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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7:15-25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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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4년 7월6일 http://dabia.net/xe/sermon/763910 |
선과 악
롬7:15-25a, 성령강림후 제4주,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폭력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는 조폭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티브이에 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착하게 살자!’라는 문구도 가끔 보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거기에 잘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지만 잘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건 그분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종교적으로 상당한 내공을 쌓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영적으로 예민할수록 선한 의지와 악한 의지의 충돌을 더 심각하게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롬 7:19절에서 자신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토로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자기 훈련이 잘 된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11장과 빌 3장에 따르면 바울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종교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할 정도로 율법에 정통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말하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일까요? 바울의 외침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립니까?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면 구원 문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구원 문제를...’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것대로 대처해나가야겠지만 기독교인으로 살겠다면 구원 문제는 늘 삶의 상수로 두어야 합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구원 문제를 상수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바울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에게 선과 악의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 종교라 할 정도로 율법을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그가 선을 행한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악을 행한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평생 율법만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율법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했기 때문에 율법에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바울의 영혼이 평화로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에게 절망감만 늘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율법을 실정법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는 선과 악의 기준이 실정법입니다. 법을 잘 지키면 선을 행한 거고, 지키지 않으면 악을 행한 겁니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 법을 잘 지킨 거니까 선을 행한 거고, 탈세를 했다면 악을 행한 겁니다. 이처럼 법에 의해서 사회가 운용되는 걸 법치라고 합니다. 법치가 잘 되는 나라를 일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단 법이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는 걸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똑같은 잘못을 했는데도 재판에 가면 어떤 변호사가 변호했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 전관예우가 법보다 힘이 더 있습니다. 법도 역시 사람이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엄정하게 선과 악을 구별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특히 법치의 역사가 짧고 온정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에는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이런 법의 근본적인 한계는 접어두고,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법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사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지만요.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율법과 로마의 법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어쨌든지 법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삶과 양심을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선이 아니라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자신은 양심에 거리낌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얼마나 착하게 살았냐 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비추어볼 거울이 얼마나 투명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울에 때가 끼어 있으면 자신의 악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살이에서는 때가 낀 거울이 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투명한 거울을 가능한 피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오해는 마십시오. 율법이나 실정법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도 롬 7:12절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면 선하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법은 필요한 겁니다. 최소한 법치 사회만이라도 만들어가는 게 옳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말인지 해체하는 말인지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노력과 결단과 희생을 무가치한 것으로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법을, 종교적인 율법이나 정치적인 실정법이나 다 마찬가지인데, 절대화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큰 절망에 떨어진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런 문제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좀더 구체적인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율법을 돈으로 바꿔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대한민국에서는 이건 비유가 아니라 실체나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신념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돈이 선이고, 돈 없는 게 악입니다. 돈이 많아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연히 행복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이 두려워서, 불편하게 사는 게 두려워서 돈에 집착하는 것뿐이지 돈을 통해서 행복하기 때문에 돈을 소유하려는 게 아닙니다. 돈에 집중하면 할수록 거기서 더 큰 절망만 경험합니다.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돈을 어떻게 불릴 것인지,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노블리스 오블리제) 어떻게 질 것인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 것인지 않을 것인지, 걱정거리만 늘어납니다. 돈 쓰는 재미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는 벌면서 살아야겠지요. 다만 거기에 매달리면 바울이 율법에 매달리다가, 내가 젊음을 다 바쳐 노력했는데 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정도밖에 안 되지, 나에게 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거지, 하는 한탄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약하거나 환경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 놓여 있는 문제였습니다. 죄가 그것입니다. 20을 보십시오.
만약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자기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죄로 인해서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 겁니다. 여기서 악(헬, 카키아)과 죄(헬, 하마르티아)를 구별해서 봐야합니다. 악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나쁜 행동(evil)을 가리키지만 죄는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근원적인 힘(sin)입니다. 악은 우리가 노력해서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율법과 실정법이 이런 데 도움이 됩니다. 도덕과 윤리도 도움이 됩니다. 심리적 안정감도 도움이 됩니다. 복지 확대도 도움이 됩니다. 교양인이 되는 것도 약간의 도움은 됩니다. 그래서 유럽의 계몽시대에 사람들은 교육과 복지를 통해서 세상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 1차, 2차 대전을 통해서 이런 계몽의 한계를 인류가 경험했지만 기본적인 생각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노력은 계속해서 필요하긴 합니다. 이에 반해서 죄는 우리가 노력해서 조금씩 줄여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죄의 힘을 약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능력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양심과 율법에 충실했던 바울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힘을 원죄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에 보편적으로, 숙명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는 이 문제를 신화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아담과 이브에게 동산의 모든 과실은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이 다 아십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이브, 이브의 권고를 받아들인 아담은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운명이 그 후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인간 이해가 얼마나 준엄했는지를 이 선악과 설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죄의 지배로 인해서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죄의 능력은 근원적이어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우리가 윤리적으로 실수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자기중심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합니다. 인격 여부에 상관없이, 종교여부에 상관없이 그렇게 삽니다. 숨 쉬고, 먹고, 배설하고, 후손을 이어갑니다. 이것은 윤리 너머의 생존본능에 속합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경쟁합니다. 경쟁은 타인을 거부하는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여기에 악이 일어납니다. 요즘 브라질 월드컵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팀은 조별 리그에서 1무2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16강에서 탈락했습니다. 이런 시합에서는 의리도 없고 체면도 없습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적인 논리로 작용합니다. 저도 테니스 동호회에 나가서 친선 시합을 합니다. 내가 이기면 상대방이 지는 겁니다. 가능한 게임 자체를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이 실수를 하거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서 내가 이기는 게 기분이 좋습니다. 어처구니없이 내가 실수를 해서 지면 그게 기억에 남습니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게 다 죄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악이라는 열매입니다. 목회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끼리도 경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자신을 성취하려고, 즉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에 악이 작용합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진술을 오해,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악의 근원이 죄니까 결국 자기가 한 악한 행위도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잘못을 원죄 탓, 아담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그건 잘못입니다. 악은 당연히 그것을 행한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나 악의 뿌리인 죄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악행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다는 게 아니라 죄의 지배가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을 적당하게 지켰거나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반복해서 선을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자기 안에서 싸웁니다.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24절) 절규합니다.
바울은 완전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힌 신세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했으면 별 탈이 없었겠지만 그는 이것이 구원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끝까지 밀고 나갔다가 죽음의 수렁에 빠진 겁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에게 구원의 빛이 비쳤습니다. 그는 25a절에서 이렇게 또 외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서 악의 뿌리인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예수 믿어도 죽는 거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생명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어도 살며, 살아 있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요 11:25, 26). 단백질 덩어리로 된 몸이 산다는 게 아니라 종말에 그 실체가 드러날 부활 생명을 미래 당겨서 산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믿음으로 죄 문제가 해결된 기독교인들에게는 선과 악의 충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까요? 완전히 선에만 속한 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로 계속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고 살아가는 한 여전히 자신에게서 선과 악이 충돌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겠지만 그것의 뿌리인 죄와 죽음이 해결되었기에 종말의 완전한 해방과 구원을 기다리면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유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집 마당의 텃밭에 원하지 않는 풀들이 자랍니다. 그중에 다른 작물의 몸을 뱀처럼 감고 올라가는 풀도 있습니다. 가는 줄기지만 아주 강해서 그냥 두면 작물을 죽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물을 감고 있는 덩굴을 다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는 작물에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낫으로 덩굴의 밑동만 잘라주면 작물이 일단 숨을 쉴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붙었던 덩굴줄기도 시나브로 조금씩, 또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떨어져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을 띤 악의 덩굴이 우리를 감고 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 악의 뿌리인 죄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바울처럼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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