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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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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3절.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구약성경 중에 선지서가 16권이 있습니다. 이 16권을 둘로 나눠서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을 대선지서라 부르고,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을 소선지서라고 부릅니다.
소선지서 열두 권은 대선지서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동일하게 표시하고 있어요. 그 내용을 보면 첫째는 열국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다는 것과, 또 이스라엘 민족을 각국에 분산하고 결국은 열국이 망한다는 것,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위로 하신다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또 세상 모든 민족들 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올 자들이 많을 것을 예언을 했다 그 말이요.
신구약 66권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이 성경을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그들의 책처럼 경전으로 취급을 해버리면 아니 됩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 또 코란경 몰몬경 등등의 종교경전들이 있지요? 그런 책들처럼 이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같이 취급을 해버리면 절대로 안 된다 그 말이요.
이 성경을 불신세계에서는 또는 이방종교인들은 경전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경전이라고 그러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이렇게 보아야 옳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무슨 글이다. 누구의 책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그렇게 본단 말이요.
경전이라 할 때는 그 경전의 글자나 문자대로 지켜 나가면 됩니다. ‘하라, 하지 말라’ 하면 그 말한 대로만 지키면 되지요. 이방종교인들의 책은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러나 하나님의 성경은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의 글자 그대로 했더라도 심판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 당시에 율법사들 그리고 교법사들이 율법을 잘 지켜 나왔지만 그러나 그들은 계시 면으로는 전부가 말씀에 어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경구절대로 다 지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의사 의도 계시 면과는 전혀 다르게 지켰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경을 보고 배우는 것은 성경의 글자를 못 읽어서, 단어와 문구를 몰라서 배우는 게 아니다 그 말이요.
부모공경 하라고 하는 게 성경에만 아니라 다른 책에도 있는데, 국민학교 1학년 책에도 있단 말이요. 그러면 국민학교의 책에서 부모공경 하라는 것과,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부모공경을 하라는 그 뜻이 같으냐 그 말이요. 전혀 다르니 같은 것처럼 취급을 하지 말라 그 말이요.
성경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계시적 면을 알기 위해서 배운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의중에 이러 이러한 뜻으로 계시를 했는데 잘못 전달을 하면 듣는 자나 가르치는 자나 전부는 심판거리가 장만이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경을 계시성으로 보아야 하는 겁니다.
성경 66권 전부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서학적으로 볼 때는 외형적인 면을 보고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 등으로 분리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오경에서 율법을 가르쳤다고 해서 목적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목적은 단일목적입니다.
선지서에서 표면적인 면을 말했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단일목적인 구원사역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구원적으로 역사하심과, 또 하나님의 독권적인 구원사역과 인간의 자유성, 하나님의 유기적인 피동성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결과성을 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위해서 이방을 동원시켜서 독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그 역사성, 또 인간 이스라엘의 절대 자유성의 자유로 패역성 또는 방종성 그런 게 있지요? 또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유기적인 피동성으로 구원목적으로 활동하신 그리스도의 활동성과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성경이더라 그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가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본다고 하면 유대인으로서 이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육적인 유대인이 망한다고 하는 사실이 있는데 이걸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무슨 사업이 망한다. 나라가 망한다’ 그렇게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인간이 망한다 그 말이요. 인간 자체가 인격적인 면에서 완전히 망해버려요. 그걸 우리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 역사를 비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망한 후에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구원을 입을 것을 바라보고 한 편으로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계시적인 면에서 볼 때는 전혀 뜻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닫는 면이 얼마나 세밀하고 예민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다닌다. 예수를 믿는다’ 그럴 때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경을 대하는 자세, 성경말씀을 듣는 자세 이런 것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자기는 살아있지만 자기 속에 죽어나가는 것을 발견할 줄 알아야 되고, 그리고 매일매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살려나가는 이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입니다.
이제 요나서의 역사적 가치를 한 번 보면 이 요나는 열왕기하 14장 25절에 기록된 선지 요나와 동일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본문에도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 하며 1장 1절에도 나타나 있지만 또 다른 곳에서도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 말이요. ‘아밋대의 아들이라’ 그렇게 나타나는데 좀 전에 말했던 열왕기하 14장 25절에도 있고요.
그런데 성경을 비평하는 고등 비평가들이 이 요나를 실존인물로 보지 않고 요나의 사건이 신비스러우니까 이 요나서를 풍유 혹은 전설 혹은 신화 속은 우화라고 말들을 한다 그 말이요.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경에 기록된 사실이 그들의 말대로 될 리는 없지요. 물론 그들이 그렇게 말할 자유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분명한 사실을 전설이나 우화나 신화로 만들 능력도 없고, 또 진리를 비진리로 만들 능력도 없습니다.
본서의 요나가 틀림없는 역사적인 인물이요, 요나서의 사건들도 틀림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누가 또 증명을 했는가 하니 예수님께서 증명을 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로써 인용을 했다 그 말이요. 마태복음 12장 39절로 나타나 있고, 16장 4절, 누가복음 11장 29절로 나타나 있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어떤 학자들의 말보다도 예수님께서 증명을 했으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을만하다 그 말이요.
어떤 신학자나 어떤 목사가 ‘요나라고 하는 인물은 실질적 인물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이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3일 동안 살아있을 수 있느냐? 그러니 역사가 아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잡고 ‘기다, 아니다’ 하며 씨름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누구든지 ‘요나서의 사건은 실지가 아니다’ 라고 말할 자유는 있겠지만 그러나 성경에 있는 사실을 뒤집어 놓을 능력은, 바꾸어 놓을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다’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실존적인 하나님은 그대로 계십니다. 아무리 진리를 비진리라고 떠든들 진리가 비진리가 되느냐? 그렇지 않다 그 말이요. 또 비진리가 진리가 되기도 만무한 겁니다.
일반학교에서는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해주면 진리라고 말들을 한다 그 말이요.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정의는 따로 있다 그 말이요.
진리의 정의는 바로 진리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던 못 받던 진리는 진리입니다. 자체적인 가치성이 있고 독자적인 권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증명을 했다고 해서 진리이고, 증명을 안 했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고 그게 아니고 누가 증명을 하든 말든 진리는 진리로서 있는 겁니다.
어떤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무시해도 진리는 진리로서 독자적인 권위성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리 진리를 무시해도 진리는 없어지지 않고 그 권위성은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진리를 무시한 그 자는 심판 날에 진리 앞에서 반드시 무시를 당할 날이 오게 되는 겁니다.
성경 전체는 예언서인데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요, 이웃나라들에 대한 예언이요, 인류의 흥망성쇠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요나서의 예언적 특징을 보면, 요나서의 전체적 성격을 보면 요나의 하나의 사적 기록인데, 요나가 ‘40일 후에 니느웨 성이 무너지리라’ 그렇게 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서를 하나님의 계시성으로 볼 때에 그 전체가 다 예언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를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다가 나온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고기 뱃속에 들어 있다가 나온 그것도 앞으로 일어날 예언이란 말이요. 예수님 당시로 보면 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을 예언한 거라 그 말이요.
성경의 다른 예언서들은 예언적 계시요, 본서는 사기적 예언계시입니다. 즉 요나서는 개인의 사적 기록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말이요.
본서의 연대와 장소를 열왕기하 14장 25절을 참고해서 보면 이 요나는 여로보암 2세 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전 783년으로 743년의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 요나가 니느웨로 전도하러 갔을 때가 아마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셋의 통치 전이 아니었는가 그렇게 연대를 추정하는 거지요.
그 다음에 요나라는 인물의 성격에 있어서는 이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가까운 아도니세댁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 그는 하나님의 특수은총으로 선지자로 등용이 되었으나 목적이탈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망스럽게 일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요나서를 가만히 보면 요나의 방종과 패역이 나타나고 있지요? 그리고 또 요나가 회개하는 장면도 나타나지요? 요나가 전도한 그 결과와 성과성이 나타나고 있고, 또 보면 마지막 때 요나의 불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나의 성격들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 있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요나라는 한 개인에게 특수적인 은총을 베풀었지만 이 요나는 회개를 안 한 고로 자기 자체의 구원은 완전히 절단 나 버렸다 그 말이요. 참 안타깝지요?
자기에게 진리가 왔을 때에 이 진리라고 하는 게 보통 진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왔을 때에, 특수한 교훈이 자기에게 왔을 때에 이건 하나님의 특수한 은혜란 말이요. 이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 말이요. 그런데 요나는 그걸 모르니까 자기 일생이 구원을 이루어야 될 자기인데도 그 구원적인 면에서 전부 다 절단이 나버렸다. 그 면이 보입니까? 그 면이 보이느냐 그 말이요.
가만 보면 이 요나는 패역성과 자기의 주관성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구나. 패역이란 자기의 주관대로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면 신앙의 세계에서 인간 자기 주관은 금물이에요. 왜? 망하는 거니까. 인간 주관은 멸망이요 망하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참된 신앙은 자기의 주관을 꺾고, 자기의 주관은 없애버리고 하나님의 객관을 즉, 하나님의 것을 자기 속에서 자기의 주관화 시켜야 된다 그 말이요. 이게 신앙이라. 이게 예수 믿는 거라. 이게 사람이 바로 되는 거라. 이게 구원을 이루는 면에서 성공을 가져오게 되지요. 사랑을 갖고 오게 되고. 그럼에도 자기의 주관을 꺾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객관을 자기의 주관화 시키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무서운 패역입니다.
믿는 사람 중에 보면 ‘나는 예수이름으로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 그런 게 있을 수 있거든요. 그게 믿음인 것 같으나 인간 주관으로 아주 똘똘 뭉친 패역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바로 이것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망한 자라 그 말이요.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패역이 강했기 때문에 망한 자라. 말하자면 말씀대로 심부름을 하고서도 얻어맞은 자라. 심부름을 하면서도 그의 속은 심부름을 시키는 하나님과 팽팽하게 대립이 돼 있다 그 말이요.
오늘날 기독교 안에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는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기는 하는데 이걸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자기는 믿음으로 한다고 하는 거지만 그 속은 주관성이 강해가지고 하나님과 팽팽하게 대립이 돼 있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주로 사역주의적인 외식종교 활동적인 사람 속에서 그런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얼마나 패역이 강한지?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때 당시의 종교인들을 보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너희가 어찌하여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 너희들에게는 요나의 표적을 보여줄 것밖에는 없다’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의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의 패역을 말하는 거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시는데 ‘나는 기어코 이 길을 가겠다’ 그러면서 금식하고 단식을 하면서 ‘믿습니다’ 하며 걸어가는 이것이 바로 어그러지고 패역한 족속이라. 물론 이 말씀 속의 계시 면을 보면 주님의 사활이 거기에서 또 보여지는 거지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타락적 자율을 하나님의 타율로 바꿔놓는 것. 나의 타락적 능동을 하나님이 타율로, 능동적 피동으로, 자원적 순종으로 바꿔놓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면 순종이 나온다 그 말이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며 권면도 하고 명령을 하시는데 왜 그렇기 하시나?” 하고 하나님의 그렇게 하시는 속마음을 알면 ‘아, 나를 위해서 그렇게 권고 권면도 하시고 명령도 하시는구나’ 하고 속에서 자동적으로 순종이 나온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게 신앙이지요.
하나님의 의중을 모르면 내 속에서 쾌히 그렇게 나오는 능동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타락적 자기 주관성에서 나오는 신앙들이 굉장히 많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의중을 모르면서 명령에 따르는 거. 그리고 명령에 따르는 여기에는 깨달아서 ‘아, 그렇구나’ 하고 기뻐서 하는 이건 별로 없고 어거지로 해나가는 거. 이런 게 많이 있을 수 있다 그 말이요. 이건 잘못된 거지요. 이건 신앙이 아니라 그 말이요. 피동적 피동은 순종이 아니기 때문에 이건 엄격히 따져보면 패역성입니다. 그런 패역성을 고쳐야 만이 신앙이 자라나게 되는 겁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완전 전적 타락이 되었고, 가치성 평가성 취미성 지식성은 그 본성이 전부는 다 비뚤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담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은 전적 완전 타락이기 때문에 지식의 기준도 전부 다 비뚤어져 있어요. 하나님 앞에 어느 부분이라도 완전한 게 하나도 없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는 인간은 전부가 비뚤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아예 전제를 해버려야 돼요. 이걸 전제를 못하면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의 마음이 좋게 보이니까 예수도 잘 믿겠구나’ 하는 마음이 은근히 들기 쉽단 말이요. 또 일반적으로 성격이 유달리 꼿꼿한 사람을 보고는 ‘아이, 이 사람은 예수 절대로 안 믿겠구나’ 하고 단정을 내리기 쉽단 말이요. 이건 잘못 보는 거지요. 사람의 성격이 성질이 좋던 나쁘던 아담 하와 타락 이후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비뚤어졌다. 이질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는 좋은 거라도 하나님의 본질에서 볼 때는 전부 다 비뚤어진 겁니다. 완전한 게 없단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선행을 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선행을 할 수 없다 그 말이요. 그건 일반적 선행이지 생명적 선행은 아니라 그 말이요. 아담의 후손 전부는 다 비뚤어졌다. 바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오늘날 기독자들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게, 그리고 교회에서 성경을 보고 말하는 것도, 그리고 신앙생활 하는 것도 보면 일반 도덕적 선행이라든지 의행이라든지 그런 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그런 정신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뿐만 아니라 그런 정신이 신앙인 것처럼 생각들을 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안 하기 때문에 이들이 선행을 하건 악행을 하건 그건 아예 지옥 갈 자로 말을 해버리지요? 그런데 어떤 때 보면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사회적으로 선행을 많이 하거든요. 그러면 예수 믿는 자가 그 선행을 생각을 하면서 ‘이 사람은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까 죽어서 좋은 데 갈 것이다’ 이렇게 슬며시 붙인단 말이요. 그러니까 교회에서들 보면 교인들이 기준을 모른다 그 말이요. 아담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은 완전 전적 부패요 타락이라고 하는 걸 모르고 있다.
우리 인간이 아담 타락 이후에 바로 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예수 믿고 중생을 했다고 할지라도 고칠 것 중에 제일 먼저 고칠 것은 자기 속의 지식성부터 바로 고쳐야 된다. 예수는 믿는데 즉, 영은 중생은 했는데 자기 속의 지식성이 바꾸어지지를 못하면 예수를 믿어도 일반지식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 그 말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제일 먼저 할 것은 지식성을 바꿔나가는 것. 내가 예수를 믿으면 내 지식을 성경의 지식처럼 바꿔나가는 것.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라 그 말이요. 이게 신앙이라 그 말이요.
지식을 바꾸지를 못하면 신앙생활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몰라요. 신앙생활을 몰라요. 신앙이 어떤 건지 알 리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 지식을 바꿔나가야 된다.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나 둘 하나 둘 죄다 바꿔나가야 된다.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꿔놔야 된다 그 말이요.
그런데 믿는 사람 중에 하나도 바꾸지를 못하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을까요, 적을까요? 예수 믿으면서도 지식을 바꾸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평신도뿐만 아니고 교역자도 예수 믿은 후로 지식을 바꿔야 되는데 바꾸지 못하고 간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성도에게 선택이라든지 계획아라든지 예정이라든지, 창조 중생 등 성도에게 입혀진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에 속한 겁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고 우리가 신경을 쓸 것은 뭘 바꿀 것? 우리 성도는 지식을 바꿀 것이다 그 말이요. 바꿔놔야 된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예수를 믿으면 성경을 보는 것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의 종교인으로서 일반적 다른 종교와 동등한 개념으로 그런 정신으로 그런 사상으로 예수를 믿고 가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 말이요.
그렇게 믿는다면 예수 믿는다는 게 특수한 게 뭡니까?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예수 믿고, 절간에 다니고 공들이고 하는 사람처럼 그런 식으로 믿다가 죽는 것뿐이라. 이 사람은 예수를 믿기는 믿었으니까 죽어서 천당엔 갈 런지 모르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 말이요.
예수 믿는 거, 기독교 신앙이라 그럴 때는 지식을 바꿔 넣는 거.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지식을 바꿔 넣지 못하면 남이 보기에는 충성봉사가 굉장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패역적인 그런 족속으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요나서에 들어있는 이 요나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속마음을 열어서 보여주면서 깨닫게 해주심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을 믿는 그 날로 하나님의 진리지식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자기 주관성을 꺾지 못하고 아담이 가졌던 그런 타락적 지식을 가지고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지식 그 기준을 가지고 충성봉사도 하고, 남 보기에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지식부터 바꿔지는 족족 하나님 앞에 능동적 순종으로 신앙생활이 나오고, 가능한 한 누구의 명령보다도 지식이 바꿔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능동적 순종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랑받는 옳은 신앙생활로 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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