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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28: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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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고진하 목사 |
참고 : | 2008년9월7일 쌍문중앙감리교회 http://cafe.naver.com/scmchurch |
선택받았으나 버림받은 사람
할렐루야! 오늘 아침에는 "선택받았으나 버림받은 사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길 원합니다.
지난 4월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이소연씨가 우주에 가서 여러 가지 과학실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서 이소연씨와 더불어 고산씨가 끝까지 우주인의 후보로 훈련에 동참을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산 씨가 우주선에 탑승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어떤 책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산 씨가 중도에 탈락하고 이소연 씨가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산 씨의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돌아올 때에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아도 고산 씨의 얼굴이 어두웠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보고 같은 고씨로서 마음이 안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는 것은 돈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력만 좋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택 받았다가 중도에 탈락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경험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주에 가는 것은 안 가면 그만이지만 선택 받았다가 인생이 완전히 파멸하는 것은 더 심각한 일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울 왕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버림받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즉 사울의 처음 출발은 좋았지만 불안과 욕심으로 인하여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절감과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여 질투와 미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즉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라고 했을 때에 사울은 다윗에 대한 열등감과 백성들로부터 당한 거절감으로 인하여 괴로워했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자기 길을 찾아 다시 출발하면 되었는데 사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충신이었고 사위였던 다윗을 죽이려고 자신의 전 인생을 투자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울을 권면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이나 요나단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권면을 계속 무시했고, 죄 없는 제사장 85명과 그 가족과 마을 사람들도 다 죽였습니다.
그러자 사울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다 떠나게 되었고, 사울을 위해 기도하고 중보해 줄 사람들이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 말씀을 보시면 사울은 세상 말로 갈 때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실지로는 사무엘상 31장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지만 이미 사울의 인생은 오늘 말씀에서 끝이 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사울 왕은 처음에는 선택 받았지만 나중에는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까? 얼마 전에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분은 늘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께 늘 쓰임 받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쓰시기에 편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즉 전병욱 목사님은 훌륭한 목사님이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력이 좋다고 하나님께서 쓰임 받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께 계속해서 쓰임 받고,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편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배우도 감독이 자기를 불러주고 써 주어야 인기도 생기고, 배우로서 실력도 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 우리 교회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와 민족도 이 세상의 총감독이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아무리 실력이나 조건이 좋아도 하나님 쓰시기에 불편하면 그냥 묻히는 것이고 나중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처음에 선택받아 쓰임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울처럼 처음에는 선택받아 쓰임 받다가도 곁길로 빠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된 자 중에 나중될 자도 있다."고 말씀하셨고,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0:12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왜 사울이 처음에는 선택받았지만 나중에는 버림받았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를 배우고, 그 반대로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1.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사울이 처음에는 선택받았다가 나중에는 버림받은 것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제멋대로 가는 사울에게 여러 사람과 여러 상황들을 통하여 여러 차례 경고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때로는 잠시 잠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후회한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일 뿐 계속해서 같은 죄를 또 지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윗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울은 여러 차례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맞대결하거나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즉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두 번이나 맞이했지만 하나님께 모든 심판을 맡기며 자신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받은 자를 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또 똑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후서 2장의 말씀처럼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구정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자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사울은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전쟁의 위기와 고난을 허락주신 이유 중의 하나는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함인데 사울은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살면서 기회가 참 중요한데 학생 때 공부할 기회를 놓치면 직장인이 되어서 그 기회를 다시 살린다는 것은 몇 배가 어렵습니다. 결혼이나 기타 어떠한 성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회를 잘 살려야 하는데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나 생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나 어떤 사건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생활을 바꿀 때에 우리는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회개의 기회를 계속해서 놓치면 영원한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죄 지었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만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이는 사울처럼 멸망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윗의 인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광야생활을 할 때에는 몸은 힘들었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왕이 되고 나라가 부강해졌을 때에 방심하게 됩니다. 즉 부하들은 다 전쟁터에 나갔다는데 혼자 왕궁에서 늦잠하며 게으르게 생활하다가 죄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즉 자신에게 충성했던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와 간음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우리아 장군을 죽였습니다. 사울 왕 못지않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이 죄를 지었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즉 나단 선지가가 다윗에게 와서 말하기를 어느 성에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와 암양 새끼 하나 밖에 없는 가난한 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한 손님이 찾아왔는데 이 부자가 자기 양을 아껴서 잡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자의 암양 새끼 한 마리를 빼앗아 그것으로 손님을 대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이 한 것인 줄도 모르고 나단 선지자가에게 "그 죄인이 누구냐? 내가 혼내 주겠다."고 했습니다. 즉 사람은 자신의 죄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고, 영적으로 깨어 자신을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정말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시편의 표현을 보면 침상이 눈물로 둥둥 뜰 정도로 회개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한 후에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자신을 죄와 철저하게 단절시키고 지켰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강점이었습니다. 다윗도 사울 못지않은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더 큰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책망하실 때에 정직하고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회개함으로 영육간에 전진과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을 확신할 때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개할 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심하면 하나님께로 돌이키기가 힘듭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시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유산을 받아 외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써 버렸습니다. 그리고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둘째 아들의 마음속에는 "아버지가 과연 나를 받아 줄 것인가?"라는 의심과 주저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쁨으로 맞이하고 환영했습니다.
마귀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의심에 빠져 자신을 정죄하고만 있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고, 죄를 끊고 회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음을 확신할 때에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초는 정죄감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녀나 다른 사람을 정죄할 때에 자녀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멀리 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못을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늘 아버지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때에 돌아오게 되고 진정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3) 지정의(知情意)의 단계를 통하여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회개에서 중요한 것은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즉 회개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의 단계를 통해서 생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즉 감정적으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거나 후회만 하지 말고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말씀을 통해서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아야 합니다(知).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죄를 대해야 합니다(情). 그리고 의지적으로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합니다(意). 그렇지 않고서는 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사울이 버림받았다는 것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기 때문에 하루도 전혀 죄를 안 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해야 하며, 그렇게 날마다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과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울 왕이 처음에는 선택받았지만 나중에는 버림받은 이유는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4-7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8:4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28:5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28: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이 수넴에 진 친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물론 그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은 결국 세 아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마도 어떠한 불길한 예감이 사울에게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께 전쟁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꿈이나 우림 혹은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1)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과 사울의 관계가 소통 원활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럼, 왜 하나님과 사울의 관계가 소통원활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물론 죄 때문입니다. 이사야 59:1-3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고자 해도 죄가 있으면 그 사랑과 축복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사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상 3장을 보시면 사무엘이 어린아이였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즉 사사시대도 무척이나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이나 말씀을 듣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상시에 죄의 문제를 잘 처리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즉 평상시에 기도에 막힘이 없으면 위기의 순간에도 기도를 통해 응답받는 것도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처럼 평상시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있으면 위기의 순간에는 더 곤란해질 것입니다.
저는 부목사 때에 조용히 기도한다고 어느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여러 번 지적을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기도하든 뭐라고 얘기를 잘 안하려고 합니다. 기도도 여러 종류가 있고, 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고, 각 개인의 기질이나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상 맞는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와보니 저보다 더 조용히 기도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 편으로는 안심도 되지만 한 편으로는 기도의 불이 좀 더 붙어야 겠다고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는 새벽 5시부터 기도할 때에는 작게라도 계속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니깐 멍하니 졸다가 기도 줄을 못 잡는 일은 없고, 기도생활에 막힘이 없으니깐 영적으로 훨씬 더 좋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무튼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든 힘과 소리를 내어 기도하든 중요한 것은 평상시의 기도생활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끈질긴 기다림을 통해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더 큰 실수는 평상시에 기도생활이 없어서 위기의 순간에 답답했다고 할지라도 기도의 응답을 계속해서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자 부하들을 시켜서 신접한 여인을 찾게 했고, 결국 그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상 13장에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신이 직접 제사한 것과 같은 조급한 행동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은혜와 응답을 구하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즉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면 "아니면 말고, 너 말고 딴 방법은 없을라고"라고 홱 돌아서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절대 의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낙망하지 말고 계속 기도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어느 도시에 사는 재판관은 불의한 재판관이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도 무시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한 맺힌 과부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왔지만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부가 계속 끈질기에 찾아와서 번거롭게 하니깐 들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그렇게 끈질기게 요구하면 들어주는데 하늘 아버지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끈질기게 "하나님, 우리 가족과 일터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에 부흥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끈질기게 기다려야 합니다. 한 부인이 오페라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갔다가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극장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아아몬드를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지배인은 전화를 끊지 끊고 기다리라고 했고, 잠깐 동안 수색한 끝에 다아몬드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전화기로 갔는데 이미 그 여인은 전화를 끊은 상태였습니다. 지배인은 그 여인이 전화를 다시 해주기를 바랬지만 결국 후에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기다리지 않는 것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야보고서 1:6-7을 보시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고 끈질기게 기다려야 합니다. 마치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우리의 기도가 거절당하는 것 같이 느껴져도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끈질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의 막힘이 제거되고 응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3)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변함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기도의 응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변함을 의미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을 때에 평상시에 기도하지 않았던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고 끈질기게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울 왕은 끈질기게 기다리면서 자신을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길치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길을 찾아갈 때에 네비게이션을 항상 켜 놓고 운전합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을 평상시에 사용하지 않다가 필요할 때가 되어 켜게 되면 기계가 인공위성과의 주파수를 맞추느냐고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십 분을 정상작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정상작동을 하기 위하여 계속 주파수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못 기다려서 막 운전하다가 국도로 가도 지장 없는 길인데 통행료내고 고속도로로 간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주파수를 맞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면 손해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 응답의 시기를 늦추시는 것은 주파수를 맞추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로 맞추는 시간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상작동하고 응답이 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기다릴 때에 나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만 응답주시길 기다리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임할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면 오순절 성령이 임했듯이 응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다리고 기다리면 우리 영혼이 맑아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때때로 지체하시는가?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마다 우리에게 갑절의 축복을 준비하고 계신다." 결국 조급해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잘 기다리고 기도할 때에 계속해서 쓰임 받고 갑절의 은혜를 입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악한 영과 접했기 때문입니다.
(1) 회개와 말씀이 빠진 영적 체험과 신비주의는 위험합니다.
세 번째 사울 왕이 처음에는 선택받았으나 나중에는 버림받은 이유는 악한 영과 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기를 실패한 사울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 신접한 여인을 찾았습니다. 신접(神接)했다는 것은 무당이나 점치는 사람들처럼 악령과 접하면서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에게 변장을 하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에서 신접하는 이들을 몰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몰아내고 금지시킨 신접한 행위를 자신이 한다는 것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변장을 하고 갔습니다.
물론 신접한 여인은 처음에는 사울 왕을 못 알아보고 사울 왕이 금지시킨 신접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변장한 사울 왕이 책임지겠다고 말하자 신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접하자마자 자기 앞에 있던 사람이 사울 왕임을 알고 왜 자신을 속였느냐고 소리 높여 말했습니다.
이처럼 악령이나 귀신도 하나님처럼 전지 즉 모든 것을 다 알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귀신도 능력을 행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1-23을 보시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능력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 자체만을 보고 따라갔다가는 실수하기 쉽습니다. 야고보서 2장은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로 믿고 떠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하신 이후에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어떠한 능력 행함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는 알 수 없고 말씀에 순종하느냐를 보고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가 중에 은성수도원을 세우신 엄두섭목사님이 계십니다. 저도 신학생 때 한번 은성수도원에 가서 세미나를 통해 배운 적이 있는데 이분은 장로교 목사님이시면서 수도원 영성에 정통하신 분이십니다. 신학교에서 강의할 정도로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이라는 영적이고 신비적인 체험 이전에 회개를 통한 자기정화와 말씀을 통한 인도를 강조하십니다. 즉 회개와 말씀이 빠진 영적인 체험이나 신비주의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가 너무 넓고 그 체험들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고 자기를 정화하지 않으면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에 나오듯 악령과 신접할 수 있게 됩니다. 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이나 무당에게 빠지고, 잘못된 기도원 가서 이상해지는 것이 왜 그렇겠습니까? 성령님도 계시지만 악령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미국과 같은 경우에는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 중에 최첨단 과학을 공부한 과학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세계에 대해서는 정통했지만 영적인 세계에는 무지하니깐 인도를 잘못 받으면 이상한 곳으로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말씀이 빠진 영적 체험과 신비주의는 아무리 능력이 나타나고 귀신같이 알아맞혀도 그곳으로 가면 절대 안 됩니다. 성경은 누차 그것을 말씀하고 있고, 사울 왕이 결정적으로 망한 것도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2) 악령은 정죄를 통해 절망하게 합니다.
그럼,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은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사울은 신접한 여인에게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신접한 여인은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어서 사울은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울과 대화한 영은 죽은 사무엘의 영이 아니라 악한 영, 즉 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대한 말씀처럼 낙원에 올라가거나 음부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낙원이나 음부 사이에는 왕래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어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 전까지 죽은 자들은 낙원이나 음부에서 그 상태로 잠자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 떠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나오는 영은 사무엘을 가장한 영은 악한 영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서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죽은 자의 영혼으로 위장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권위와 친근감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하지만 속은 다 악령이고, 제사할 때 역사하는 것은 조상의 영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더욱이 진짜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인지를 결론을 보면 압니다. 오늘 말씀에서 악령과 대화한 사울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8:20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를 살리고 소망을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책망을 하시면 그 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변합니다. 하지만 악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10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삶을 살지만 악령이 역사하면 도적질당하고 죽임당하고 멸망당합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옳게 말해도 끝은 절망이고 죽음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절망하고 자살하는 것은 악령의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악령은 결국 우리를 절망케 하고 두렵게 하고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의 원리보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명의 원리로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참 화목하지만 어떤 교회는 나누어질 정도로 싸웁니다. 그런데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은 다 자기들은 옳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들어보면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악령이 역사하면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하는 것 같아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머리는 복잡해지고 결정적으로 하나되지 않고 싸우고 그 끝은 멸망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악령과 접하자 회개하고 살 생각은 안 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3) 인간적으로 좋아도 악령과 접하는 이들은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접한 여인이 보다 못해 자신도 사울의 청을 들어주었으니 사울 왕도 자신의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거절해도 또 다시 청해서 결국은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이처럼 악령과 접하는 이들 중에도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악령과 접하는 이들은 멀리해야 합니다. 그 결과는 절망과 죽음이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고 심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재미로 점을 보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스포츠 신문을 보면 전도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고, 다 사주팔자 보는 악령 전도지는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에 돈 아끼면 안 됩니다.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시고 물질 축복 더 주십니다. 악령과 접하는 이들은 신문을 도배하듯 광고하는데 우리는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결과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아무튼 재미로 하든 혹은 아무리 인간적으로 사람이 좋아보여도 악령과 접하는 이들은 멀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시면 신접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말거나 살려두지 말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과 접하면 결국 악한 영과 접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절망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생명과 복이 넘치고 강해지고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할 때도 성령으로 예배하고 살아갈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와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끝까지 쓰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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