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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스트] 무언의 기도

기도자료 리처드 포스터............... 조회 수 2964 추천 수 0 2008.08.25 23: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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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스터의 기도        (리처드 포스터 / 송준인 역   두란노)

무언의 기도

  "오 주님, 제게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무언의 언어를 가르쳐 주십시오."
                                  < 장-니꼴라 그로우( Jean-Nicholas Grou)

     무언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 들어간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무언의 세례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 초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낡은 신발처럼 혀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닳아 빠졌다. 우리는 오늘날 정교한 첨단 원격 통신 장비까지 갖춘, 말이 많은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역사상 다른 어떤 시대보다 말은 적게 하면서도 의사 소통은 훨씬 더 많이 하는 이상한 시대이다.
     시리아의 수도사였던 니느웨의 이삭(Isaac of Nineveh)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많은 말을 함으로써 기뻐하는 사람들은 비록 좋은 말을 하더라도 그 속이 텅 비어 있다. "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무언의 기도는 우리를 말 중독증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훈련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진다는 것은 점점 더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시 62:1)라고 시편기자는 선언한다. 그리고 성 안토니스(St Anthony)의 제자였던 광야의 '교부 암모나스(Ammonas)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게, 침묵의 힘이 얼마나 철저하게 치료하는지 , 또 얼마나 하나님께 온전한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침묵에 의해 성도가 자라나며 ,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 안에 거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다.

     무언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렇듯 다시금 살아나는 침묵으로 나아가게 된다.

경계할 일과 주의할 일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약병에 붙어 있는 주의 사항과 왜 비슷한 경계의 말을 해야겠다. 무언의 기도는 초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숙련의 정도나 전문적인 지식과는 상관없이 찬양의 기도나 묵상 기도나 중보 기도나 다른 수많은 종류의 기도들은 누구든지 다 자유로이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무언의 기도만큼은 다르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소중하지만, 누구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놀랍고 두렵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그리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침묵의 말씀에 귀기울일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다.
     어린 아기에게는 스테이크 대신 우유를 준다. 스테이크가 아기에게는 아무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수습 전기 기술자는 전문기술자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것이 사실 위험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계산을 하려면 먼저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 이치와 같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에 속한 한 가지 사실에 불과하다.
     C. S.루이스는 그의 친구 말콤에게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일찍이 무언의 기도를 시도한 적이 있는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도 할 수만 있다면 무언의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기도를 나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실제 내 능력보다 더 큰 정신적, 영적 힘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언의 기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우리가 '최상의 상태' 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루이스의 말이 옳다. 무언의 기도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사실 영적 지도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늘 어떤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무언의 기도를 권한다 성숙한 믿음의 표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와, 개인적 희생이 크다 해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만이 마음의 소원을 만족시키신다는 살아 있는 확신과 기도에 대한 깊은 만족 등이다. 또 개인적인 능력과 단점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와, 영적인 성취를 자랑하지 아니하는 자유함과, 생의 요구들을 끈기 있고 지혜롭게 처리해 낼 수 있는 입증된 능력 따위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분야에 숙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진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점검하려면 다음 몇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된다.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점점 덜 두려워하고 있는가?"
    "기도의 훈련을 달게 받으며 기도가 내 안에서 발전하고 있는가?"
    "건설적인 비판을 점점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개인적인 모욕에 대해 구애받지 않으며, 내게 잘못한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기를
     배우고 있는가? "

     이런 작은 성찰의 경험을 한 후에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장을 넘기라 걱정하지 말라. 당신 속에서 "우주의 본문을 원문으로 읽고자" 하는 갈망과 각오가 샘솟듯 솟아날 때가 올 것이다.

     주의해야 할 일도 한가지 말하고 싶다. 말없이 하나님을 묵상하다 보면 영적인 세계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초자연적 역사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초자연적 세계의 본질에 대하여 그다지 많은 정보를 주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적인 존재들에는 여러 등급이 있고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식과는 절대로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보를 알려 주고 싶기 때문이다. 당신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 :8)는 말씀을 알아두어야 한다. 또한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 :4) 하신 말씀도 알아두어야 한다. 바로 다음 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영적 싸움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에게 보호의 기도를 배워 실천하라고 권하고 싶다. 루터가 드렸던 기도가 여기에 있다 "주님, 주님의 오른팔로 보호하여 주시고, 죄의 무서운 해악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나는 다음의 간단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언의 기도 시간을 시작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믿사오니 그리스도의 빛으로 에워싸 주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치 시옵소서. 모든 어둠의 영들과 악의 영들이 지금 이 순간 물러가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통과하지 아니하고서는 어떤 세력도 틈타지 못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물론 이러한 기도들은 제안에 불과하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가장 편안한 방법으로 자유롭게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영혼의 큰 기쁨인 천국에 대한 묵상 연습"이라고 부른 이러한 체험은 과연 어떤 것일까? 리지외의 떼레즈 (Therese of Lisieux)는 '천국을 꿈꾸는 것'이라고 했고, 꾸자의 니꼴라 (Nicholas of cusa)는 '하나님에의 응시'라고 했으며, 귀용 부인은 '실재의 기도'라고 했다.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무언의 기도에서는 말이 뒷전으로 물러가고 감정이 전면으로 부상한다. 리차드 로울(Richard Rolle)은 어느 날 예배당에 앉아 있을 때 갑자기 평소에 체험해 보지 못한 기쁨의 불을 자기 안에서 체험했다고 말했다.
     12세기의 걸출한 종교적 정치적 인물이었던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서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주께서 임재 하심을 느꼈다. 후에 되돌아보니 그는 나와 함께 하고 계셨다. 그리고 때때로 그가 오실 것이라는 예감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오시거나 떠나시는 것을 느낀 적은 없었다. "
     요한 웨슬리도 알더스게이트에서 그 유명한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임이후에 이렇게 외쳤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구원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정말로 믿는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사해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
     각각의 경우 감정적인 언어를 주목해 보라. 이런 종류의 기도는 분명히 이성적인 경험보다는 감정적인 경험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처럼 감정을 강조하다보면 혼란이 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감정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훈련받았으며, 감정을 통해 진리와 실재에 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선 우리를 감정적인 면에서 그렇게 격려하는 증인들이 엄청나게 많고 또 평판이 좋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그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단순히 감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무언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체험을 말한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청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명령에 단순한 마음으로 믿음을 갖고 따르고자 애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 : 3) 무언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감정에 대해서 말할 때 의도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내적인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이성이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하나님에 의해 훈련될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변할 수 있다. 무언의 기도는 신앙생활에 숙련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든 교리의 풍조나 감정의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과 육정과 마귀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폭넓은 체험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고양되는 영적인 열정과 성령께서 주시는 확고부동한 확신의 차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한 반복된 시행착오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음성과 교활한 인간들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연합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대답해 왔다. 노리치의 줄리아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온전한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이상과 생각 속에 들어가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 성 프랜시스의 제자였던 보나벤추어 (Bonaventure)는 우리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면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순수한 관계라고 하였다. 또 귀용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체험할 수 있는 궁극적인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이것은 당신 자신의 경험만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묵상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져오지 않는다. 사랑도, 예배도, 당신의 헌신도, 당신의 희생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져오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과의 연합을 실제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에 나오는 연합에 관한 말씀을 상기시켜준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4-5).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 : 1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요 17:21).
     하나님과의 연합은 우리의 개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정체성의 상실을 일으키기는커녕 온전한 개성을 장려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대로 온전한 존재가 된다. 무언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불 가운데 있는 통나무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활활 불타고 있는 통나무는 불과 완전히 연합되어서 타는 동안 나무인 동시에 불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용광로 속에서 횐 빛을 내며 녹는 쇳덩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들은 "우리의 인격과 개성이 하나님의 사랑의 용광로 속에서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다"고 말한다.



두 가지 중요한 준비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이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연합이 순전히 우리 마음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편에서 해야할 두 가지 중요한 준비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마음이다.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사실 사업전체를 가동시키는 엔진과 같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대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무언의 기도가 당신에게 주는 소망의 메시지는 오늘날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과 혼잡한 언어의 정글을 당신이 말없이 헤쳐나갈 필요가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 속에 임재하셔서 당신 속에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 속에 내주하셔서 당신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당신이 책이나 설교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지각과 빛을 주신다는 데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려고 애쓰는 무언의 기도자의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언어를 간단히 깨우친 후에, "무언의 기도는 헌신으로 불타는 사랑이다"라는 월터 힐튼(Walter Milton)의 단순한 고백을 우리는 겨우 하게 된다.
     사랑의 길은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해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황홀한 체험으로 끊임없이 폭격을 당한다면 하나님의 사랑받는자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예수님도 그 말을 지지하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불결함은 하나님과의 연합에 치명적이다. 청결한 것과 불결한 것은 결코 연합될 수 없다. 둘이 하나가 되려면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결한 혼은 순수한 금과 연합될 수 없다. 불순물을 태우고 순수한 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불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귀용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불을 보내시는 이유는 당신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태우시기 위함이다. 그 불의 능력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불은 모든 것을 소멸한다. 하나님은 그 지혜로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곧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신다. "
     앞서 여러 장에서 이미 순수한 마음으로 인도하는 여러 길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여러 훈련과 '영혼의 어두운 밤' 이라는 주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구나 자신 있게 거기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로 정곡을 찌른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유명한 표현이다. "마음의 순수함이란 오직 한 가지만을 소망하는 것이다. "
     우리도 그렇게 하자. 한 가지만을 소망하고, 하나님 외의 모든 충성의 대상들을 포기하고, 하늘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 하나님이 보시는 것만을 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만을 하자. 한 가지만을 소망하자.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그것이 선한 것이며, 그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청결함이다.
마음의 평정을 배워라

      무언의 기도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가 있다. 나는 그 세 가지 단계를 간단히 설명만 해주어도 사람들이 종종 엄청난 도움을 받는 것을 보아왔다.

첫 번째 단계는 전통적으로 '마음의 평정'이라고 불려 왔다.
     그것은 우리가 정신이 통일되거나 마음이 온전히 하나 될 때까지 그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뜻한다. 바실 페닝턴(Basil Pennington)은 그것을 '집중적인 기도' 라고 했고, 수 몽크키드(Sue Monk Kidd)는 '임재기도' 라고 했으며, 옛 궤이커 교도들은 '침잠'이라고 하였다. 그 모든 말은 다 같은 체험을 말한다. 우리가 있는 곳에 진정으로 우리가 존재할 때까지 모든 산만한 생각들을 내버린다는 생각은 동일하다.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방법이 하나 있다. 먼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모든 긴장과 걱정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 방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라. 아마당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그곳에 와 계시기 때문이다.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정신이 산만해지면 그것을 다만 아버지의 품안에 올려 드리고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기라.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풀어 버리는 것이다. 억제란 내리누르는 것이며 제지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마음의 평정이란 내버리는 것이며 풀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어정쩡한 심리적 긴장 해소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장 삐에르 드 꼬싸드 (Jean-Pierre De Caussade)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자기 포기" 즉 적극적인 굴복을 말한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고 또 모든 것에서 자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기만하면 정작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과의 동행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심적 갈등과 좌절까지도 마치 태양 앞의 눈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녹아 없어지고 만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폭풍우까지도 하나님께서 "평안하라, 고요하라" 하시면 잠잠해질 수 있다. 우리의 시끄럽고 복잡한 마음도 하나님의 큰 침묵 속에서 잠잠하게 할 수 있다.
     한가지 경고하고 싶은 말은 이러한 마음의 집중은 처음부터 쉽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마음의 집중과는 거리가 먼 찢어지고 분열된 단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말로 마음을 모아 한마음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순간 고통스럽게도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얼마나 나누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로마노 가르디니
(Romano Guardini)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마음을 진정 시키려고 애를 쓰면, 불안의 강도는 두 배로 높아진다. 그것은 밤중에 잠자려고 애를 쓰면, 낮 동안에는 상상도 못했던 힘으로 근심과 욕망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이러한 사실에 낙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결과나 보상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서 무언의 기도시간 전체를 바칠 준비를 해야만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아낌없는 사랑의 헌물로 "기꺼이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겉으로는 어리석은 낭비처럼 보이는 그것을 받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 속에 더 깊이 들어가게 하신다. 가르디니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내적인 통일성이 얼마나 결여되어 있는가를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얻은 셈이다. 왜냐하면 흐트러지지 않는 그 중심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고요의 기도

     마음의 평정이 주는 하나 되게 하는 은혜에 점차 익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무언의 기도의 두 번째 단계로 안내 받는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것을 '고요의 기도'라고 불렀다.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통해 마음속의 온갖 방해 요인들과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들과 의지를 박약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내버렸다. 하나님의 사랑과 찬양의 은혜가 대양의 파도처럼 우리를 씻어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내적으로 하나님의 움직임에 민감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경험한다. 우리의 존재 중심에는 요동하지 아니하는 고요함이 있다. 그 경험은 단지 침묵한다든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심오한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고요함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고요함이다. 우리의 마음이 비뚤어져 무조건 풍부한 것. 많은 것만을 찾을 때보다 마음이 고요할 때 우리는 더 살아 있고 더 활동적임을 깨닫는다. 우리 속 깊이 있던 그 무엇이 깨어나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바짝 긴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방심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상태가 된다.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마음의 응시가 있다. 그것은 때때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님의 뜨거운 임재를 체험하며 주님의 가까이 계심과 주님의 사랑을 느낀다. 제임스 보스트(James Borst)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주님은 내 진정한 자아에 더 가까우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훨씬 더 사랑하신다. 주님이 내게는 '아빠'요, 아버지시다. 그분이 존재하시기에 내가 존재한다. "
     변화 산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드리운 구름 사이로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 : 5). 그러므로 우리가 귀기울이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자. 우리의 마음과 뜻과 영과 뼈와 근육과 힘을 다해 귀를 기울이자. 우리의 전 존재를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자.
     프랑소아 페넬롱(Francois Ftnelo듯은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의 성령이 감화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은사들을 주실 때에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라. 당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님께 귀기울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모든 외적이고 세상적인 사랑과 우리 속에 있는 인간적인 생각들을 침묵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께 귀기울이기 위해서는 정말로 모든 '외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을 조용히 잠재우지 않으면 안된다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은 이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이제 온통 고요 속에 싸여 있는 우리 집"이라고 묘사했다. 이 짧은 표현 속에서 그는 모든 육체적 감정적·심리적인 감각들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기다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르치는 영을 받게 된다. 나는 은혜로 이 말을 한다. 가르치는 영이 없이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시는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도 우리의 마음을 다만 완고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유순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하기 쉽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려 하면, 하나님의 가르침은 생명이 되고 빛이 된다. 물론 목표는 이런 청종하는 기도의 자세를 일상적인 생활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일은 절대로 금방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속삭임에 민감해지려고 애쓰게 된다. 또 모든 일상 생활의 움직임들, 가령 수지 결산을 맞춘다거나 마룻바닥을 진공 청소기로 청소한다거나 이웃사람들이나 사업상 관계되는 사람들을 찾아 보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속삭임에 주의하게 된다.

영적인 신비 체험

     무언의 기도의 마지막 단계는 영적인 신비 체험으로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 하시는 일이라는 점에서 앞서 말한 두 단계와는 아주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의 책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 하시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열어 놓고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그 외 신비 체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다. 당신은 분명히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거기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던 그 경험(고후 12:1-5)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과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티버 강에 있는 오스티아성에 있을 때 경험했던 아름다운 일에 대해서는 그만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그들 두 사람은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아름답게 단장된 정원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후에 어거스틴이 기록하기를 "우리 마음의 입으로 천국에서 흘러 넘치는 주님의 샘, 생명의 샘을 갈망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은 말을 잃고 들림을 받았다. 그들의 체험을 들어 보자.

점점 더 높이 올라가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씩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지나쳤습니다. 심지어 해와 달과 별들이 매달려 지구에 빛을 비추고 있는 그 하늘까지도 지나쳤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위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솜씨를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묵상하며 이야기했습니다. 마침내 우리 자신의 영혼이 있는 곳에 도달하였고 우리의 영혼 너머에 있는 결코 다함이 없는 무한의 세계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주께서 이스라엘을 진리의 양식으로 영원히 먹이시는 곳입니다.

     이런 영적인 황흘경에 들어간 이상한 체험을 이야기한 후에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 영의 첫 열매를 그곳에 남겨 둔채 말의 시작도 있고 끝도 있는 현실로 돌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
     어거스틴의 체험은 분명히 이상하기는 하지만 독특한 것은 아니다. 17세기, 화란의 경건주의자였던 데오도르 브라겔(Iheodore Brakel)의 증언을 들어 보자.

나는 너무나 기쁜 상태가 되었다. 나의 생각은 하나님께로 향했고 내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하나 됨을 느꼈다. 하나님의 존재 속으로 나 자신이 빨려 들어감을 느끼는 동시에 내 마음은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 경험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나의 영혼은 이삼 일 동안 완전히 하늘나라에 있었다.

     황흘경은 최고도에 달한 무언의 기도이다. 그러나 무언의 기도 생활에 있어 인정받는 권위자들조차 이 황흘경을 그들 생활의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지나가는 일시적인 체험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당신이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괜찮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작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아실 때에만 주신다. 혹시 무언의 기도에 대한 이런 차원 높은 이야기가 당신에게 실망을 줄지도 모르겠다. 또한 당신은 그런 체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적인 황홀경의 높이를 측정하려고 애쓰기는커녕 다만 그 다음 주를 잘 보내기만을 소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감정 상태가 그렇다 해도 낙망하지 말라. 나도 이 글을 쓰면서 바로 그런 느낌을 가졌었다. 그것은 내가 일신된 진리를 행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안된 일이지만 우리 모두는 수 차례 우리의 목표에 미달하곤 한다. 귀를 기울이는 기도를 시도하다가도 종종 싱크대에 놓여 있는 씻지 않은 그릇들이나 내일 있을 화학시험에 대한 찜찜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사소한 일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우리는 우리를 성령의 성찬에 초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은혜와 자비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언의 기도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려의 말을 하고자 한다. 우리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때가 올 터인데 그래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말없이 기도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그 영광이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인생 초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게르하르트 테르슈터겐(Gerhard Tersteegen)의 말대로 "지금도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를지켜 보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기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 귀기울인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이것이 노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용의 문제임을 잘 알고 있기에 꼭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 말은 제가 너무나 행동 지향적이고 성과 지향적이며, 제게는 행동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더 쉽다는 뜻입니다 제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려면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번 해보고 싫습니다. 주님의 임재의 빛 속에서 침묵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 속에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지금 그 일을 시작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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