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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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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큰 은혜를 잊지 말자
본문: 누가복음 17: 11 - 21
오래 전에 미국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 라는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큰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돈이 없었습니다. 스트로사는 그 당시에 큰 부자인 바턴 씨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까 믿고 빌려주면 그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면서 2천 달러를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턴 씨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고, 담보도 없고, 후원자도 없는 청년에게 큰돈을 빌려주는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하면서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 씨는 청년의 용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모험을 걸고 2천 달러를 쾌히 빌려주었습니다.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다 갚았습니다. 그 후 10년쯤 지나서 미국에 경제대공항이 일어나 바턴 씨는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 씨를 찾아가서 『사장님이 빚진 돈 7만5천 달러를 저가 다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바턴 씨는 너무 놀라서 『아니 자네가 빌려간 돈은 이미 다 갚았는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라고 하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스트로사는 『예, 분명히 저가 빚진 돈 2천 달러는 그 전에 갚았지만, 사장님이 저에게 베풀어준 은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 때 2천 달러로 장사하여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심으로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은 큰 은혜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딛3: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약 5백년 전에 전라도 남원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개를 어찌나 좋아하는 지, 어디를 가나 끌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김씨가 이웃 마을의 회갑잔치에 갔다가 만취되어 돌아오는 중, 산길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그가 버린 담배꽁초에서 불이 나, 산에 옮겨 붙는 바람에 김씨는 곧 타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그의 개가 몇 번이고 가까운 개울로 가서 자기 몸에 물을 적셔와 몸을 굴리며 불을 껐습니다. 덕분에 김씨는 살았으나 개는 지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술이 깨서 일어나 이 사실을 안 주인은 너무도 감격하여 그 자리에다 무덤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서 커다란 나무가 되었고, 그 마을은 오수라 불리우게 되었는데, 지금 『오수』라는 기차역이 바로 그 마을입니다. 개도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느 시골 마을에 들리시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어구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났습니다. 대부분이 유대 사람이고 그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섞여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보통 사람들은 서로가 교제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병환자들은 다같이 불행한 처지에 있다 보니까 서로가 동정하면서 한 무리가 되어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에 유대 사람 사마리아 사람 할 것 없이 같이 지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멀리서 보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아마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면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으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하신 말씀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옛날 나병환자들이 혹시 병이 낫게 되면 낫다고 하는 증명서를 제사장들에게 가서 받아야 다시 일반 사회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한 그 말씀 가운데는 네 몸이 곧 나을 것이라고 하는 뜻이 내포된 줄로 생각합니다. 이 나병환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자 서슴지 아니하고 곧 그 자리에서 떠나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도중에 그 추악한 나병이 온전히 나았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다 나았는데 그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을 깨달아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밖에는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나음을 받았지마는 그 은혜를 깨닫고 돌아와서 감사를 드릴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아홉 사람은 은혜를 받았지마는 그 은혜를 잊었습니다. 감사를 드리지 아니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마음 가운데 생각되는 것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그것이 우연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은 말할 것 없거니와 우리고 여러 가지 병에 걸리게 될 때 이 병이 낫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후에 우리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병이 나은 다음에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그대로 꼭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영국에 유명한 트렌취라는 감독이 있었는데 그는 특별히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에 대한 해석을 중심해서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이적에 대해서 해석해 내려가다가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 자기가 살펴보는 대로는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드문 은혜라』고 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속담과도 비슷한 말입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 그러니까 은혜는 곧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국가에 대한 충신이 많지 않고, 가정에 효자가 드물고, 회사에 참된 일꾼이 적고, 교회에도 참된 신자가 적은 것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웅변으로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코크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빌딩 4층 창문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밑의 사람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4층위에서 일하던 사람이 발판에서 미끌어져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한 사람만은 피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떨어지는 사람을 향하여 두 팔을 벌려 있는 힘껏 사람을 받았습니다. 떨어진 사람은 안전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받아 준 사람은 두 팔 모두 심한 골절로 평생에 불구가 되었습니다. 떨어진 사람은 불구된 은인의 일생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물어봅시다. 만약에 떨어진 사람이 자기를 구해 준 사람에게 『땡큐』라고 한 마디의 인사만 남기고 툭툭 털고 사라져 버렸다면 그것도 괜찮았겠는가 말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유황 불못의 저주를 영원히 면했다고 하는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 지어다』(벧후3:18)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마는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조심하고 힘쓰지 아니하면 우리도 그 무서운 나병의 고침을 받고도 잊어버린 아홉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치며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시103편 2절)하며 자기 영혼을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빌립보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잊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도 잊어야 합니다. 슬픔도, 아픔도, 원한도 잊어야 합니다. 성공한 것도 잊어야합니다. 성공한 것 계속 기억하고 있으면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6장 12절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땅 중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을 맹세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의 계명을 그의 섭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처럼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계단을 쌓아야합니다. 요셉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잊지 않아야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잊어버림이 많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은혜를 입은 것을 잘 잊어버립니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애굽 궁중에서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어떤 협의를 받고 요셉이 있는 감방에 수감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두 관원이 각각 꿈을 꾸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라는 청년이라는 청년이 지혜가 많다는 말을 듣고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이 간밤에 꿈에 보니 좋은 포도나무가 있는데 가지가 셋이 있어요 그 세 가지에서 꽃이 피고 어느덧 열매가 맺었어요. 포도가 맺히자마자 잘 익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 포도를 따서 포도즙을 잘 만들어서 왕에게 다시 바쳤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요셉이 이 꿈 이야기를 듣더니 꿈 해석을 잘 하는 사람이니까 그 꿈은 대단히 좋은 꿈입니다. 세 가지는 사흘을 의미합니다. 사흘만에 당신이 협의를 벗고 이 감방에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사흘 후에 감방 문이 열리고 술 맡았던 관원을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요셉이 술 맡았던 관원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의 꿈을 잘 해석해서 석방되고, 또 우리가 그 동안 서로 가까이 지냈으니 당신이 나가서 왕 앞에 서게 되면 나를 잊지 말고 왕에게 말해서 내 이 억울한 사정을 좀 알려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술 맡았던 관원은 복직이 되었습니다. 왕 앞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술 맡은 관원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40장 마지막 절을 보세요. 『술 맡았던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치 아니하고 잊었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보통 우리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은혜를 받을 때는 감사한 것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얼마가지 아니해서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의 은혜도 스승의 은혜도 잊어버리고 친구의 은혜도 국가의 은혜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은혜가 크면 클수록 더 잘 잊어버립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을 똑같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잊어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잊어버린 아홉 사람은 어디 사람이었어요?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하면 어느 민족이 더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까? 유대 사람은 아브라함 때부터 제일 많은 축복을 받은 민족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신 분들이 특별히 정신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흔히 외아들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네 배가 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절기를 정해 주셨습니다. 유월절을 왜 정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준 그 놀라운 은혜를 잊지 말라고, 장막절은 왜 매년 지키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에서 만나를 주시고 생수를 주신 은총을 잊지 말라고, 오순절을 왜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해마다 밀과 보리, 오곡백과를 주신 것을 잊지 말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내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아마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레 받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사실 이 아홉 사람은 은혜를 받았는데 보통 은혜를 많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큰 은혜를 받았지마는 그것까지 잊어버렸습니다. 나병환자가 나병이 나았다는 것은 생명을 도로 받은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생각할 때는 적은 은혜는 바로 잊어버리기 쉽지마는 큰 은혜를 받은 것이야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하는데 실제는 큰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잊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방에 전기가 나가면 방안이 캄캄해집니다. 촛불 하나를 켜 놓아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아침 온 누리를 밝히는 햇빛을 주시는데 아침마다 밝은 햇빛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다윗은 요나단의 사랑을 받아 그의 도움으로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후일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자 그 은혜를 갚으려고, 요나단의 아들인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찾아 왕궁에서 함께 생활하게 하였습니다.(삼하9장) 우리는 다윗과 같이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늘 내 영혼을 깨워야겠습니다. 참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감격한 가운데서 그 은혜의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것도 귀하지마는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은 더욱 귀합니다.
우리가 중한 병으로 호흡이 어려워졌을 때 어떤 분이 산소를 한 통 보내면서 그 호흡하는 것을 도와주었다면 아마 그 은혜를 오래오래 기억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 넉넉한 공기를 주어서 불편 없이 호흡하면서 숨쉴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까? 은혜가 클수록 우리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이 아홉 사람을 보면 멀리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을 보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요사이도 나병이 확인되면 나병 환자 촌으로 격리수용 합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나병이 확인되면 동네 밖으로 내어 쫓기게 되고 일반 사람과의 접근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동굴 같은 데를 다니며 기거했고, 친척이나 식구가 먹을 것을 해서 동굴 가까운데 갖다 놓으면 아무도 보이지 않은 때 나와서 두고 간 음식을 가져다 먹는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나병 환자들이 멀리서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그들이 기도는 잘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된 다음에는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응답을 받고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또 보세요. 이들이 이 추악한 나병에 걸려서 앓고 있는데 온 몸의 마디마디가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어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예수님 말씀 그대로 꼭 믿고 곧 제사장에게 간 것을 보니까 이 사람들의 믿음이 어떻습니까?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그 믿음의 결과로 은혜를 받은 다음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 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하든지 아무리 믿음이 진실하다고 하지마는 우리가 이 방면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시하지 못한 아홉 사람처럼 되기가 쉽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아홉 사람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의 찬송을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없느냐?"
우리가 왜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까요?
첫째는 보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군인이며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 수상에 관한 일화입니다. 처칠이 어렸을 때 런던에 있는 템스 강가에서 수영을 하다가 깊은 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라고 소리를 쳤지만 구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청년이 지나가다가 뛰어들어 처칠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안 처칠의 할아버지가 청년에게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니 당신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라고 하자 청년은 『선생님, 저는 의학공부를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학비를 대 주었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알렉산더 플레밍이라는 사람인데 열심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연구실에서 실험하여 여러 가지 약을 발명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 지금도 많이 알려져 있는 페니실린 주사약입니다. 플레밍은 이 약을 성공시킴으로 노벨 의학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 후 세계 2차 대전 때 처칠 장군이 아프리카 전쟁에서 큰 병에 걸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플레밍 박사는 직접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페니실린으로 그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처칠과 플레밍은 서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주고 은혜를 갚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떤 때든지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움 받은 사람도 그 은혜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고는 그것을 기억하지 말고,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고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으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시145:7, 엡1:6)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
둘째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더 큰복을 받고 사회생활에서도 성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공군조종사였던 Fred 할젠사이머씨는 1943년 일본군의 사격을 받아 뉴기니아에 추락했는데, 원주민이 숨겨 주고 치료해 주어서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원주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가 그 섬에 학교를 세워주기로 결심하고 모금을 하여 드디어 1970년 그와 그의 아내는 미네소타를 떠나 뉴기니아로 가서 학교를 세우고 14년간 머물면서 카카오(쵸코렛)나무를 심으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런 마음씨 때문에 그가 위기에서 살아났을 것입니다. 시편50:14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감사는 모든 덕의 기초가 되고 부모가 됩니다. 하나님께, 부모에게, 스승에게 감사할 줄 모르면 유해무익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 드릴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원문의 뜻대로 하면 『네 믿음이 너를 네 생명전체를 온전케 하였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네 병만 고친 것이 아니고 네가 이렇게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므로 그 믿음이 너의 영혼까지 구원하였느니라』하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나병을 고침 받고 돌아와서 감사하므로 육신의 병만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줄 압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은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의 표가 여기 있습니다.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믿는 사람의 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욱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일이 점점 더 적어집니다. 사실 참된 신앙과 헌신의 생활의 배후에는 이와 같은 은혜를 깨닫고 은혜에 대한 감사 감격의 마음이 그 마음속에 충만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아니하리요 마는 특별히 감사절을 기해 한 주간을 감사주간으로 지키는데 그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시145:7)
다같이 찬송가 405장을 부르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자기 안일과 행복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견딜 수 없으리만큼 모든 것이 무의미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 순간 영원한 희열을 느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 나이 60이 넘으니까 1년이 새롭고, 70이 넘으니까 한 달이 새롭고, 80이 넘으니까 하루가 새롭더라』고 했다 합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생명이 앞으로 1년만 남았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설문지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다양한 대답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남을 도우면서 살겠다. 주면서 사겠다. 전적으로 사랑하며 살겠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며 살겠다』 고 대답한 사람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착해지면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좀 더 참을 것을... 좀 더 베풀 것을... 좀 더 재미있게 살 것을..』
사람들은 좀 더 참지 못해서 마음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조급하게 판단하게 되고, 평가하면서 자기 스스로 좌절하여 절망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 조금만 더 참아내면 어떨까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여건으로 좀 더 베풀고 나누고 사랑과 은혜를 공유하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좀 더 재미있고 유익하게 살면서 서로서로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 목적과 목표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추구하며 좇아가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는 삶의 목적을 가질 때 가능해집니다.
사람은 어떤 때든지 남을 도울 수 있을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은혜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움 받은 사람도 그 은혜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고는 그것을 기억하지 말고,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고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으니 감사함으로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엡1:6)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내 주 하나님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고 측량을 다할 수 없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말고 찬양하게 하옵소서. 불신자들과 어울려야 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소서. 언제 어디서든 제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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