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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따라 일어나되 일어남성이 옳아야 합니다.

요나 궁극이............... 조회 수 748 추천 수 0 2014.08.29 10: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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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3절.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우리가 일생동안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덧입기도 하고 덜 덧입기도 하는데 이건 우리가 이 땅에서는 잘 모르지요. 그러나 부활 때에 하나님의 권능을 입고 나올 때는 많이 입은 자가 나타나고, 적게 입은 자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완전히 차별이 나게 된다. 물론 그 때에 가서는 외부적 활동적으로도 나타나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견적인 면에서 사람들의 모든 활동을 볼 때에 어떤 면이든지 자기 속에 든 것만큼 든 대로의 활동성이 나타나기 마련이요. 분명히 그렇단 말이요. 부활할 그 때도 그렇다 그 말지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영과 육이 결합적으로 있다가 죽음이 오면 영과 육이 분리가 됩니다. 그러나 부활 때는 완전히 신령체로 변화 부활되기 때문에 영과 육이 하나가 돼버리는 거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육이 좋아하는 대로 살려면 영이 죽겠고, 영이 좋아하는 대로 살려면 육이 죽겠고. 이때에 ‘죽겠고’ 하는 그것이 자기 속에서 대립입니다. 자기가 영이 좋아하는 대로 살면 대립이 아닌데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대립성적인 그런 마음이 있지요. 있는 거예요. 그게 대립이라 그 말이지요.

 

그리고 내가 사망운동을 할 때에 중생된 영은 거기에 동참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 영이 자기 몸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의 표현상 끌려간다고 그럴까요?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볼 때도 분리가 되는 거지요. 물론 죽음의 선에서는 그건 분리가 되는 거지만 살아 있으면서도 그게 분리성이란 말이요. 그러나 부활 때는 성분적으로 성질적으로 활동적으로 완전히 결합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고기를 잡수신 것은 육체입니까, 영체입니까? 영체지요. 인성과 신성이 신령체로 돼버린 겁니다. 그 참 우리 인간의 존재가 그렇게 신비로워요.

 

우리의 육체는 썩어질 육체가 아니고 부활할 육체이기 때문에 롬8:23에 보면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지요. 물론 부활 때는 그렇지요? 그런데 현재적으로 중생된 영이 몸에다 구속을 입혀나가야 된다 그 말이지요. 제세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동화되어가지고 나의 육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혀나가야 한다.

 

우리가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목적을 바로 깨닫지를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의 효력성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말씀을 주신 목적이 뭐냐? 첫째로 혹자들이 하는 말인즉 ‘니느웨 성 사람들을 위한 여호와의 말씀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 사람들이 멸망 직전에 있는 것을 보시고 비록 이방인이지만 사망에 그냥 버려둘 수가 없어서 이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요나를 파송한 것이다’ 혹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는 것이 목적이란다면 요나에게 시키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이 훨씬 더 효력적이다. 그렇지요? 효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목적은 그 첫째 목적이 니느웨 성 사람들을 살린 목적이 아니다 그 말이요.

 

두 번째는 사건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 당신이 해야 할 사역을 인간에게 협조해 달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명령하신 것은 아니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의 도움이 없이 다 창조했습니다. 고로 어떤 사역  사건을 위한 목적이 아니고 그 방편을 사용한 목적은 따로 있다 그 말이지요. 만일 사건이나 사역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면 인간은 시은자요, 하나님은 수은자로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는 위치를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언제든지 수은자의 위치에 두고, 하나님은 언제든지 시은자의 위치에 모시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큰 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또 인간이 큰일을 해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은 수은자가 아니고 시은자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수은자요 하나님은 시은자입니다.

 

창세기 18장 3절에 아브라함의 사건이 나오지요? ‘내가 은혜를 입었사오면 발을 씻기고 대접할 수 있게 해 달라’ 그랬지요? 이건 전부 다 은혜를 받는 겁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즉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또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고. 교만은 하나님 앞에 시은자입니다.

 

우리가 몰랐을 때는 ‘주일학교를 도와주고, 교회를 도와주고’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이건 바꿔져야 합니다. 바꿔지지 않으면 예수 바로 못 믿습니다.

 

내가 가서 도와드린다? 물론 수은자적 입장에서 어떤 교훈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도와줘라. 도와달라’ 그렇게 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자기 속에서 신앙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도와준다고 하는 이거는 안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볼 때는 도와주는 것으로 돼 있지만 자기 속의 사상은 은혜를 받는 입장에서 해야 하는 거지요.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거기에서는 모든 걸 하게 되는 거니까 이건 시은자적 사랑은 아니지요. 수은자적 사랑이지요.

 

‘내가 가서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린다. 내가 교회 일을 도와드린다’ 하게 되면 하나님이 무능자가 돼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완전자요 전능자요 뭐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지요. 그렇지요?

 

‘주일학교를 돕는다. 청년회를 돕는다’ 그러면서 ‘돕는다’ 하는 그건 인간이 볼 때 교회가 재정적으로 약하고 숫자적으로 적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지만 그러나 교회는 약한 게 아니에요. 교인이 하나가 있던 둘이 있던 본질적으로 자라는 교회는 그 배후에 하나님이 버티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교회는 약한 게 아니에요.

 

제가 과거에 사상의 개념이 안 바꿔졌을 때는 교회를 도와주러 많이 다녔거든. 군대에 있으면서도 그랬고, 제대 하고 나와서도 저기 시골 청평 가는 그 쪽까지 배 타고 강 건너서 조그마한 교회에 그림 들고 가서 주일학교에서 얘기도 해주고 그랬어요.

 

‘내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갔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끔찍해요. 그렇게 나갔다면 주일학교에 큰 붐을 일으켰을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옳은 스승을 만나게 해서 그런 나를 탁 잡아 앉혀가지고 사상적으로 개념적으로 바로 들어가게 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그런데 ‘옛날에 활동한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됐지’ 이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되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혹 그렇게 보실지 모르지만 인간 내 입장에서 볼 때는 그렇게 생각을 해서 ‘오늘 내가 이렇게 됐으니 과거에 잘못된 거 참 감사합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잘못된 것은 자기 속에서 ‘내가 다시는 안 그래야지’ 그러면서 그 원수를 갚을 줄 알아야 돼요. 안 그러면 앞으로 나가지를 못해요. 그걸 ‘감사합니다’ 하고 붙이게 되면 자기 속에서 합리화가 돼버려요. 그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던 간 하나님의 인도는 분초찰나 순간마다 언제든지 나에게 구원을 입혀주실 목적 아니요? 그런데 내가 과거에 잘못할 때 구원을 입을 목적으로 그렇게 했나? 아니었지. 시은자적 입장에서 해 나갔단 말이요. 하나님 입장은 따로 있고 내 입장은 따로 있는 채로 그렇게 한 것인데 ‘그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될 수는 없는 거요. ‘그래서 과거를 감사해야 된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가룟유다에게도 물으면 ‘내가 예수 죽인 거 참 감사하다’ 그런 식으로 말이 될 수밖에 없어.

 

‘하나님이여, 내가 은혜를 입었사오면 이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교회에서 빗자루 드는 거, 자기 속에서 예수님 사랑으로 나오는 모든 활동들은 아무나 못하는 거요. 은연중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되는 거거든요. 불신자가 교회에 와서 그 일을 못하는 거지요.

 

아닌 말로 저 청와대 같은데 가서 내가 청소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가서 청소를 할 수가 있나요? 절대 아니거든요. 허락이 있어야 되거든요. 하물며 우리 창조주 하나님의 집에서 나 같은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걸 모르면 이러한 느낌은 그냥 넘어가 버려요.

 

하나님의 집에서 찬송할 수 있다는 이거 얼마나 감사합니까? 일상생활에서 늘 교회 잘 나오고 하는 사람은 그런 것에 감사한 느낌을 못 가질 거요. 그러나 자기 몸이 아파가지고 병원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면 병원 안에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를 수 있어요? 그러다가 교회 나와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를 수 있을 때 그 감사를 말로 다 할 수 없을 거요.

 

제 개인적 경험입니다만 지금도 거기 있는지 모르겠어. 여수역 앞에 동광교회가 있고 그 조금 밑에 지서가 있는데, 내가 그 지서에 취직을 했어.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고. 그런데 주일날이 되니까 교회를 나갈 수가 있어야지. 어떻게 교회가 가고 싶은지 잠깐 교회 갖다 온다고 얘기하고 가고 그랬어. 속에서 안달이 나는 거지.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가 오래간만에 교회에 나갔어. 평소 때 교회에서 늘 부르던 찬송이었는데 오래간만에 교회에 나가서 찬송을 부르니까 새로운 느낌이 있어. 감사지.

 

여러분들, 그런 경험 간혹 할 수 있을 거예요. 개척지에서 개척교회 생활하다가 몇 년 만이나 십 년 만에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가 봐요. 부모를 만나고 고향 땅을 밟고 이웃을 만나는 마음의 홀가분한 그 느낌 그 즐거움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거요. 그냥 늘 상 고향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느낌을 못 느끼지.

 

‘하나님이여 내가 은혜를 입었사옵거든.’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교회에서 성도들을 만나고, 성경을 보고, 내 몸이 건강으로 돼 있고 하는 이거 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신 환경적 허락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받아야지. 하나님 앞에 은혜스럽게 자라야지. 그러나 그런 신앙적인 느낌이 아니고 일반 불신자들이 가지는 느낌이나 또 우리가 옛날에 불신자적으로 있을 때의 그런 식의 느낌으로 맨 날 그렇게 되면 생활 속에서 신앙이 안 들어가지.

 

내가 보고 듣고 하는 거, 또 내가 오늘 이 하루를 살았지만 건강한 몸으로 집에 들어올 수 있고 이랬을 때에 내가 오늘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얼마나 이루었을까? ‘나에게 건강을 주신 거,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방편을 주신 거 모두가 나에게 구원을 입으라고 허락이 되어 있구나. 감사합니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지요. 만약의 경우에 내일 내가 뻣뻣한 시체로 나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니까 잠들기 전에 기도하는 것도 ‘내일 건강함 몸으로 다시 주시기로 되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하나님의 허락이니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뜻이옵거든 내일 아침에 나를 건강한 몸으로 다시 깨워주십시오’ 하는 기도지요. 그 얼마나 감사하냔 말이요. 참 흐뭇하지요. 그런 생각을 안 해 봤거들랑 그런 생각을 좀 해 봐요.

 

우리는 은혜를 입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영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은 도와달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맡기는 것은 아니라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와서 좀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구원을 입혀주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나로 하여금 약한 상대를 가서 돕도록 돼 있다면 이면적으로 보면 내가 은혜를 받는 하나의 방편들이라. 성도들의 모든 게 그래요. ‘성도의 생활이 어떤가? 몸이 아프지는 않은가? 어떻게 사는가?’ 하고 돌아보는 그게 전부가 자기의 구원의 일이지요.

 

미련한 내 자랑 같지만 난 목사 된 게 갑갑해. 내가 평신도로 돼 있다면 여러분들처럼 이렇게 안 있어. ‘누구는 어떻게 사나’ 하고 자꾸 가보기도 하고, 성도들과 대화가 끊어지지를 않아요.

 

사람은 자꾸 가까이 할수록 정이 들고, 한 부부라도 멀리 있으면 정이 안 들어요. 남이 돼버려요. 우리 인간은 다 그래요. ‘어떻게 지내나’ 하고 물어보고, 건강도 물어보고, 자기가 넉넉한 게 있으면 갖다 주기도 하고. 하기야 시간도 바쁘고 다 멀리 있으니까 뭐.

 

그러니까 우리교회 교인들로서는 부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규모가 큰 교회는 교인도 많고 그래서 자기들끼리 잘 만나기도 하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대화거리가 많고, 또 그런 정으로 뭉쳐있게 되고. 그 맛도 좋지? 그런 걸 그 자체를 나쁘다고 그러면 안 돼요.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크게 돕는 그런 거는 없다 할지라도 가서 같이 얘기해주는 것도 돕는 거요. 이면적으로 말하면 은혜 받는 거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리가 와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물어가지 못하게 되거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고 요나 너 자신을 위해서 주는 거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요나를 볼 때에 한 편은 성공이요, 한 편은 실패입니다. 어떤 면에 그러냐? 멸망 직전에 있는 니느웨 성이 멸망이 안 됐으니까 이거는 성공이고, 그 면으로 볼 때 성공이고. 성공이라는 이 말이 요나 자신에게 성공이란 말이요, 사건적으로 성공이란 말이요? 요나 자기가 볼 때 ‘아, 니느웨 성이 멸망이 안 됐으니 나는 성공이구나’ 그겁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러나 요나 자신에게는 실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요나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명령을 한 거지요. 그런데 그게 안 됐으니까 그 면에서는 실패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든 직접 말씀으로 하셨던 사역적으로 말씀을 하셨던 그걸 빨리 빨리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일반적으로 보면 눈치 빠른 사람이 있지요? 눈치 빠른 사람은 말을 안 해도 착 봐서 행동으로 움직이지요.

 

일반적으로도 그런 것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데 사건적으로 명령이 오는 경우가 있어요. 사건적으로 오는 것은 누가 명령을 안 해요. 쉬운 예를 들면 방이 너즐하게 어질러져 있으면 그건 사건적으로 나에게 청소를 하라는 거 아니요? 꼭 말을 해야 하는 그거는 둔감하지요. 눈치가 빠르면 사랑을 많이 받아. 어디를 가든지 사랑을 받아요.

 

어느 교회든 사건이 있어요. 작은 사건이든 큰 사건이던 활동적인 사건이던 어떤 일을 해야 할 사건이던 무슨 투자가 돼야 할 사건이던 어느 교회든 사건이 다 있어요. 이처럼 사건적으로 오는 음성을 우리 교인들은 빨리 알아들어야 돼요. 그럴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지요.

 

우리교회도 사건이 있습니다만, 물질적 사건이 있고 봉사적인 사건이 있고 그럴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빨리 알아들어야 하고, 또 사건은 아직 안 터졌지만 그 환경 속에서 신앙사상의 흐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잘못 아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현 시대의 기독교가 사상적으로 혼돈의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빨리 사상을 세워야 되겠구나’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저는 들어요. 그러니까 기독교계가 신앙사상적인 면에서 혼돈 혼합이 되면 이거는 반드시 뭔가가 오게 돼 있어요. 이 길로 말세 끝 날이 될 런지, 아니면 부분적인 어떤 사건이 터질 런지 그건 몰라요.

 

소돔 고모라라고 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불신자적 사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보게 되면 도덕성이 문란한 거지만 그러나 신앙사상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이 육의 소원 목적으로 된 것은 혼음이요. 그러니까 이건 신앙적 도덕성에 혼음이 된 거란 말이요. 세상하고 짝짓고 하는 거. 그러면 반드시 뭔가가 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런 면을 생각을 깊게 하시고.

 

만약의 경우에 요나가 하나님과의 단일목적으로 나갔다면 고쳐지고 회개했을 겁니다. 성도의 모든 신행 즉, 믿음의 행동은 자기를 위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 전부도 성도 자기를 위해서 이루어진 겁니다. 그렇게 믿어집니까? ‘오늘 하루가 갔다. 내가 무슨 무슨 일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이걸 다 동원시켰다.’

 

2절: 너는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하는 그 ‘일어나’가 있고, 3절에는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난 ‘일어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라고 한 그 말 자체를 보면 일어나라고 하는 그것이 육을 보고 일어나라고 하는 거지요. 그렇지요? 요나가 앉아있었는지 누워있었는지 서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어나라는 그 말씀은 인간이 볼 때 육을 보고 한 거지요. 그렇지요?

 

우리 인간끼리 말을 할 때 ‘너 왜 앉아 있느냐? 일어나라’ 그럴 때에 육을 보고 하는 말이지. 그런데 하나님은 그 육보고 하는 말은 아니지요. 이성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어나’ 하는 하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생명이 들어있고 사랑이 들어있고 진리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 들을 건 듣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하는 자유는 이성이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람 자체를 보고 하는 말이지요. 이성이 듣고 몸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해야지.

 

마태복음 26:46에도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하는 이 말이 영을 보고 하는 말이냐, 이성을 보고 하는 말이냐, 육을 보고 하는 말이냐? 이성.

 

하나님의 말씀이 올 때 이성이 듣고 결합성은 영에다 결합을 시키고, 귀로 듣는 것은 육으로 듣고. 그렇지요? 중생된 영의 활동이 이성으로 건너오고, 이성의 활동이 육의 활동으로 건너오는 이것은 진리와 영감의 활동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일어나라’ 그랬단 말이요. 신앙적으로 일어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3절에서 요나의 일어나는 그 일어남은 하나님께서 일어나고 하는 그 말의 뜻과 같은 일어남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나보고 일어나라고 하는 그 말씀 속에는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들어있지요. 그런데 요나의 그 일어남성은 하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는 그 일어남성과 단일적입니까, 이질적입니까? 이질이란 말이요. 딴 마음으로 일어났어.

 

이를테면 아버지가 ‘너 왜 거기 앉아 있느냐? 일어나라’ 할 때는 아버지가 뭘 의미해서 일어나라고 한 말인데 자기는 일어나 가지고 딴 데로 가 버렸단 말이요. 그러니까 일어나기는 일어났는데 그 속에서 일어남성의 질이 다르지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는 것과 요나가 일어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적으로 새사람으로 일어나라고 그랬는데 요나는 어떻게 일어났지요? 사망적으로 옛사람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일어난 그 성질이 다릅니다. 이걸 심사를 하라 그 말이요. ‘일어나’를 심사를 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걸 많이 경험할 수 있는데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분쟁이 나가지고 다른 교회를 찾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다니던 교회가 분쟁이 나서 다른 교회를 찾는다면 더 나은 교회를 찾아야 할 게 아니냐 그 말이요. 그런데 질적으로 똑같은 이질적인 교회로 찾아 들어가. 그런 거 많이 볼 수가 있어요.

 

우리는 마음의 일어남성을 잘 심사를 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대로 단일목적으로 일어나라고 한 뜻이지요. 그런데 요나는 일어나기는 일어났는데 목적이탈을 해서 일어났으니, 그러니까 이렇게 일어남은 자기에게 무슨 구원이 되겠느냐? 일어나기는 했지만 구원이 안 되는 거지요.

 

그러면 요나가 어떻게 일어나야 되겠느냐? 니느웨 성 사람들을 진리에 접속시키려고 일어나야 되겠는데 그렇게 일어나지를 않고 하나님의 목적과는 이질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곧 패역성이다 그 말이요.

 

그러면 요나가 하나님의 목적대로 일어나지를 않고 왜 이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일어났을까?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었더냐? 그것은 요나에게 구원을 입혀주기 위해서 일어나라고 한 것입니다. 요나가 이 하나님의 제일 되는 목적을 깨달았다면 이질적인 목적을 가질 수가 없었을 테지요.

 

그러니까 요나가 지금 뭘 버리고 산 거지요? 자기의 구원을 버리고 산 겁니다. 그러니까 잘못 일어남이지요. 곧 자기의 생애목적을 버리고 사니까 이것이 곧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틀리니 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기도 올립시다.

 

저희를 세상 끝 날까지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하루 24시간 속에서 저희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사건 환경을 잡아 돌렸습니다. 이런 환경 사건 속에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대로 구원을 입었는지 실로 의심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시려고 크고 작은 사건 또는 환경을 동원시켜서 구원을 입는 쪽으로 저희를 자극을 시켜서 일어나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부분 부분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패역으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여, 모든 사건과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곧 나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것이오니 모든 분야별로 사사건건 속에서도 역시 자기를 위한 그 구원은 빼버릴 수가 없는 줄 압니다. (이하 녹음 안 됨)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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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2 고린도전 육신에 속한 자 고전3:1-9  한태완 목사  2014-09-03 1939
11171 마태복음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 마16:21-28  강승호 목사  2014-09-03 958
11170 시편 성경 말씀의 능력(힘)과 유익 시119:105  한태완 목사  2014-09-02 2335
11169 마가복음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막12:28-33  한태완 목사  2014-09-01 1657
11168 로마서 구원은 삯이 아니다 롬4:4-8  강종수 목사  2014-08-31 836
11167 요한일서 나의 생명 드리니 요일3:16  한태완 목사  2014-08-31 1622
11166 로마서 형제를 사랑하여 롬12:9-21  강승호 목사  2014-08-30 1108
11165 고린도후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고후10:17  한태완 목사  2014-08-30 1065
11164 에배소서 진정한 효도 실천 엡6:1-3  한태완 목사  2014-08-30 1084
11163 출애굽기 너의 선 곳은 출3:1-15  강승호 목사  2014-08-29 1016
11162 빌립보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빌3:7-8  한태완 목사  2014-08-29 2079
» 요나 말씀을 따라 일어나되 일어남성이 옳아야 합니다. 욘1:1-3  김경형 목사  2014-08-29 748
11160 빌립보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빌4:9  한태완 목사  2014-08-29 1569
11159 빌립보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빌3:12-14  한태완 목사  2014-08-28 2431
11158 골로새서 좋게 기억되는 사람 골1:1-24  최장환 목사  2014-08-28 1251
11157 사도행전 생각을 바꾸자 행15:1-21  최장환 목사  2014-08-28 1206
11156 고린도전 나 맡은 본분은 고전4:1-5  한태완 목사  2014-08-28 1833
11155 베드로전 예수님 닮기 원합니다. 벧전2:19-21  한태완 목사  2014-08-27 2159
11154 사무엘하 일관성을 가지십시오! 삼하4:1-12  김흥규 목사  2014-08-25 971
11153 사무엘하 이스보셋의 죽음 삼하4:1~12  강용규 목사  2014-08-25 1152
11152 갈라디아 개신교와 가톨릭교와의 차이 갈1:7  한태완 목사  2014-08-25 2279
11151 마태복음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20  강승호 목사  2014-08-24 863
11150 골로새서 속지마라 골2:6-8  강종수 목사  2014-08-24 949
11149 시편 우리 편에 시124:1-8  강승호 목사  2014-08-23 988
11148 히브리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히9:27  한태완 목사  2014-08-23 1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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