용기 있는 결단을 통해 우리는 참다운 진리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원수의 부릅뜬 눈 앞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삶을 활기 있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의 가치를 더욱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이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이후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칼빈이, 쮜리히에서 쯔빙글리를 통해 개혁의 불길이 번져나갔습니다. 영국에서는 장로교회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유럽에서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 라는 말을 쓰면서 날마다 개혁해 가는 교회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날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개혁해 감으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교회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유다의 종교적 상황
여러분 역사 속에는 수많은 종교개혁들이 있어왔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본문에서도 종교개혁이 나타나는데 요시아 왕이 어떻게 개혁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대왕들은 대체적으로 거의 나쁜 왕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타락했기 때문에 나라가 나뉘어 있었습니다. 북쪽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남쪽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 중간 사이에 수많은 왕들이 교체되고 정권이 불안정했습니다. 이때 오늘 요시아라는 임금은 나이가 8살 때 임금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나이 8살에 임금이 될 수 있습니까? 이 말은 굉장히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시아 왕의 증조할아버지는 유다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히스기야왕입니다. 기도로 병낫고 종교개혁을 했던 증조 할아버지이지만 그 할아버지, 그 부친은 아주 형편없는 왕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 중의 하나였습니다. 무려 50년을 통치하며 나라를 완전히 거덜냈던 사람입니다. 유다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한 사람입니다. 성전에 우상을 세우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요시아의 아버지 아몬은 그 아버지 므낫세를 닮아 더 형편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몬이 요시아 8살 때 그 신복들의 쿠데타로 제거되고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또 나라가 정치적으로 소용돌이 속에 빠지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서 아몬을 제거했던 일당들을 다시 제거하고 나라를 건설하면서 왕족가운데 왕으로 세울만한 사람을 찾다가 이 요시아를 다시 왕으로 옹립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8살에, 소년이 왕이 된 것입니다. 그 나라 통치를 누가 했겠습니까? 정권을 뒤엎었던 사람들이 통치했고 18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요시아왕은 자기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가 했던 역사도 알고 자기 할아버지 므낫세의 역사도 알았고 아버지 아몬의 역사도 알게 되면서 왕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2.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다가 무엇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책이었던 것입니다. 모세오경입니다. 그래서 힐기야가 그것을 사반에게 주고 사반이 요시아에게 읽어주었는데 그것을 읽는 가운데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자기 옷을 찢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옷을 찢는다, 머리에 재를 뒤집어 썼다, 재 위에 앉았다, 굵은 베옷을 입었다 이 모든 것은 철두철미한 회개를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잘못하면 옷을 찢으니까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했던 것입니다.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모든 백성을 다 모아놓고 성경을 읽어줍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자신들이 살아야 될 것인지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다짐받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 열왕기하 23장 24장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도여러분, 본문말씀 2절에 보면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 노소하고 다 왕과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회개합시다 하고 온 백성이 동의하고 백성이 그 왕의 언약을 그대로 다 순종해서 좇기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율법책의 발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비텐베르그, 보름스, 제네바, 쮜리히에 가서 칼빈, 루터, 쯔빙글리의 동상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성경 바깥에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뭐냐, 개혁이 뭐냐, 우리나라 사람만큼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들은 백성이 없을 겁니다. 개혁은 상대방에게 너 잘못이니까 고쳐! 이런 식의 개혁이 아니고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흐트러진 자세를 고치는 것이 개혁입니다. 유대나라가 말씀 앞에 자신을 보니 얼마나 죄가 많고 더러운지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외친 것입니다.
6세기 종교개혁도 타락한 로마 카톨릭 교회를 보면서 우리 이런 것을 고쳐보자, 말씀으로 돌아가자 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세상의 거울은 면이 왜곡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거울에 우리를 비추면 우리도 왜곡됩니다. 정치, 문화, 경제, 사상, 시대 정신같은 것들은 우리를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불변하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흐트러진 모습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바로 발견하고 바로 잡는 것이 개혁입니다. 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먼저 내 모습부터 내 자세부터 바꾸는 것이 개혁입니다. 우리가 개혁을 외치기 전에 먼저 내 자세를 바꾸는 것입니다. 개혁은 결코 남을 향해 소리칠 일이 아닙니다. 내 모습을 보면서 나를 바꾸어나가는 것이 개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발견했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했고 그 말씀을 읽어주면서 회개를 촉구했고 온 백성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랐습니다. 역대하 34장 33절에 요시아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는 자기 소위에 옳은대로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 말씀에 이 말이 맞는가 안 맞는가 나의 생각, 행동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에 비추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또 놀라운 사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23장 21절부터 보면 “왕이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던지 유대열왕의 시대던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더니” 유월절은 해방기념일인 동시에 민족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400년 종살이를 끝내고 가나안으로 출발했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그 중요한 절기를 이 요시아가 회개하고 말씀을 읽고 유월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예배를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유월절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상하게 되고 우상이 세워지니 레위인들이 자기 먹고 살 길을 찾아 거의 대부분이 전업했습니다. 요시아가 농사, 목축하는 레위인들을 다시 불러 모아 그들의 본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역사를 열어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3. 종교개혁자 녹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녹스는 스코틀랜드를 기독교국으로 만든 성도인데, 그는 나라를 지극히 사랑하고, 부정에 대하여 용감하게 싸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왕 메어리 스튜어트가 구교 세력을 회복시키고, 개신교를 압박하려 할 때에 녹스는 용기 있게 일어나, 그것을 나라 지도자들에게 공개하고, 또 메어리 여왕이 구교도인 사촌동생 단리와 혼인한 일에 대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때 여왕은 스파이의 말을 듣고, 녹스를 불러다 놓고 울면서 말하기를 "네가 내 혼인 건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녹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나라 백성의 일원(一員)으로 지었으니, 나도 이 나라에 해로운 일에 대하여는 미리 경고할 책임이 있다"
1562년에 메어리 여왕은 녹스를 반역죄인으로 죽이려 했으나, 녹스는 의회에서 진리대로 분명히 말함으로써 의회는 그에게 무죄선고를 하였고, 또한 그의 용기 있는 행동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드디어 기독교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나라에 해될 일이 있을 때, 국민은 경고해야 될 책임을 가지고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매 일반입니다.(삼하12:7)
4. 이 시대의 종교개혁
여러분 16세기 종교개혁, 요시아의 종교개혁 이 개혁은 오늘 이 시대의 하나의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유럽의 종교상황이 얼마나 혼탁했습니까. 면죄부가 남발되고 교권주의, 비진리가 판을 치고, 성직이 매매되고 비도덕적인 생활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그 때 루터, 칼빈, 쯔빙글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서 우리 신앙을 점검하자고 외쳤던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요시아가 율법책을 근거로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고 거기서 유대의 회복을 부르짖었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문제 많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교회가 병들었다는 것은 곧 교회를 이루는 세포 하나 하나가 정상적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하나님 앞에 말씀앞에,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뜻대로 행할 때 우리가 바른 교회, 바른 신앙을 가진 교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남이 근사하게 만들어 놓은 교회에서 내가 아무런 부담없이 신앙생활 하려면 안되고 내가 변해야 된다는 심정으로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더 좋은 교회가 되도록 개혁해 나가야 되는데 그 개혁이 누구 누구가 바뀌면 개혁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가, 장로가, 권사가 바뀌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상담을 하다보면 기가 막힌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부간에 문제 있는 경우 거의 대부분 우리 남편, 우리 아내에게만 문제있다 그럽니다. 늘 홈쇼핑만 보고 과소비하는 우리 아내가 문제여서 우리 가정이 문제있다. 아니다, 우리 남편 노름하고 술 먹고 그래서 남편만 변하면 우리 집에 아무 문제없다고 그럽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거의 자신이 문제 있습니다. 내게 먼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주변 환경과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형편, 조직, 교회, 사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문제는 내가 주체적인 삶의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바로 세우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러질 못합니다. 진정한 개혁의 대상은 결코 남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남을 향해 개혁하고 외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회복할 때 개혁됩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할 때 개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역할, 직분을 제대로 회복할 때 개혁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데 그 어원이 프로테스트(Protest)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병들어 있는 점이 뭔가 하면 머리에 붉은 띠 두르고 결사투쟁 하고 외치는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역사는 한 걸음씩 뒤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내가 과연 가장, 남편, 직장인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주부, 아내, 어머니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개혁을 외쳐야 하는데 자기 역할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남의 개혁을 더 강조하는 그 점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부터 모든 일에 대해 전부 다 내 탓이라고 하십시다. 가정에 돌아가서 자식을 보면서, 부모를 바라보면서, 남편을 바라보면서, 아내를 보면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오늘 우리 한국의 모든 일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먼저 돌아봅시다. 우리가 대통령을 비난하고 욕하기 전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심각하게 회개하고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버려야 될 나쁜 습관들 내가 고쳐야 될 나쁜 습관들 그것이 개혁입니다. 내가 버려야지 고쳐야지 하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하나님 말씀 앞에서 버리고, 과감히 하나님을 따르는 것 그것이 개혁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을 비춰보고 말씀에 대해 바로 응답할 수 있는 목적이 이끄는 성도, 가정, 교회가 되는 것 그것이 참된 개혁입니다. 여러분, 완성된 교회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 완성된 좋은 교회 찾아 보십시요. 겉으로 보면 좋을 것 같지만 조금 들어가면 그 속에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사람의 냄새가 나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완벽한 교회를 찾아 몇 개월 돌아 다녀봐야 결국 못 찾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고 좋은 교회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이 들어가는 순간 그 교회는 더러워집니다.
참된 교회, 바른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과감히 잘못된 부분과 가지를 잘라주고 버려야 합니다. 요시야 왕처럼 산당과 제단을 없애고 불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5- 10)
우리는 좋은 교회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좋은 신자가 되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성도가 되어질 때 우리는 참된 개혁을 이루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이 교회 저 교회 가봐도 허물과 약점이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문제는 나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 세우느냐 그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살지만 발은 더러운 세상에 붙어있습니다.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고민을 하시기 바랍니다. 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먼저 말씀 앞에 자복하고 돌아오는 것이 개혁임을 기억하시고 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몸된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처럼 나도 교회를 아끼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더욱 진실되게 기도하며 교회 안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 한분만 믿고 따르게 하소서. 한국교회가 회개하여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미스바에서 일어난 역전을 우리가 다시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머뭇거리는 신앙을 접고 전심으로 돌아가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공동체가 예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룩한 집으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초대교회처럼 사랑이 넘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목자되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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