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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단1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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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59272193 |
2008년 12월 2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다니엘서 12장 10절
설교제목 : 인디언처럼, 다니엘처럼
<인디언 이야기>
인디언들의 삶을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용기를 얻게 되고, 평화스러워지고, 담담해지고, 당당해지고, 지혜로워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최근 의정부 도서관에서 『나는 하나의 노래, 이곳을 지나간다』(I, the song, Walk Here / 문학의 숲)를 빌려서 읽는 중인데,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오늘은 이 책 내용을 중심으로 인디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책이 왜 좋으냐고요?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 책의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는 하나의 노래, 이곳을 지나간다』(I, the song, Walk Here).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인생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냥 하나의 노래이고, ‘나’라는 존재는 그냥 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얼핏 이 이야기를 듣는 분들 중에는 ‘허무주의’를 떠올리는 분들이 계실텐데, 인디언의 이런 인생관은 허무주의라기보다는 ‘자유주의’라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허무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깃털처럼 자유롭게 인생을 살고, 또 그렇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마친다는 것이지요. 오래전에 읽은 인디언 관련 책 중에 『삶은 바람소리일 뿐이다』(오이예사, 거송미디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 메시지 역시 동일한 맥락입니다. 인디언들은 깃털처럼 자유로운 마음으로 삶과 죽음의 공간을 왕래하는 인생을 지향했습니다. 저 역시 그러고 싶은 사람입니다.
둘째 인디언들의 삶은 ‘신령한 세계와 더불어 사는 삶’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신령한 영에게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인디언들의 삶이란 항상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위대한 영’에게 마음과 영혼을 열어놓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무수히 많은 기도문 중에 “바람결에 그 목소리를 전하시고, 숨결로 세상만물에 생명을 주시는 위대한 영이시여, 저의 기도를 들으소서”라는 문구들이 끊임 없이 고백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신령한 영과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 역시 그러기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인디언들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인디언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어린 우정’을 나누며 살아갔습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그들을 대륙의 옥토에서 몰아낸 서양인들에 대해서도 ‘우정’으로 대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요? 특히 인디언들의 언어 속에는 ‘욕’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인디언들의 존경할만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만 하겠습니다. 그 대신 ‘인디언 십계명’이라는 글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인디언 십계명】
1.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 잘 보살펴라.
2. 당신과 연결된 모든 존재들을 존중하라.
3. 위대한 영에게 당신의 마음과 영혼을 열라.
4. 모든 생명은 신성하다. 모든 사물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5. 대지에게서 꼭 필요한 만큼만 얻고 그 이상은 취하지 말라.
6.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라.
7. 모든 새로운 날에 대해 늘 위대한 영에게 감사하라.
8. 진실을 말하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좋은 점만을 말하라.
9. 자연의 순환을 따르라. 태양과 함께 일어나고 태양과 함께 잠자리에 들라.
10. 삶의 여행을 즐기라. 하지만 발자취는 남기지 말라.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한글개역 성경) / 많은 사람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악해질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것이다.(표준새번역 성경, 다니엘 12:10).】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백과사전에 ‘다니엘’에 대해서 찾아보니까, 이렇게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예언자. 경건함과 지혜로움으로 유명하다.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었으나 이교의 박해와 싸워 유대의 종교적 전통을 잘 지켰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가 다니엘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잘 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한국교회는 “우리가 다니엘처럼 신앙생활을 잘 하면 세상 사람들보다 엄청 똑똑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이름을 딴 학교나 학원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다니엘서의 본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서가 이야기하는 ‘지혜’는 내 자식하나 좋은 대학에 보낼 때 도움이 되는 지혜가 아닙니다. 좋은 성적을 받는데 필요한 지혜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깊고, 높은 지혜입니다. 근원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즉 인디언 식의 지혜입니다.
인디언들의 지혜라는 게 뭡니까? 내 몸 하나 출세하는데 필요한 지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로울 수 있고, 담대할 수 있고, 용감할 수 있고, 너그러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다니엘의 지혜는 그런 지혜였습니다.
둘째 한국교회는 “우리가 다니엘처럼 신앙생활하면 마치 무당처럼 신비로운 세계를 넘다들면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꿈 해몽도 잘하고, 미래일도 잘 예측하고, 생사화복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신령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엄청난 오해입니다. 다니엘의 영성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물론 다니엘서에는 비상한 꿈 해몽의 능력, 미래 일에 대한 정확한 예측, 기이한 언어를 통한 예언 등이 등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문학적으로’ 읽어야할 내용이지, ‘사실적으로’ 읽어야할 내용은 아닙니다. 다니엘서 등장하는 기이한 이야기들은 ‘더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묵시문학적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그건 문학적인 작품으로서 읽어야 합니다. 그걸 신문기사 읽듯이 사실적으로 읽어서는 그 메시지의 핵심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영성은 한 마디로 인디언 식의 영성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신령한 영과 교제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신비로운 삶의 양식’, 그걸 다니엘서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제 이야기의 핵심은 “인디언의 눈으로 다니엘을 보자”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보아왔던 다니엘에 대한 시각이 본질에서 많이 이탈했는데, 그 본질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인디언의 삶을 통해서 다니엘을 보면 참 유익한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디언의 눈으로 다니엘보기>
그러면 이제 인디언의 눈으로 다니엘을 보는 작업을 조금 해 보겠습니다.
첫째 다니엘은 채식주의자였습니다. 바벨론의 왕이 이스라엘 소년들을 데려다가 온갖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였지만, 다니엘은 뜻한 바 있어서 이를 거절합니다. 다니엘은 대신 채식만을 고집했고, 그런 채식의 다니엘이 산해진미를 다 먹은 소년들보다 더욱더 건강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채식이나 육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 ‘철학’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서양인들은 이 대륙에 넘쳐나는 소떼들에 대해서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잘 개발된 총으로 그 소떼들을 사냥해서 마음껏 먹었습니다. 배불리 먹고, 또 먹어도 그 소떼의 고기들이 남아도는데도, 계속해서 재미삼아 사냥을 했고, 결국 지금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소떼들은 멸종을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삶입니다. 그에 비해 인디언들은 얼마나 지혜로운 가요! 인디언들은 “대지에게서 꼭 필요한 만큼만 얻고 그 이상은 취하지 말라”는 계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백인들이 1백년 만에 망가뜨린 대륙의 소떼들과 이미 오래 전 수천년 동안 공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채식을 했다는 것은 그런 차원이었습니다. 더러운 욕망에 가득찬 바벨론 왕이 여러 가지 유혹과 음모로서 먹여주는 산해진미를 거절하는 대안으로서 ‘채식’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채식은 철학이 있는 채식이었고, 정신이 살아 숨쉬는 식사였습니다. 그게 다니엘의 메시지입니다.
둘째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하는”(단 6:10)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라는 것이 자신의 출세라든가, 혹은 뭔가 비상한 능력을 갖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짐작한 바, 다니엘의 기도는 인디언식 기도였습니다. “위대한 영에게 당신의 마음과 영혼을 여는” 기도였고, 다니엘 자신과 “연결된 모든 존재들을 존중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 기도하는 삶의 양식을 갖고 있는 이가 곧 다니엘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권력을 위해, 명예를 위해, 전쟁을 위해, 정복을 위해, 야망을 위해, 투쟁을 위해 … 미쳐서 돌아가지만 다니엘은 인디언들처럼 하늘을 우러르며 인생을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다니엘은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우굴 거리는 감옥에도 담담한 마음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인디언들 역시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패배가 분명한 전투에도, 즉 죽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전쟁에도 용감하게 나섰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위대한 영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과가 죽음으로 끝나든, 아니면 살음으로 끝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전쟁에 ‘하나님’ 혹은 ‘위대한 영’의 부름이 있는가 없는가, 그게 중요했습니다. 다니엘이나 인디언이나 그 전쟁에 하나님의 위대한 부르심이 분명했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인디언처럼, 다니엘처럼’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인디언들이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정신들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시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서 다니엘에게서, 또한 다니엘의 후예이신 예수님에서 보여지는 ‘깊고, 높고, 무거운’ 인생의 지혜들에 대해서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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