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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8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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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394) 2014년 6월 23일 |
마음과 시야를 넓히십시오 (시편 82편 1-8절)
오래 전에 개봉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란 영화가 있습니다. 여주인공 임정희는 폭행에 반항하다가 가해자 청년의 혀를 깨물었습니다. 상대 변호인은 장래가 유망한 청년을 장애자로 만들었다며 그녀가 과거 술집에 나간 사실을 들어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피해자로서 정당방위를 인정받기는커녕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큰 수치를 겪어야 했습니다.
재판정에서 그녀의 변호사가 최후 변론을 했습니다. “재판장님! 우리 조상은 자기를 지키려던 여자를 열녀로 숭상했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여인을 법정에 세우고 즐겼습니다. 그녀는 세 번 죽음을 당했습니다. 첫째, 그 폭행에서 여자로서 죽었고, 둘째, 현장검증에서 수치로 인격이 죽었고, 셋째, 법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다 벗겨지며 죽었습니다. 이 법정은 그녀가 오판에 항변해 자살을 시도했을 때 이미 판결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녀에게 가했던 오해와 비웃음과 모욕을 거둬들이는 일입니다.”
그녀도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재판장님! 저는 피해자인 저와 제 가족이 왜 이렇게 고통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재판에서 숨기고 싶었던 제 과거가 모두 밝혀졌습니다. 유 변호사님!(상대 변호사) 사람의 진실을 그저 ‘네! 아니요!’로만 대답할 수 있나요? 과거가 있으면 폭행당해도 되나요? 재판장님! 만일 또 이런 일이 닥치면 순순히 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말하겠습니다. 반항하면 안 되고, 얘기해도 안 되고, 재판에 호소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결국 그녀는 무죄로 선고되었습니다.
강자가 힘으로 약자를 폭행하면 약자는 거세게 반항하다가 때로는 비인격적인 면을 노출시킬 수 있습니다. 그때 제 3자가 약자의 아픔과 반감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약자에 대한 편견에 동참하고 같이 돌을 던지며 즐길 때가 많습니다. 반항은 반골 기질의 표시니까 없어야 되고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니까 없어야 된다면 계속 폭행당해야 합니까? 편견의 피해자인 약자가 원하는 것은 풍성한 보상이 아닌 사람들의 바른 이해입니다. 자기 심정을 진실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희망을 찾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상담가를 찾아와서 자살하겠다고 했습니다. 상담가가 이유를 묻자 그가 자신의 억울함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 얘기를 다 듣고 상담가가 말했습니다. “듣고 보니 자살할 만도 합니다. 제가 그 입장이라도 자살하고 싶을 것 같아요.” 그때 그가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자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억울함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음을 알면 스스로 파멸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판단하는 마음보다는 이해하는 마음을 앞세워 편견의 희생자가 최대한 생기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 바른 판단을 위한 원리 >
인생을 살면서 판단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판단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판단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1. 불공평한 판단을 하지 마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이 구절에서 ‘신들의 모임’을 무엇을 뜻할까요? ‘천사들의 모임’ 혹은 ‘선택된 백성들의 모임’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문맥에 따르면 ‘하나님의 위임 권세를 가진 재판장들의 모임’으로 보면 무난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재판의 주관자는 하나님이기에 재판관들은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공정한 재판을 추구하고 공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편견에 오도되어 불공평한 판단을 할 때가 많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 불공평한 판단으로 악인의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고 있지만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가난한 자와 고아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무시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 본능을 잘 극복해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정한 재판으로 공의를 베풀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내야 합니다(3-4절). 이 말씀은 가난한 자를 무조건 편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공정하게 재판해 사회적 약자가 불의한 판단과 판결로 희생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잘 모르고 마치 어둠속에서 헤매듯이 불의하게 판결하면 세상이 어둡게 되고 삶의 기초가 흔들리게 됩니다(5절). 그처럼 불의한 재판 및 판단은 사회를 망치는 최대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의한 재판이나 판단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불의한 현실에서 건져내주는 영적인 백기사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힘과 숫자를 과시하는 것이나 불의한 기득권에 편승하는 모습은 교회의 이미지를 망치는 제일 독약입니다.
2. 자신의 판단을 자신하지 마십시오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고 높은 재판장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자신의 판단을 자신하거나 절대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대단한 존재도 언제든지 죽고 넘어질 수 있기에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의 가장 큰 문제의 원천은 자기가 선악을 잘 판단할 수 있다는 죄성을 유식으로 혼동하는 것입니다. 조금 알고 교만하게 된다면 차라리 모르고 겸손한 것이 더 낫습니다. 예수님은 남의 눈의 작은 티보다 자기 눈의 엄청나게 큰 들보부터 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살피는 탐조등으로 남보다 자기를 먼저 비춰보면 회개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 회개와 용서가 인간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원천입니다.
자신의 유식을 자랑하는 것은 자신의 무식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지식은 자기의 들보와 무지를 깨닫게 하기에 사람을 자랑이 아닌 사랑으로 이끕니다. 결국 사랑이 최고의 지식이고 최고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했습니다. 자랑은 문제를 낳고 사랑은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그러므로 판단은 줄이고 이해는 늘리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성령의 생각이고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3.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십시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아삽은 사람의 판단을 믿을 수 없기에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서 판단해달라고 노래합니다. 최종적인 심판과 판단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고 늘 하나님의 관점을 따라 살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이 바르게 판단하려면 특히 4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첫째, 공동체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전체적으로는 좋은 일이라면 열린 마음으로 그 일을 따라주려고 하십시오. 공동체 전체를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자기주장과 색채와 생각을 지혜롭게 갈무리하면 하나님이 그 삶과 마음에 더욱 찾아와주십니다.
둘째, 객관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주관적으로 보면 어떤 것이 단점 같아도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이 장점일 수 있습니다. 자기와 취향이 달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확한 사실에 의거한 것이 아니면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마십시오.
셋째, 사랑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가 싫으면 그가 속한 그룹도 편견을 가지고 싸잡아 비난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우리 국민들은 일본인을 싸잡아 미워하지만 일본인 중에도 과거 역사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한국을 이해하려는 지성인들도 꽤 있습니다. 그처럼 거룩한 지성과 사랑의 관점을 가지고 편견에 무작정 매몰되는 모습은 없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원수가 잘못되면 좋아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그를 불쌍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사람과 사물을 보고 하나님께 최종 판단을 맡길 때 그런 사람이 편견을 극복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고 천국과 행복을 위한 선한 경쟁에서도 결국 최종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 편견을 버리십시오 >
옛날에는 정보가 많이 차단되어 현실을 조작하고 왜곡된 여론을 만들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에는 그런 조작과 왜곡이 쉽지 않습니다. 결국 진실이 최종승리의 제일 원천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기심과 악한 본능에 기생하는 편견적인 생각을 잘 극복하고 진실을 따라 바르게 판단하려고 해야 합니다. 편견의 극복은 풀기 어려운 과제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편견은 힘 있는 자가 힘을 계속 유지하려는 본능이나 혹은 실력이 딸리는 경우 앞에서 정정당당한 실력보다는 뒤에서 모함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본능에 의해 형성됩니다. 어떤 이유든지 편견은 등 뒤에서 칼을 꽂는 비겁한 행위입니다. 편견적인 언사는 자신을 높게 보이고 싶어서 교묘한 쓰리쿠션 언사로 남을 치는 것이지만 그런 언사는 자신의 비열성과 비인격성만 보여줄 뿐입니다. 결국 상처와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어느 날, 말씀 준비를 하다가 피곤해서 자정 쯤 자리에 누웠는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해졌습니다. 제가 사는 건물의 2번째 옆 건물에서 큰 불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인적이 드문 그 길에 1분도 안 되어 동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밤 12시가 넘어서 소방차들이 다니며 시끄럽게 하고 동네가 떠들썩해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모두 얘기꽃을 피우며 불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남의 집 불구경이란 속담이 실감났습니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이 문 앞에 대기한 사람입니다. 인생 전체로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가해자가 되면 곧 자신이 피해자가 됩니다. 결국 편견적인 언사로 남에게 돌을 던지거나 그 돌을 던지는 것을 같이 은근히 즐기면 결국 자신도 얼마 후에 돌을 맞게 됩니다.
왜 편견이 생깁니까?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고 정당한 대결로 승부하려고 하지 않고 등 뒤에서 남을 쓰러뜨리려는 나쁜 본능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적인 언사를 쓰는 편견의 가해자는 편견의 피해자보다 더 비인격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편견의 피해자가 될지언정 편견의 가해자가 되면 안 됩니다. 특히 편견의 가해자가 만들어내는 교묘한 여론 조작에 휘둘리거나 편승하면 안 됩니다.
가끔 보면 신기한 일을 목격합니다. 목회자 중에도 지역편견적인 언사를 쓰는 경우를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으로 궁금합니다. “저분들은 교인들을 어떻게 대할까?” 보나마나 앞과 뒤가 다를 것입니다. 그보다 더욱 신기한 일을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 중에도 지역편견적인 언사를 쓰는 경우까지 목격하는 것입니다. 선교하는 마음과 편견적인 마음은 도저히 양립될 수 없는 180도 다른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선교는 도대체 어떤 선교일까요?
19세기 중후반에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의 창시자인 심슨(A B. Simpson) 목사님은 가장 잘 나가는 장로교 목사님이었습니다. 1880년대 그분이 섬기던 뉴욕 13번가 장로교회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장로교회였고 교인들은 주로 상류층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심슨 목사님이 선교마인드를 가지고 목회를 하자 이탈리아 계통의 하층 이민자들이 많이 전도되면서 상류층의 편견으로 인한 교회 내의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때 선교마인드를 가지고 편견의 희생자 편에 서서 과감하게 13번가 교회를 사임함으로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이 생겨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표현한 것은 편견이 없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잘 암시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육신적인 사랑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이지만 신적인 사랑은 이타적이고 포용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신적인 넓은 사랑을 체질화시키는 훈련의 제일 중요한 관문으로서 성도는 무엇보다 편견을 극복하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저는 젊었을 때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정죄하지는 않았어도 잘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왜 표준말이 분명히 있는데 어른이 되어도 저렇게 사투리를 쓸까?” 그런데 교회를 개척하고 약 5년쯤 되던 시점에 어느 날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투리가 제 귀에 구수하고 친근하게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목회자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라고 다짐하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조금 더 사람이 된 건가? 내게 선교마인드가 조금 더 생긴 것인가?”
< 마음이 넓어지는 성공 >
우리 교회는 돈, 학벌, 지역, 계층, 정치성 등으로 인한 편견적인 언사가 없는 교회가 되고 편견을 잘 극복한 인물을 길러내야 합니다. 즉 천국을 나눠주고 마음을 나눠주고 그 외에 좋은 것을 많이 나눠주려는 넓은 시야를 가진 인물을 키워내는 것이 우리 교회의 제일 존재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나눔의 모델 교회가 될 뿐만 아니라 나눌 줄 아는 교회를 많이 개척하는 비전도 멋지게 이뤄내야 합니다.
한국에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 교회가 40개가 되면 국가총회를 만들어 세계 각국의 기독교 선교연맹 총회와 동등한 자격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미국에 있는 2200교회 기독교 선교연맹 교회 중에 한 교회로 미국총회에 한시적으로 속해 있습니다. 몸체는 한국에 있는데 소속은 미국에 있는 어정쩡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이 조속히 정상화되도록 한국에 40개 교회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애써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가 많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눌 줄 아는 교회가 많아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나눌 줄 아는 교회를 많이 개척하는데 우리 교회가 기초석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저희 선교연맹 착근의 초창기라 부족함이 많지만 거룩한 꿈과 비전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과 여건과 비전 동지를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나누면 헐벗을 것 같습니다. 문화생활도 못할 것 같습니다. 자녀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고 가족도 고생만 시킬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이 신비한 동역자를 예비해서 필요를 채워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체험을 통해 더욱 나눔의 축복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제 나눔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오르지 못할 나무라도 계속 쳐다보며 믿음의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교회가 나눔의 모델이 되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저희와 뜻을 같이 하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암행어사와 같은 비전 동지를 붙여주소서!”
사람은 자기 잠재능력의 5%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두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5%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용량은 큽니다. 중요한 것은 넓은 마음과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나눔의 DNA가 깊이 박힌 교회! 많은 사람들이 꿈꾸면서 잘 실천하지 못하던 그런 교회가 많아진다면 한국 교회는 다시 신뢰를 얻을 것입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자기 교회의 위로는 되겠지만 한국 교회의 위로는 되지 못합니다.
대원군이 나라를 닫고 세계를 못 보게 막았기에 나라가 힘을 잃고 일본에게 먹혔습니다.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자녀와 후대들에게 넓은 마음과 시야를 가지도록 힘써 배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유와 기회를 주시면 자녀들을 학원만 보내지 말고 해외여행도 보내주십시오. 가둬놓고 근시안적인 시야만 가지게 하면 매 맞고 흩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미리 큰 시야와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흩어질 준비를 시키면 매 맞을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듭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편견을 깨고 큰 시야를 가지게 하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자녀들이 군대에 가면 부모들의 마음이 아픕니다. 어머니들은 헤어질 때 웁니다. 그러나 자식이 군대에 갔다 오면 다 잘 갔다 왔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때로는 고난도 필요합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는 것도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 자녀가 돌아와서 나중에 큰 인물이 될 때도 많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마음이 높아지는 헛된 성공’을 추구하지 말고 ‘마음이 넓어지는 참된 성공’을 추구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말씀한 좁은 문의 삶은 매력도 없고 손해만 보는 삶 같습니다. 그래서 손해 보며 살지 않겠다고 돈과 학벌을 추구하면서 다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며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그처럼 유치원 때부터 경쟁에 내몰려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동심리 상담과 소아정신과 진료가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외고생이 엄마가 요구하던 성적에 도달한 직후 엄마에게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했습니다. 유서는 단 네 글자였습니다. “이제 됐어?” 그런 삶을 누가 막아주어야 합니까? 교회가 해야 합니다. 교회는 ‘마음이 넓어지는 길’이 아닌 ‘마음이 높이지는 길’로 내몰린 영혼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와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조차 넓어지는 참된 성공이 아닌 높아지는 헛된 성공을 추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 요새 교회성장 세미나가 성행합니까? ‘넓어지는 성공’보다 ‘많아지는 성공’을 추구하고 ‘깊어지는 성공’보다 ‘높아지는 성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교회성장은 나누려는 마음이 성장하는 것이고 나누려는 교인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기복적인 사람들로 넘치는 교회의 숫자적인 성장은 별로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성장 세미나에서 배우는 정교한 매뉴얼을 보면 나눔을 실천하는 깊은 원리보다는 욕심을 채우는 얕은 원리로 넘쳐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면 참된 성공은 없고 성공해도 단기간의 성공이나 부작용이 많은 성공으로 끝납니다.
때가 되고 때를 찾아 교회를 과감히 분립시켜 나눔을 앞서 실천하는 목회자를 보면 사람들은 얼마나 존경하겠습니까? 그에 반해 교인 숫자를 늘리겠다고 교회성장 세미나만 1년에 몇 번씩 다닌다면 그 모습이 욕심으로 비춰지기 쉬운 상황에서 어떻게 존경하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또한 나눌 줄 모르는 분위기와 환경에서 나눔을 모르고 자라난 교인을 통해 어떻게 나눔이 제대로 이뤄져 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확대되겠습니까?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을 많이 배출해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마음의 넓어짐’보다 ‘마음의 높아짐’이 목표가 되면 참된 안식과 평안은 주어지기 힘듭니다. 큰 꿈과 비전을 가지라는 말은 많이 소유한 존재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많이 나누는 존재가 되라는 말입니다. 높아짐에 초점을 맞추면 자기 뜻대로 안될 때가 많으니까 수시로 초조해지고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목표를 이뤄도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으니까 허탈할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높은 곳에 도달하려고 안달하면 미달이 인생이 됩니다.
높아짐의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왜 높아져야 합니까? 낮아지기 위해서입니다. 낮아질 때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넓어지면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고 깊어지면 지혜와 창조성도 넘치게 됩니다. 모든 물이 낮은 바다로 흘러들듯이 수많은 좋은 것들이 낮은 바다와 같은 마음에 흘러듭니다. 세상은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불행을 쉽게 외면하지만 성도는 다수의 행복에 대한 꿈과 비전을 늘 가슴 깊이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마음과 시야가 넓어지는 성공을 이뤄내고 많이 나눠주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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