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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후3: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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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04) |
종말을 준비하는 5대 자세 (베드로후서 3장 8-13절)
기독교를 관통하는 대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선행에 대해 보상하시고 악행에 대해 보응하십니다. 그러나 보상과 보응 문제에서 항상 하나님의 타이밍에 대한 열린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행을 바로 보상하거나 악행을 바로 보응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결국 보상의 지연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만큼 보응의 지연도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할 때마다 즉각 벼락을 내리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시간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보상이 늦어지는 이유는 ‘참된 성도를 찾으려는 하나님의 정의 때문’이고 보응이 늦어지는 이유는 ‘회개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응이 늦어지는 것에는 감사하고 보상이 늦어지는 것에는 여유를 가지십시오. 어떤 분은 큰 구원의 은혜에 비해 한참 작은 선행을 하고서 바로 조바심을 냅니다. “왜 보상이 없지? 왜 남편이 변하지 않지? 왜 이렇게 헌신하는데 길이 안 열리지?” 그 질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답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을 때도 벌을 당장 내릴까?”
보응의 지연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라면 결국 보상의 지연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밭 심은 데 팥 납니다. 분량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그런 단순한 진리를 외면하기에 세상이 시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를 아는 사람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또한 사랑을 원하기에 먼저 사랑하고 믿음을 원하기에 먼저 믿어줍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이치 안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됩니다. 그 원리를 외면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타이밍에 대한 인식 차이’와 더불어 ‘대상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갑에게 잘못하면 갑이 아닌 을로부터 더 큰 보응을 받을 때가 많고 갑을 도와주면 갑이 아닌 을로부터 도움을 더 큰 받을 때가 훨씬 많습니다.
제가 어려운 분들이나 선교사님들을 위해 작은 도움을 펼치고 나서 비전 동지로부터 더 큰 도움을 받는 체험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결국 자기가 생각하는 모습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시간에 자기가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보상이나 보응이 없다고 해서 보상이나 보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열매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자신이 알게 모르게 심은 것을 거둔 것입니다. 그래서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를 알면 보상이 늦다고 불평하지도 않고 보응이 늦다고 방종하지도 않습니다.
선행을 하고 금방 보상을 바라면 오히려 죄에 대해 당장 벌을 받습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복이 늦어지는 것이 낫습니다. 보상과 보응의 지연을 통해 하나님의 숨은 사랑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죄 공장인 자신이 벌을 받지 않고 지금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고 있다면 보상이 늦어지는 것도 감사하십시오. 그처럼 심은 대로 거두는 진리를 깊이 인식하고 열심히 심는 삶이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데 가장 필요한 삶입니다.
< 종말을 준비하는 5대 자세 >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지만 영원히 참고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때가 되면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도둑 같이 갑자기 임하고 그때는 하늘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가 있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질 정도로 온 땅이 불천지가 될 것입니다(10절). 그처럼 무서운 심판이 동반되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성도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1. 시간에 너무 매이지 마십시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가지고 갖가지 미혹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인간의 시간 개념은 다르고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성도도 시간이 너무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에 얽매이는 삶은 미혹의 통로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재림 시기를 정하며 미혹하는 이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재림 시기를 정하는지 그 동기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거짓 신령함으로 영혼을 약화시키고 미혹해서 돈을 털고 자신의 영적인 노예로 만들려는 나쁜 동기가 그 밑에 깔려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축복의 때와 기한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 문제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요즘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를 지켜 오신 귀한 어르신 권사님들이 요새 기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기에 하루라도 빨리 비전을 멋지게 이루는 모습을 보여드려서 큰 기쁨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조바심을 내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넉넉한 믿음으로 기다리며 현재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비전이 이뤄지는 멋진 모습을 볼 때까지 권사님들의 건강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40일이면 충분히 가는 거리였지만 그 365배인 40년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시간낭비입니까? 지금도 순종하며 기다리지 못해서 며칠이면 해결될 일을 몇 년 걸리며 더 늦어질 때도 많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조바심을 내면 보상이 더 없습니다. 반면에 보상에 대한 생각이 없이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면 어느새 보상의 때가 성큼 다가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늦는 것이 결국은 빠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믿음의 길을 출발했지만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었다고 하지 마십시오. 본문에서 베드로가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한 것은 짧은 시간으로도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부터 남은 생애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면 하루가 천년 같은 삶을 살 수 있고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하나님 앞에 계수되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시간과 때에 대해 항상 열린 시각을 가지십시오.
2. 기다림을 축복으로 여기십시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없다고 미혹했을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 및 약속 성취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 성취가 늦어지는 것은 주님의 약속이 잘못된 것이나 주님이 능력이 없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오래 참으시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해 성도는 ‘오래 기다림’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오래 참으십니까? 심판의 끔찍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태만과 거짓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시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5:22). 왜 므두셀라를 낳은 후 그런 변화가 생겼을까요? ‘므두셀라’란 이름은 “내가 죽으면 쏟아진다.”란 뜻입니다. 즉 므두셀라란 이름은 그가 죽으면 홍수 심판이 있다는 깊은 의미가 담긴 이름입니다. 아마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이름을 지을 무렵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네 아들이 죽으면 홍수 심판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로 짓고 늘 종말과 심판을 생각하며 살았기에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969세에 죽자 바로 다음 해에 노아의 홍수가 있었습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장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오래 산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오랫동안 심판을 늦춘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당장 심판 받기에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계속 회개기회를 주시고 심판을 늦추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늦어짐에 대해 나태해지지 말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결혼 주례를 위해 예식장에 갔는데 행사 진행요원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신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토요일에 바쁜 목사님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저희도 목사님의 시간을 귀하게 여겨 이런 시간 낭비가 없도록 해야 함을 잘 알지만 신부화장이 덜 끝났다고 하는데 어떡하지요?” 그 젊은 행사요원의 배려하는 말과 태도가 너무 기특해서 목사님이 언짢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때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있는데 성령님이 감동을 주셨습니다. “종아! 신부화장 덜 끝나서 도착하지 못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봐라. 네 신랑 되신 그리스도도 속히 재림하고 싶지만 이 땅의 신부들이 아직 화장이 덜 끝나서 심판을 연기하고 기다리는 것이란다.” 그처럼 주님은 당장 오실 수 있지만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지연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읽고 기다림을 축복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3. 거룩한 행실을 갖추십시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베드로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마땅히 취해야 할 첫째 자세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라고 합니다. 거룩함과 경건함을 갖추라는 말은 행위 하나하나를 따지며 수도사나 바리새인처럼 살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신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기를 단장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신랑은 대개 예쁜 신부를 원합니다. 신부는 화장품을 30가지 이상 씁니다. 그렇게 화장에 돈도 많이 쓰고 시간도 많이 들여서 요새 신부들은 많이 예뻐졌습니다. 화장이 없는 자연스러운 얼굴이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자연스러운 것이 관리도 없이 맘대로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장이 가장이나 변장 수준이 되면 안 되지만 자신을 예쁘고 단정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힘써 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자 예의입니다.
성도도 힘써서 영적인 화장을 해야 합니다. 율법의 거울을 보고 마음과 태도를 단장하고 성령의 기름과 즐거운 헌신으로 영혼을 윤기 나고 예쁘게 만들어서 최상의 신부단장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신부단장을 위한 영적인 지침서와 같고 교회는 영적인 미장원과 같고 목사는 영적인 미용사와 같습니다. 특히 주일 예배 때마다 은혜가 넘치는 말씀과 감사가 넘치는 찬송과 기도로 매주 아름다운 영혼의 단장을 이뤄내야 합니다.
미장원을 자주 드나들면 얼굴이 예뻐지듯이 교회에 자주 오면 영혼이 예뻐집니다. 그처럼 말씀의 꿀을 먹고 찬양과 기도와 봉사와 교제를 통해 영혼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주님이 오실 때 모두 예쁜 신부들로 나타나야 합니다. 처녀 때는 뭇 남성들의 이목을 끌려고 화장하지만 결혼하면 한 남성의 애정을 얻으려고 화장합니다. 사실 화장은 자기를 위해 하는 것 이전에 남을 위해 하는 것이고 신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의 사랑을 얻는 것이 뭇 남자의 시선을 받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뭇 남자가 다 선망해도 사랑하는 한 남자가 싫다면 그때부터 삶이 무너집니다. 단장의 제일 목적은 신랑의 마음을 얻는데 있습니다. 그처럼 성도는 세상적인 힘과 권세와 능력과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부의 꿈을 품고 주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자신을 잘 단장해야 합니다.
4.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본문 12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사탄이 거짓 선지자를 통해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는 것은 두려움과 급박성을 심어서 순진한 성도의 마음과 돈을 훔치고 그들은 영적인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사탄의 치밀한 고도의 전략적인 목적은 ‘성도의 믿음 약화’에 있습니다. 즉 거짓 예언자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다가 틀리면 실망해서 믿음을 버리거나 종말신앙이 현저히 약화됨을 알기에 자꾸만 틀린 시한부 종말론을 유포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어느 날, A 목사가 1988년 8월 15일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 교인이 아쉬워하며 말했습니다. “오시려면 진작 오시지. 어렵게 아파트 한 채 겨우 마련하니까 이제 오신다니. 그 집에 살지도 못하고 가겠네.”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교인들이 괴나리봇짐을 싸들고 뒷산으로 올라갈 때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예언한 날 낮 12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했는데 12시가 넘고 낮 한시가 되어도 안 오니까 교인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12시에 오신다는 주님이 1시가 되어도 안 옵니까?”
A 목사가 말했습니다. “이상한데. 분명히 오실 텐데. 연락이 잘못 되었나? 다시 기도하고 올게요.” 그리고 기도 굴에 갔다 와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 갑자기 비상이 걸려서 재림을 무기한 연기하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속빈 교인들이 그냥 “아멘!”하고 뒷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 거짓을 그냥 눈감아주고 잘 책임을 묻지 않으니까 거짓 예언과 거짓 치유를 내세우는 미혹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좋은 교회를 만나고 이단을 만나지 않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최고의 축복입니다.
실제로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을 비롯한 그런 유사한 종말예언들이 다 틀리면서 한국 성도들의 종말신앙이 얼마나 약해졌습니까? 한번 그런 경험을 겪으면 영혼의 트라우마가 생겨 믿음도 약해지고 헌신도 약해집니다. 또한 그런 교회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다른 정상적인 교회에 가면 메시지를 밋밋하게 여기고 잘 적응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시한부 종말론은 처음부터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고 또한 침착하고 냉철하고 담대하고 바르게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간절한 재림신앙이 퇴색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바른 재림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상상을 초월한 극적인 변화가 이뤄집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역사가 주전(BC)인 기원전과 주후(AD)인 기원후로 나뉘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과거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앞으로 있을 가장 큰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미래의 역사는 재림하실 예수님 전과 재림하실 예수님 후로 갈리면서 또 다시 놀라운 대 변혁의 역사가 지구상에 생길 것입니다.
또한 그런 대 변혁의 역사가 각 개인의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이 마음이 임하시면 자신의 삶에도 획기적인 주전과 주후의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고 가장 큰 일은 예수님을 꼭 붙들고 사는 일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을 형식적으로 붙잡았다가 진심으로 붙잡는 변화만 있어도 그의 삶에 멋진 작품 인생을 향한 최대의 인생 반전의 계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5. 천국 소망을 가지십시오
본문 12절 하반부 말씀과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심판의 날이 되면 사방이 불천지가 될 것입니다. 무섭고 두려운 장면이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도에게는 의가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삶처럼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한때 잉꼬처럼 잘 살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저녁마다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남편이 전화도 없이 밤늦게 들어오면서 자꾸 바깥으로 돌았습니다. 결국 남편을 기다리는 삶에 지쳐서 결혼 10년 만에 합의이혼하고 혼자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녁마다 마음이 허전했고 꼭 누군가 올 것 같고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며 이런 넋두리를 했습니다. “그래도 기다릴 사람이 있을 때가 좋았구나!”
기다릴 사람이 있고 기다릴 것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행복의 조건입니다. 로또를 사면 사는 순간부터 설렌다고 합니다. 그 기다림의 대상이 좋은 것이면 행복감을 커지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배우자나 주님이라면 그 행복감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앞으로 다가올 찬란한 미래의 일부를 현재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과 심판이 불신자에게는 힘들고 무서운 재앙이지만 진실한 성도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면서 조만간 큰 기쁨의 날이 펼쳐질 것입니다.
< 사랑으로 자신을 단장하십시오 >
이제 예수님을 만날 희망을 늘 품고 사십시오. 현재 모습이 부족해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은 늘 기억하며 사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악한 사람도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 자기 약점과 힘든 환경 때문에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할 때 주어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약한 것이 딱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굳고 딱딱한 것이 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교만하지 않도록 주어진 육체의 가시가 떠나게 해라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습니다(고후 12장).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네 은혜가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계속 머물러 있도록 자신의 약점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약해질 때가 강해질 때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꼭 붙잡고 종말심판의 때가 작은 왕관을 받는 즉위식 때가 되게 하십시오. 그때까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며 사십시오. 흔히 힘이 정의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힘과 숫자는 잠시만 정의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힘과 숫자는 정의가 아닙니다. 힘과 숫자가 정의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조만간 그들 개념에 의한 진짜 정의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사실상 죽음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음을 이겨낸 사람은 역사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이란 강력한 힘과 숫자의 제동장치를 발명하시고 힘과 숫자를 숭상하는 사람에게는 여지없이 그 제동장치를 빨리 작동시킵니다. 그 죽음의 힘에는 누구도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결국 힘과 숫자를 정의로 여기면 진짜 정의로운 죽음의 손길이 늘 대기한 상태가 됩니다. 반면에 사랑을 정의로 여기면 영생의 기운이 일부나마 현실에서도 나타나면서 행복과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최고의 힘과 정의입니다.
나폴레옹은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창칼로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창칼도 없이 세계를 정복했으니 그분이야말로 위대한 승리자이다.” 사랑이 진짜 정의입니다. 밑지는 장사가 남는 장사이고 지는 장사가 이기는 장사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시는 밑지는 장사를 했지만 결국 가장 남는 영적인 장사로 만드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누구보다 나눔에 앞장서는 인물들이 되십시오.
이틀 전 <월간 새벽기도(월새기)> 비전에 대해 한 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뜻은 좋지만 너무 가격을 적게 책정한 것은 아닌가요? 요새 하드 하나도 편의점에서는 천 원을 받는데 2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니까 2천원 받아도 괜찮을 겁니다. 천원 받아서 창간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일리 있는 말이고 요새 주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역이 한두 달 반짝 하고 끝나지 않을 것이란 강한 확신이 듭니다. 그 확신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아마 나눔의 축복을 확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종말의 때가 가까워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단장하며 주님 맞을 준비만 잘하면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나누십시오. 나누는 길이 얻는 길입니다. 나누면 나눔 받는 사람이 풍성해집니다. 신기하게도 나눠주는 사람의 마음은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도 풍성해지고 결국 천국 보상도 풍성해질 것입니다. 항상 복음을 비롯해서 좋은 것을 많이 나눔으로 마지막 때를 잘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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