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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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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10절.
1절-10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기도 올립시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불러주시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시간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타락한 인간들 속에는 정확한 것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옳은 것이 없습니다. 보면 전부는 시간이 지나면 변질 되고 변동 되고 불에 넣으면 타질 것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정확한 것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것만이 옳은 척도요 선의 척도요 사랑의 척도요, 하나님의 것은 정확하고 흔들림이 없고 영원한 것이 분명합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들 속에 생각하고 가치판단을 따지는 평가성의 기준이 전부 다 타락이 되어 있고 정확하지를 못합니다. 외부적인 가견적인 것을 보고. 활동적인 것을 보고, 외모 모양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판단 평가를 잘 내립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제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 정확하게 깨달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옳은 기준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들이 이 땅에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기준을 하고 모든 것을 판단 평가를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도와주시고, 비록 나그네 생활을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우리의 속에 가득 채우고 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 말씀을 주시는 방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에 어떻게 임하느냐?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로 말씀이 임하는 방편을 알고 있어야 만이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볼 때에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그랬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하실 때에 직접 하시는 말씀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 그 말씀을 받는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과 인격적 동행을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을 한 사실이 있지요?
옛날 구약시대 창세 직후 때의 사람들은 사람이 참 오래 살았어요. 아담 하와가 타락을 했어도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무두셀라. 몇 살까지? 969살까지 살았거든요.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성경이 없이 그 말을 듣는다면 이게 옛날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할머니들이 구수하게 꾸며서 해주는 소리처럼 들리거든요.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인간의 나이를 볼 때에 ‘인간이 궁극적으로 영원한 존재로구나’ 하는 이걸 보여준단 말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고작 살아봐야 100살이나, 아니면 6, 70살이나, 아니면 일찍 가고 싶으면 낳자마자 가고. 이런 걸 보면, 인간이 생활을 하는 거라든지, 빨리 죽는 거라든지, 병이 들고 늙고 고생고생하며 사는 거라든지 이걸 보면 인간이 짐승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지요? 아무 것도 없는 거라요.
그럼에도 인간이 존귀 가치가 있습니까? 왜 그럴까요? 돼지는 일 안 하고 먹고 잠만 자고 가만히 있어서 살이 쪄야 주인이 좋다고 하지 사람처럼 살이 안 찌고 있다면 주인이 싫어할 거야. 돼지주인은 돼지가 많이 먹고 잠 잘 자면 좋아하는 거거든.
그걸 볼 때에 우리 인간은 그것보다 못하지. 그렇지 않아요? 우리 인간이 뭐 편할 날이 있어야지. 세 끼를 먹으려면 나가서 고생을 해서 돈을 벌어야 쌀을 사다 밥을 짓고 하는데 돼지는 입는 거 걱정합니까? 돼지만 아니라 모든 짐승이 그래요. 그런 걸 생각하면 사람이 짐승보다도 못해요.
또 더한 것은 짐승들은 아파도 별로 고통스러움을 못 느끼더라고. 그걸 알 것 같으면야 말을 한 테지. 돼지 자기들끼리 모여서 ‘나 다리가 아프다’ 그럴까? 그런 면을 가만 보면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인간이 가치가 있다고 그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러느냐? 왜 그럴까? 짐승보다 못한 것이 수두룩한데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러거든.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한 마디로 말하면 인격이 있기 때문에. 타락된 인격이지만 인격이 있기 때문에. 말하고 창조력이 있고 생각하고. 이게 그렇게 귀중하다 그 말이요. 이런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가치판단 평가력 이해타산을 내릴 줄 아는 게 인간이니 그렇게 귀하단 말이요. 존귀하단 말이요.
짐승들은 아무리 기뻐도 북 치고 장구치고 두드리고 노는 거 없잖아요. 그러나 인간은 그런 느낌성이 있기 때문에 두드릴 게 없으면 간장 깍쟁이라도 두드리고 논단 말이요. 짐승들은 그런 게 없어요.
이런 것은 하나의 가견적인 거, 눈에 보이는 거고,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면으로 파고 들어가면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고상한 게 더 많습니다. 참 많아요.
눈에 안 보인다고 없다고 부정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인간의 양심이라든지 마음이라든지 이런 건 눈에 안 보이지요. 의사선생이 수술을 해도 그건 안 보일 거야. 그런데 그런 게 들어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고상한 평가를 내리게 하거든.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인간은 이 세상을 끝나고도 영원무궁한 궁극적인 그 세계를 기준하고 거기다 맞춰놓고 인간을 지었다고 하는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이것은 언제 날아가도 다 날아갑니다. 안 날아갈 게 하나도 없어요. 변질 안 될 게 없고. 다 날아가게 돼 있어요. 금은? 금도 마지막 날에는 다 날아가지요. 다 날아가요. 진짜는 신령계에 있다. 천국에 있다. 거기는 변질 변동 변함이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실상의 그 세계에서 살 능력 지력 기력, 궁극적 결과에서 나로 나타날 그 마음 그 정신 그 도덕성을 현재적으로 자기 속에 집어넣고 살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의 현재의 현실에서도 그 마음은 변하지를 않지요. 확실하지요. 변하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그 사랑을 가지고 인인관계 연관관계성을 맺어나가면 그 우정 그 부자지간 그 모녀간 그 부부 간이라든지 모든 연관관계성은 거기(천국)까지 간다 그 말이지요.
그 세계는 남녀가 없고 중성이라는 거. 천군천사는 중성입니다. 만일 거기도 천사가 남성 여성의 성으로 돼 있다면 거기서도 어른 천사들이 결혼을 해서 아기천사를 낳고, 자손들이 번식하고 그럴 거란 말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도 남성적으로 돼 있으니까 어머니 하나님도 있을 거란 말이요. 그러면 자꾸 자꾸 올라가면 한도 끝도 없지. 하나님 위에 또 자꾸 올라갈 테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을 했는데, 그 동행성이 유형적 동행이냐, 무형적 동행이냐?
여러분들, 하나님과 동행합니까?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진리와 동행합니까? 진리와 동행하는 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요 주님과 동행하는 건데 그게 무형적입니까, 유형적입니까? 무형적이지요. 유형적은 눈에 보이는 거니까.
유형적 동행이라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동행성을 인식을 할 수 있겠지만 무형적 동행은 인식을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남이 볼 때 안 보이니 인식이 안 되고. 그러나 자기가 인격적 동행이라면 인식을 할 수가 있단 말이요. 느낄 수가 있고. 느낀다는 말의 의미가 아무도 없는데 내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닙니다.
왜 그런 얘기가 있지. 어떤 사람은 손을 이렇게(옆 사람의 손을 잡고 걷는 것처럼 빈손을 쥐고 걸음) 하고 다닌대요. 왜 이렇게 하지요? 예수님과 같이 걷는다 그 말이지. 손을 잡고 간다 그 말이지.
우리는 그런 유형적 동행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네 속에 네가 내 속에.’ 이게 뭐요? 인격적 결합적 동행이거든요.
어때요? 집사님? 결혼하기 전에 한참 사랑할 때에 무형적 동행이 되지요? 말하자면 사랑하는 이가 자기 속에서 늘 생각이 들고, 맛있는 거 있으면 갖다 주고 자기는 안 먹고 그런 게 있거든. 그리고 더더군다나 사는 소원 목적성이 같다면 무형적 인격적 동행이 되는 겁니다.
인격자이신 하나님과 인격적 무형적 동행을 하면 세상을 초월하는 초월적 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왜 이런 게 있지요? 집에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길거리 술집에 마네킹 같은 여자가 빙 둘러서서 오라고 손짓을 해도 그거 쳐다볼 새가 없지. 그런 것처럼 세상을 초월하는 초월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초월적 신앙이란 예를 들면 아주 재미있고 깨가 쏟아지는 일을 할 때에 밥 먹는 시간이 넘었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밥시간을 넘기는 그런 게 있어요, 없어요? 많이 있어요. 컴퓨터 앞에 한 번 앉으면 이건 낮 시간이 지나는 건지 밤 시간이 지나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앉아있대. 그래, 하나를 딱 붙들고 그게 깨가 쏟아지면 모든 것이 초월이 돼버린다. 좋은 것을 붙잡고 가다 보니 모든 것이 초월이 된다 그 말이요.
그러나 초절은 의식을 하면서도 일부러 꺾는 거. 그건 안 되지요. 우리는 초월적 신앙이라야 되는 건데, 바쁘다 보니 뭘 못하는 거. 초절은 일부러 끊어버리는 거.
그리고 속에서 목구멍까지 올라오는데 ‘참자, 참자’ 하는 그거는? 극기. 극기는 하면 할수록 속에서 다져지기 때문에 나중에 터지게 돼 있어요.
여러분들, 처음에 슬쩍 한 번 건드리면 참습니다. 두 번을 건드려도 참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연속해서 건드리면 ‘참자, 참자, 참자’ 하는 이것이 속에서 압축이 되지요. 계속해서 여러 번 건드리면 그 압축된 폭발성이 팍 터지면 엄청난 세력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극기는 금물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극기로 하지요. 속에는 부글부글하고 있지요.
그래서 전 그래요. 좋던 싫던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싫은 게 자꾸 눈앞에 나타나고 애를 먹이고 꼴 보기 싫고 듣기 싫고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런 게 있으면 ‘야, 이거 다 지나가는 거다. 이거 다 세상 거다. 이건 다 지나가는 거다. 마음대로 해라’ 그래놓으면 속에서 뭐가 올라오지를 않아요. 그러나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 할 때 옳지 않은 것을 말할 때는 확 올라오는 그런 게 있지요.
옳은 말을 순하게 할 때도 있고, 옳은 말을 강하게 할 때도 있고 하는 건데, 강하게 할 때인데 웃어가면서 슬슬 순하게 하면 그것도 효력이 없어요. 북채를 쥐고 북의 가운데를 꽝 때리면 가장자리까지 울리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에 있듯이 앉을 때가 있고, 밀어낼 때가 있고, 주울 때가 있고, 던져버릴 때가 있고. 적재적소에 때라서 말을 한다는 게 지혜로워요.
여러분들, 비오는 밤에 우뢰가 울고 번개가 번쩍번쩍 하면서 ‘꽝’ 해야 번개 맛이 있습니까, 시계 종소리 모양으로 음악소리가 나면 번개 맛이 있을까요? 번개는 번개답게 쳐야 세상에 안 믿는 사람이라도 죄 지은 사람들은 두렵고 하는 그런 게 있는 거거든요.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초월적 신앙을 할 수 있어야 된다.
‘말씀이 나에게 왔다’ 할 때 발설된 그 말이 아니고, 다시 말씀드리면 철학자 필로도 로고스라는 말을 썼고, 성경에도 말씀이라고 할 때 헬라어로 로고스인데, 영어로 하면 보이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로고스는 메아리쳐 울리는 그 소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인격성을 말한다 그 말이요. 자기에게 인격적으로 임하는 것.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든지 듣든지 어쨌든 보이지 아니하는 무형적인 세계에 민감성을 갖도록 해야 됩니다. 자칫 잘못해서 물질성적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생각하게 되면 말씀의 깊이를 알 수가 없게 돼요.
소리는 들리면 그냥 날아가지요? 없어져 버리지요. 이게 예가 될 런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이런 거는 심부름을 시킨 그 때가 지나면 그게 그냥 소멸이 돼버리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인격적 결합이 될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의 심부름적인 말은 인격적 결합이 아니고 그냥 소리로 끝나버리지만, 그러나 사랑에는 인격적 결합이 되는 거거든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뭐지요? 불신자들에게도 제일 좋은 거? 사랑이지요. 사랑이 확실히 좋기는 좋아. 사랑은 모든 걸, 죽음까지도 초월을 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참 요새는 결혼을 해도 사랑을 가지고 결혼을 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조건을 달지. 그게 무슨 인격적 결합이요. 그러니까 이거는 물물교환으로 사는 거야. 당신이 번 건 당신 주머니로 들어가고, 내가 번 돈은 내 주머니로 들어오고. 이건 합칠 수가 없어. 이러면 밤에는 무슨 결합이야? 인간은 인격적 결합이라야 되는 거다.
불신자들은 너나 나나 다 세상적 결합이지요. 세상적 결합은 언제든지 환경에 동요되고 동화되기 때문에 환경이 휙 바뀌면 ‘네가 언제 날 사랑했느냐’ 하고 환경에 의해서 싸우고, 환경이 좋으면 그럴 수 없이 좋고, 환경이 나쁘면 지옥보다 더하고. 유형적인 눈에 보이는 세상환경에 따라서 젊었을 때는 팽팽하니까 사람 좋다고 그러고, 나이 들어 쭈그러지면 싫다고 그러고. 그게 뭐요? 변동적인 물질성을 가지고 사랑을 하면 그렇단 말이요.
우리 기독자들은 ‘유형적인 것은 다 변질되고 다 지나가는 거다’ 하며 변질 변동되지 않는 것으로 서로가 자기 속에 채우고, 변질 변동되지 않는 것으로 인인관계 연관관계성을 가지고 그러면 어떤 사건 환경이 오더라도 찌그럭 뻐그럭 안 하지.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바로 갈 수가 있고, 인격적 결합으로 모든 사건 환경을 헤치고 갈 수가 있는 거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온다고 하는 건 인격성을 말하는 겁니다. 인격적 결합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기억하면서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체가 말씀화 된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자체가 그렇게 돼버렸어.
‘오늘 저녁에는 신랑이 반찬을 좀 싱겁게 하라고 그랬지. 싱겁게 만들면 내 입에는 안 맞지만 싱겁게 만들어야지’ 라고 한다면 이건 결합이요, 기억하면서 생각하면서 하는 거요? 기억하면서. 그러나 인격적 결합은 자기 입맛을 남편의 입맛으로 바꿔놓고 음식을 만들 때 ‘내 입에 맞구나’ 하게 만들면 남편이 집에 와서 먹을 때도 ‘아, 내 입맛에 맞구나’ 이렇게 되는 거지요 예를 들면 그런 거지요.
그리고 우리가 ‘말씀’ 할 때 발설자의 말을 붙잡느냐, 아니면 발설자의 인격을 붙잡느냐? 에녹은 말씀을 붙들고 기억하면서 산 것이 아니고 발설자의 인격을 찾은 거라 그 말이요.
이렇게 말하려니 또 예를 들어야 하겠지요?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당신에게 옷 사주고 집 사주고 맛있는 거 잔뜩 사주고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그런다면 이 말 속에는 인격을 찾아볼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만이 인격의 말이지요? 인간은 인격성자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만이 인격성이 있는 말이 됩니까? 앞의 그거는 물질성적인 말이지요. 그런 말에는 인격이 안 들어있어요. 그건 사랑을 안 해도 누구든지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와 애정적 결합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거기에는 물질 이전에 인격자로서의 가져야 할 도덕성이 들어있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는 인격을 찾아라. 발설자의 인격을 찾아라.
목사가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병 낫고, 장사를 해도 만사형통이 되고, 공장을 해도 만사형통이 되고, 뭐든지 하면 만사형통이다. 그러니 예수 믿으시오’ 그런다면 이 말이 물질적인 말입니까, 인격적인 말입니까? 이 말 속에 하나님의 인격이 없어. 그럼 뭐가 있지요? 그 말을 하는 목사 속에 뭐가 잔뜩 들어있지요? 세상이 잔뜩 들어있고, 불에 타질 게 잔뜩 들어있고, 교인들이 돈 안 갖고 오면 다 쫓아버릴 그런 성분이 잔뜩 들어있고, 돈 많이 갖고 오면 장로 시켜주는 그런 것도 들어있고, 사기성이 들어있고. 이거는 인격이 아니요. 그런데 오늘날 그런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지. 끼리끼리 모인다 그 말이지. 인격을 찾아볼 수가 없어.
신앙에는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5단계 6단계가 있는데, 6단계인 최고 단계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6단계는 성도가 무형적 인격적 동행생활입니다. 그 다음에 5단계는 어떤 건가 하니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억하면서 사는 그런 교인들이 있어요. 이거는 어디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가 하니 보수적인 신앙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보수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데 머물고 있으면 안 돼요. 인격적 결합적으로 들어가야지 말씀 따로 자기 따로 그건 안 돼요.
그 다음에 4단계는 습관적인 신앙이 있어요. 습관적 신앙은 교회에 오기는 왔는데 뼉다귀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믿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교회의 일에 동참성도 없고 그냥 왔다 갔다만 합니다. 그런 교인들도 많아요. 우리는 일반적인 그런 습관적이라기보다도 속에 간절성이기 때문에 그 간절성에 의해서 그게 자기 인격이 돼가지고 습관적으로 자동적으로 주일을 지키고 하는 거지요.
3단계는 목적만 가지고 사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건 뭐냐? 천당만 가겠다는 겁니다. 딴 건 아무 것도 없는 거지. 천당만 가면 된다. 또 2단계 신앙이 있는데 이거는 ‘언제든지 잘 살아야지. 세상에서 언제든지 잘 살아야지’ 그런 신앙이고, 이제 1단계는 제일 밑인데 이거는 예수 믿어도 별 볼일이 없다는 겁니다. 믿기는 믿는데 예수 믿어도 별 볼이 없다 그 말이지. 교회에 나오니까 남들이 그 사람을 믿는 걸로 봐주는 거지 자기는 믿기는 믿는데 믿어봐야 별 볼일 없더라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지? 이 사람은 뭘 바라보고 예수 믿은 거지? 세상 것을 바라보고 믿은 거지요. 우리는 그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된다.
발설하신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어도 딴 것을 사랑하고 살게 됩니다. 발설자와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는 말씀을 들으면서 비판적이고 냉철하고 아주 명철해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그게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자기 속에 비판성이 생겨요. 냉철해지고 명철해지고 그래요.
예수 믿는 사람은 명철하고 지혜롭고 총명하고 도덕성이 아주 고상해야지. 예수 믿어갈수록 그래야 돼요. 믿기 전에 개망나니로 살았다면 예수 믿으면서 하나 둘 그게 뜯어 고쳐지면서 도덕성으로 올라가요. 일반 도덕성보다 고차원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도덕성이 기준이니까.
인간이 도덕성이 자꾸 올라가면 생각 판단 평가 수지타산, 말하는 거, 양심 가지는 거, 계산을 내는 거 전부 다 아주 고상한 겁니다. 최고 고상한 것을 가지는 거지요. 그러니까 물질세계의 것을 놓고 아옹다옹 싸우거나 그것 때문에 살지를 않는다 그 말이요.
오늘날 보면 물론 여기 오는 분들은 안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사람들이 생각할 때도 도무지 이해 못할 짓을 한단 말이요. 아니, 눈에다 안수하고 눈을 손가락으로 파면 눈이 망가지지 눈이 낫는 거요? 마귀 쫓는다고 주먹을 쥐고 가슴을 때리면 사람이 죽는 거지 귀신이 나갑니까? 귀신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안 나갑니다. 기도원에서 안수한다고 사람의 가슴을 때리면 사람이 아프다고 그러지 귀신이 아프다고 그래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 이치도 아닌 것을, 말도 되지 않는 것을 공공연히 하고 있어요.
그거는 기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에요. 기독교는 기준을 하나님 기준에 맞춰놓고 성질도 고쳐지고 취미도 고쳐지고 소원 목적도 전부 다 하나님 것으로 고쳐서 넣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환난 바람이 아무리 몰아붙여도 하나님이 끄떡없는 이상, 자기가 하나님을 닮은 이상 자기도 끄떡없는 거지요. 그렇지 않아요. 성경에 보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 타져 죽었습니까? 타져 죽지 않았단 말이요.
그리고 성경에 이런 말이 있지요? ‘네가 나를 사랑을 하되 네 부모나 처자식이나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해라.’ 그러면 이 말씀이 부모나 처와 자식을 돌아보지도 말고 거들떠보지도 말고 내버리라는 그 말인지? 왜 그 말씀을 했는지? 왜 주님을, 왜 진리를, 왜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느냐? 왜 그럴까? 그럴 것 같으면 뭐하려고 하나님이 남자 여자를 붙여놨을까? 붙여놓을 때는 사랑을 하라고 한 건데, 그런데 ‘네 아내보다 네 남편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 왜 그 말씀을 했을까 그 말이요.
교회에서 금요일 날 철야기도 잘 시키지? 사람은 밤에는 잠을 자야 되고, 부부는 기도하는 외에는 떨어지면 안 되지요. 밤낮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주신 것도 밤에는 자라 그 말이지요. 밤은 왜 밤이냐? 일하지 말라 그 말이지. 캄캄하면 일을 못하는 거고, 밤을 준 것은 일을 하지 말고 자라 그 말이지. 또한 낮을 준 것은 밝았으니 일을 하는 거지. 성경에 주님이 뭐라고 그랬지요? 낮이니 일한다고 그랬지. 일반적으로 따져본 겁니다.
그런데 가정에 남편이 있고, 살림 사는 여자가 교회에서 철야한답시고 밤에 교회에서 철야를 하는지, 기도하다가 자는지, 자다가 깨어나서 우물우물하고 하는지 몰라도 밤에 집에도 안 들어오고 그러고 있으면 어느 남편이 좋아하겠어요. 이건 법칙을 어기고 사는 거야. 그래서는 안 되거든요.
그래, 아닌 말로 철야기도를 하면 밤에 한숨도 자지 않고 해야 하는 거지 저녁에 잠깐 하면 그게 무슨 철야기도야. 밤새 기도하고 집에 가면 낮잠 안 자고 배겨? 그러니 일이 돼야지.
그리고 늦은 밤에 교회에 오다가다 나쁜 놈 만나면 끌려가게 되고. 그러니까 그런 짓하지 말라고 인신매매단을 하나님이 허용해 놨는지도 모르겠어. 밤에 돌아다니면 좋지 않아요. 신앙적으로 볼 때도 진리가 밤이면 껍적거리고 돌아다니면 안 돼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지 몰라요.
왜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그랬나? 물론 가족들이 같이 있으면서 가치판단 평가성을 내릴 때에 ‘이것보다 이것이 더 좋다’ 하는 그걸 자기 속에서 내릴 수가 있지요. 그래서 진리는 인간을 살리는 거거든요. 살리되 영원히 살린단 말이요. 그러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교훈의 도를 받아서 집안 식구 모두가 최고의 귀중하고 영원한 것을 향해 함께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한 집안 식구 모두가, 부부가, 처와 자식 모두가 하나님 말씀의 사랑으로 올라가면 가족 모두가 어떻게 돼요? 모든 식구가 하나님 마음을 닮느니 만큼 그 가정은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행복하고 평안하고 그렇지요.
이걸 역순으로 돌려서 예를 하나 들겠어요. 온 집안 식구가 어린아이부터 부부간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가 ‘돈 돈’ 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면 이거는 누구보다 뭘 더 사랑한 거지? 사람보다 돈을 더 사랑하니 그 집안 꼴이 돼요, 안 돼요? 집안이 폭삭 망하지요.
그래, 성경말씀에 ‘집안 식구들보다 돈을 더 사랑하라’ 그러면 좋겠습니까, ‘집안 식구들보나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그래야 좋겠습니까? 어느 게 더 좋겠어요? 후자. 확실합니까?
교훈을 받는 것도, 교회 가는 것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서 오는 거고, 주님을 더 사랑해서 오는 거고, 진리를 더 사랑해서 오는 거고. 너나없이 다 그런다면 이거는 상당히 평안하고 가정천국이 이루어지는 거지요. 심령천국이 이루어지고, 심령천국이 이루어지면 가정천국이 이루어지고.
그런데 식구 중에 하나가 자꾸 세상 쪽으로 내려가려고 그러면 의사적 대립이 생기지요. 그런다고 해서 천국 쪽으로 향하는 내가 그걸 따라서 세상 쪽으로 내려가면 안 되지. 세상 쪽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느냐 하면 그 사람도 죽고, 나도 죽고 둘 다 망해버리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천국 쪽으로 올라간다면, 그러니까 성경에 이런 게 있지요? 어느 한 쪽이 믿으면 다른 한 쪽이 믿을 가능성이 있지요.
사람들이 기독교를 진정으로 바로 이해를 한다면 내 생각에는 안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기독교를 떠나서 유교나 불교를 한 번 생각을 해봐요. 그 종교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에 처음엔 아무도 안 믿었지만 그 도에 혹해가지고 퍼진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기독교는 그 이상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도이기 때문에 이 기독교의 교훈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사람이 존재야 하나님은 되지 않지만 마음이 하나님을 닮는단 말이요. 하나님의 도덕성을 닮아요.
이게 기독교요, 이게 기독교의 교훈이요, 이게 기독교의 운동인데 오늘날 기독교는 개판으로 돼버렸어. 그러니까 목사들도 보면 다는 아니겠지만, 훌륭하신 분들도 많이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 세상을 가르치고 있어요.
세상을 위주로 하고 예수 믿게 하면 이거는 전부 다 망하는 겁니다. 끝내는 불타지고 망해요.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거는 신앙사기 다 당하는 거요. 자기 평생 신앙사기 다 당하는 거요.
성경에는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고 그랬지요. 그런 자가 바로 이단이고 사기꾼이고 거짓 목자고 도둑이고.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런데 세상 법은 영적으로 못 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잡아가지 못하지? 못 보니 그래요. 우리는 그런 걸 보는 눈을 가져야 되겠지요?
그리고 ‘부모 남편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주님을 더 사랑하라’ 하신 것은 알고 보면 그 말씀을 하시는 주님이 당신을 좋게 하라는 뜻에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말씀을 하시는 그 분의 속 중심은 ‘그래야 만이 너에게 평강이다’ 하고 사람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까? 후자. 확실합니까?
그리고 우리 기독자들은 생활하는 면에도 다 자기의 분수가 있단 말이요. 이 넥타이가 얼마짜리인 것 같아요? 2, 3천원이면 찍 하지. 그런데 스카프 손수건 하나가 얼마 해요? 오만 원짜리는 값이 적어. 그 비싼 손수건을 얼굴에 탁 얹으면 땀이 저절로 싹 닦이고 얼굴이 환하게 분칠이 딱 된다면 몰라. 그러나 아무리 비싸도 땀 닦고 나서 안 빨면 썩어서 냄새나고 그럴 텐데 세상에 원. 하나님께서 책임추궁을 할 것 같아요. 옷도 그렇고, 머리 파마하는 것도 그렇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내 집이 아무리 잘 살아도 못 사는 이웃집을 생각을 해야 되고. 그렇지요? 일반적으로도 못 사는 우리나라 국민을 생각을 해야 되고.
예수 잘 믿으면요 예수 잘 믿는 것에서 애국 애족이 다 나와요. ‘애국합시다’ 하며 두들겨 부수고 하는 그런 거는 저질적이에요. 예수 믿는 건 아예 사회정의가 이미 들어가 있는 거고, 애국 애족도 이미 들어가 있는 거요. 사람을 사랑하면 이미 애국 애족이 다 들어있는 거지 사람을 싫어하고 사람을 때려죽이고 하는데 애국 애족이 어디 있어. 그건 없는 거지요.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거기에는 다 들어있지 뭘. 그렇지 않아요? 안 되니까 그냥 법을 가지고 와서 따지고. 그게 무슨 애국 애족이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자기 생활에 불편이 없을 때까지 쓸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써요. 멀쩡한 것도 갖다 내버리고 그러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잘 지키고 다스리라고 그랬는데 함부로 쓰면 책임추궁이 와요. 반드시 책임추궁이 와요. 물질을 함부로 쓰면 함부로 쓰는 대로 나중에는 비게 만들어요.
우리는 물건 아까운 줄 알아야 되고, 귀하게 쓸 줄 알아야 되고, 그리고 몸이 건강할 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쓸 줄 알아야 돼요. 자기 몸 건강할 때 그 건강을 세상 소원 목적으로 함부로 써버리면 하나님이 쳐버려요. 이건 건강에 대한 책임추궁이 온 거란 말이요. 이해 가지요?
OOO집사님을 남이 보기에는 지옥에 사는 거 아니요? 밤에 잠을 잘 수가 있나,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가 있나? 참 지옥살이야. 그런데 깨닫고 나니 그걸 신령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바꿔놓는 거지요.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다 OOO집사님처럼 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건강할 때 하나님께 깨끗하게 드리움이 되고, 하나님 앞에 봉사적인 일에 건강을 쓰고. 이해 가지요?
오늘은 말씀으로 많이 못 나가고 생활 속에서 사상 정신면으로 많이 얘기했어요. 앞으로 말씀에 고도로 올라가면 이런 것은 자동적으로 자기 속에서 깨달아져 가지고 나가는 겁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알고 보면 눈에 보이는 것도 못 깨달아서 알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깨달으려면 얼마나 많이 깨달아야 할런지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도 원통스럽고 한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하루 빨리 하나님을 더 많이 깨달아서 지헤지식자가 돼가지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지혜자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늘 감동 감화시켜 주시고, 저희들과 함께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세상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런 일 저런 일,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원망불평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는구나’ 하며 그 사건 환경 속에서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고 그 속에서 깨닫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복스럽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그런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져 나오는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실속 있는 능력 있는 당신의 자녀로 살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 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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