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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매질을 하시는 이유를 아십니까?

요나 궁극이............... 조회 수 1007 추천 수 0 2014.09.19 09:5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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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10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10절.

 

1절-10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 얻어맞았다. 맞지요? 대개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봐서 그렇게 보지요? 그러나 그건 잘못된 겁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갔으면 안 맞을 텐데 다시스로 갔기 때문에 맞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사역이 돼버리지요. 일을 안 했기 때문에 얻어맞았다. 일에 대한 목적을 둔 말이 돼버리지요. 인간보기에는 꼭 그렇게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왜 그렇지요? 일에 대한 목적을 두고 하나님이 성공리에 일을 시킬 것 같으면 요나 같은 자를 불러서 일을 시킬 필요가 없지요. 세상에 요나밖에 없나? 요나보다 말을 더 잘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아닌 말로 가치판단을 별로 못 내리는 바보를 시키면 고분고분할 거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표면대로 보게 되면 계시 면에 있어서 허구성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은 사역목적이 아닙니다. 표면만을 보게 되면 ‘요나가 니느웨로 안 가고 다시스로 갔기 때문에 얻어맞은 것이다’ 이렇게 말이 돼버리는 거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게 아니라 그 말이요.

 

그리고 이런 게 있을 수 있지요? 장사를 해도 안 되고 무엇을 해도 자꾸 망해. 그래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나를 목회 길로 나가라고 하는데 내가 장사를 해서 요나처럼 망했다’ 하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요나서는 ‘요나가 외형적 활동적 행동적으로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성품을 바꾸라는 거요. 그런데 표면적으로 보고 ‘명령을 어겨서 매를 맞았다’ 하는 정도로 보는 눈을 가졌다면, 만일 이 요나서를 불신자가 읽고 그 내용을 말한다면 요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게 되지요? 요나가 명령을 어겨서 얻어맞았다고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불신자가 보는 것과 믿는 자기가 보는 것과 똑같단 말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계시 면은, 근본적인 면은 안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보는 건 계시 면으로 보는 게 아니다.

 

천국 가서 보면 어느 게 맞는지 안다?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러면 그 때 가서 볼 때 ‘아이고, 잘못 됐구나’ 한다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그걸 따질 거요? 안 되는 거지. 불가능이지요.

 

하나님께서 대풍을 바다에 내리쳐서 요나에게 그렇게 하실 때 요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은 변동이 없지요. 하나도 변동이 없어요. 사랑의 마음이 계속 요나에게 좇아가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에 사랑이 변한 것 같지. 요나를 두들겨 패고 요나가 얻어맞으니까 그렇게 보이지요. 그러나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요나를 위해서 동원된 모든 존재들은 절대 자유자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만 자유를 가졌지요? 요나. 그러면 불신자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종을 시키면 하나님 앞에 복종을 할 수밖에 없게 지음 받은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동원을 시킨 거지요. 심지어 요나를 사랑하고 구원을 입히고자 하는 그 면에 자연법을 여겨가면서까지 라도 돼 있다 그 말이지요. 자연법을 어겨가면서 그렇게 하시는 걸 이상하다고 보는 게 아니고 성도 요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깊이를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이 대풍이 우연히 분 겁니까? 우연히 분 게 아니란 말이요. 하나님께서 바다 위에 내리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했느냐? 요나가 자기의 구원을 중단시키면 안 되는데 구원을 중단시키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 못된 자기를 자기가 숭상하고 있고 위하고 있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대풍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요나를 동원시킨 것은, 그리고 그 요나의 사건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기록해서 준 것은 우리에게도 요나와 같은 성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걸 깨닫고 고치라고 우리에게 준 거란 말이요. 그러니까 이 요나를 보는 우리의 눈이 옛날 동화 속에 나오는 얘기처럼 ‘요나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매를 맞았단다’ 그런 식으로 보지를 말고 요나 속에 들어있는 그 성분 말이요. 아주 주관성이 강하지요? 그걸 보란 말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시기관으로 쓰시려고 그런 요나를 동원시켰다. ‘계시기관을 삼았다’ 하는 그것도 있는 거지만 그런 요나가 계시기관으로 동원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요나는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갈 자이지요. 그렇지요? 사실은 그 시대에 요나 같은 사람이 많아요. 없는 건 아닌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나를 선택해서 계시기관을 삼은 겁니다.

 

그리고 요나는 처음부터 평소에 그런 성분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불러 심부름을 시키려니까 ‘아이, 안 가렵니다’ 하는 그게 나온 건 아니지요. 평상시 그런 성분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순종을 한 것이므로 훗날 요나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 항의를 할 수가 없지요. 오히려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 사건이 없었더라면 내가 매를 안 맞을 것인데 그런 사건을 줘가지고 나를 바보로 만듭니까?’ 그러겠습니까? ‘내가 평상시 하나님 앞에 교만 되고 주관성이 강한 자였는데 내가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환경을 들어서 나를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여러분들에게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이 올 수 있지요? 그 때마다 사건을 맞는 자기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건에 대해서 자기의 자세가 있잖아요. 감사한 그게 얼른 떠오를까요, 요나 같은 그게 튀어나올까요?

 

하나님이 요나인 우리 모든 택자에게 바라시는 소원은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 소원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느니만큼 입혀지느니만큼 내 속의 사망적이고 타락적이고 죄악적인 요소가 제거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신앙은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요나적인 성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구원을 충분히 입어가야 할 우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서 이 말씀을 전하라’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전하는 것만으로 만족치 않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했을 때에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전하는 그 이전에 먼저 그 말씀과 대립이 되는 성질이 자기 속에 들어있어서 그 말씀을 받지를 못하니 그 말씀을 붙잡고 자기 속의 말씀과 대립이 되는 그 성질과 싸웠어야 했습니다. 대립이 되는 그것은 참 자기가 아니고 거짓 자기지요. 그 성질을 꺾어야 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을 때 요나가 그 말씀을 생명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자기 속에서 잉태가 되고, 또 그 말씀이 중생된 영과 결합이 돼가지고 자기 속의 옛사람이 주격이 된 거짓된 그 자와 싸워서 이기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돼야 되는 건데 요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 말이지요.

 

우리 기독자는 싸움을 잘 싸워야 합니다. 싸우려면 먼저 원수를 발견해야 되겠지요? 제일 큰 원수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원수, 거짓된 원수입니다. 이 거짓된 자기와 싸워서 꺾어서 복종을 시키고, 아울러 이것과 합세해서 도전해 오던 이성과 몸을 또 다스려야 하고, 또 내 몸 밖에 있는 모든 것과 싸워야 하는 거고.

 

몸 밖에 있는 걸 인용하고 선용하고 잘 다스려 나가는 것이 신앙이고, 몸 밖의 것에 내가 다스림을 받는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내가 몸 밖의 환경에 다스림을 받으면 그 사람은 환경에 놀게 되고, 환경이 나를 업고 가고, 환경이 나를 밀어버리고, 환경이 가자고 그러면 따라가게 되고. 이건 타락입니다.

 

씨앗 속에 생명이 있으면 싸워서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비바람과 싸우고 태양과 싸우고, 그리고 한 편으로는 그러한 모든 것을 인용해서 솟아나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씨앗에 생명만 있으면 지구가 갈라지지요. 씨앗에 생명이 있으면 흙을 뚫고 올라온단 말이요. 지구를 쪼개놓는단 말이요. 그러나 생명이 없는 것은 땅을 가르고 올라오지를 못하지요.

생명이 있으면 땅만 갈라지겠느냐? 여러분들, 산에 가서 보면 큰 바위가 갈라진 틈에 작은 식물 뿌리가 자리를 잡으면 그 식물의 뿌리가 바위를 파고 들어가는 걸 보지요. 생명이 있어서 그래요.

 

담쟁이 덩굴인가? 돌 타고 올라가는 그 줄기 굉장하지요? 산에 가면 많이 있어요. 보면 좋은 땅은 다 놔두고 바위에 뿌리를 박고 올라오는 걸 보면 희한하지? 아주 대단해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물론 씨앗이야 바람에 의해서거나 짐승에 의해서 그곳에 떨어진 것이지만 그럼에도 바위 위에 떨어져서 싹이 나는 걸 보면 아주 대단하단 말이요. 아주 특별히 봐진단 말이요. 생명이 파고 들어가고 파고 올라오고 할 때는 그 큰 바위를 파괴를 시켜버리지요. 그만큼 힘이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못된 자기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생명의 주체성의 싸움을 싸우지를 못했다. 자기 속의 거짓된 것과 싸워서 하나님의 거룩을 입어야 할 텐데 요나는 그 목적을 잃어버렸다고나 할까?

 

인간이 태어나서 자기 속의 거짓 자기와 싸워 이겨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게 하나님의 목적대로 바로 가는 건데 그렇지 못하면 딴 사람하고 대립이 되기 전에 자기가 자기에게 대립이 되는 거지요.

 

우리가 이런 걸 볼 수 있지요? 보통 사람은 못 느껴. 갑과 을이 싸우는데 그 싸움을 하는 사람이 각자 싸우는 이유가 ‘누가 와서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흉을 봐서 그렇다. 가만있는 사람을 건드려서 그렇다’ 라고 말하며 원수를 상대로 보지요? 제 삼자가 볼 때도 그렇게 보고.

 

그런데 우리는 그걸 깊게 살펴보면 각자가 자기 속에서 참 자기를 붙잡지 못하고 거짓 자기가 나타나서 싸우는 걸 볼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속의 적을 못 알아보고 타를 원수 시 한단 말이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우습느냐?

 

알고 보면 원수는 자기 속에 있는 건데 일반적으로 그런 것을 보는 눈도 없고 말을 해줘도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구원도리를 민감하게 깨닫는 사람은 그건 금방 척척 들어오잖아요?

 

이렇게 인인 간에 대립이 될 때 자기 속에 먼저 대립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교훈할 수도 있지요. 모르면 그 사람 얘기 듣고 ‘아이고, 네가 나쁘다’ 늘 이런 식으로 보게 되지요.

 

주인 할아버지에게 며느리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이 며느리와 늘 싸워. 그런데 할아버지의 말인즉 예수를 믿으려면 며느리가 믿어야 된다는 거지. 그러니까 자기는 의인 시 돼 있고 자기는 사람이 좋으니까 안 믿어도 된다는 거지. 며느리가 예수를 믿어서 좋은 사람이 돼가지고 자기에게 좋게 해주면 좋겠다는 거지요. 그 참 인간을 가만 분석해 보면 참 우스워요.

 

우리가 그와 같은 걸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우리들이 착각을 하는 때가 많은데 보통 보면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자꾸 성이 나고 저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상하고 자꾸 그리로 들어가지요.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동원시켜서 내 속에 있는 걸 보여주는 거라. 상대와 대립이 될 때 그게 척 들어가야 할 텐데 그게 안 보여지고 자꾸 상대로만 신경이 쓰여진단 말이요. 그거 아주 잘못입니다. 자꾸 상대에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 자기가 고통이요.

 

예수님을 누가 자꾸 헐뜯고 쥐어박고 걷어차고 옆에서 욕을 하고 머리를 끄집어 당기고 하면 예수님도 참다 참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 지나고 여덟 번에 여든 번이 되면 속에서 뭔가가 일어나지 않을까? 안 일어날까?

 

참다 참다 하고 참는다는 게 뭐요? 벼르고 있는 거? 참는 것은 언젠가 터지면 더 크게 폭발하는 거 아니요? 그러면 삽살개보다 더 무섭지.

 

알고 보면 모든 만물은 진리 편에 서 있어요. 만물이 진리 편을 알아서 진리 편에 서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는 대로 그렇게 돼 있어요. 만물은 성도를 위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쪽으로 돼 있어요. 만물이 내 편으로 돼 있는 게 아니란 말이요.

 

그리고 만물은 진리를 호응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진리대로 걸어가면 나는 진리의 보호를 입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요? 성경에 그 말씀이 많이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러면 지켜주실 것이다. 보호해 주실 것이다’ 하는 이게 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걸어가면 하나님이 날 보호해 주신다’ 할 때 어떤 면에 보호로 보지요? ‘자연목숨이 안 죽는다’ 그런 보호가 아니요? 이런 면으로 강하게 해 놔 버리면 진리를 보호하고 사수하며 예수 잘 믿다가 순교를 당한 분들이 믿음이 없는 바보 취급이 돼버려요. 은연중에 그렇게 된단 말이요.

 

물질적으로 육신 보호적으로 보는 건 토를 다는 겁니다. 말씀대로 걸어가면 진리의 보호를 입는 건데 우리가 진리대로 걸어가면 성화구원 면에는 하등의 손해가 없어요. 전부 이익이고 100% 승리가 보장이 돼 있어요. 그런데 이걸 슬며시 육신적인 면으로 몇 %라도 기울어지면 성화구원에 있어서 그만큼 손해가 되는 거요.

 

말씀대로 걸어가면서 내 편에서 육신적인 면은 전혀 바라지 않고 그 면은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겁니다. 나의 육신이 살고 죽고 하는 그거는, 육신적인 면에 보호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그거는 하나님 주권 면에 있는 겁니다.

 

진리를 사수하다 죽은 사람도 있지만 다니엘 같은 경우는 육신의 보호도 입었습니까? 그러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도 육신의 보호도 해 줄 것이다’ 하고 들어간 겁니까? 그건 아니었지요. 그런데 그 사건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호를 입은 다니엘의 생각도 모르고 자기 입장에서 육신보호 쪽으로 해석을 해버린단 말이요.

 

우리가 진리대로 살면 진리의 보호를 입는다는 것은 믿지요? 확실합니까? 진리대로 걸어가다가 성화구원의 보호를 입는다는 건 100% 약속이 돼 있는 건데 그런데 진리대로 걸어간다고 가다가 뭔가가 물질적인 면에 조금 손해가 났다면 그만큼 섭섭할 테지. 안 그럴까?

 

진리대로 걸어가면 전부가 보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어떤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이 만사형통입니다. 그러면 이 만사형통이 어디에 대고 만사형통이냐? 어딘지 모르게 육신적인 것에다 은근히 붙이기 마련이지?

 

진리대로 걸아가면 전부가 그 나에게 호응이다. 이건 뭐지요? 구원을 이루는데 100% 호응이요. 걸그작 거릴 게 없어요.

 

예수 잘못 믿다가 대립이 되던 타락이 되던 남이 못 믿게 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가만히 살펴보면 다 자기 때문이요. 사단 마귀까지도 예수 더 잘 믿게 하는 하나의 이용물이거든요. 하나님의 본심이 예수를 못 믿게 하려는 그 목적을 두고 그들을 동원시킨 건 아니거든. 예수 잘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동원하시는 거지요.

 

그래서 가만 보면 이 지구상에 어떤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일어나더라도, 어떤 환난의 바람이 불어도 내가 구원을 입어가는 이 면에는 그 누구도 말릴 자가 없어요. 하나도 못 말려요. 이해 갑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요? 그런데 보면 자기가 예수 잘 못 믿는 걸 저 사람에게 자꾸 대지요? 사건에다 대고 사람에다 대고 자꾸 그러지요. 우리가 예수 믿는 거, 특히 예수 믿고 구원을 이뤄가는 이거는 남이 아닌 자기가 가로막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한 구원이라고 하는 게 참 놀라워요. 사건적으로 성공이라든지 실패라든지 원수라든지 마귀라든지, 또한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내가 구원을 이뤄 가는데 전부는 호응이야. 이해가 가지요? 깨닫고 보면 전부는 호응이야. 그런데 우리가 깨닫지를 못하니까, 알지를 못하니까 자꾸 대립을 일으키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 대립이 돼서 가게 되면 전부는 나와 대립이 되는 겁니다. 타가 나를 육적으로 해코자 하는 거라든지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거라든지 사실 알고 보면 모두는 내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방편이요 매개물인데 그것이 그렇게 보이지를 않는단 말이요. 자기 속에서 대립이 먼저 일어나는 이거는 못 봐. 그렇지요? 그리고 타도 나를 대립적으로 보고. 그러니까 전부는 대립이 돼요. 이렇게 되면 자기는 하나님과, 구원과, 생명과, 천국과, 자연과 전부 대립이 돼버려. 그러니까 자기는 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여기서 망한다고 했는데 이 망함은 어떤 망함이요? 사업이 망한다? 이룰구원 성화구원에 전부 망해버려요. 구원을 못 이룬 건 망한 거지 뭐.

 

우리가 처음 믿을 때와 달리 깨닫고 보면 보는 세계가 달라지지요. 접근 방법이 다르고.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와 대립이 되는 것이 있을 때 타락된 옛사람이 주격이 돼가지고 대립되는 상대의 그 대립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상대가 대립이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고 오셔서 나를 고치고자 하는 그 면을 알아차려서 고쳐나간다면 그 대립도 나에게 호응이 되지요. 안 그래요? 그런데 이게 참 어렵지요? 사람의 마음이 돌려지기란 그렇게 어렵단 말이요. 눈에 보이는 것 같으면 벽돌모양으로 이렇게 놓고 저렇게 놓고 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미꾸라지보다 더 잘 빠져나가요.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갔기 때문에 요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보응적인 징계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요나로 하여금 지나간 과거는 심판거리로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부터 남은 시간만큼이라도 하나님의 성품인 구원을 입게 하려는 하나님의 보호요 사랑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알겠어요?

 

이걸 예로 든다면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걸 안 하니까 아버지가 나를 불러가지고 ‘너 이거 왜 안 했느냐’ 하면서 매를 때린다. 이 때 내가 매를 맞은 건 아버지가 하라는 걸 안 했기 때문에 맞았지요?

 

아버지의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맞았다고 생각하는 이거는 앞으로가 강합니까, 한 일에 강합니까? 과거사가 되지.

 

매를 맞을 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한다면 그 말이 뭐지요? 바꿔서 말한다면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그 뜻이지.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뭔가가 한 대 얻어맞으면 ‘아,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적인 어떤 그걸 먼저 탁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 과거는 이미 지나갔어요. 내가 앞으로도 과거처럼 살아가면 뭐가 돼요? 심판거리고 완전히 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과거는 과거다.

 

하나님께서 매질을 하실 때 인간 편에서는 과거사 때문에 얻어맞는 것처럼 강하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은 건설적인 목적에서 때리는 겁니다. 이미 지나간 게, 망한 게 때리면 살아납니까? 고쳐집니까? 안 돼요. 그러니까 현재에서 앞으로 구원을 입어나가는 그 면에 정신을 차리고 입어나가라 그 말이지요. 우리가 매를 맞을 때 그 면으로 생각을 하고, 우리의 생각이 그런 면으로 튀어져야 된단 말이요.

 

요나가 당하는 걸 표면적으로 보면 요나의 불순종에 의한 보응적인 진노 같이 보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보응적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고, 건설목적의 교훈이고 인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믿는 자는 심판을 안 당한다고 했는데 이거는 공심판이고, 사심판은 행한 대로 심은 대로 정확하게 심판을 받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받아요.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이 심판 받는 것을 볼 때 보통 보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주로 보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심판을 말하는 거지요.

 

우리에게 향한 사심판은 조목조목 아주 세심해요. 그러니까 죄를 허용치 않는, 이질적인 것을 허용치 않는, 거짓적인 것을 허용치 않는 아주 세밀적인 심판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죄보다도 안 보이는 죄는 더 많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우리 기독자가 눈으로 보이는 죄를 붙잡고 그걸 회개하고 그렇게만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지요. 하나님은 안 보이는 죄 그걸 보고 야단인데 우리는 보이는 죄만 갖고 말하면 안 되지요. 형무소에 들어가는 사람이 죄가 많을까요, 안 들어간 사람이 죄가 많을까요? 형무소에 들어가는 사람은 들킨 사람만 들어가는 거지. 들킨 사람만 들어가.

 

우리가 신앙 사상적으로 깨달을 게 많습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게 잘 살면 죄가 없는 겁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예수 믿어 부자 되고 병 낫고 등 따시고 배부르게 잘 살아야 한다’ 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정신을 야단을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자꾸 그렇게 하라고 하고 있으니 이거 기가 막힐 노릇 아니요?

 

그러면 지금 현재 하나님의 진노를 안 받고 사는 사람은 죄가 없어서 진노를 안 받고 있는 거지요? 안 그래요? 시골에 사는 교역자는 죄가 많아서 그곳에 살고, 도시에서 자가용 굴리고 사는 교역자는 죄가 없어서 그렇게 사는 거지? 안 그래요?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그렇게들 보던데?

 

교인 많고, 주택 갖고 있고, 자가용 굴리고 하면 ‘아이, 목사님은 축복 받았다’ 그러는데 그게 뭐요?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은? 저주 받은 거요? 이렇게 돌아간단 말이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은 사건 환경이 몰아치고, 왔다가 지나가고 교체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사건 환경에 대해서, 타에 대해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안 되니, 좋게 안 해주니 대립과 충돌과 마찰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먼저 자기부터 고쳐야 할 자기인줄 압니다.

 

또 모든 사건 환경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저주요 진노요 심판인 것 같으나 저희들이 구원을 이뤄가는 면으로 깨달아 보면 마지막 그 날이 되기 전까지 우리를 구원건설적인 면에 목적을 두고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인도요 교훈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모르나 세상에 사는 동안에 각종 다양적인 사건 환경이 교체되어 우리 앞에서 지나갈 때에 그 때마다 먼저 진리를 붙잡고 자기가 진리에게 붙잡히고, 그리고 육적인 면에 다소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영적인 면에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그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건 환경을 통과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잘 입혀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부족합니다. 과연 저희들의 가르침이, 그리고 저희들의 깨달음이 옳을진대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희들을 그렇게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구원이 잘 입혀질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그 면에 대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모든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원만히 입고 가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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