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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받는다는 것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892 추천 수 0 2014.08.02 22: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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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0:40-4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4년 6월29일 http://dabia.net/xe/sermon/762917 

jys.jpg 상을 받는다는 것

마10:40-42,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답은 각각 다를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등등의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옳은 대답도 있고 틀린 대답도 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한 20세기의 순교자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뒤따름’(Nachfolge Christi)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누구냐에 대한 고백이자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3 독서로 읽은 본문이 포함된 마 10장에서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가룟 유다까지 열두 명의 제자를 선택하고 그들에게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을 향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든 사람과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제자의 존재이유입니다. 거꾸로 이 사명을 잃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자로서의 이런 사명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사명에서 나름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시련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시련과 박해 문제가 거론되면 제자로서의 삶이 부담스럽습니다. 마 10:16-1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제자들을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시련과 박해를 실제로 받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당한 박해를 지금 우리가 실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잡혀가거나 재판을 받지 않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엄연하게 분리되어 있고, 종교의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당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정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정략적 판단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을 범법자로 몰아갔습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묻기까지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랑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이런 시련과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시련과 박해를 견딜 수 있도록 두 가지 사실을 짚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의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겁니다. 하나는 그들을 괴롭히는 세속 권력의 한계를 뚫어보라는 것입니다. 세속 권력은 사람의 몸만 죽일 뿐이지 영혼은 죽이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정말 두려워할 대상은 몸과 영혼을 심판하는 분, 즉 창조주 하나님입니다(마 10:28). 이런 믿음이 있다면 시련과 박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두렵기는 하겠지만 굴복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순교의 용기도 이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상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0:40-42절에서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우선 4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제자들의 기를 세워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제자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논리를 잘 보십시오. 제자, 예수님, 하나님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결국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게 사실일까요, 비약일까요? 제자들은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내세워야 했을까요?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해야 할 일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선포해야 하고, 왜곡된 세상의 근원적인 변혁을 추구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 사명에 의해서만 정당성이 확보됩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임박한 천국에 근거해서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40절 말씀은 제자들의 사명이 중요하니 시련과 박해를 받아도 힘을 내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제자의 사명과 관련된 문제는 깨끗하게 정리된 겁니다. 그런데 41절과 42절에서 갑자기 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체 문맥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4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0절과 연관해서 본다면 41절에 나오는 상을 받을 사람은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런 뜻으로 읽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뜻입니다. 마태복음 기자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극심한 시련과 박해를 받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41절과 42절이 말하는 상 받을 사람은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상이 언급됩니다. 하나는 선지자의 상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의 상입니다. 선지자는 당시 유랑 설교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탁발 수도승처럼 빈손으로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최소한의 경비를 제공받았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활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태 공동체에도 이런 유랑 설교자들이 간혹 들려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자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런 의인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기독교인들이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한국교회 신자들은 상을 정말 좋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는 늘 그런 상을 떠올립니다. 한국교회에서 한 때 천국의 상급에 대한 논란이 크게 벌어진 적도 있습니다. 천국에 상급이 있느냐, 그 상급에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런 논란이 희극처럼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오막살이집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큰 저택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개털모자밖에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황금면류관을 쓸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부흥회 강사들만이 아니라 신학교 교수들도 이런 말을 합니다. 고려신학대학원 변 아무개 교수는 ‘천국에 상급이 있는가?’라는 글에서 여러 성경구절에 근거해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면서 구원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상급은 행한 대로 차별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구원과 상급을 구분함으로써 천국 상급론이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나 하나님 나라와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좀 부족해서 저런 논리를 펴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태양빛이 비치고 있으면 손전등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태양은 구원이고 손전등은 상급입니다. 자신이 선물로 받은 손전등이 국산이냐 독일제냐, 자동이냐 수동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옥신각신 한다는 것은 아직 태양빛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상벌 원리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은 모든 걸 돈이라는 상으로 처리합니다. 능력이 있으면 연봉을 많이 주고 없으면 적게 줍니다. 돈이 안 되는 건 안 하려고 하고, 돈이 되는 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대학교도 돈에 의해서 돌아갑니다. 돈벌이가 안 되는 학과는 폐과하고,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더 받기 위해서 거짓 서류까지 꾸밉니다. 정부는 돈으로 학교와 시민단체를 컨트롤합니다. 모두가 돈이라는 상을 받기 위해서만 애를 씁니다. 기독교인도 이런 세상 원리에 길들여져서 하나님 나라를 상급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세상 원리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아야만 성경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왜 나왔는지를 돌아보십시오. 모든 성경말씀은 전후 맥락이 있으니까 그런 것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 제자들은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청중들이 외면해도 오로지 하나님의 영에 의존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이며, 온갖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의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선지자의 상을, 그리고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선지자와 의인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즉 제자로서의 삶 자체가 상입니다. 왜냐하면 제자의 사명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상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상은 없습니다. 제자가 된 사람은 제자로의 삶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고, 만족해야만 합니다. 다른 것은 더 준다고 해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에게는 그 외의 것들은 다 군더더기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군더더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처럼 제자로서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상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닐는지요.

  

예를 들어, 여기 시인이나 화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들도 시집을 내거나 그림을 그려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그걸 시 쓰는 행위와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상이라고 여긴다면 그들은 참된 시인이나 예술가는 못 됩니다. 시 쓰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상입니다. 거기서만 그는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제자로 사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꾸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어 천국에 가서 아무런 상도 없다는 말이냐,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상에 대한 성경구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계 2:10b절은 이렇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이런 구절들을 사실적인 것으로 읽으면 성경을 오해하는 겁니다. 생명의 관을 받는다는 표현이나 상을 받는다는 표현은 메타포, 은유입니다. 어떤 근원적인 세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 근원적인 세계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아주 놀랍고 매혹적이어서 우리를 죽도록 충성하게 만들고, 전력으로 달음질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거기에 휩쓸리게 만듭니다. 칼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휩쓸리는 것이 신학적 실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실존은 곧 제자의 실존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거기에 휩쓸리는 걸 거부할 수 없습니다.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자로서 구도적인 삶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삶 자체가 생명의 관이고, 받게 될 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의 삶 자체입니다.

 

제자로서의 삶에 나타나는 특징을 본문 42절이 실감 있게 묘사했습니다. 제자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는 냉수 한 그릇이라도 상을 잃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멋있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냉수 한 그릇의 영성입니다. 제자의 정체성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냉수 한 그릇도 하나님의 일로 여깁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제자로 사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비록 그것이 냉수 한 그릇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상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제자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소명으로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제자로서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제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삶에서 각자가 찾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제자로서의 삶 자체를 하나님의 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만 집중합니다. 이게 억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제자의 삶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이를 위해서 더 공부하고, 거기에 동의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 제자의 삶에 실제로 집중하고 있을까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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