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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의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요나 궁극이............... 조회 수 994 추천 수 0 2014.07.26 09: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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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10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10절.

 

1절-10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되게 만들어지지 못했지요?

 

인간의 이성은 절대 자유성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자유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권리와 능력이 보장이 돼 있어요. 하나님이 강제로 한다면야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못할까마는 그러나 인간에게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자유를 준 것이고, 그리고 진리와 영감을 통해서, 또 사건을 동원시켜서 깨닫도록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나서를 보니 모든 만물이 요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다. 요나나 우리들이나 똑같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하려고, 즉시 움직이려고 만물이 대기를 하고 있다. 이게 믿어져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방편은 하나님이 말씀에 절대 순종입니다. 그러면 아침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왜 우리는 구원을 입어야 하느냐?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구원을 적게 입은 자와 많이 입은 자가 차이가 있다. 차이가 있느니만큼 천국의 누림의 차이, 느낌의 차이, 기쁨의 차이, 행복의 차이, 영광의 차이가 다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다 차이가 있는 겁니다.

 

천국에서의 주체적인 사랑은 아가페 사랑지이요? 주님이고. 그리고 같은 친구라도 사랑을 받는 차이성이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만일에 자기가 제일 꼴찌 되는 사랑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느낀다면 마음이 어떻게 될까요?

 

어린아이들도 부모로부터 나오는 사랑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지요? 제일 어린 젖먹이 아이를 사랑해 주면 그 위에 언니나 오 빠가 시기질투를 하는 걸 우리가 볼 수 있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이치는 같아요. ‘아이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꼴찌로 받는구나’ 하고 느낄 때에 어떻게 될까? 시기질투도 없어?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아도 그만이고, 많이 받아도 그만이고 그렇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고 좋지요? 그렇지요? 교인들이 목사님의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고 좋지요?

 

우리가 이건 느낄 수 있지요? 많은 사람과 같이 있는데도 쓸쓸함을 느끼는 거 있습니까? 그거 있어요? 또 혼자 있어도 기쁨을 느끼는 때도 있고 그래요. 사람은 느끼는 존재지요. 인인관계끼리 사랑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즐겁고, 어려운 일도 힘든 줄을 모르고. 그렇지요?

 

우리 기독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민감하게 느낄 줄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사랑의 민감성을 느낄 줄 모르면 그거 어디 되겠어요?

 

천국에 가면 부모의 사랑이 있고 없고, 천국에 가면 친구의 사랑이 있고 없고, 천국에 가면 부부의 사랑이 있고 없고. 그러면 있는 건 뭐냐? 주님의 사랑으로 연관된 거. 없는 것은 육으로 끝난 것뿐이지. 천국에는 육의 사랑은 못 들어가는 거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의 사랑으로 바꾸어야지요.

 

우리 기독자들이 사람을 사랑할 때에 진리 때문입니까, 예쁘기 때문입니까? 진리 때문에. 그렇지요. 성경에 그거 있지요?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을 해봐요. 에스더가 인물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 예뻤는지, 아니면 아하수에로 왕 제 눈에 예뻤는지? 뭣인 것 같아요? 누구 눈에 예뻐했어요?

 

이 에스더가 왕의 마음도 정복을 하고, 왕이 주는 사랑도 정복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에스더를 가지고 놀겠는지, 에스더가 왕을 가지고 놀겠는지? 누가 누굴 가지고 놀까?

 

세상에서 우리가 많이 볼 수 있지요? 시내에 나가면 짧은 치마 입고 술집에 앉아있는 여자들이 있는데, 남자들 제 눈에 그 여자가 예뻐 놓으면 들어가. 들어가 놓으면 누가 누굴 잡고 놀지? 누가 누굴 잡고 놀아서 홀딱 다 뺏기고 나오는 거야? 그거 참.

 

아하수에로의 마음이 에스더에게 전부 다 들어가 버렸지요. 그리고 솔로몬의 궁녀도 보면 그 궁녀가 천 명인가? 그 천 명이 왕궁에 있으면서 솔로몬 왕과 대화를 한 번도 못하고 손도 한 번 잡는 것도 없다면 솔로몬의 궁 안에서 무슨 맛으로 살까? 방안에 혼자서 가만히 있을 거 아니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못 살아도 혼자 사는 게 낫지. 안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 보니까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 여자는 솔로몬과 밀실로 들어가지요.

 

이게 우리에게 뭘 가르쳐 주고 있지요? 뭘 가르쳐 주고 있어요? 아가서가 성경이 아니지요? 성경이 아니고 솔로몬의 연애편지지요? 솔로몬의 연애편지이면서도 성경이지. 참 희한하구만. 연애편지가 성경이라.

 

우리가 신의 성품을 그만큼 진하게 입으면 하나님의 사랑에 민감해지고, 입지를 못하면 둔감하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도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만 받으면 안 돼요. 다양적인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게 다양적인 사랑을 받아서 느낄 수 있는 자로 만들어져야 되겠지요. 우리가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전에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독점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이건 걱정할 건 없고, 이제는 자원적 순종으로 신의 성품을 입고 가는 이것만큼은 우리가 이 재세기간 동안에 반드시 하고 가야 한다. 설령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이것만큼은 해야 된다. 뭘 해야 된다? 이를테면 세상 그 무엇을 못하더라도 신의 성품을 입는 이것만큼은 하고 가야 된다. 이 일이 그만큼 중요하단 말이요.

 

우리가 구원을 입는 일에 있어서 제일 방해물은 패역성이고 주관성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일을 많이 해도 구원을 못 입을 수가 있습니다.

 

요나의 특성을 보면 첫째는 요나는 패역성 주관성이 강하고, 두 번째는 요나는 변덕성이 강합니다. 이런 게 들어있으면 구원이 적어집니다. 세 번째는 요나는 조급성이 강하고, 네 번째는 요나는 회의성 즉, 의심이 많습니다. 물론 누구든지 믿을 때 처음에는 하나님과 대립성을 가지게 돼요. 그러나 시일이 자꾸 갈수록 그게 고쳐져야지 계속적으로 대립성만 있어가지고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결국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고 맙니다.

 

다섯 번째는 요나는 적개심이 강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지요. 이 앗수르는 이스라엘과는 철천지원수입니다. 이 원수의 나라 니느웨 성이 망하는데 있어서 요나는 찬성이란 말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야, 네가 가서 니느웨 성이 망하지 않도록 하라’ 그랬단 말이요. 그러니까 요나가 니느웨로 갔어요, 딴 데로 갔어요, 딴 데로 가버렸지요. 다시스로 도망을 가버렸어. 원수의 나라가 구원 받는 것이 싫어가지고 딴 데로 도망을 가버렸어.

 

가정에서도 그런 게 있지요. 드러누워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더니 ‘예’ 하고 일어나서 옷을 척척 주워 입었어. ‘일어나서 갔겠거니’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딴 데로 가버렸어. 그러니까 일어난다고 해서 심부름을 간다고 보지 말고 일어나서 어디로 가느냐 그 말이지.

 

우리가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 것도 많아요. 잘못된 교회에 들어가서 피해를 보고 나서 그 교회에 안 나가고 집에 있어. 그러다가 자기 마음에 맞는 교회에 간다고 해서 다른 교회로 나갔어요. 교회에 간다고 하는 건 마음에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래, 그렇게 일어나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또 사기 맞는 데로 가요. 그런 걸 우리가 많이 볼 수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원수든 나의 원수든 누구든지 간에 ‘남이 망했으면’ 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면 자기가 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원수관을 바로 가져야 하겠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이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내 이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원수가 뭐냐? 죄요, 거짓이요, 거짓적인 지식이요, 모든 불의가 나의 원수입니다. 왜 이런 걸 원수라고 하는 거지요? 왜 원수라고 그래요? 주님의 성품을 못 입게 하는 것이므로.

 

그러면 주님의 성품을 못 입게 하는 것이 뭐요? 일반적으로 악한 사람이 와서 두들겨 패는 거요, 아니면 ‘좋다, 좋다’ 하며 사랑해주고 얼러주고 업어주고, ‘축복 축복’ 하면서 육의 정신으로 나가게 하는 거요? 후자. 그런데 그걸 원수로 알아요? 모르지. 제 좋게 해주는 것으로만 알지.

 

모든 이웃은 내 구원에 협조자요 동원자입니다.

 

여섯 번째는 요나는 시기심이 있고 질투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으로 가득하게 채워진 것이 요나다. 집사님은 몇 가지가 채워졌지요?

 

상징계시적으로 보면 요나는 천국에 간 자입니다. 또 그리고 천국에 갈 자인데, 요나가 이 여섯 가지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면 그 성질이 천국에서 쓸모가 있겠어요? 이 세상에서도 쓸모가 없는 건데.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하면 뽑겠느냐? 이런 여섯 가지의 성질들을 굴속에 들어가서 금식기도 하면 뽑혀집니까? 그게 왜 안 뽑힐까요? 사실인즉 뽑는다고 하는 것은 적극성이 못 돼요. 안 뽑혀요.

 

그런 것들은 소극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해도 안 뽑혀요. 금식기도 하면서 ‘이거 뽑게 해 주십시오’ 하면 뽑히나? 아니, 자기가 뽑아야지 하나님이 와서 어떻게 뽑아. 제 밭의 풀은 자기가 뽑아야지. 남의 밭을 풀을 누가 뽑아줘?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지혜롭게 해 주십시오. 영리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한다고 되는 게 아니요. 절대로 헛노력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보고 부지런히 깨닫고 자기 속에 넣는 수밖에 없어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요. 그 이상 좋은 방법은 없어. 그러니까 큰 나무 밑에서 조그마한 나무 싹이 올라오다가 이 작은 나무가 큰 나무 때문에 햇빛을 못 받으니까 그냥 녹아버리지.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요나 속에 여섯 가지의 못된 성질이 들어있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다 알지요. 다 알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왜 요나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킬까? 일꾼이 없어서? 심부름할 사람이 요나 외에는 없어서?

 

사실 요나가 지옥에 갈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지를 않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했듯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하나님의 파송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했는데,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의사표시이고, 자기의 의사를 타에게 표시할 때에는 말로나 글로나 명령으로 하지요. 활동은 순종에서 나오고, 순종은 말씀에서 나오고, 말씀은 의사표시에서 나오고, 의사는 인격에서 나옵니다.

 

‘말씀’ 할 때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로고스’라고 되어 있어요. 철학자들은 이 로고스를 갖다가 ‘하나의 개념이다. 그 사람의 의지다. 혹은 의지의 질서다’ 이렇게 말하는데, 사도요한은 로고스를 ‘하나님의 인격성이다’ 이렇게 본 거지요. 그러니까 글자가 같고 말은 같은데 그 개념을 다르게 사용하는 거다 그 말이지요.

 

의사는 인격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인격이 왔다 그 말이요.

 

보통 보면 사람의 말은 사건 혹은 사역에서 오고 있어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사건에서 오고 사역에서 오고. 거기에서 되어진 그 말을 해요. ‘어디 가느냐? 밥 먹었느냐? 어디 갈 거냐? 어디서 만나자. 무슨 일을 할까?’ 등등 거의가 그런 거 아니요? 사람의 말은 사건에서 오고 사회에서 오고.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사건목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해 가요? 사건목적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는 이 말씀은 무엇 때문에 하신 걸까요? 사건 때문일까요, 요나에게 당신의 성품을 입혀주려고 하신 걸까요? 후자. 요나는 천국에서 인격자로 능력자로 살 자이기 때문에 그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성품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성경에서 전부가 그래요. 사건목적으로 오는 게 아니라 그 말이요. 이해 갑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역시 일 목적 사건목적에다 강조를 붙이면 안 되지요.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실 때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어디에 있어요? 단순히 니느웨 성이 구원 얻게 하는 그 목적밖에 없는 거냐?

 

니느웨를 구원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그 일을 잘 할 사람은 누굴까? 요나라야만이 되는 건가? 찾다 찾다 다른 사람은 심부름을 할 사람이 없어서 요나를 적임자로 알고 요나에게 명령을 한 것이냐 그 말이요. 일이 목적이라면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 요나는 지독하게 목이 곧고 되게 말을 안 듣는 사람인데 이런 요나에게 심부름을 시키느니 숫제 하나님 당신이 직접 하는 게 수월하지. 그런데 그게 아니기 때문에 첫째는 요나를 문제를 삼아야지요.

 

물론 나중에 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것도 있지만 요나는 결국 고치지를 못했어요. 어쨌든 요나가 고치지 못하고 그 길로 죽었지요.

 

바울의 경우에도 바울이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고 말을 하는 그 중심을 아시겠지요? 이 말이 단순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바울에게 벌을 준다든지 어떤 심판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차원은 아니지 않느냐 그 말이요.

 

그러면 화가 있다면 그 화라는 의미는 어떤 뜻이 강조가 되느냐? 바울이 말하는 거는 오늘날 교인들이 흔히 하는 그런 말이 아니란 말이요. 영적인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겁니다.

 

 

‘내가 저 사람을 구원했다. 내가 구원하지 않으면 저 사람은 망한다’ 그러는 교인들이 많지요?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들의 신앙심이 어떤 건지, 주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말하는 개념과 바울이 말한 개념과는 같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요나를 보면서 자기를 요나에게 비춰보면서 들어가야지요. 그렇게 되면 좋은 뜻이 나오는데, 그게 안 보인 채 ‘내가 저 사람을 구원했다’ 라는 말을 한다면 이거는 자기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어요.

 

성경은 항상 나와 상관이 없는 객관만이 아니거든. 언제든지 자기가 포함이 돼서 말이 돼있는 거거든요. 그렇지요? 내 신앙이 포함되지 않은 말씀은 있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되면 성경의 계시성이 나와는 상관이 없이 돼버리니까.

 

목사님들이 기도할 때에 ‘종을 보내주시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종을 붙잡고 오셔서 종을 통해서 말씀을 하신다. 종을 보냈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 둘은 듣는 느낌이 각기 다를 수가 있어요. 또 달라야 되고.

 

‘종을 보내주시고’ 하게 되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무슨 심부름을 보내는 것처럼, 마치 인간이 이웃집에 보내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할 수 있거든. 그러나 ‘종을 붙잡고 오셔서’ 하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같이 계신다는 거 아니요? 동행 아니요? 그리고 ‘종을 통해서 말씀을 하신다’ 할 때는 말씀만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격성이 찾아온 거지요. 요나에게도 이렇게 찾아오신 겁니다.

 

신앙에는 말씀만 온 게 아니고 인격적 결합에서 동행적인 그런 신앙이 있습니다. 즉 말씀만 온 게 아니고 인격으로 찾아오셨다.

 

하나님께서 인격자 요나에게 찾아오신 것은 니느웨 성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인가? 그건 아니란 말이요. 요나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기 위해서 찾아오셨다.

 

그런데 여기서 요나가 ‘예’ 했더라면 여섯 가지 성품은 자멸이 된단 말이요. 순종을 했더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질 텐데 요나가 그게 아니었다 그 말이요.

 

‘요나’ 하면 목사 요나도 되고 선지자 요나도 되는데, 이 본문에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 이렇게 인간적인 면을 붙여서 얘기를 했단 말이요. 그런 점을 우리가 잘 보고 뭔가가 냄새를 빨리 맡아야 돼. ‘누구의 아들 요나’ 할 때는 인간적인 냄새가 나지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찾아오시는 목적은 나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을 입혀주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찾아오시는 방편은 구약성경에 보면 직접 말씀으로 찾아오시기도 했습니다. 아담에게도 그랬고 가인에게도 그랬고 노아에게도 그랬고.

 

그런데 또 성경에 이런 게 있지요? 창세기 5장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을 해서 자녀를 낳았다고 그랬지요. 그렇지요? 이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면 에녹의 동행이 어떤 동행을 말하는 건지? 형체로 물체로 나타난 그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는 말인지? 다시 말씀드리면 무형체 동행인가, 유형체 동행인가? 에녹은 형체는 없지만 인격적 결합적 동행으로 되는 신앙생활이라 그 말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은 말씀생활이냐, 아니면 인격을 붙잡았느냐? 진리는 붙들었는데 인격은 못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찾아야 한다 그 말이요.

 

인격자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것은 무형적 동행이지만 이 인격자와 동행을 할 때에는 심심함이 없어요. 인격적으로 결합이 되는 거니까. 인격자 그 분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인격적으로 결합이 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여기에서 내가 인격자와 끊어지면 세상을 그리워하게 돼요. 그리고 쓸쓸하고. 그러나 그 분과 동행을 하면 초월적인 신앙이 돼버린단 말이요. 알겠어요? 그렇게 달라요. 그러니까 우리 기독자는 극복주의 극기주의가 아니다.

 

바울도 보면 하나님과 인격적 동행의 생활을 하다 보니 결혼하는 거, 먹고 마시는 게 다 초월이 된 것 같아요. 참 부러워. 바울의 머릿속은, 온 몸 구석구석은 전부 다 인격적인 그 주님으로 충만이에요. 충만생활이에요.

 

교회에서도 청춘남녀들이 결혼을 안 했을 때는 주님에게 마음을 모으고 그러더니 결혼을 하고 나니까 마음을 빼앗겨. 누구한테 빼앗기지? 우리 기독자들은 결혼하는 그 날 즉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영광스럽게 할까?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연구로 들어가야지 제주도로 뭐 하러 가. 맘 빼앗기러 가는 거 아니야? 난 안 그래봤어.

 

에녹이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으로 생활을 하다 보니 세상은 초월입니다. 우리 기독자는 극기 극복이 아니요.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참자, 참자’ 하는 이거는 초월이 아니지요. 초월은 예를 들어 말하자면 달음박질하는 사람이 앞만 보고 냅다 뛰다보니 옆에 누가 있는 줄도 몰라. 그런 것과 같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아도취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결합니다. 에녹은 마음의 수지성이, 총 집중성이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입니다. 아이를 하나 낳을 때마다 주님과 동행하고, 또 하나를 낳을 때마다 주님과 동행하고. 그러니까 그 동행성이 중단하는 게 없어.

 

그런데 우리는 보통 보면 중간에서 자식에게 마음 다 빼앗기고, 아내에게 마음 빼앗기고, 무엇에게 빼앗기고 하는 게 많지요. 그런데 에녹은 그런 일이 없다. 항상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이었다.

 

또 하나는 뭔가 하니 우리 기독자는 사건을 물리쳐 달라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야 된다. 왜 그러냐? 사건은 하나님께서 어련히 내 형편을 알아서 주시겠느냐 그 말이요. 그런데 타락된 기독자들은 사건을 자꾸 물리치는 거지요. ‘왜 이런 사건을 나에게 줍니까?’ 하며 그 사건을 거둬가라고 그러고, 그 사건은 마귀로부터 온 것처럼 자꾸 생각을 하지요. 하늘에서 돈 보따리가 떨어지는 건 주님이 주는 거고, 어려운 사건을 주는 것은 마귀가 주는 거고 그래요?

 

우리는 먼저 주님과 인격적 결합을 해야 한다. 이게 아주 시급하다. 그래야 만이 그 사람이 ‘신앙 믿음’ 하는 것이 늘 원칙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거요. 그러니까 원칙에 맞추라는 거지. 그렇게 안 돼 있는 걸 자꾸 원칙에 맞추라는 거지.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현실도피를 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이거든요. 현실도피를 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런 신앙으로 나가면 그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닥치는 행불행이 자기 신앙에는 상관이 없단 말이요.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을 하다 보니 죽을 것이 없이 살았단 말이요. 죽은 것이 없고 죽을 것이 없어. 참 그거.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전부 다 들어갔지요. 그렇게 살아온 그 자체는 전부 다 천국이고, 소속이 천국이고. 그러니까 전부는 천국으로 갈 것밖에 없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 죽은 것이 없고 죽을 것이 없습니다. 누구와 동행을 하면?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 그래요. 그러니까 그렇게 살게 하려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요나를, 나를 찾아오신 겁니다. 어렵습니까?

 

사건 속에서 존재 속에서 환경 속에서 인격적으로 찾아오시는 그 주님이 안 느껴집니까? 그냥 편안한 생활을 할 때는 못 느끼고 있다가 어떤 큰 사건이 머리에 뭐가 딱 떨어지는 것처럼 ‘꽝’ 하고 부딪혀야 그 때서야 느끼고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인 신앙은 세상풍파에 상처를 안 받아요.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그만큼 적기 때문에 자꾸 동요를 받고 자꾸 동화되고 하지요.

 

불과 쇠와 가까워지면 쇠에게 뭐가 동화가 되지요? 뜨거운 열기가 자꾸 동화가 되지요. 그래, 이제 쇠가 불속으로 팍 들어가 버리면 쇠는 불에 화동이 돼버리지요. 하나가 돼버리지요. 그냥 일반적인 쇠 속에서 불을 끄집어 낼 수 있어요? 못 끄집어내요. 그런데 쇠가 불에 화동이 되면 불이 쇠고, 쇠가 불이지. 그래서 이 쇠를 종이에 대면 종이에 불이 붙게 되지요. 그렇지 않아요? 쇠가 불과 하나가 돼버렸어. 화동이 돼버렸어. 주님과 우리와의 결합을 물질이치를 들어가지고 그런 관계로 가르쳐 줘요.

 

우리가 처음 믿을 때는 마음이 둔감해서 그게 잘 안 되지. 그러나 믿어갈수록 둔감한 상태는 자꾸 짧아지고, 짧아지면서 주님과의 인격적 결합이 되는 시간이 자꾸 많아져. 주님과 떨어지는 시간은 그 간격이 자꾸 짧아지고. 그리고 인격적 결합이 자주 자주 돼요. 이게 자꾸 연속이 되다 보면 이제는 붙은 채로 연속이 되겠지.

 

사람 간에도 처음 만났을 때는 남남이었는데 처음 만나보니까 마음에 탁 들거든. 그래서 자주 자주 만나게 돼. 이렇게 되니 서로 안 보는 시간이 길지를 않고, 만나는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 그 다음에는 노상 안 떨어져. 그게 이치란 말이요. 주님과 우리와의 신앙생활의 이치도 그래야 된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어요? 자기의 신앙생활에서 그걸 느낄 수 있겠느냐 그 말이요.

 

그리고 주님과 동행을 하려면 주님의 의사와 맞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 양해도 하고 양보도 하고 그러는데 우리 주님은 인간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얼마나 고집통인지?

 

여러분들, 일반적으로 얼마든지 예를 볼 수가 있겠는데, 내가 농약을 들고 먹겠다고 그러면 그 농약이 어떤 것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걸 먹으라고 양보를 하겠습니까? 양보를 할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머리박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양보를 안 할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에요.

 

‘주님의 의사에 맞추자 맞추자’ 하는 것은 나를 살려주려고 하는 건데,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의사에 맞추려고 하지를 않고 자꾸 인간 제 의사에 맞춰달라는 거지. 그러면 주님이 그걸 들어주느냔 말이요. 들어주면 누가 죽어? 내가 죽는단 말이요. 인간 내가 고통당하는 것을 주님이 보고 좋다고 그럴까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할 때에 의사충돌이 일어나면 동행을 못해요. 그런 고역이 없는 겁니다. 고통스러운 거지요.

 

이 요나서를 요나가 기록했나? 누가 기록했는지 한 번 봐요. 누가 기록한 거지요? 요나가 쓴 모양인데, 그거 참. 하기야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게 했다면 써야지 뭐.

 

참 그것 보면 우리가 그런 게 있어. 학생들이 자기 일기장을 자기가 좋아서 쓰지. 아마 그런 식으로 요나가 이 요나서를 쓴 것 같아. 이 요나서가 성경이 될 줄은 요나도 아마 몰랐을 거야.

 

여러분들, 천국에 들어가거들랑 요나의 손목을 붙잡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었지?’ 하고 물어보라고. 그러면 ‘아니,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할 거라고. 그러면 ‘아, 그걸 몰라? 성경에 다 있는데’ 하면 요나가 깜짝 놀랄 거야.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일상생활도 하나님의 기록책에, 생명책에 기록이 돼 있단 말지이요. 알겠어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속에 요나 속에 들어있던 여섯 가지 이상의 못된 성질들이 들어있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사건이 부딪힐 때에 우리의 속에서 못된 성질들이 나타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미리 이 요나를 보여주어서 우리 속에 있는 걸 고칠 수 있게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내 속에 부지런히 집어넣고, 생활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사와 뜻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고 하나님의 좋은 성품이 품행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 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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