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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순종하지만 거짓 자기로 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 궁극이............... 조회 수 830 추천 수 0 2014.09.12 20:29:37
.........
성경본문 : 욘1:4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4절-10절.

 

4절-10절: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인격자요 생존자요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깊은 인격의 발생적인 소원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입혀가지고 하나님 당신처럼 영원히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당신이 누리시는 그 천국을 주어서 사용하고 다스리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 구원역사를 부절히 하고 계시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완전히 전적 타락해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이 없는 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영에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혀서 당신의 생명으로 중생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중생된 그 영을 새사람이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새사람인 이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거듭났기 때문에 본질과 본성적으로는 완전하지만 그러나 양적으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무한히 닮아가야 하는 겁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그도 인간의 구성요소로 말한다면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고 자라야 할 기능 면, 지능 면, 도덕성적인 면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과 같다 그 말이요.

 

본서의 이 요나는 인간 전체의 상징적인 인물이 아니고, 인간 전체를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한 성도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겠습니다. 불신자를 말하는 게 아니고 성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 요나 속에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의 지음을 받은 중생한 새사람이 있는데 이 중생한 새사람이 자기에게 있어서 참 자기라 그 말이요. 그 외의 것은 전부가 다 자기는 자기이지만 참 자기가 아니고 거짓된 자기입니다.

 

본질과 본성적인 면을 두고 우리가 참 자기와 거짓된 자기를 느낄 수 있겠지요? 어디까지 선을 딱 그을 수는 없으나 그러나 그것을 느낄 수는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걸 지식을 할 수 있지 않느냐 그 말이요.

 

그러면 여러분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성분으로 된 그 참 자기가 몇 %나 돼 있을까’ 이걸 한 번 생각을 해봐요. 그렇게 따지니까 자기가 둘로 나오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거짓된 자기가 더 키가 크고 힘도 센지, 아니면 참 자기가 양적 성장적으로 더 키가 크고 힘이 센지? 말하자면 참 자기가 더 능력이 있어서 거짓된 자기를 이기고 넘길 수 있는지? 그 면을 자기가 한 번 상상해 봐요. 몇 %나 될까? 예수 믿은 후로 어느 주격으로 예수를 믿었는가 그걸 한 번 보란 말이요. 이건 질적인 면에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질을 안 보면,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이 아니면 구분이 안 되잖아요.

 

우리는 구별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어느 자기가 자기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그걸 아는 거지요. 자기 속의 신앙이라고 하는 그 질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의 질인지를 구별을 못하면 무조건 예수이름으로 믿음으로 한다고 그러면 그걸 몽땅 주먹구구식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게 되지요. 그건 절대로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악령이 교회로 통해서 활동을 할 때에 종교적인 운동 종교적인 활동을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걸 못한다는 게 아니고 제일 중요한 사람 구별을 못합니다. 옛사람 새사람의 구별을 못하게 합니다. 악령의 운동이 그렇다 그 말이요. 이해 가지요?

 

그렇게 보니까 하나님과 원수인 자기, 또 자기와 원수인 자기가 있지요? 진리와 원수인 자기, 참 구원과 생명과 원수인 자기. 있단 말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거짓된 자기에게 피해를 무수히 보고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자기가 있는 것도 모르고 모든 인생들이 현재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차원에서의 그 자기가 참 자기인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 말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별을 하라고 이따금씩 세쌍둥이 네 쌍둥이를 나게 하는 모양이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교회도 쌍둥이 나가지고 설교할 적마다 상징계시 보조계시로 좀......

 

그리고 거짓된 자기를 참 자기인줄 알고 그 자기를 가꾸고 다듬고 숭상을 하고 살찌우고 그러지요? 참 이거 기가 막히지요. 그러니까 그 자기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당하느냐 그 말이요. 엄청난 피해다. 그러니까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요나는 자기 속의 그 자기를 찾아가지고 사정없이 죽여 버려야 한다.

 

우리 기독교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단순히 어떤 행위보다도 그 속의 참 자기와 거짓 자기를 찾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겁니다. 물론 우리가 표면적으로 보면 행위 자체도 중요하긴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서 바리새인들의 그 행위 자체가 나쁩니까? 나쁜 게 아니에요. 문제는 인격의 주체성을 바로 못 찾았다 그 말이요. 바로 찾지를 못하고 거짓된 자기에게 동원이 되고 활동이 됐기 때문에 그들은 남이 볼 때에 도덕적인 종교행위를 했지만 실제에 가서는 무서운 사망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이지요.

 

자기의 속에 하나님과 본질과 본성,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성, 하나님의 단일성이 아닌 것은 전부 다 거짓된 자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서 진짜 자기를 자꾸 만들어가는 이게 기독교라 그 말이요. 자기를 하나님의 생명적으로 만들어가고,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는 이게 기독교 운동입니다. 이게 복음운동이고.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의사성과 정면 대립이 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하나님은 ‘이렇게 하자’고 하는데 나는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정면 대립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를 위해 달라고 하는 그 자가 하나님과 원수란 말이요. 자기 위하고자 하는 거, 그러니까 거짓 자기가 되겠지요. 자기 위하고자 하는 그 자가 원수인 자기요, 그 자기를 누가 해칠 때에 섭섭하다 그 말이지요. 섭섭한 그 자기도 죽여 버려야 돼요. 그게 다 죽여야 할 자기지요.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자기 혼자만 좋아하는 그 자도 자기 원수란 말이요. 참 자기는 언제나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고 남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빼버리고 남을 위하는 그것도 안 된단 말이요.

 

자기 기쁨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기쁨에서 사는 그 자가 참 자기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좋아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그 자가 참 자기다.

 

요나는 자기를 위해 달라는 그 자기로 살았고, 그것이 자기를 해치는 원수로 삼아야 하는 건데 그것을 또 자기로 알고 있단 말이요. 하나님이 좋아하지도 않는데 자기는 좋아하는 그 자로 살고 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이 자는 꺾어야 할 자기고 죽여야 할 자다.

 

요나는 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도망을 갔지요? 도망을 갔지만 하나님은 요나의 그 거짓된 자기를 죽이려고 배와 바람과 사공 이런 걸 다 준비해 두었다가 총 동원을 한다 그 말이지요.

 

물론 그 때 당시 뱃사람들이나 선장이야 자기들이 돈 벌어 먹으려고 했고, 장사하려고 한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 면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그 거짓된 자기를 죽이라고 그런 사람들까지 움직이시는 거 아니요? 하나님이 미리 몇 년 전에, 혹은 몇 십 년 전에 다 준비해 놓은 거 아니요? 요나를 위해서 총 동원이 됐어.

 

우리가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적으로도 성도를 위해서 만물을 동원시키시는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환하게 볼 수가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점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모르지요.

 

총 동원된 그들이 하나님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고, 또 요나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는 그건 아니에요. 물론 하나님은 어떤 무엇에게도 어떤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피해를 입는 자는 요나 자기가 자기에게 피해를 입는 겁니다. 언제든지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요나가 거짓된 자기에게 피해를 입는 것을 보시고 견딜 수가 없어서 아주 분개한 마음이 일어난 거지요.

 

평소에 자기 아이가 정직한 말만 하는 자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부모는 그 자식 속의 거짓된 그 성분을 보고 사정없이 매질을 하지요? 분하단 말이지요. 아이의 그 자기가 점점 커지게 되면 자기 자식은 죽는 거라 그 말이요. 자식이 그렇게 크면 가면 갈수록 사회적인 어떤 일을 일으키고 하는 그것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분한 마음이 나오는 거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를 관심을 두고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면을 가만히 볼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정말 원수로 여겨가지고 죽이려고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속에 당신의 자녀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불붙고 있다는 그게 있지요. 그게 있으니까 그 매질이 나오는 거지요.

 

쏜살같이 바람같이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을 입을 시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니 이 현존세상에서 일생 전부를 다 투자를 해가지고 구원건설을 해도 무한한 하나님의 성품을 다 닮을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거짓된 그 자기가 주격이 돼가지고 그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안타깝단 말이요.

 

요나가 그렇게 되니까 자기의 구원을 중단시켜 놓게 되고, 이로 인해 자기의 영원한 천국을 전부 다 절단내버렸단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분통이 터져가지고 노해가지고 모든 물질계 자연계의 존재들을 총 동원시켜가지고 요나 속의 그 못된 거짓된 자기를 꺾고 구원을 입혀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노력이 지금 보여지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런데 보통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안 듣고 도망가는 요나만 보여지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분이 나서 요나를 원수 시 해가지고 ‘왜 내 말을 안 듣느냐’ 하고 풍랑 파도를 일으킨 형벌적인 면으로 강조가 돼서 나가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을 더 깊이 살펴보면 요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보여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시고 사랑인 분이시니 내발적인 이 사랑의 발작에서 적극적인 사랑의 마음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요나를 모형계시로 삼아서 지음 받은 것이 누군가 하니 곧 자기다. 곧 나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요나서를 놓고 ‘이게 신화냐 전설이냐’ 하고 따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혀놓은 성도에게 역사를 하시는 하나님의 방편이 다르다 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은 각자에게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시대가 다르고 시간이 다르고 공간이 다르고 그 모든 사건이 종별적으로 다르다 뿐이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사랑이 미치는 것은 성질적으로는 똑같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중생시켜 놓고 그 다음에 그 성도와 함께 유기적인 사역을 원하시는 겁니다. 강권 마찰 대립이 아니고 억압이 아니고 유기적인 사역을 원한다 그 말이요. 유기적으로 하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요나서에서 보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나를 잡고 얼마나 씨름을 하시는지? 그러니 고통을 당하고 죽어나는 건 누구만 고통을 당하고 죽어나지요? 뱃사람들이고 사공들이고 말 못하는 큰 고기고. 참 그거.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하면 딴 존재들이 고통을 많이 당해요. 누구 때문이냐? 나 때문이다 그 말이요. 그 면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고 안 가고, 또 다시스로 가고 안 가고 하는 이것을 근본 문제시 삼는 건 아닙니다. 알겠어요?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되지요. 지금 이 요나서에서는 그걸 큰 문제로 삼는 게 아니란 말이요.

 

사역적으로 따진다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야 그 사역이 성공이지요.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면에 대한 강조를 할 필요가 없고, 강조점을 두면 안 되는 겁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로 가고 안 가고 하는 이게 큰 게 아니란 말이요.

 

요나 속에 있는 거짓된 자기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요나 속에 거짓된 자기가 있기 때문에 다시스로 내뺀단 말이요. 그런데 ‘어쨌든 니느웨로 갔으면 문제가 없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자, 우리가 이렇게도 한 번 봐 봐요. 요나가 지금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요나가 니느웨로 갈 수도 있지요? 만일 그렇게 갔다면 지금 이 성경에서 일어난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요나 속에 거짓된 자기가 있어서 갈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럼 그 때는 무슨 목적이 되지요? 사역목적이 되지요. 그런 상태로 니느웨로 가가지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했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은 됐겠지. 그러나 이것은 실질적인 면에서 자기에게 할 일을 다 못한 거지요.

 

1차적으로는 거역했지만 2차적으로서 기어갔던 걸어갔던 성문계시적으로 다 했습니다. 그렇지요? 2차적으로 했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밀계시는 순종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으로 되지 못하는 이 모든 것은 거짓된 자기이다.

 

우리 믿는 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면 자기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어떤 종별을 가리지 않고 다 한다 그 말이지요. 이럴 때 하나님과 대립성은 아닐지라도 문제는 ‘자기를 위하는 그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우리가 분별을 해야 됩니다. 자기라는 것이 있다고 그러면 그것은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 순종인 것 같으나 이면적인 면에서는 하나님과 원수라 그 말입니다.

 

자기 속에 거짓된 자기가 있는데 첫째는 보편적인 때는 자기 속에 이 거짓된 자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몰라요. 그러나 어떤 사건이 왔을 때에 그게 나타난다 그 말이지요. 두 번째는 타인이 자기를 건드렸을 때에, 그러니까 옆에서 쿡쿡 찌르고 건드렸을 때에 나타나고, 또한 남이 쿡쿡 안 찔러도 자기를 위하는 거기에서 거짓된 자기가 또 나타날 수도 있지요? 얼마든지 볼 수 있지요. 그래서 가만 보면 말세가 될수록 사기꾼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세 번째는 하나님은 좋아하지를 않는데 자기만 좋아하는 거. 오늘날 입으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참 자기를 손해 보는 그런 자들이 많다 그 말이요. 니느웨 성 사람들이 요나의 거짓된 그 자기 때문에 손해 본 건 없지요? 그러나 요나 자기는 큰 손해를 본 겁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질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미움의 불길이 불일 듯 일어나요. 알겠어요? 사랑 속에서 일어나는 그 미움성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거룩 된 성품을 입혀주려고 하는데 요나는 안 입으려고 도망을 가니까 하나님이 애가 탄다 그 말이요. 도망가는 그 동안에도 시간은 자꾸 지나가고 구원거리는 자꾸 지나가는 거니까요.

 

요나처럼 그렇게 살면 영원한 자기의 미래가 유익될 게 뭐냐 그 말이요. 자기에게 영광이 되고 능력이 될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요나가 그러한 점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속이 터진다. 아이들이 학생이라고 하는 신분을 잊어버리고 거리의 나쁜 아이들과 하루 온 종일 시간낭비하고 보낼 때에 그 아이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부모가 그걸 볼 때에 분통이 터지는 거지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도 요나를 볼 때 그렇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패역성이 강한 요나에게 당신이 누리시는 화려하고 무궁하고 아름다운 그 세계를 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행위나 활동이나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니고 성품이 바꾸어져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패역성은 절대로 용납이 안 된다 그 말이요.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인 것을 갖는 일에 있어서 그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방해를 하지를 못해요. 내가 원하는 이상 구원을 입어갈 수가 있어요. 내가 원하는 이상 그 누구도, 사단 마귀도 입지 못하게 하는 방해는 못해요. 안 된단 말이요. 마귀가 방해를 하면 내가 구원을 못 입고, 방해를 안 하면 입고 하는 그런 구원이 아니란 말이요. 자기 할 탓이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구원 방해자는 누군가 하니 바로 자기다 하는 점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겁니다.

 

기도 올립시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못된 요나 같은 패역성이 강한 저희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자기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궁극적 구원을 염려해 주셔서 미리 이 요나를 동원시켜서 우리의 속에 들어있는 거짓된 자기를 볼 수 있게 저희들의 영의 눈을 밝혀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복음운동이 무엇이며 생명운동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많은 타락된 속화된 기독자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활동한 그 사역성 그 위주로 목적을 삼고 하나의 사역목적을 두고 기독교 운동을 하는 것을 저희들은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진정 깨닫고 보니 사역도 중요하긴 하겠지만 사역목적이 아니라 그 사역에 동원돼서 움직여가는 그 속의 자기가 누구인지, 어느 자기가 주격이 되어서 움직이고 있는지 그 자기를 깨닫도록 저희들에게 요나를 통해서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인간들이 볼 때는 저희들이 볼품없고 알아주지 않고 무슨 깜짝 놀랄만한 큰일은 하지 않지만, 또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어떤 환경 처소에서도,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그 일은 할 수 있는 것이니 부절히 그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갈 수 있는 복스럽고 지혜로운 당신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성품을 원없이 한없이 입고 가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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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4 이사야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알라 사36:4-10  한태완 목사  2014-09-09 1187
11183 여호수아 만사 형통하리라 수1:1-8  한태완 목사  2014-09-0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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