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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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갈 때,우리의 삶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닮아가기 시작합니다.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다하여 주기도문을 자신의 기도로 드릴 수 있다면, 그는 최고의 영적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기쁨을 드리는 신자는 바로 그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출판사 서평기독교 복음 진리를 함축한 예수 신앙의 진수이자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모본인 주기도문의 참된 가치와 중요성을 되돌아보고 삶으로 실현할 것을 촉구하는 김남준 목사의 또 한 권의 역작! ‘기도 중의 기도’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소 기도하시던 기도의 틀이었을 뿐 아니라 그분이 지상에…[더보기▶]




김남준 목사님의 <깊이 있는 주기도문>을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햇볕같은이야기 4975-5070호까지 한편씩 나눔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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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님의 기도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만든 기도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소에 기도하시던 형식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자세뿐만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틀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기도의 형식은 평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던 틀이었고 동시에 당신께서 실제로 이 땅에서 살아가셨던 삶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2. 주기도문의 삶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기쁨을 드리는 신자는 주기도문의 삶을 사랑가는 신자입니다. 기도의 열렬함과 삶의 치열함이 서로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주기도문을 자기의 기도로 삼아 눈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만큼 살 수 있고, 사는 것만큼 기도할 수 있습니다.

 

3. 기도와 삶

기도와 삶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만큼만 살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만큼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껏 하나님을 향해 열렬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고, 지금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앞으로 열렬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는 삶의 도처에서 멸시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4. 사상적 무신론

어느 시대이건, 자신들이 신의 존재를 믿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현대인들 역시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오늘날의 일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10:4)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스스로 마음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증거들을 지워버린 결과입니다.

 

5. 기도할 때,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 신앙생활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는 때가 있고, 거의 기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두 시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기도를 많이 할 수 있지만, 워낙 바쁠 때는 기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렬한 기도생활은 단지 우리의 시간적 여유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에 크게 느껴질 때에는 아무리 바빠도 열렬히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라지고 그분의 살아 계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한가해도 거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가르쳐 주시기에 앞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실천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실 뿐 아니라, 살아 계신 인격체로서 우리와 교통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시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7.구별된 존재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구별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게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이 묻어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과 창조세계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줍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19:2-4)

 

8. 거룩하신 하나님

어느 교회에든지 예배당에는 강대상이 있습니다. 강대상은 예배에 사용되기 전까지는 그냥 가구에 불과합니다. 가구가 되기 전에는 목재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성된 가구가 예배당에 놓이고, 설교를 위하여 사용되면서 '성구'(성구)라고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물건이 '거룩한 가구'라고 불리는 것은 에배라는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동안의 일입니다. 예배를 위해 성구로 사용되던 강대상이라도, 길거리에 버려지면 폐품으로 분리되고 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물건에는 거룩함이 부여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9.통치하시는 하나님

'하늘에 계신' 이라는 표현은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은 진실한 기도의 실천을 위하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마음의 준비입니다. 이 모든 세계와 인간 존재의 원인 뿐 아니라 그것들의 운명과 존재의 목적까지도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하신 이 세계를 당신의 주권으로 다스리십니다. 특별히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들을 당신의 지성과 의지로써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깨닫게 하시고, 상벌을 내리심으로써 그 뜻대로 살게 하시려는 당신의 의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10. 기도의 깊이는 하나님을 아는 깊이입니다

주기도문은 인간의 운명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비인격적 절대자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신 기도문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계시지만 인간 세계에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유신론자들을 위하여 주신 것도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존재하실 뿐 아니라 살아계시고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지금도 인간 세계에 간섭하시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시는 거룩하고 인격적인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신자들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11. 위에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더욱이 인간이 타락하고 구원받은 후에는 더욱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그렇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신자인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항상 평안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약속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수많은 문제들에 애워 쌓여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믿음의 눈을 들어 위의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2.하나님 아버지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가족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한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같은 것입니다.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이토록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를 당신의 가족 관계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13. 위격적 아버지 되심

하나님은 우리에게 삼위일체 안에서의 '위격적 아버지'가 되십니다. 성자와 성령과 구별된 성부가 아버지로 불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요10:30)


14. 창조적 아버지 되심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조적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만물과 함께 인간의 기원 역시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창조된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을 '신의 소생'이라고 여겼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행17:28)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인류가 하나님의 소생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행17:29)


15.신정적 아버지 되심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정적 아버지가 되십니다. 세상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중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선택된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진실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어리석고 지혜 없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이는 신정국가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신32:6)


16.양자적 아버지 되심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자적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언약 백성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구속의 아버지가 되어 주심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합니다.(롬8:15) 하나님의 양자적 아버지 되심은 당신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우리로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데서도 나타납니다.(갈4:6) "아빠 아버지"의 호칭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실 때도 사용하셨습니다.(막14:36)

 

17.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에는 일곱 가지의 기도문이 등장합니다. 그중 세 가지는 하나님 자신과 관련된 기도제목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을 위한 기도제목입니다.
첫 번째 기도 제목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나머지 모든 기도 제목들 속에서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또 그 신앙 아래 사는 삶이 무엇인지 함축하여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분투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여섯 가지의 기도 제목들은 궁극적으로 이 첫 번째 기도 제목의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18.불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존재는 당신이 아닌 인간들이나 그 무엇에 의해서 결코 영향을 받거나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그 불변성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하여 전혀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와의 관계 안에서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세상이 놀랍게 번영한다 하여도 혹은 심각하게 파괴되어서 사라진다 하여도 그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만물의 흥망이나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서 우리가 어떤 영광을 돌리느냐에 상관없이 당신 스스로 거룩하고 존귀하며 엄위하신 분이십니다.


19.가변적인 영광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는 가변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초월하여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은 이 세상 사람들 안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불변하지만, 그 이름은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혜를 따라 당신의 언약 백성이 어떤 삶을 사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기도 하고 존귀하게 높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을 통해 그들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의 이름과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분의 이름이 인류 안에 드높여지기 위하여 지은바 되었습니다.

 

20.인간의 두 가지 의무

인간에게는 두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고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하도록 정결한 영혼을 갖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땅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존재가 아름다운 것처럼 그분의 이름도 온 땅과 만물 위에 드높아지고 빛나도록 기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인간들에 의하여 존귀하게 여김을 받기를 비리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삶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은 신자의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영예는 그 무엇과도 양보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일을 가장 궁극적인 삶의 목표로 삼을 것이며, 그 일의 성취를 위한 어떠한 희생도 크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모든 것을 후히 누리며 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쓴 결과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단지 씨를 뿌렸을 뿐이고 그것들을 결실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22. 당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잠시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명에를 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무대에 막이 내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대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햇빛같이 내리는 그날, 그들의 삶은 수치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가진 것 없이 누린 것도 별로 없이 살다 간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다면 그날에 받게 될 칭찬과 영광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첫 번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폭풍처럼 쏟아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3. 하늘나라 천국(天國)

한 나라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국민, 영토, 주권입니다. 한 국민이 영토를 소유하고 있고, 그 영토와 국민을 의지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그 나라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대 주권이 한 사람의 왕에게 있으면 왕정국가가 되고, 다수의 국민에게 있으면 공화정국가가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일제 강점기를 "나라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나라의 영토나 국민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주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렸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역시 국민, 영토, 주권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진정한 나라입니다.


24. 하나님 나라의 핵심 -왕권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왕권입니다. 영토도 백성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왕권입니다. 그 왕권이 확립되어 있을 때에 비로소 영토를 제대로 장악하여 왕의 뜻대로 다스릴 수 있고, 백성들도 왕의 뜻을 따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나라가 건설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왕권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그들이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통치를 받는 나라를 이룰 국민의 탄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토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수립된 육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 앞으로 수립될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한 그림자인 것입니다.

 

25. 이미 온 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여기서 말한 '이미 임한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함께 이미 지상에 침투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이 나라는 아직도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세상 나라 속에 침투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습니다.

 

26. 성취될 나라

성경은 현재적 차원의 '이미 임한 나라'와는 또 다른 차원의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성취될 나라로서 미래에 신적 통치가 실현된 나라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40일 동안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고 기록합니다.(행1:3) 여기서 말하는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도입되었지만, 아직은 채 완성되지 못한 나라, 그렇지만 미래에 결국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완성의 날은 우리 모두가 영광스럽게 부활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27. 영원한 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이 세상 나라를 모두 완성하시고 나면, 이제 이 땅은 죄와 사망이 결코 깃들 수 없고 악도 존재할 수 없는 순결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자연에 맺혔던 저주도 모두 풀려 자연은 창조 당시의 영광스런 광휘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아름답고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송축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나라는 완전한 사랑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세 번째 차원으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28.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기쁜 소식,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도입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왕국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는 다른 자격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류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29.구약의 경륜

구약의 경륜은 율법에서 복음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복음이 있었고, 율법조차도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갈3:24, 히10:1) 그러나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경륜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은헤를 베푸신 다음 율법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올바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갈망하는 자들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0. 신약의 경륜

신약의 경륜은 복음에서 율법으로 향하는 것입니다.(롬7:7) 신약의 경륜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복음으로써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롬13:10)
신약에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인간의 의무를 일깨워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값없이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써 일체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31.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대적인 이방 나라들의 대조가 나타난다면, 신약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상 나라 사이의 대립이 나타납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 나라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세상 나라의 국경선은 물리적인 경계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국경선은 영적인 구별선입니다.(눅17:21) 이것은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32. 다른 질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다른 질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은, 영적인 나라입니다.(롬14:17) 세상 나라에서 높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반드시 높지 않습니다.(마20:27) 왜냐하면 그 나라에는 다른 질서가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존재의 질서, 가치의 질서를 따라서 다른 사랑의 질서가 있는 나라입니다.
인간들이 의식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주인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입니다.(엡2:2)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왕이신 나라입니다. 

 

33. 다른 동기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다른 동기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의 것을 찾는 자들이 아니라 위에 것을 사모하는 자들에 의하여 추구되는 나라입니다.(골3:1)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동기는 하나님 사랑입니다.(롬14:8)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는 반드시 선행이 뒤따르는데, 이 선행은 세상 나라에 속한 인도주의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선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행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요14:21)

 

34. 하나님께 순종함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행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비롯됩니다.(롬6:16)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선행은 타인을 향한 동정심이나 정의감 같은 것들이 선행의 동기가 되는데, 이러한 동기에서 행한 외적인 선행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순종에서 비롯된 선행이 아닙니다.
진정한 선행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나라에서 그분의 신적 통치를 받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백성들을 말씀과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인생관을 따라 선을 행하는 것보다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을 더욱 기쁘게 여깁니다.


35.하나님이 창조하신 두 세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를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이 두 세계는 각각 위치적으로 다른 세계이지만, 동일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두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와 사랑 안에서 질서있게 창조되었습니다.(사45:18) 하나님께서는 두 세계를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두 세계 안에 드러내셨습니다. 이로써 당신 자신의 영광을 두 세계 안에서 보시고, 또한 피조물에게 그 영광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6. 인간의 존재 의미

천상세계가 영적인 사물들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다면, 지상 세계는 물질적 사물들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두 세계 모두와 관계를 맺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를 잇는 존재입니다. 육신은 지상 세계에서 물질로 만들어졌고, 영혼은 천상 세계에서 물질 없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육체의 생명인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 영혼의 생명인 것과 같습니다.


37. 위대한 인간의 존재

인간의 존재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  인간처럼 탁월하고 존귀한 지위를 부여받은 존재는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이러한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습니다.(히1:4) 그러므로 인간은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를 모두 이해해야 했습니다. 이 두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물론 세계와 인간과 자신에 대한 지식까지 가져야 했습니다. 지상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천상 세계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38. 하나님의 기쁨

성경은 자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묘사합니다.(살전5:18)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행18:21)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도 잘 나타나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여기에 나오는 '주의 뜻'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경외심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행하고 싶어하는 순종하는 의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단지 금지의 명령을 준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찾아서 행하는 것입니다.(요일3: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이유가 그러한 당신의 삶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요8:29)


39.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어떤 일을 행하고자 하시는 의지를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고전1:1, 골1:1) 또한 율법의 교훈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아는 길이며, 이를 통하여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롬2:18)

 

40. 하나님의 목적

성경은 종종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영원한 목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임을 드러냈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행4:27-29)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려놓고, 인간을 그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주기도문에서 언급되는 '뜻'입니다.

 

41.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인간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서, 세상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진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육신을 위한 양식의 공급도, 죄를 용서받는 것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것도, 악에서 구출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받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해지는지를 생각할 때, 이 간구의 제목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42. 하나님을 위하여 살라고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세 가지 간구, 곧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며, 악에서 건져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43. 마틴루터의 일용할 양식

마틴 루터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다. 곧 음식과 의복과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돈, 재산, 올곧은 배우자와 아이들, 착한 식솔들, 강직하고 신실한 통치자들, 좋은 정부와 날씨와 평화와 건강과 품격과 명예, 좋은 친구, 신실한 이웃과 같은 것들이다."

 

44. 일용할 양식의 범위

'일용할 양식'의 범위는 인간이 사는 시대와 문화마다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우리나라에서는 승용차가 일용할 양식의 범주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거나, 업무용 자가용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자가용도 일용할 양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인간적인 삶을 위한 조건들입니다.


45.인간적인 삶을 위한 조건들

일용할 양식이란 단지 육체의 생존을 위한 하루 동안의 음식뿐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정신적인 필요들까지 포함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교육과 문화, 주거와 위생을 비롯하여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삶을 위한 모든 조건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나아가서 정의로운 법치국가, 공정한 사회제도, 이웃들과의 좋은 관계,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는 문화를 향유할 기회는 물론,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그가 즐기는 기호품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46.일용할 양식이 충족되지 않은 것

공공연하게 불법이 자행되는 국가 현실, 외적인 조건들 때문에 겪는 불합리한 차별대우,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소외를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은 일용할 양식이 충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배부르게 생존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짐승같은 피조물이 아니기에, 그것들보다 더 많은 삶의 조건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 삶의 조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47. 양식의 진정한 의미

'양식'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르토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빵'을 의미합니다. 빵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빵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양식'은 인간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삶의 여러 가지 요소를 '빵'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진실로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됩니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양식'을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것은 스스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저축을 해서도 안 되고, 돈을 벌 욕심을 버려야 하며, 일용할 양식으로만 만족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상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조건을 '최소한의 음식'이라고 보고 이 구절을 무엇인가 더 풍족한 삶을 꿈꾸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근거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청빈주의자들이나 금욕주의자들의 견해이지 주기도문이 가진 원래의 의미는 아닙니다.


48. 육체와 영혼에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창1:26-27) 육체와 영혼 모두에 하나님의 형상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영혼도 하나님의 완전한 피조물이고, 육체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과 가치, 고귀함 등은 육체에까지 미쳐 있기 때문에 육체도 당연히 존엄과 가치, 고귀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텔레비전에서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인간 사회의 모습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들이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인간의 존귀함을 유지하며, 안전하고 평안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49. 하나님 책임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도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굶주리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하루 종일 일해도 한 조각의 빵을 얻지 못하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배고픔을 먼저 배우고, 결국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수많은 아이들, 이러한 현실의 세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식량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개입하여 식량의 분배가 균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2010년 북한관련 보고서를 보면 북한에서 한해에 부족한 식량이 약 135만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한에서 남는 쌀이 약 150만톤이었습니다. 지구는 1년에 생산한 곡식으로 2년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50.인간 전 존재의 존엄성

누구라도, 비록 불신자 혹은 이교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굶주림으로 인해 그 존엄성이 짓밟히고 비참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존귀함은 그들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없도록 이웃을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51.영육 모두 신적 돌봄의 대상임

우리가 주기도문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신의 지식도 필요하고, 영혼의 생명을 위한 진리와 은혜도 필요하며, 육체도 건강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나라에서 생존하기 위한 적당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탁월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계속 복종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진리와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52.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엽만 감아 놓으시면 쉼 없이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외로울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밥이나 물과 같은 육체적인 요구뿐만 아니라, 교육, 교제, 문화와 같은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요구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깊은 영혼의 필요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러한 모든 생활 조건들이 바로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아야 할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이 '양식'은 그저 하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물, 그것의 공급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53.우리에게

'우리에게'라는 표현에 담겨있는 중요한 의미는 공동체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간구에 '우리에게'라는 구절을 보태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의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간구를 올릴 때마다 우리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들에 탐욕을 보태어 그로 인해 이웃을 굶주리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54. 소명을 따라 살고자 하는 준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살고자 하는 준비는 결코 정죄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래를 위해 지적으로,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준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적으로도 예비하는 것은 결코 주기도문을 따르는 삶과 괴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는데도, 무절제한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모자라서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55. 매일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않으면 그분이 우리를 먹이고 돌보실 것을 잊으실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잊어버릴까봐 올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상기시켜드리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먹고 입는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양식, 교육받을 기회, 문화적인 누림, 함께 교제를 나눌 친구들, 이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자원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56. 혹시 여러분은 지금 염려가운데 있습니까?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는 물질의 부족이나 공급의 모자람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맺고 있는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가 와해됐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궁극적인 소명은 그분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인데, 염려는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만이 우리를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내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최선의 것을 주시고, 언제나 변함 없이 나를 사랑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가 우리로 하여금 어머니 손을 붙든 어린아이처럼 기쁘고 담대하게 인생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57.그리스도 안의 지체들

주기도문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일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깝게는 제자들에게, 멀게는 이어지는 신약의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그리고 우리가 몸담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는 삶을 영위해 가도록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소유를 그들에게 내어주어 그들도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주기도문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가족들에게 그리고 믿음의 지체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58. 이 세상의 모든 인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 간구가 적용되는 이차적 지평은 인류 전체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웃들이 그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는 양자적 아버지가 되시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는 창조주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구속주 되심 모두를 인류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를 의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네 번째 간구를 단지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 심지어는 이교도들에게까지도 적용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를들어 정치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복음의 정신으로 볼 때 굶주리고 있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매우 시급합니다.


59 하나님께 대한 의존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넘치도록 주셔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든 조건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을 다만 즐기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60.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이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까지 주십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단순한 즐거움을 위하여 주신 것들도 그것들을 즐겁게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보다 더 높은 가치와 목적을 위하여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을 최소한으로도 누리며 살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인류 사회를 당신의 사랑으로 교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인류 사회의 궁극적인 이상을 먼저 성취하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61. 사랑과 정의

사랑 없는 정의도 정의 없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목적이 없고, 정의 없는 사랑은 누군가에게는 불의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참된 정의는 사랑을 완성합니다.(롬13:8)


62.극단적 금욕주의

4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수도원 운동은 사람들이 극도의 금욕과 절제 속에서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은 악하며, 정신과 영혼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육체를 천하게 취급하고 학대함으로써 영혼은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고양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고, 그것을 즐기면서 이 모든 맛들과 음식 재료들의 식감과 취향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에 주는 유익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함께 몸도 거룩한 구원의 대상이며 이 둘이 모두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음식에서 맛을 느끼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극단적 금욕주의는 비성경적입니다.


63.노동을 통한 응답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자기 손으로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간절히 울려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주석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언제나 주시지만 우리가 노동하는 대가로 얻는 떡으로 주실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얻은 떡으로 주실 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64.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삶

그리스도인은 사막과 같은 세상 한 복판을 강물처럼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즐거운 노예의 유전자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눔의 삶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것이 성향으로서 몸에 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자원을 가지고 곤궁한 이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도 언젠가는 우리처럼 하나님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궁핍한 세상에 두신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65. 노동으로 얻은 한 조각의 거친 음식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노동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그 고통을 기피하여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습관화된다면, 영혼의 활력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취적 기상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이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얻게 되는 일년치의 기름진 음식보다는 나의 노동으로 얻은 한 조각의 거친 음식이 아름다운 양식입니다.

 

66.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분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은 물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며 그 영적인 평화 안에서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67.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하나님과 나누는 영적인 교통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고난 불완전성과 선천적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과 성령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면 속에는 죄가 잔존하고, 그 죄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스르게 만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마련해 놓지 않으셨다면 신자조차도 비참한 인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 안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순종을 위한 무한한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셨습니다.

 

 

68.용서받은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이 다섯 번째 간구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주기도문을 올릴 때마다 자신들은 다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백성들일 뿐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번째 간구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이미 받은 그리고 지금도 용서하시는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69.유대인들과는 다른 기도

복음적 경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불러 주셨지만, 스스로는 다만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행한 모든 선한 일들을 잊어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다만 용서받은 죄인이며, 지금도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를 받음으로써만 살아가는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70. 이미 받은 용서 -영원한 용서

구원의 용서는 영원한 용서이기에 어떤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그때 그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는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에 짓게 될 모든 죄까지도 사함받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의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받는 순간 우리가 그동안 지은 모든 죄를 생각한 것도 아니고, 생각난 모든 죄를 회개한 것도 아닙니다. 지을지도 모를 미래의 죄를 미래의 죄를 회개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죄가 없는 사람을 대하시듯,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한 보심 속에서 영원히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71.반복되는 용서-경험적 용서

구원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현견지 안에서의 용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용서를 경험적 용서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죄에 속하였고, 신자에게도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도 은혜에서 물러나면 죄를 짓습니다. 본성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이 한때 회개하였다고 할지라도, 은혜에서 멀어지면 다시 폭력을 쓰게 되고, 돈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면 다시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나, 마치 아직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살아가야 합니다.(고전9:27, 빌2:12)


72. 용서를 통해 사랑을 배움

성경에는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또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탁월한 영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다윗이나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위하여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만, 죄의 용서를 통해서 그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최고의 영적 축복입니다.

 

73.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무엇입니까? 용서란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여 손해를 입혔을 때, 그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법적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그 이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계속 사랑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용서 이후에 더 이상의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은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미이지, 진정으로 용서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74. 하나님의 절대적인 용서

절대적인 용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직접 베푸시는 용서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에게 죄 지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과는 구분되는 신적 용서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용서는 '죄 사함'이라고 번역하고, 사람인 우리의 용서는 그대로 '용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감화를 받으셔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의 속성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용서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용서입니다.

 

75. 인간의 상대적인 용서

상대적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인간이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용서입니다. 이 용서는 먼저 자기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용서를 의지하는 용서라는 점에서 상대적인 용서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 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시지 않지만, 인간은 한번 용서하고 난 후에도 사랑이 식으면 다시 미워하고 복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용서입니다.

 

76. 용서의 요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에 상호간의 두려움과 사랑 속에서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물으실 뿐 아니라, 손해를 입은 사람에게도 피해자로서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적절한 배상을 받거나 용서할 권세를 주셨습니다.(마6:14, 눅19:8)


77.용서에 대한 경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올리도록 가르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날마다 우리가 용서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존재들임을 상기하도록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라는 말까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 앞에 굳이 붙여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며, 나아가 우리가 용서를 실천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희생을 힘겹게 느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78.사랑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요일4:8, 16) 인간이 창조되고 나서 비로소 사랑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 스스로 사랑이십니다. 이 세상에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 안에서 서로의 완전하심과 아름다우심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3:35) 그리고 그 사랑은 끊임없이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의지적 성향입니다.
 

79.용서의 실천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인 회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도 사라집니다. 여기에는 용서의 삶을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며칠 전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기도하고 은혜생활을 잘 하였다고 할지라도 지금 다른 사람을 향해 악하고 미운 감정을 품고 복수를 꿈꾸기 시작하였다면, 오늘은 기도할 수도 없고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현재적 경험은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80. 용서하지 않으면

종종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한번 상처를 받고 손해를 입으면, 자기의 고통에 집착하면서 결코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신입니다. 미움은 양쪽으로 날이 선 칼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입은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 오래도록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81.용서와 영혼의 자유

용서는 우리의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제일 먼저 그 용서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우리에게 악을 행한 살마이 아니라, 용서를 행한 우리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죄를 지었을 때, 아직 현실적으로 그 사람과 화해하지 못했다고 할 지라도 먼저 마음으로 그를 용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고 하늘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기도가 그친 마음에 다시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 주시고, 말씀이 사라진 마음에 다시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82. 시험의 의미

우리는 흔히 '시험에 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시험이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으로부터 떠나 어떤 죄를 향하도록 이끄는 힘을 가진 모든 상태와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마음속으로 악을 끌어들이거나 마음속에서 악을 이끌어 내거나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드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거나 자신의 의무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83.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에 관하여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간청하셨습니다. 만약 시험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왜 이런 기도를 올려야 하겠습니까?
시험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단지 시험에 들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주는 유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만약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이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시험을 극복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영적 유익을 능가하여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간구는 사실 시험 자체를 만나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아갈 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시험에서 패배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84. 신자의 삶: 영적 전투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신자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 전투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여기서 씨름은 정확한 의미는 '격투기'입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이 금속을 박은 손에 감고 상대방과 죽기까지 싸웠던 그 격투기를 가리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진 그 처절한 광경을 목격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신자로 사는 우리의 삶이 그러한 영적 전쟁임을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85.보호를 구하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는 시험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라기 보다는 피할 수 없는 시험 안에서 우리를 보호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서 분투하며 살아간다면, 그 목표들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우두머리 마귀와 싸우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 전쟁은 본질적으로 영적 전투이며 어느 한쪽이 파멸해야만 끝나는 싸움입니다.

 

86. 마귀의 시험과 신자의 책임

인간이 악을 행하면서 그 원인을 마귀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책임 있는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불경한 자들의 눈멂과 부정을 인간의 의지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불경건한 자들의 눈먼 것과 그에 따르는 모든 부정은 사단의 역사라 불린다. 단, 그 역사의 원인을 인간의 의지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되는데 이는 인간의 의지가 악의 뿌리요 인간의 의지가 사단의 왕국의 토대, 즉 죄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87.시험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고 사노라면 시험을 만나게 되고, 우리의 잔존하는 죄로 말미암아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모두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으로부터,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시험과 유혹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지혜와 은혜의 부요함을 드러내십니다.(롬5:17, 고후1:5)


88.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여주심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지성에 대하여는 속임으로, 정서와 의지에 대하여는 강압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죄의 속이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는 물론, 우리가 놓인 환경들이 우리 신앙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실재를 잘 모르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죄와 악한 욕망, 악의 경향성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커다란 위험입니다.


89. 다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시험에 들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올리는 간절한 탄원은 이미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험의 상태를 하나님께 알려드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탄원에 우리의 마음을 묶어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90. 열렬한 기도

열렬한 기도는 치열한 삶을 요구합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삶을 능가할 수 없고, 그의 삶은 기도 안에 묶입니다. 사는 것만큼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것만큼 살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살기 위한 것이고, 사는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방식은 기도의 풍부함을 결정합니다.


91. 거의 기도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요즘 거의 기도할 수 없다면 거의 주기도문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반대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간구의 제목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움직이고 있다면 여러분 삶의 모든 방면에서 열렬하게 살고 있는 증거입니다.
 

92.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전한 마음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은 마귀나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기도는 우리가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온전하게 보존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입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울리는 이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자만심과 독립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전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93.선의 결핍으로서의 악

아우구스티누는 악을 가리켜 '선의 결핍'이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는 악이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선한 것에 기생한다는 것을 유명한 '상처의 비유'로 악을 설명합니다. 즉 상처는 건강한 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치면서 존재합니다. 만약 상처가 실체라면 약을 바르고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한 후에도 어디론가 위치이동을 하여 여전히 존재해야 할 것인데 실제로는 사라짐으로써 실체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처럼, 악도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94. 죄와 악

죄와 악은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에 '죄악'이라는 단어는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죄가 뿌리라면, 악은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와 가지 혹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이며, 마음 안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향으로 작용합니다. 악은 그 마음의 성향이 나타나서 죄가 실행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죄는 경향성이고 성향이지만, 악은 구체적으로 미움과 시기, 정욕과 교만과 같이 인간의 악한 마음으로 흘러나오거나, 살인과 거짓 등과 같이 악한 행동으로 실현되기도 합니다.(15:19)


95.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고난을 당하고 시험을 만난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켜주시지 않으면 시험에 떨어져 악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시험과 악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되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를 간구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96. 간절한 기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복음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면 시련과 환란, 고난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조건 이런 것들을 피하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경륜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비록 시험을 만날지라도 소명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만을 드러내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태하여 시험 중에서 악으로 미끄러지려고 할 때마다 우리를 거기로부터 건져달라고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