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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274 추천 수 0 2014.08.02 22: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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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8:16-2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4년 6월15일 http://dabia.net/xe/sermon/7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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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마 28:16-20, 삼위일체 주일,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질문을 하나 드릴 테니까 답을 찾아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존재라고 믿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게 말이 될까요?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주장이 아닐까요? 이것은 예를 들어, 어머니는 한 분인데, 또 다른 사람을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예수라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믿느냐는 겁니다. 유대교 고위 성직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즉 하나님을 사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벌어져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람과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이십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을 받은 다음에 당신의 이름이 뭐냐, 하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셨습니다(출 3:14). 이 문장을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 (이히 베르데 자인, 데어 이히 자인 베르데.) ‘나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자로 그렇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유일무이하고, 초월적이고, 알파와 오메가이고, 우주 전체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존재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유대교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따르는 이들이나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그들의 문제 제기에 대답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걸 피하면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도 그 대답을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의 총괄이 바로 삼위일체론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삼위일체 주일을 기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삼위일체가 가리키는 어떤 존재라는 걸까요

 

삼위일체(trinity)라는 단어는 삼위와 일체의 결합입니다. 삼위는 위격이 셋이라는 뜻이고, 일체는 체가 하나라는 뜻입니다. 한자에서 온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삼위는 맞지만 일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일체에서 ‘체’(體)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예수, 성령이 한 몸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일체가 아니라 동질(同質)입니다. 우리말로 이미 삼위일체로 굳어져서 그 단어를 일단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논쟁의 출발점은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종교회의입니다.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위격이 다른 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역사를 초월하지만 예수님은 세상과 역사에 지배받습니다. 하나님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먹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일까요?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가 논쟁을 벌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걸 전문 용어로 ‘헤테로 우시오스’(이질)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아다나시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 ‘호모 우시오스’(동질)라고 합니다. 니케아에 모인 교부들과 주교 등, 신학자들은 많은 논쟁을 거쳐 아다나시우스의 호모 우시오스 개념을 정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 위격으로는 하나님과 다르지만 본질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시오스, 즉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페르조나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인격체, 또는 정체성이라고 봐도 됩니다. 나무도 나름으로 위격이 있고, 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별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총칭해서 페르조나라고 합니다. 본질은 그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훨씬 근원이 어떤 차원을 가리킵니다. 여기 사과가 있다고 합시다. 사과의 페르조나는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공처럼 생겼고, 색깔이 붉거나 청색이고, 맛이 시원 달콤합니다. 손으로 만져서도 알 수 있고, 눈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사과의 본질은 이런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탄소와 물과 햇빛의 결합이 사과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사과가 아닌 것들이 없는 어떤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의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이며, 생명 사건이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호모 우시오스 개념에 근거해서 교회는 하나님, 예수,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삼위일체 개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정통교회는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삼위일체 개념은 신학적으로 너무 전문적인 분야이기에 일반 신자들에게 별로 필요한 게 아니라거나, 그냥 예수님만 잘 믿고 구원받으면 되지 않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초기 교부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런 논쟁을 벌인 게 아닙니다. 이것은 선교 현장에서 불거진 실제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느냐 하는 반론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은 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선교 지향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소중히 여긴다면 오늘도 우리는 이런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작업에 성실하면 기독교는 진리 공동체로 자리매김 되겠지만, 거꾸로 그런 대답에 소홀하게 되면 자폐적인 소종파나 사이비 이단으로 떨어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8:16-20절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이런 노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부활 후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즉 권력을 받았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루터는 권세를 강제력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권력이 로마 황제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게 생각할 만합니다. 황제는 민중들의 생사여탈권을 명실상부하게 쥐고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치, 경제 권력은 임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참된 권력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주는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권력에 저항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력이 있다는 본문의 주장은 세상 권력을 대표하는 바로 로마 권력, 즉 로마 정신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 사실을 19, 20a절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이 구절에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명령이 세 가지 나옵니다. 첫째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둘째는 세례를 베풀라, 셋째는 나의 말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겁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한 가지 명령입니다. 복음 선교입니다. 제자를 삼는 것도 선교이고, 세례를 베푸는 것도 선교이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도 선교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선교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자신들의 구원에 자족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고 교회 밖으로, 즉 세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행 1:8절에 따르면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가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선교가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를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이익도 많았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신흥종교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 만능의 가치관이 팽배한 우리나라에서 정의와 평등이 더 우선적인 가치관이라도 외치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예수의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들어가서 증인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순교의 각오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증인이라는 단어는 순교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순교까지 각오한 선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오늘날도 많은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활동합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합니다. 미국이야 처음부터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나라이기도 하고, 유무형의 토대가 탄탄하니 그럴만합니다. 해외 선교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선전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형편이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해외 선교에 지나친 열정을 보입니다. 한국교회의 30% 이상이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했습니다. 명실상부하게 교회의 품위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재정자립도를 갖춘 교회는 50%도 되지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교 신학적인 검토도 없이 해외 선교사를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도 없지 않겠으나 해외 선교를 교회 업적으로 삼으려는 잘못된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선교 공동체라는 사실만은, 즉 참된 권력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선포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출발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선교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우선 선교가 무엇이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선교 방식을 무조건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로마의 국가 종교 모델을 목표로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선교는 시대와 자리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세계교회에서 1960년대부터 선교 개념이 좀더 확장되었습니다. 미쇼 데이(missio Dei), 즉 하나님의 선교를 중심 개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선교사를 파송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선포되는 모든 것이 바로 선교라는 겁니다. 경제 불평등이 고착화된 곳이라면 경제 정의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인권이 제약받는 곳에서는 인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경쟁 중심의 교육으로 인해서 청소년들의 삶이 파괴되는 곳에서는 전인교육이 살아나야 합니다. 교회가 선교 지향적 공동체라고 한다면 이런 하나님 선교를 추구해야겠지요.

 

선교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본질을 오늘 삼위일체 주일과 연관해서 말씀드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9b절이 가리키듯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다시 사는 것을 가리키는 종교의식입니다. 자연인으로서의 그 사람은 죽고,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도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게 아닌 거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죽고 다시 난다는 것도 별로 실감이 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도 성격이 그대로고, 실수도 반복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늘 뜨거운 게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아버지인 하나님과의 결속, 아들인 예수와 결속, 영인 성령과의 결속이 유명무실하다는 데에 대답이 있습니다. 그 결속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단순히 종교현상에 머물러 있으니 new Being이 뭔지 경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 세 이름과의 결속에 전념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만 해도 바쁜데 어느 세월에 그런 것까지 생각하느냐고, 그런 것은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다급하고 치열한지 잘 모르는 목사의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아들, 영과의 결속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각각 세 가지 이름과의 결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1) 아버지와의 결속, 또는 아버지와의 일치는 창조와 종말의 완성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일까요? 여러분 앞에 마지막 순간에 졸지에 닥쳐 올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가장 궁극적인 현실이 될 것입니다. 2) 아들과의 결속, 또는 일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약속으로 주어진 영생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게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일까요? 돈과 집과 삶의 재미만이 실질적인 것일까요? 그 모든 것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이 득달같이 올 것입니다. 그때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궁극적인 현실로 경험될 것입니다. 3) 영과의 결속, 또는 일치는 생명의 영인 성령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름 잡는 이야기인가요? 사람은 자기의 인식 능력을 절대화합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정치 이념 등도 절대화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명백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순간이 곧 닥칩니다. 그때는 생명의 영인 성령이 가장 궁극적인 능력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스스로의 생명을 누리고 늘리기 위해서 평생 수고하겠지만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놀랍게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영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본질이 동일한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 각각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바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하고, 그 하나님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으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신비한 방식으로 오늘 성경 본문 마지막 구절에 나와 있듯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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