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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2:2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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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4년 8월3일 http://dabia.net/xe/768367 |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32:22-31, 성령강림후 제8주,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서안의 가자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이슬람주의 군사정치 조직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라서 사실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요즘 이스라엘이 전 세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이스라엘도 나름 할 말이 있을 겁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제거를 목표로 하는 집단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입니다. 유엔의 중재도 먹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민간인 사망자와 부상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희생도 큽니다. 벌써 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가자 지역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입니다. 수천 년 동안 박해를 받았던 이스라엘이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박해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군가요?
오늘 설교 본문(창 32:22-31)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성경 각주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것은 신성모독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나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신들 나라의 이름에 그런 뜻을 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는 씨족사회로 분류되는 족장들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세 명의 족장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세 번째 족장인 야곱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삶은 출생 때부터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장손의 지위를, 즉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된 자리를 얻습니다. 화가 난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서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피신합니다. 거기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삼촌을 속이면서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일가를 이룬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습니다. 형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야곱은 형이 자신에게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사절단을 꾸려 에서에게 먼저 보냈습니다. 사절들을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다만 에서가 4백 명의 부하를 대동하고 야곱을 맞으러 온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 상황을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원래 에서는 체격이나 성격이 모두 우락부락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냥하러 다녔습니다. 야곱은 집에서 어머니를 도우면서 곱게 자랐습니다. 쌍둥이였지만 에서와 야곱은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긴 여행 끝에 야곱은 요단강 지류인 얍복 나루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만 건너면 고향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먼저 선물을 보냈습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낙타 삼십과 그 새끼들,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들입니다(창 32:13-15). 오늘로 따지면 수억 원 이상이 되겠지요. 종들과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도 다 얍복 시내를 건너게 한 후 야곱 혼자 남았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 22-24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하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시름하다가...
얍복 나루를 건너기 전에 촌극처럼 보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벌였다는 겁니다. 지금은 한가하게 씨름을 할 때가 아닙니다. 얍복 시내를 건너냐 마냐, 형을 만나서 목숨을 건질 것인지, 유사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순간에 낯선 사람과 씨름을 한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게 단순한 놀이로서의 씨름이 아니라는 건 이야기의 진행을 조금만 더 따라가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야곱과 씨름하던 이 낯선 사람은 씨름이 불리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비상수단으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즉 고관절을 무언가로 내리쳤습니다. 반칙을 행한 겁니다. 그래도 야곱은 밤이 새도록 이 낯선 사람과의 씨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밤이 지났고, 급기야 날이 새려고 했습니다. 이 낯선 사람은 야곱에게 ‘날이 새려고 하니 나를 가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야곱은 ‘당신이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놓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장면은 주술적으로 보입니다. 동서양의 유령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유령들은 밤에 활개 치다가 날이 밝기 전에 도망칩니다. 이런 귀신, 유령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신앙과 어울리지 않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과감하게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익숙한 주술적인 이야기 방식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씨름하다가 날이 밝아오자 자리를 뜨고 싶어 했으나 야곱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던 이 낯선 사람은, 이제 독자들은 그가 하나님의 천사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 텐데, 야곱에게 ‘당신 이름이 뭐냐?’ 하고 묻습니다. 야곱이라는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기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제 이스라엘로 변경되었습니다. 야곱이 낯선 사람과의 씨름 시합에서 기권승을 얻어냈다는 에피소드를 기초로 해서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신적인 능력을 갖고 있던 낯선 사람이 실제로 야곱과의 씨름에서 진 건 아닙니다. 다섯 살짜리 자식과 씨름하면서 아빠가 일부러 져주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고관절이 탈골된 상태에서도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끈질기게 천사를 붙들고 늘어진 데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축복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사생결단으로 받아내려 한 축복은 대체 무엇일까요? 당시에 야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축복을 달라고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누리고 싶은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내도 여럿이었고 자식들도 많았고, 목축을 통해서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형편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지금 얍복 시내를 건너기 직적입니다. 에서가 4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옵니다.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런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런 위기는 야곱에게 처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재산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가족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는 인간이 이룬 그 어떤 업적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축복을 요구했다는 말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미 여러분도 대답을 찾으셨을 겁니다. 축복은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체입니다. 즉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축복입니다. 그 이외의 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형편에 따라서 그 가치와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우리 삶의 근본은 점점 허약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아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는 갖춰져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한계를 넘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와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체 회장의 생활수준은 수십, 수백 배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저보다 행복하다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티베트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비해서 대한민국의 생활수준은 아주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특히 지금 얍복 나루터의 야곱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재산과 건강 등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축복의 근원입니다. 야곱은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했습니다. 본문 30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이나 지명인 브니엘이나 모두 하나님 경험이라는 점에서 서로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 경험이 야곱에게 최대의 축복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창 28:10-22절에 따르면 야곱은 훨씬 젊었을 때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탓에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신할 때입니다. 가는 도중 광야에서 노숙하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축복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음성까지 들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야곱은 돌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은 다음에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로 지었습니다. 이제 상당한 세월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야곱은 다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브니엘, 벧엘에는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엘’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될 만합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첫째,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둘째, 그 하나님 경험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셋째, 나는 하나님을 경험했을까요? 이런 질문은 신앙의 본질에 속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려면 이런 질문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대답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그 대답을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대답은 설교자인 목사가 아니라 성령이 주십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생각과 영혼을 살아 숨 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딱 떨어지는 대답은 주지 못한다하더라도 거기에 이르는 길은 어느 정도 가이드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다음입니다. 야곱 이야기를 다시 잘 보십시오. 야곱이 하나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때로는 번갯불로, 때로는 바람소리로, 때로는 큰 깨우침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점진적으로, 때로는 한 찰나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순간에 그를 맞이하면 됩니다. 얍복 나루터에서 어떤 낯선 사람과 씨름했던 야곱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을 놓칩니다.
이런 설명이 멀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에게는 왜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는 거야, 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거꾸로 자신은 매일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을 보신 분이 계신지요. 베토벤은 자기 악보를 대필해주는 비엔나 음악대학 수석 졸업 여학생이 ‘선생님, 지금 청각 장애를 겪고 있으면서 어떻게 심포니 9번 일명 <합창 교향곡>을 작곡했나요?’ 하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오해다. 내 귀에는 음악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나는 그걸 악보에 옮겨 적을 뿐이야.’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소리가 그를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궁극적인 것은 사람이 발견하거나 창조해내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가 사람을 찾아옵니다. 하나님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모두 베토벤이 될 수 없듯이 모두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없겠지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밝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영적인 눈이 유달리 밝지 않다하더라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습니다. 야곱의 얍복 나루터 경험이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의 경험으로 확대된 사건이 2천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 안에 실제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여러분도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마 1장에 따르면 천사가 마리아의 남편 될 요셉을 찾아가 아내인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니 이름을 예수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사 7:14절을 인용해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다시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인 이스라엘과 연계됩니다.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곱 이야기에 나오는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요 14:9절에 따르면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을 향해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약성서 전체는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즉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그 주장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나름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야곱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경험의 흔적을 부분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분이시며, 온전한 의미에서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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