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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 유예의 삶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162 추천 수 0 2014.08.02 22: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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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3:24-3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4년 7월20일 http://dabia.net/xe/sermon/766154 

jys.jpg 집행 유예의 삶

마13:24-30, 36-43, 성령강림후 제6주, 2014년 7월20일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은 가르치실 때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의 재료는 주로 농사와 목축과 어업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그중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주일학교 어린이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그 씨가 여러 곳에 떨어졌습니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위, 좋은 땅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에 이르는 전체 공관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그만큼 초기 기독교 안에 잘 알려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오늘 설교 본문에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또 하나의 다른 씨 뿌리는 비유를 보도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렸습니다. 좋은 씨를 좋은 밭에 뿌렸으니 당연히 그 씨가 잘 자랐을 겁니다. 나중에 보니 밭에 잡초의 한 가지인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었습니다. 일꾼들이 주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주인은 ‘원수가 우리 몰래 가라지 씨를 뿌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꾼들은 잡초를 당장 뽑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일꾼들을 말렸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29, 3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잡초에 대한 일꾼들과 주인의 생각이 다릅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일단은 일꾼들의 생각이 더 옳아 보입니다. 저희 집에도 작은 텃밭이 있어서 잡초가 작물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압니다. 잔디밭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여름철에, 특히 요즘처럼 비가 자주 오는 계절에 토끼풀을 당분간만 내버려두면 토끼풀이 잔디밭을 뒤덮습니다. 잡초는 눈에 보이는 대로 뽑아내는 게 부지런한 농부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하는 주인의 염려도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농사를 잘 지으려면 부분적으로 어린 곡식이 손상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잡초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순전히 농사의 효율성만 본다면 주인은 틀렸고, 일꾼들이 옳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비유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비유는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어떤 것을 유추하고 깨닫게 하는 가르침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에는 때로 비약이나 모순이 드러나 보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비유인 포도원 주인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 주인은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건 경제 논리에도, 경제 정의에도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라는 점에서 진리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비록 일반적인 농사법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건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가 독자들로 하여금 무엇을 유추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집 주인의 생각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합니다. 이것은 악한 현실에 대한 성서의 관점입니다. 이 세상에 악은 없을 수 없습니다. 악은 존재론적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이 적당하게 처리해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경찰과 검찰이 아무리 철저하게 악을 척결하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요즘 정부가 국가 개조, 국가 혁신, 또는 적폐 일소를 외칩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고 싶다는 충정이야 알겠지만 그런 외침은 그저 정치적인 수사나 포즈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외친다고 해서 적폐가 해소되는 게 아닙니다.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것 외치는 정부 자체가 악할 때도 많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 파출소 입구에 ‘정의사회구현’이라는 팻말을 붙여 놓았습니다. 미국이 다른 일부 나라를 악의 축으로 재단하면서 세계 경찰을 자처하지만 힘으로 세계의 악을 척결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악을 행할 때도 많습니다. 정말 악과 투쟁하려는 사람은 겉으로 큰 소리 치지도 않고 꾸준히 자신을 성찰하는 일부터 먼저 합니다.

 

이 세상의 악은 왜 없어지기는커녕 줄어들지도 않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또는 교육 수준이 낮아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를 성장시켜서 넉넉하게 살게 되면 인간이 악에 기울어지지 않는다고, 또한 교육을 많이 받으면 윤리의식이 높아져서 악을 멀리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악은 경제성장이나 교육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조금 세련되어 보일 수는 있으나 그 중심은 똑같습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경제성장과 계몽을 지상목표로 하는 현대 문명이 인간을 더 악하게 만듭니다. 제가 사람과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걸까요?

 

에릭 프롬은 두 권으로 된 책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이 더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전쟁을 예로 들어봅시다. 옛날 전쟁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상대합니다. 칼이나 창으로 상대를 죽여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기에 전쟁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상대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전쟁이 가능해졌습니다. 지난 2003년에 벌어진 이라크 전쟁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이제는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대량살상 무기를 발사할 수 있습니다. 요즘 격화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와의 전쟁이나 지난 7월17일 298명의 승객을 태우고 우크라이나 상공을 지나던 말레이시아 항공기의 미사일 격추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첨단 문명의 시대에는 전쟁마저 기계화되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은 채 더 큰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무슨 방식으로도 우리는 악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사회과학적인, 또는 사회심리적인 현상만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한 사람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고 말입니다. 남한은 정의로운데 북한은 불의하다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선한데 타종교는 악하다고 말입니다. 선악이원론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을 골라내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비교적 선한 사람이 있고, 비교적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전적으로 선한 사람도 있고,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한 사람의 인격 안에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우리 안에 가라지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는 다 가라지를 갖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라지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안에도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 비유를 거론한 이유는 마태복음 공동체 안에 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좋은 씨가 심긴 좋은 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려서 언제부턴가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가라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본문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발흥한 이단이었을까요?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이런저런 방식으로 교회를 허무는 사람들이었을까요? 남의 말을 나쁘게 전해서 신자들 사이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마태는 당장 뽑아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뽑다가 선한 곡식까지 뽑을 염려가 있으니 가라지를 그냥 두는 게 차라리 낫다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무책임하다고, 너무 소극적이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당장 시시비비를 가려서 버릴 건 버리고 보호할 건 보호해야지 그렇게 내버려두었다가는 공동체 전체가 파괴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오늘의 비유를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악의 현실을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악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건 병을 치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병이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주니까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병은 가능한 대로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병을 고쳤다고 해도 그 이후로 사람이 병들지 않고 사는 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병은 남아 있습니다. 악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사안 별로 판단할 거는 판단하고 제거할 거는 제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겁니다.

 

저는 앞에서 가라지 문제가 사회현상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에 해당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고민을 할 겁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인데 왜 악이 자신에게 남아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나의 악을 극복해도 다른 악이 또 들이닥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보고 믿음 생활에 더 열정을 쏟지만 해결은 되지 않습니다. 악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 되기를 혹시 원하시나요? 그런 삶은 없습니다. 병이 났을 때 의사의 도움으로 치료하듯이 자신의 악을 꾸준히 고쳐나가야 하지만, 악이 없는 상태는 죽기 전까지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악이 남아있다는 건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이며 은총입니다. 우리의 악이 완전히 제거되면 선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은 악의 반대개념입니다. 악이 없는데 어떻게 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 안의 악을 하나님께서 ‘함께 자라게’ 두는 것이 불안하겠지만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추수 때에 가라지와 곡식이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불살라 버리고 곡식은 곳간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마 13:36-43절에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직접 풀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씨를 뿌린 농부를 인자(人子)라고 했습니다. 인자는 세상 마지막 때 세상에 와서 심판주로 활동할 하나님의 사자를 가리킵니다. 그 인자는 집 주인인 농부가 가라지를 불에 사르듯이 악을 행하는 자들을 불에 던져 넣습니다. 이것은 악이 완전히 제거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본문 마 13:41b-43을 읽겠습니다.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이런 성경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마지막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성서의 표상은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들입니다. 불, 구더기, 목마름 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경험에서 생각하는 두려움일 뿐이지 실제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신경도 죽고 의식도 없기 때문에 불이나 구더기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머리카락을 불에 넣어도 뜨겁지 않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여러분이 죽어서 화장을 하거나 땅에 묻히거나 그것 자체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심판 표상을 유치하다거나, 또는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완성에 대한 강렬한 욕구입니다. 가라지와 비슷한 것들은 완전히 불에 살라질 수밖에 없는 원초적 생명을 향한 갈망이자 희망입니다. 그런 생명은 인간에 의해서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게 많아도, 몇 대에 걸쳐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재산이 많아도, 탤런트처럼 잘생겨도 얻을 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명이 완성되는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따라서 심판 이야기는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환희입니다. 비관이나 좌절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인들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에 실감이 가지 않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청년들입니다. 그들은 젊기 때문에 죽음, 종말 등이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느낍니다. 그 다음은 세상의 일에 너무 쫓기며 사는 분들입니다. 좋은 일로도 쫓기고, 어려운 일로도 쫓깁니다. 그런 일로 인해 마음이 늘 분주하기 때문에 심판을 통한 생명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종말, 심판 등은 먼 미래의 일이니 지금은 무조건 즐겁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종말과 심판과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고 살려면 세상살이의 많은 부분에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그래서 뭔가 좀 손해를 보는 거 같고 재미가 없을 거 같고, 그래서 세상에 할 일이 별로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든 다음에나 잘 믿어보겠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까요?

 

각각의 경우에 약간 씩 차이가 있긴 하나 그들이 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원칙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참된 만족이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오늘 비유 방식으로 말씀드리면, 마지막 추수 때 곳간에 들어간다는 사실과 하나님 나라에서 해같이 빛난다는 사실을 삶의 궁극적인 현실(reality)로 깨닫고 받아들이고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설교에 동의한다고 해도 삶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 그리고 우리 내면에 실제로 우리를 힘들게 하거나 최소한 짜증나게 하는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신앙도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요동이 심합니다. 놀라운 기쁨과 평화를 만끽하다가도 언젠가 다시 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이걸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요동이 있더라도 완만하게나마 신앙의 진보가 있으면 됩니다.

 

이런 신앙의 진보를 위해서 오늘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말씀은 다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마지막 때 행하실 생명 심판의 집행이 잠시 유예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집행 유예의 선고를 받은 신분입니다. 집행의 순간은 곧 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 25장이 말하듯이 불을 밝힐 기름도 없이 혼인집에 간 어리석은 처녀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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