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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을 바로 잡았다면 방편과 위주도 옳아야 한다

요나 궁극이............... 조회 수 815 추천 수 0 2014.09.05 13:4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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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3절.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자기를 지은 하나님의 제일 되는 목적을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되는 이질적인 목적을 가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요나의 정신을 가진 자는 자기 구원을 버리고 살고 있는 겁니다. 곧 자기의 생애목적을 버리고 사는 겁니다. 자기의 생애목적을 버리고 하는 이것이 곧 하나님의 목적이탈로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너 무슨 목적을 가지고 사느냐’ 그러면 사람들은 ‘아, 나는 장사를 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런다. 아, 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연구하는 박사가 되려고 그런다’ 하며 자기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취하고자 하는 목적을 많이 말을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런 목적들을 가만히 심사를 해보면 어떤 목적을 가졌던 간 그것은 자기 살아생전에 취할 것, 이룰 것, 자기 죽기 전에 이룰 것을 목적으로 말하는 거지요. 자기가 죽은 후에 어떤 목적을 말하지를 않지요. 그렇지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정상인 것 같지요? 우리 인간들의 세계에서 자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모두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게 정상인 것 같고 그래요.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죽음 안쪽에 있는 목적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확실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부모의 복중을 빌려가지고 인간 자기를 만들어 내놓은 목적이 있더라 그 말이지요. 그걸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는 할 때는 하나님 당신 의중에 ‘내가 너를 이런 뜻으로 인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하는 그 목적이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의 그 목적을 알고 살아야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간 나를 향하신 이 목적은 자기 살아생전에 장사를 하던, 농사를 짓던, 정치를 하던 이 세상의 성공에 대한 그 목적하고는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만든 목적 그 말이지요.

 

그 다음에 인간 자기라고 하는 자기는 영과 육의 결합체로서 영은 신령계에 속하고 육은 물질계에 속하는 것인데, 이런 인간 자기는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도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으니 나는 또한 이 목적을 잡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목적을 몰라. 그렇지요? 인간 출생의 목적, 그리고 인간이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사후에서 되어질 그 목적을 인간이 압니까? 모릅니다. 전혀 모릅니다. 오직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목적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을 창조를 할 때에 인간창조의 존재적인 그 목적과,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인간에게 사후에 되어질 그 목적이 같으냐, 다르냐? 결코 다른 것은 아닙니다. 같은 건데 연관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너를 인간으로 출생을 시켜놓았는데 너는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인 나와 똑같이 천국을 누리고 느낄 수 있는 지혜지식적이고 도덕성적이고 능력성적인 면을 이 세상에서 성경을 통해서 배워서 나처럼 닮아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라. 마음을 닮아라. 지혜지식을 닮아라. 하나님의 능력을 닮아라’ 그러신단 말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것을 가지고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써먹는 것이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창조의 목적존재, 자기의 목적 이걸 전혀 모릅니다. 스스로 알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이 안 가르쳐주면 모릅니다. 예수 암만 믿어도 성경에서 그게 영감적으로 깨달아져 나오지 않으면 모릅니다. 이걸 깨닫지를 못하니까 ‘예수 잘 믿어 이 땅에서 배부르게 잘 살자. 예수 덕으로 행복하게 살자’ 그런 식으로 기도하고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에 왜 나가느냐?’ 하고 물으면 ‘우리 집 부자 되려고 나가지. 병 고치려고 나가지’ 맨 그런 식이야.

 

이런 식으로 살고, 이런 식으로 예수 믿는 것은 그 사상의 성분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이종교와 다른 게 뭐냐? 다른 게 없다 그 말이요. 기독교의 특수성이 없어.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고쳐지느냐? 어떻게 사람이 사상정립이 바로 되느냐? 어떻게 사람이 지혜지식적으로 무디지 않고 날카로워지느냐? 예민해지느냐? 민첩해지느냐?

 

오직 성경이라야만이 사람이 정돈 정립이 돼요. 인간 자기가 정말 성경대로 바로 만들어진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인격적으로 참 온전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건전하고 온전한 사람이라.

그런데 아직까지 이 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일반적으로 볼 때 ‘아, 이 사람 마음 참 좋다. 아, 이 사람 영리하다. 이 사람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이다’ 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 사람은 신앙사상적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적으로 정립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상에 허구성이 있고 허물투성이고 연약성이 있고 힘이 없어요. 사상이 없어. 힘이 없어.

 

이런 사람이 일반적으로 이론적으로 잘 따질 런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에게 견디지 못할 사건이 오면 어쩔 도리가 없어. 그 면에 대한 깨달음이 없어요. 수입이 못 잡아.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갈 수밖에 없어. 모르니까 사건이 오는 목적, 사건이 지나가는 목적, 인간의 창조의 목적, 자기가 세상에 왜 사는지 그 존재의 목적을 알 길이 없단 말이요.

 

기독교 외에는, 성경 외에는 이걸 가르쳐주는 데가 없고, 가르침을 받을 곳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종교인들은 뭔가가 좀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제각기 나름대로의 신을 만들고, 찾아가서 숭배하고, 누가 유명하다고 그러면 거기 가서 무릎 꿇고 엎드리고 맨 그런 식이지. 우리는 인간존재의 목적, 창조의 목적 등 인간을 잘 알려면 하나님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인간 자기가 생애목적을 버리고 사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목적이탈로 사는 거다. 그리고 인간 제각기 ‘나는 이런 목적으로 세상에 산다’ 하고 세상적인 것에 목적을 두고 말을 하는 사람은 성경으로 볼 때에,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인간창조의 목적을 잡고 사는 게 아니라 목적 없이 무목적적으로 사는 거다 그 말이요. 알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목적이 뚜렷합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이 뚜렷하지요? 그 다음에 내가 세상에 왜 있는지 그 목적이 뚜렷하고, 내 앞에 사건이 왜 오는지, 왜 사건이 지나가는지 그 목적이 뚜렷하고 확실하단 말이요. 그러니까 세상 사는 게 겁이 없어. 벌벌 떨 필요도 없고.

그리고 우리가 이미 깨달았지만 나에게 깜짝 놀랄만한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지옥 같은 환경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늘 전제가 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려고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인간생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불러일으킬 때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복잡하게 일을 꾸며가지고 그렇게 하시느냐?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심이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이게 사건을 보는 기독교요. 이게 인간을 깨닫는 기독교요.

 

나를 이 세상에 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나를 이 세상에 왜 보냈느냐?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하면 뭐지요? 하나님을 닮게 하려는 목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목적. 하나님을 닮게 하는 이것이 구원이라 그 말이요.

 

어려운 지경에 빠져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도와주는 그것도 구원이고, 그리고 내가 편안하고 탈이 없지만 그러나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성분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닮게 하는 것 즉, 나를 하나님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것도 구원이다 그 말이요. 날 좋게 해 주려고 하는 것, 날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것,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은 절대로 변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윤리도덕적인 죄를 지으면 자기가 그게 죄인 줄을 알지요. 그러나 우리가 한 단 더 올라가서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로 사는 이것을 죄인 줄을 모르고 있다 그 말이요. 이게 죄 중에 큰 죄란 말이요.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는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나쁜 짓하면 법이 와서 잡아가고, 감옥 속에 집어넣고, 멀리하고 그러는 거지만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 앞에서 인간들이 말하는 죄이고 하나님 앞에서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이게 큰 죄라 그 말이요. 자기를 만드신 창조의 목적으로 모르고 사니까 이게 얼마나 큰 죄냐 그 말이요.

 

이 죄를 지었다면 말하는 죄, 행동 죄 등 딴 건 구태여 해석할 필요가 없는 가라요. 나를 왜 인간으로 만들어 내놨는지를 모르는 데야 그 다음 것은 해석할 필요가 없잖아요. 자기를 왜 만들어 놨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사심적이고 이기적인 것은 해석이 돼 들어가는 거지요.

 

하나님 앞에 자기를 창조한 목적에서 이탈로 사는 이게 얼마나 큰 죄냐? 우리는 자기의 제세기간 동안에 즉,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 목적을 바로 잡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의 재세기간의 목적을 모르는 고로 하나님 앞에 패역과 방종을 떨고 있는 겁니다. 알겠어요?

 

우리 기독교는 일반사회의 도덕적인 죄를 말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찾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사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비슷한 것이 아니고 질적 차원적으로 근원적으로 다른 겁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타 종교와 비교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기독교 본질이 그렇단 말이요.

 

그런데 오늘날 불행스럽게도 기독교 안에서 사람 때려잡아 죽이고, 안수하다가 죽이고 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거는 다 성경에서 이탈이고 거짓이에요. 성경은 그렇게 시키는 게 아니요. 몰라서 그런 데 가서 속고, 모르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해서 돈 뺏어 먹고 사람 죽이고 그러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자동적으로 불신세계에서 ‘기독교가 저렇다’ 하게 되고, ‘예수 믿읍시다’ 하면 ‘너나 잘 믿어라. 기독교는 순 도둑놈들만 있다’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지요. 참 불행한 겁니다. 그런 건 기독교 본질적 운동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인간창조의 목적, 인간 자기의 재세기간의 목적을 바로 잡고 살아야 되느냐? 자기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행위가 따르게 되고, 이 행위에는 자기가 산 결과가 있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궁극적 목적을 붙잡아야 하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사후세계의 목적을 바로 붙잡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왜? 내가 사는 재세기간 동안의 모든 삶은 사후의 거기에서 나에게 결과가 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총 결산을 거기서 본다 그 말이요. ‘이 세상에서 보자’ 하는 그게 아니고 사후의 세계에서 총결산을 볼 목적으로 이 세상에서 사는 거다 그 말이요.

 

인간이 목적을 붙잡지 않고, 결과를 붙잡지 않고 사는 것은 목적이탈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이탈이다. 이탈자로 살면 나에게 아무 책임이 없느냐? 천만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 말이요.

 

우리가 이런 걸 느낄 수 있지요?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지었다. 그러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든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가책성이 생기게 되는데 이 가책성이 저 사람에게 있는 겁니까, 내 속에서 쿵쿵 거리는 겁니까? 내 속에서. 그렇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뿌린 것은 절대로 남에게 가지를 않아요. 선을 뿌렸던 악을 뿌렸던, 말을 했던 어떤 행동을 했던 그것은 나를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게 나다 그 말이요. 내가 어디 가겠어, 내 속에 있지. 이게 말하자면 결과로써 나에게 온다고 하는 하나의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결과가 있어요.

 

이제 말씀드린 것은 내가 현세에서 느낄 수 있는 거고,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산속에서 도통하고 살았다고 그럽시다. 그런데 사후에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보니까 그렇게 산 내 결과가 하나님께서 ‘너는 죄를 안 짓고 살았구나’ 그렇게 결과가 되는 게 아니고 ‘너는 누굴 닮고 살았느냐’ 하는 그 면에서 나에게 큰 심판이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세상에 살게 한 분명한 목적이 있거늘 너는 일반적인 도덕성, 사회적인 그 죄를 생각하고 혼자서 산에 가서 살았구나’ 하고 목적이탈로 산 것에 대해 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교는 산속에서 혼자서 사는 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성경을 깨달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선을 뿌리고 하나님의 것을 뿌려서 연관을 지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게 하려고 나 외에 또 다른 많은 사람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잘 닮아야 되겠지만 또한 내 이웃과 부모형제에게, 아는 사람에게, 친구에게, 만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연관을 짓고 살아야 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 기독자는 적극적으로 사는 거다 그 말이요.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선을 주며 사는 것, 하나님의 의를 주며 사는 것, 하나님의 선을 행하면서 사는 것. 이렇게 적극적으로 살게 되면 사람이 활기가 있고, 사는 맛이 나고, 사는 것이 기쁘고, 어떤 환난 고통이 나에게 온다고 하더라도 사는 게 기쁘단 말이요.

 

‘아이고, 나 빨리 죽고 싶다. 이놈이 세상 귀찮다. 빨리 죽음의 선을 넘어가야지’ 하는 것은 목적이탈로 사는 겁니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겁니까?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겁니까? 이건 목적이탈이에요. 우리 입에서는 절대로 그런 소리가 나와서는 안 돼요.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주는 것. 받는 기쁨도 있지만 주는 기쁨은 더 커. 주면 자꾸 솟아나와. 산속의 샘물은 그대로 놔두면 썩어버려. 자꾸 퍼내서 먹고 마시고 딴 사람에게 줘야 속에서 자꾸 좋은 물이 솟아나지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면 줄수록 사람들은 ‘아이고, 저 사람 지독하고 미움의 사람이다’ 그렇게 소문이 날까요, ‘아, 저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다’ 그렇게 소문이 날까요? 그런데 주려고 하니 내 것이 있어야 주지. 사랑을 주고 살면 딴 사람이 날 사랑합니까? 그래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려고 하는 결과가 있다. 내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이 결과가 무엇이냐? 신령계에서의 영광과 존귀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을 닮으니 만큼 영광과 존귀란 말이요.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부분적이지만 세상의 실력이 있는 자는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겁니다. 부분적인 면에서.

 

요새 야구가 인기더구먼. 야구 잘 하니까 이 세상에서 영광과 존귀를 받습니까? 야구를 잘 하면 ‘몇 억 줄께 우리 팀에 오너라’ 하고 돈이 그 사람을 따라가지요. 실력이 있으니까 돈이 따라가. 돈이 따라가면 영광도 따라가고 명예도 따라가고 부귀도 따라가고 다 따라가잖아요. 우리가 임시적이지만 그런 걸 이 세상에서 볼 수 있지요?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야구장이 있겠습니까?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는 없는 건데 이 세상에서 그런 걸 통해 신령세계에서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이 세상에서도 늙어지면 쭈그러지고, 죽으면 냄새나는 육체의 미모성도 잘 생기니까 딴 사람이 와서 돈을 주며 세계 구경 가라고 비행기 태워주고 그럽디까? 그러지. 이건 다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해주려고 보여주는 거지요. 수영을 잘 하면 수영을 잘 하는 그 면에 영광이 있고. 세상은 그래요. 어떤 부분적인 면에 그래요.

 

부분적으로 보면 그런 실력이 있으면 영광을 받지만 인격이 제일 고상한 사람은 세상에서 별로 알아주지를 않지. 공부를 많이 하면 인격이 있는 걸로 알지? 천만에요. 인격이라는 것은 공부를 많이 하면 있는 게 아니요. 공부를 못하면 그 사람은 인격이 없나? 여러분들, 국민학교도 못 나왔으면 하나님을 하나도 못 닮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요.

 

우리를 장차 신령계의 영광과 존귀자로 만들어 주려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 나에게 향하신 결과적 목적이란 말이요. 그런데 이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별로 실감이 안 나지? 그래요, 안 그래요? 예수 믿어서 자가용도 생기고, 뭔가가 이름이 나서 세계 각국에서 ‘오너라, 가너라’ 해 쌓고, 돌아다니고 구경도 하고 이런 게 있어야 예수 믿는 것도 재미가 있는 거 아니요?

 

가만있으면 하늘에서 돈 보따리가 굴러 떨어지고 그래야 예수 믿는 게 재미가 있지 예수 백 날 믿어봐야 노상 아프고 가난하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저 사람들은 예수 안 믿어도 저렇게 부자로 자자손손 잘 되고, 성경에 보니까 그들이 얼마나 잘 먹고 살이 많이 쪘는지 눈알이 툭 불어지도록 저렇게 잘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직장에 가면 승진도 하고, 대통령이 상도 좀 내려주고 하는 그런 결과를 보고 예수 믿는 겁니까? 그러나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딱 하나가 있어요. 아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그런 면에서는 너희가 다 가져가라 그 말이요. 세상 명예 영광은 다 가져가라 그 말이요. 그러나 너는 미쳤다. 왜? 사람이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온전하지를 못하니까 어떤 환경의 바람을 하나님이 쓱 불게 하면 그 사람 속에는 숨어있던 미친 짓이 다 나와.

 

아무리 학박사라도, 아무리 부자요 명예와 영광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으로 이름이 있어도 사건 환경이 탁 부딪히니까 자기 아버지를 죽입니까?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국민들이 낸 세금을 뒤로 쓱쓱 해가지고 돈 다 날리고 그럽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다면 그러겠어요?

 

참으로 성경대로 하나님의 지식을 닮고 마음을 닮고 나가는 사람은 아무리 없이 살아도, 아무리 어려운 사건 환경이 오더라도 그 사람은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정립이 딱 돼. 그 사람은 참말로 신사야. 그걸 보고 신사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결과를 붙잡고 살다보면 목적을 안 붙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바른 목적을 붙잡았으면 바른 방편을 붙잡아야 되고, 바른 방편을 붙잡았으면 바른 지식을 붙잡아야 되는 겁니다.

 

바른 목적을 붙들고 살았다고 해도 방편이 비뚤어지면 자기의 원하는 목적이 올까요? 예를 들면 내가 임시적인 거지만 이 세상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목적을 두었습니다. 목적을 그렇게 두었다면 방편이 나와야 돼요, 안 나와야 돼요? 나와야지요.

 

방편이 나오는 것은 어찌하든지 밤과 낮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사회를 잘 알고 정치적으로 잘 알고 그렇게 방편이 나가야지. 그런데 ‘나는 앞으로 대통령이 될 거다’ 하는 목적은 가졌지만 방편적인 면에서 깡패들하고 술이나 먹고 놀고 하면 그 목적이 옵니까? 안 와요.

 

자기가 실력이 있는 선생이 되려면 방편을 바로 써야 되고, 현재적으로 옳은 지식을 바로 배워야지요. 그래야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그래야 바른 결과가 옳은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오지를 않아요.

 

아무 교회나 가서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그건 제 생각이지. 성경은 뭐라고 해요? 바른 목적을 붙잡아라. 바른 결과를 붙잡아라. 방편적으로 네가 어떻게 살아라.

 

이렇게 말하니까 ‘어떻게 꼭 하나님 뜻에만 맞추라고 그럽니까? 내 뜻 내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나를 조이는 것 같아서 몸부림이 납니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까? 그래, 그러면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차타고 다니면서 자기가 안 죽으려면 제 멋대로 가면 됩니까, 교통질서를 바로 지켜야 되는 겁니까? 법칙을 잘 지켜야지요. 그게 자기 자유지. 그렇지 않아요 그게 법 안에서 자기 자유지. 우리에게는 활동의 목적이 있고, 바른 목적에서 바른 방편으로 살고.

 

우리가 교회적으로 볼 때 목사님이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님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이웃을 찾아가서 불쌍한 사람을 돌보고 부지런히 사랑하고 구제하고 그렇게 사십시오’ 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 목사님이 강조하는 말이 인격적입니까, 활동입니까? 인격에다 강조하는 것 같습니까. 활동에다 강조하는 것 같습니까? 행동 활동. 틀림없습니까?

 

여러분들, 없는 사람을 보면 안 주고 싶습니까? 밥 굶는 사람을 보면 밥 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건 사람이라면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마음속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거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목사님이 행동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설교가 된다면 그거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아니란 말이요.

 

그러면 뭘 얘기해야 되느냐? 성도들의 인격이 하나님에게 피동 되도록 해야 된단 말이요. 사상과 정신이. 이해 갑니까? 그게 기독교란 말이요. 그러니까 목적과 방편이 다르면 안 된다 그 말이요. 활동의 종류가 아무리 신앙인 것 같아도 목적과 방편이 다르면 안 되는 겁니다. 바른 목적을 두고 방편을 달리해도 안 됩니다. 고로 바른 목적을 붙잡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할 때에 바른 목적을 붙잡고 행동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이해 가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셨고, 요나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디로 가버렸지요?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그랬는데 요나는 다시스로 가버렸단 말이요. 그러니까 요나는 다른 뜻으로 일어난 거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겁니다. 바른 결과를 붙잡은 자, 바른 목적을 붙잡은 자, 이런 사람은 바른 지식을 가지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돼 있어요.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랬단 말이요. 그렇게 말씀하는 것은 ‘아브라함 네 마음대로 살아라’ 그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그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그렇지요?

 

우리 속에는 다 자기의 주관성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객관성이 내 속에 들어와서 그것이 내 주관으로 된 것이 신앙이지요. 그것이 바른 믿음이고. 그런데 하나님의 객관은 객관대로 내버려두고, 내 주관성이 주인이 되어가지고 주격이 되어가지고 하나님의 객관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면서 ‘내 뜻대로 해 주십시오’ 하는 그것은 신앙이요, 신앙이 아니요? 그건 신앙이 아니지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된 자기의 능동으로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피동이 되어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다시스로 간다든지 자기 좋은 대로 아무 데고 가면 안 되는 겁니까? 종교의식도 종교적 제도도 방편도 제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요?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그랬는데 요나는 어디로 가고 있어요? 다시스로 가고 있단 말이요. 말씀은 ‘니느웨로 가라’ 그러는데 요나 자기는 다시스로 가. 그러니까 방향이 달라. 일어나는 목적도 달랐고.

 

‘나는 다시스로 가서 목숨을 내놓고 전도를 한다’ 하고서 다시스로 가서 전도를 해서 다시스 사람을 전부 하나님을 믿게 했다고 해도 그거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 아무 교회나 가서 충성봉사 하면 안 됩니까? 안 돼요?

(이하 녹음 안 됨)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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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1203 요나 하나님께서 매질을 하시는 이유를 아십니까? 욘1:1-10  김경형 목사  2014-09-19 1005
11202 마태복음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마22:37-38  한태완 목사  2014-09-19 1678
11201 룻기 룻의 결심 룻1:15-18  강승호 목사  2014-09-18 1155
11200 히브리서 이웃 사랑과 나눔의 정신 히13:16  한태완 목사  2014-09-17 966
11199 역대하 자신을 지킨 사람 대하7:1-22  최장환 목사  2014-09-17 1261
11198 요한복음 의미있는 일 요19:17-42  최장환 목사  2014-09-17 926
11197 빌립보서 최고로 가치 있고 소중한 것 빌3:7-8  한태완 목사  2014-09-16 1372
11196 시편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시71:5  한태완 목사  2014-09-16 1337
11195 잠언 나눔이 축복이다 잠22:9  한태완 목사  2014-09-14 962
11194 창세기 엘리에셀의 순종 창24:1-9  강승호 목사  2014-09-13 1793
11193 로마서 주님 때문에 롬14:1-12  강승호 목사  2014-09-13 1405
11192 사도행전 내게 맡기신 사명 행20:24  한태완 목사  2014-09-13 1683
11191 요나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거짓 자기로 할 수도 있습니다. 욘1:4  김경형 목사  2014-09-12 829
11190 창세기 비둘기 신앙 창8:6-12  강승호 목사  2014-09-11 993
11189 전도서 오늘을 행복하고 충실하게 전3:1-12  한태완 목사  2014-09-11 1474
11188 요한복음 겸손히 주를 섬기라 요13:12-17  한태완 목사  2014-09-10 1440
11187 이사야 죽어야만 산다 사30:1-17  최장환 목사  2014-09-09 955
11186 예레미야 좋은 인간 관계 렘26:1-19  최장환 목사  2014-09-09 1136
11185 누가복음 신앙의 본질을 찾아서 눅9:18-27  하은혜 목사  2014-09-09 1203
11184 이사야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알라 사36:4-10  한태완 목사  2014-09-09 1178
11183 여호수아 만사 형통하리라 수1:1-8  한태완 목사  2014-09-07 1801
11182 고린도전 성령의 가르치심 고전2:12-13  강종수 목사  2014-09-07 901
11181 디모데전 보물창고를 지으라 딤전6:17-21  강승호 목사  2014-09-06 1518
11180 고린도후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고후4:17  한태완 목사  2014-09-06 2604
11179 히브리서 마음으로 짓는 죄 히4:12  한태완 목사  2014-09-06 1759
11178 마태복음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마18:15-20  강승호 목사  2014-09-05 1000
» 요나 목적을 바로 잡았다면 방편과 위주도 옳아야 한다 욘1:1-3  김경형 목사  2014-09-05 815
11176 빌립보서 꿈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자 빌3:12-14  한태완 목사  2014-09-04 1674
11175 민수기 주님 축복하시리 민6:22-27  한태완 목사  2014-09-04 1426
11174 고린도후 유익한 사람 고후3:1-18  최장환 목사  2014-09-03 1086
11173 고린도후 어려울 때 할 일 욥7:1-21  최장환 목사  2014-09-03 982
11172 고린도전 육신에 속한 자 고전3:1-9  한태완 목사  2014-09-03 1923
11171 마태복음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 마16:21-28  강승호 목사  2014-09-03 957
11170 시편 성경 말씀의 능력(힘)과 유익 시119:105  한태완 목사  2014-09-02 2324
11169 마가복음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막12:28-33  한태완 목사  2014-09-0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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