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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마11: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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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57890051 |
2008년 11월 30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설교제목 : 멍에의 영성
<인간관계의 어려움>
예나 지금이나 역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간관계’의 일입니다. 사람들과의 사귐, 관계 맺음, 서로 어우러져서 사는 일 …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직장생활도 그렇고, 가정생활도 그렇고, 사회활동도 그렇고,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인간관계가 가장 큰 관건입니다. 인간관계만 해결되면 사실 만사가 형통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관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그건 한 마디로 사람들이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말이나 표정, 눈짓이나 태도, 말의 뉘앙스와 행동 … 등등에 ‘가시’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관계란 수많은 가시들이 꽂힌 칼을 들고 서로 할퀴는 전쟁터와 같습니다. 진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인간관계 속에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지요.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때리고, 원망하고 욕하고 … 심하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
먼저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참 놀랍습니다. “세상에서 스트레스 받은 사람들 다 나에게 와라. 내가 그대들을 정말 편하게 해주겠다.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 다 나에게 와라. 내가 그대들에게 참 쉼을 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참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도 분명 인간이셨는데, 예수님에게 있는 그 무엇이 이런 놀라운 삶의 태도를 지니게 하셨을까요? 정말 궁금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늘 말씀 속에 한 가지 목에 탁 걸리는 문구가 있습니다. 즉 ‘멍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다른 이들에게 자유와 쉼을 줄 수 있다고 놀랍게 선언하신 예수님께서 뜻 밖에도 ‘멍에’를 말씀하셨습니다. ‘멍에’란 무엇일까요? ‘멍에’란 말이나 소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목에 거는 막대입니다. 그러니까 멍에는 자유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억압의 상징입니다. 내 뜻대로 가는 자유의 도구가 아니라 주인 뜻대로 가게 하는 억압의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에수님께서 정작 그 자신은 ‘억압’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한용운의 시 시계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멍에’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한용운 선생의 시 ‘복종’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한용운의 복종은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는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선생의 ‘복종’을 우리 기독교식으로 다시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그 ‘복종’은 절대자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순종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내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절대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그게 ‘복종’입니다. ‘나’보다 더 큰 나, ‘나’보다 더 본질적인 나, 겉껍질의 나가 아니라 근원적인 모습으로서의 나 … ‘육(肉)의 나’가 아니라 ‘영(靈)의 나’를 따르는 복종이고, 그래서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종’과 ‘멍에’에는 엄청난 자유와 평화, 세상을 뒤집어 놓을만한 거대한 평온의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유>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모든 면에서 자유로운 인격으로 사실 수 있었을까요? 인간관계에서의 자유함은 물론이고, 그 마음과 생각에 모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대(大) 자유’가 넘쳤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건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연관성 속에서 풀어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삶의 모든 걸음걸음마다 하나님과의 연관성 속에서 걸어가신 분이 곧 예수님이셨습니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풀 한 포기,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역사적인 사건들, 가족들과의 관계설정 …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연관성’ 속에서 풀어내셨습니다. 그러니 그건 ‘멍에’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역설적이게도 그 ‘멍에’와 ‘복종’속에 참다운 자유와 해방, 초탈과 평화가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멍에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해방, 삶의 불안에서의 자유, 죽음의 공포에서의 초탈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멍에’에서 배우십시오. 그러면 자유와 해방, 초탈이 있습니다. ‘육(肉)의 나’를 버리고, ‘영(靈)의 나를 따르십시오. 겉의 나를 버리고, 속의 나를 따르십시오.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를 따르십시오. 이 땅의 나를 버리고, 저 하늘의 나를 따르십시오. 그 ‘멍에’와 ‘복종’에 참다운 자유와 평화, 해방과 초탈이 있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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