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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나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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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09) |
교회를 망치는 5대 대적 (나훔 1장 9-15절)
얼마 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의 수아레스 선수가 경기 중에 이탈리아 선수의 어깨를 물었습니다. 그 영상이 반복 재생되면서 그의 핵이빨 행위가 전 지구촌에 다 알려졌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남의 어깨를 물고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쇼를 한 것입니다. 결국 전 세계 모든 언론의 비난을 받고 그는 4개월 출전정지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를 세계 사람들은 다 비난했지만 우루과이 국민들은 감쌌고 심지어는 그가 귀국할 때 공항에 환영인파까지 몰렸습니다. 또한 전 세계 언론이 다 비판했지만 유독 우루과이 언론만 그를 감쌌고 심지어 우루과이 대표팀 타바레즈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아레스는 비판을 위한 비판을 좋아하는 언론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 명백한 잘못에 대한 지적을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마녀사냥’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그러자 누가 이렇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진짜 마녀라면 사냥해야지!”
20세기 말부터 한국 교회의 공룡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그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많은 뜻 있는 성도들이 공통된 소리였습니다. 그런 근심 어린 비판을 외면해 말년이 비참해진 공룡교회 목회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한 교회의 공룡화는 한국 교회 전체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고 또한 공룡교회 목회자의 욕심은 비참한 끝을 예고합니다.
요새 교회 건물이 경매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상 오래 전부터 교회건축이 급격한 교회성장을 가져다준다는 맹신이 정보화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란 수많은 경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수아레스 교회>를 무조건 감싸면 안 됩니다. 교회가 교회건축을 통해 외형적인 성장신화를 이룬 구시대적인 원리에 매몰되면 결국 심각한 고통과 후유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2008년에 경제를 살릴 큰 기대를 받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제 2의 건설신화를 꿈꾸며 4대 강 사업 등에 돈을 원 없이 풀었습니다. 같은 교회 출신 강만수 재경부 장관은 환율을 폭등시키고 원화 가치를 무섭게 떨어뜨렸습니다. 환율폭등으로 거대 수출기업의 이익을 늘려주면 고용도 창출되고 그들이 흘려보내는 돈으로 서민경제도 살아난다는 <낙수효과 이론>을 앞세워 환율폭등을 주도했지만 결국 경제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강 장관의 이론은 노동력이 생산력과 직결되던 구시대에는 잘 통용된 이론이었지만 자동화 설비가 생산력을 좌우하는 현 시대와는 맞지 않는 이론입니다. 기업들은 돈이 생기면 원가절감을 위해 자동화 설비를 늘리면서 노동력을 오히려 줄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대통령이 경제를 몰랐다면 실력 있는 경제학자나 경제 관료를 활용하면 되는데 대통령이 경제를 안다고 앞서 나서서 구시대적인 회사운영 방식으로 나라경제를 밀어붙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환율이 내리면 뜻 있는 수출 기업 오너는 비상대책 팀을 꾸려 이렇게 비전 제시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환율 하락으로 이윤이 줄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입물가 하락으로 원가절감도 이룰 수 있고 국내물가 하락으로 국민들의 삶의 질은 높아지니까 기쁘게 감수합시다. 대신 낭비요소를 없애고 창조성을 발휘해 기술력과 경쟁력을 높입시다.” 그러면 그 회사는 위기를 통해 경쟁력도 높아지고 그런 오너는 존경 받는 오너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환율이 내리면 돈만 아는 수출 기업 오너는 비상대책 팀을 꾸려 이렇게 전략을 꾸밀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환율 하락으로 이윤이 줄고 있습니다. 관료 대책 팀은 경제 관료들이 환율 상승을 유도하도록 로비하고 언론 대책 팀은 환율 하락으로 수출이 어려워져서 나라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기사를 많이 내도록 로비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로비 대책만 세우면 그 회사가 어떻게 경쟁력이 생기고 그런 오너가 어떻게 존경을 받겠습니까?
이 대통령과 강 장관의 논리는 노동집약형 경제개발 시대에는 통했지만 지금은 그런 성장주의와 외형주의는 잘 통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낙수효과는 없었고 부익부빈익빈 현상만 심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개발 시대에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한 공룡교회 목회자들 중에는 강 장관 식의 성장주의자가가 많습니다. 끼리끼리 어울립니다.
만약 이 대통령과 강 장관이 나눔과 분립을 가르치는 선교적인 목회자 밑에서 잘 배웠다면 낙수효과를 내세워 힘 있는 사람에게 더 힘을 실어주는 정책보다는 오히려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낙수가 아닌 직수를 흘려주려는 정책을 더 개발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나눔과 분립을 외면하고 외형적인 성장에 몰두한 공룡교회들과 그 물에 몸담았던 일부 외형적 성공주의자들로 인해 한국 교회의 이미지가 얼마나 잘못 인식되고 있습니까?
< 교회를 망치는 5대 대적 >
요새 한국 교회가 크게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교회를 망칠까요? 나훔 선지자는 당시 중동의 문명세계를 제패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의 외침을 통해 오늘날 교회를 망치는 5가지 대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악한 리더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니느웨가 인간적인 꾀를 부려도 하나님이 온전히 멸하심으로 이스라엘에 다시는 재난이 없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니느웨는 어떤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었을까요? 니느웨의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사악한 꾀를 가진 악한 리더의 말을 따르는 죄였습니다(11절).
요새도 악한 리더들이 교회를 망치려고 무엇을 내세웁니까? 그 대표적인 것이 다단계 판매, 거짓 예언, 거짓 치유, 기복주의, 시한부 종말론, 기업적인 교회성장 세미나 등입니다. 왜 교회성장 세미나에 갔다 오면 교회가 더 후퇴하는 사례가 훨씬 많습니까? 남의 성공사례를 통해 형성된 정교한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면 자신의 은사와 특성과 개성이 매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위험한 모습 중의 하나는 외적인 성장을 위해 남을 무조건 모방하는 것입니다. 남의 성공사례를 그대로 따르면 자신의 특별한 개성이 매몰되고 주님을 닮은 일에도 실패하며 더 나아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닮았지만 서로 각기 다르듯이 교회도 각각 자신들의 특성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뤄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이란 성령님의 은혜로 자신 안에 주님의 형상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님의 형상이 내면에 이뤄져도 자기 개성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요새 왜 이단과 사이비 세력이 그렇게 커집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족 때문입니다. 이단 집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을 문서로 기록해보면 비성경적이고 몰상식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설교는 문서로 그대로 기록해 공개해도 하자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단 집회 현장에서 선포되는 가르침을 그대로 기록하면 보기도 민망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요새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았다! 마귀가 물러갔다!”고 했다가 나중에 “아니면 말고! 네가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식의 거짓 치유와 거짓 축귀가 얼마나 성행합니까? 예언을 빙자하고 종말론과 음모론으로 영혼을 두렵게 만들어 속박하는 무속적이고 미신적인 모습도 여전히 성행합니다. 또한 기업적인 교회성장 세미나를 통해 성장신화를 부풀려 헛된 환상을 심고 결국 ‘세미나를 개최하는 교회’만 배부르게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통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2. 힘의 과시
하나님은 교회가 힘과 숫자를 내세우는 것을 <앗수르 교회>로 여기고 가장 싫어하십니다. 나훔은 앗수르 군대가 강하고 숫자가 많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멸절되고 없어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12절). 그처럼 힘과 숫자를 내세우면 하나님의 진노로 자신부터 먼저 멸절됩니다. 그런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니체의 힘의 철학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고 그 힘의 철학을 숭배한 히틀러와 나치도 패망했습니다. 땅이 부드러우면 씨앗을 뿌리며 가꾸지만 딱딱하면 곡괭이로 내리칩니다.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매스컴과 대중 앞에서 거만하게 강한 말을 하면 언젠가는 자신도 곡괭이를 맞아 만신창이가 됩니다. 가정에서도 서로 이기려고만 하면 항상 풍파가 심합니다. 그처럼 힘을 내세우면 내적인 평안도 얻지 못하고 결국 단명합니다.
저는 학생 때 싸움을 꽤 했습니다.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복싱을 비롯한 격투기 운동을 많이 했기에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일대 일 싸움에서는 거의 질 수 없을 정도로 주먹 힘과 스피드를 길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겉으로는 힘을 과시했지만 속으로는 제 심장이 저도 모르게 겁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심장도 아니면서 힘을 내세우니 얼마나 불안합니까? 만약 그렇게 계속 힘을 내세워 살았다면 불안 중에 살다가 어느 날 비명횡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1979년 어느 날 힘을 내세우는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붙들면서 살 길을 찾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강한 척 해도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강한 것이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진짜 강한 것입니다. 힘과 숫자가 생기면 과시하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가 힘과 숫자를 과시하면 조만간 모든 명예를 잃고 결국 무너집니다.
3. 동거 신앙
하나님은 필요하면 멍에를 지우시기도 하고 때가 되면 그 멍에를 깨뜨리십니다(13절). 당시 유다는 자체 왕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와 종교 자유도 없이 100년 넘게 앗수르에 복속된 상태에서 그들의 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자꾸만 벗어나려고 하고 선민의 책임과 사명을 외면했기에 그런 비참한 멍에를 하나님이 지우셨지만 하나님은 결국 때가 되면 그 멍에를 깨뜨리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성도가 마땅히 져야 할 멍에를 지지 않으면 인생의 멍에는 더 커지지만 마땅히 져야 할 멍에를 기쁘게 지면 인생의 멍에는 더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적절한 부담도 져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건전한 틀과 시스템 안에 있는 것을 자유의 제한으로 여기지 말고 그 한계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제도 안에 몸담는 삶도 중요합니다. 결혼이란 제도가 있기에 많은 가정들이 깨질 위험을 극복하고 지탱되는 것입니다. 요즘 결혼 없는 동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존 제도에 반항하듯이 동거에 들어가지만 조만간 밀가루 반죽을 서로의 코에 묻히며 까르륵대다가 침대로 쓰러지는 날이 끝나고 남자의 애정이 급속히 식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 없는 동거가 오래 가겠습니까?
책임과 부담을 지려는 결혼과는 달리 책임과 부담에서 자유롭게 되려는 동거는 결코 둘 관계를 오래 지속시킬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에 대한 아찔한 생각만 생기고 그러다가 작은 핑계거리만 생기면 곧 막을 내리는 것이 동거입니다. 진짜 사랑은 설렘을 잃은 후에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누군가의 그윽한 시선을 받고 저 하늘에 뜬 별을 함께 바라보는 삶이 아닙니다. 사랑을 그렇게 생각하고 동거하다가 방안에서 곰팡이로 덮인 된장국만 봐도 환상이 급속히 환멸로 변하는 것이 동거입니다.
사랑은 책임과 부담을 지는 것입니다. 동거하면서도 책임 있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지만 그런 착각에 빠져 동거하다가 동거 상대가 다른 이성을 만나 이별을 고할 때에 가서야 관습과 제도의 위력을 부인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는 고독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유롭고 쿨한 것이라고 믿고 시작하지만 결국 ‘결혼’한테 백전백패 하는 것이 바로 ‘동거’입니다. 제도 밖 동거는 제도 안 결혼을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교회생활은 동거처럼 하지 말고 결혼처럼 해야 합니다. 부담과 책임을 지기 싫어 큰 교회로 간다는 것은 교회생활을 동거처럼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담 없이 즐기려고 동거하면 상대도 자신을 가볍게 상대한다는 불편한 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물론 본인은 큰 교회에 가서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며 담임 목사를 “우리 목사님!”이라고 하겠지만 그 목사님은 자기를 깊은 차원의 비전 동지로 생각해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동거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결혼 제도가 왜 지금까지 존재했겠습니까? 사람을 너무 믿고 동거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다 부족하기에 결혼 제도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동거하면서 사랑하는 동거자 때문에 행복하다는 사람은 조만간 그 동거자 때문에 속을 썩이게 됩니다. 교회생활을 동거하듯이 하지 마십시오. 교회생활을 잘하려면 늘 적절한 부담을 지려고 해야 합니다.
4. 우상숭배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앗수르가 멸망한 제일 이유가 우상숭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앗수르인들은 각종 신들을 잡다하게 섬겼고 그 신전들을 중심으로 살면서 새긴 우상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로 그 우상들을 멸절하고 더 나아가 앗수르 왕의 무덤까지 준비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상이나 앗수르 왕은 아무런 힘이 없으니까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요새도 교회를 망치는 제일 요소는 역시 우상숭배입니다. 요새 예언과 치유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아니면 말고!” 식의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치유자들이 많습니다. 거짓도 문제지만 거짓이 아닌 진짜일지라도 예언과 치유 등의 ‘기적’을 ‘주님’보다 더 바라보고 기대하게 하는 것은 대표적인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하도록 두려움을 심는 무속적인 의식들과 미신적인 행위들도 결국은 다 우상숭배입니다.
얼마 전에 지방의 유명하다는 한 절을 잠깐 들렸습니다. 입구 쪽에 4대 천왕 상이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왜 갑상선 항진증 환자처럼 눈이 툭 튀어나온 무서운 신상을 만들까요? 그것도 영혼에 두려움을 심는 일종의 사전작업입니다. 대개 보면 미신일수록 무섭게 보이는 미신상이 많습니다. 그래서 뜻 있는 젊은 불자들조차 불교의 미신화를 경계하는 목소리들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신은 영혼을 두려움으로 약화시킨 후에 찾아옵니다. 무속신앙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무속의식들을 보면 영혼에 두려움을 심는 의식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교회에서도 그런 유사한 의식들을 차용해 기독교의 미신화를 부채질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무속신앙과 미신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내일 종말이 와도 오늘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기쁘게 가겠다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면 우상숭배의 저주에 빠질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5. 발 없는 말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아름다운 소식’은 ‘앗수르의 멸망 소식’입니다. 즉 이 구절은 앗수르가 멸망하고 다시 자유와 평화를 찾게 된 것을 기쁘게 사방으로 전하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구원의 소식을 이웃에게 전파해 대 자유와 대 평안을 같이 누리려고 해야 합니다. 발이 없는 말, 즉 전도가 없이 말만 많은 모습은 교회를 망치는 가장 큰 대적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가 살아나려면 ‘발 없는 말’의 삶을 끝내고 ‘말 없는 발’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전도할 때도 “교회에 한번만 와주세요.”라고 사정하며 전도하면 교회에 오래 잘 다니지 못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영향력과 소리 없는 사랑의 실천을 통한 전도로 교회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면 교회를 오래 잘 다닙니다.
교회는 ‘와주기를 구걸하는 공동체’가 아닌 ‘오고 싶은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오고 싶어야 교회에 와서도 잘 적응합니다. 전도할 때 “우리 교회에 와서 장로가 되어주세요. 지휘해주세요.”라고 사정해서 끌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집니다. 그러면 오는 사람도 은혜를 못 받고 작은 갈등만 생겨도 불만을 토로하면서 교회가 더 어려워집니다. 교회 봉사는 사정해서 와주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서 은혜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정해서 데려오는 교인’보다는 ‘갈급해서 찾아오는 교인’이 진짜 교인입니다.
물론 사정해서 데려왔다가 갈급한 교인으로 만들면 되지만 경험상 그것은 확률이 아주 낮습니다. 왜 1970-80년대에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까? 암울한 시대에 교회가 피난처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교회를 필요로 했습니다. 반면에 지금의 수많은 전도 프로그램은 구걸하는 방식의 전도 프로그램입니다. 또한 교회정착 프로그램이나 뒷문을 막는 프로그램 등도 구걸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뒷문을 막아 교회에 억지로 남게 한 사람들로부터 불평자는 잘 나와도 사명자는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 없는 발’의 전도가 중요합니다. 즉 소리 없이 나누는 실천적인 사랑이 진짜 전도를 이룹니다. 왜 요새 전도가 힘듭니까? 발 없는 말의 전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사명을 인식하고 ‘말의 성찬이 넘치는 전도’가 아닌 ‘사랑의 실천을 통한 전도’에 새롭게 나서야 합니다. 전도를 외면하는 것은 성도의 가장 큰 사명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요새는 너무 전도가 안 되니까 전도에 나설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전도의 사명을 새롭게 하고 지혜롭고 소리 나지 않게 전도에 나서야 합니다.
< 사랑의 실천을 통한 전도 >
얼마 전 저의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 말씀을 통해 감동받은 한 무명의 헌신자가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창간 비용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창간호는 곧 나오게 되었지만 2호부터는 창간호를 통해 은혜 받은 분들과 문서선교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들의 기도를 먹어가며 스스로 비전을 지속시켜야 하는 부담과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월새기 책 가격은 천 원으로 책정했습니다.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천원에 드리고 게다가 택배비와 박스비까지 부담하니까 결국 한 권에 약 700원에 드리는 셈입니다. 팔수록 손해가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책값을 책정한 것은 무명의 헌신자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돌려 나누고 문선선교의 뜻을 살리려고 그렇게 책정한 것입니다. 책값을 그렇게 책정하니까 이상하게도 앞날에 대한 염려보다는 감동과 기쁨과 흥분이 더 넘쳤습니다. 앞으로 사역이 커지면 나중에는 영어로도 번역해서 전 세계로 1불에 공급할 예정입니다.
그처럼 월새기를 한 권에 1000원에 책정했기에 3천원의 택배비를 들여 한 권만 보낼 수는 없어서 할 수 없이 최소한 10권을 구독하는 원칙을 정했습니다. 그처럼 10권을 구독하면 어쩔 수 없이 주변인들에게 나눠줘야 하니까 평생 전도를 한 번도 안 했던 분들조차 월새기를 구독하면 저절로 전도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동안 전도의 책임을 느끼면서도 잘 하지 못했던 전도를 소리도 없고 큰 부작용과 부담도 없이 자연스럽게 할 기회를 드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월새기 비전에 더욱 애정과 확신이 생겼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란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을 잘못 적용해서 몰상식하게 전도하면 전도의 문은 더 막히기에 늘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혜롭게 전도해야 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교회에 대한 반감이 많을 때는 더욱 소리를 낮추고 은밀한 사랑의 실천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그처럼 전도의 사명을 늘 인식하고 감당할 때 삶은 더욱 빛나게 됩니다. 항상 소리 없는 사랑의 실천을 통한 전도로 영혼 구원의 통로가 되어 인생을 더욱 알차고 보람 있게 만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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