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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욥23: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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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24 ) |
순금 같은 믿음
(욥기 23장 10-17절)
1990년대 중반 MBC 신우회 지도목사를 할 때였습니다. 당시에 IMF를 맞아 54명이 명예퇴직을 했는데 그 중 신우회 회원이 9명이나 되었습니다. 약 40명의 신우회 회원 중 9명이나 빠지니 모임이 썰렁해졌습니다. 어느 날, 신우회 부회장이 사회 중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금년에는 감봉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중에 몇 명이 정리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삶의 용기를 잃지 말게 하시고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길이 막히는 것이 새로운 길이 열리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그 날 예배 후 점심식사를 할 때 몇몇 회원들이 IMF 경제난이 오히려 잘됐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작은 성취로 너무 흥청망청 댔는데 그런 국민성이 IMF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국민성을 가진 국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야를 키워서 경제적인 고통과 국가적인 재난도 우리를 성숙시키고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시련을 주실 때 그 시련을 통해 순금 같은 믿음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생활을 잘해도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면 가끔 불평도 생깁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믿음의 유익이 무엇인가?” 그런 원망과 불평은 결국 “하나님! 저는 이렇게 믿음이 좋고 온전한데 왜 이렇게 대하십니까?”란 뜻입니다. 그렇게 불평할 만큼 온전하게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생각할 때 오히려 현재 정도의 문제만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고난을 당해도 믿음과 감사만 잃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은혜를 체험하면 “고난도 필요하구나! 하나님의 사랑은 크시구나!”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때를 따라 적절한 고난도 있어야 성숙해지고 진짜 성공도 주어집니다. 위대한 일은 실패와 고통을 딛고 이뤄질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사회 복지법이 제정된 해는 대공황이 극에 달하던 1935년이었습니다. 말은 맨몸으로 달릴 때보다 적당한 짐을 질 때 더 빨리 달립니다. 사람도 적당한 시련이 있어야 인생에 가속이 붙습니다. 바람은 배를 전복도 시키지만 배를 움직이게도 합니다. 무엇보다 고난과 실패를 통해 자기에게 한번 크게 실망해보아야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사려 깊은 아빠가 갑자기 함께 놀던 아이를 홱 던져버리고 차갑게 외면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난생 처음 당하는 배신행위로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조금 후에 그 아빠는 다시 아이를 품어주며 말했습니다. “얘야! 조금 전처럼 아빠도 네게 잘못할 수 있다. 사람을 믿지 마라. 믿을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야.”
반면에 어떤 부자 부모는 자신감에 넘쳐서 말합니다. “얘야! 나만 믿어라! 내가 다 준비해 놓겠다.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 그러면서 고액과외를 시키고 대학 등록금도 다 대주고 결혼할 때는 집까지 사줍니다. 그러면서 그 10분의 1도 선교와 나눔에 쓰지 않는다면 그런 부모 밑에서 자녀가 어떻게 좋은 믿음과 가치관을 가지겠습니까? 그런 자녀가 나중에는 더 불효합니다. 사람에게는 성공체험도 필요하지만 고난체험도 필요합니다. 고난을 잘 극복하면 한 차원 더 성숙해지고 한 차원 더 깊은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 순금 같은 믿음을 얻는 길 >
왜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까? 성숙한 믿음을 통해 참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욥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본문 10절 하반부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런 순금 같은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십시오
본문 10절 전반부 말씀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바로 전 구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투명하게 계셔서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어도 하나님이 자신이 가는 길을 다 알고 있다는 믿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아신다.”라고 하는 인식은 죄인에게는 죄와 허물의 최대 방어막이 되고 의인에게는 사랑과 소망의 최대 원천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신다.”는 고백은 사람은 자기 앞길을 알지 못한다는 고백입니다. 왜 용하다는 점쟁이들이 자신의 점 실력으로 로또나 주식에 투자해서 거부가 되지 않습니까? 점쟁이들의 점치는 곳을 보면 서울 강남에서도 대개 뒷골목의 허름한 곳에 있습니다. 그처럼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에게 앞날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 점치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낫습니다.
또한 욥이 “내가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한 고백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고난의 이유를 너무 정확하게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찾은 그 이유 때문에만 고난이 온 것은 아니고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난의 이유를 정확하게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중에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 고난은 축복을 위한 훈련과정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다 그런 훈련과정을 거쳤습니다. 사람마다 그 훈련과목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와 배우자 문제로 훈련받고 어떤 사람은 사업과 물질 문제로 훈련받고 어떤 사람은 죽음과 병 문제로 훈련받습니다. 어떤 훈련과정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기에 허락하신 훈련으로 여기고 감사하며 감당하면 추락하는 때가 오히려 강한 날개가 생기는 때가 됩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갔다 오면 강인하게 변합니다. 군대에서 낮아지는 체험과 훈련을 통해 강한 날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육이오 때 훈련되지 않는 병사들은 대개 총알받이가 되었지만 훈련된 병사들은 많이 살았습니다. 그처럼 고난은 힘든 것이지만 결국 자신을 유익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그 중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본문 11-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말씀을 먹는 것을 더 중시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고 고백합니다.
말씀대로 순리를 따라 살면 큰소리도 나지 않고 분란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가지고 살면 큰소리가 나고 하모니가 깨집니다. 결국 말씀의 반대는 욕심입니다. 욕심대로 살면 상처가 넘치게 되지만 말씀대로 살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욕심대로 살면 골칫덩어리가 되지만 말씀대로 살면 복덩어리가 됩니다.
욥은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했습니다. 본문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고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시면 꼭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과 손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롬 11:29). 그러므로 자기 뜻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뜻을 돌리려고 하지 말고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십시오. 의지가 강한 것은 좋지만 ‘자기 의지’가 지나치게 강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전도사는 목사님이 너무 좋다고 하면서 수시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 교회에 뼈를 묻겠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교회에 뼈를 묻겠다고 말이 앞선 사람치고 뼈를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기에 그 교회를 개척한 담임목사도 “이 교회에 뼈를 묻겠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데 전도사가 그러면 얼마나 주제넘은 언행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한지 1년도 안 되어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자기 뜻과 의지가 너무 앞서면 안 됩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강한 의지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능력’은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거부하면 삶의 고통도 심해집니다. 이제 누구도 탓하지 말고 모든 일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렇게 말씀의 순리대로 살면 놀라운 평안이 주어집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발버둥을 쳐도 그 인간적인 발버둥이 선하신 하나님이 뜻과 섭리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결국 성도에게는 2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수시로 원망하며 사는 길’이고 또 하나는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길’입니다. 원망하면 희망이 끝나고 절망이 시작되지만 감사하면 절망이 끝나고 희망이 시작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 계획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최종 승리를 확신하십시오
본문 15-16절을 보면 두려워하는 욥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고난 때문에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면 결국 지지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면 결국 이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시선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시선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욥은 어둠이나 흑암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의인의 최종 승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때로 고난이 다가와도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앞날은 정확하게 잘 몰라도 최종결과가 승리라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앞날을 잘 안다는 말은 거짓 예언이지만 최종 결과가 승리임을 안다는 말은 참된 예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는 최종 승리를 믿고 자기 앞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며 어떤 상황에서도 “아멘!”하며 나가는 자기 자신입니다.
현재 모습이 초라해도 내일에 대한 찬란한 꿈과 비전을 늘 품으며 사십시오. 우리 교회도 겉으로는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나눌 줄 아는 많은 교회를 개척하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고 있습니다. 고목나무처럼 밑동만 남은 상태였지만 어르신의 기도를 기초로 역전의 역사를 이뤄 마침내 초라함을 찬란함으로 만들면 얼마나 복된 삶이 되겠습니까?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붙잡고 꿈과 비전을 이뤄냈습니다.
뉴욕의 할렘에서 태어난 흑인으로서 미국의 국무장관까지 된 콜린 파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가난은 경제적인 가난이 아니라 생각의 가난입니다. 저는 백인 사회에서 흑인으로 사는 것을 영원히 극복 못할 장애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저의 검은 피부는 오히려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땀을 흘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저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극복할 때 가장 복된 사람이 됩니다. 축복도 고난을 극복하며 주어진 축복이 진짜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부족한 자신을 하나님이 자녀 삼아주시고 지금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최종승리를 생각하고 고난 중에도 결코 희망과 자신감을 잃지 마십시오.
< 우리의 앞날은 보장되었습니다 >
어떤 목사님의 글입니다. 어렸을 때 그분이 살던 동네에 가끔 미친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동네 꼬마들이 다 몰려나와 그 미친 여자를 놀리고 때로는 돌을 던지거나 치마를 들쳤습니다. 어느 날, 그분도 같이 놀리다가 집에 와서 엄마에게 외쳤습니다. “엄마! 우리 동네에 미친 여자가 왔어요.”
그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이모가 오기로 했는데 지금 왔나보다. 어서 가서 모시고 와라.” 이모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친 여자를 이모라고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엄하게 말해서 할 수 없이 그 여자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저기요. 저희 엄마가 빨리 저희 집으로 오래요!”
그 이모라는 여자가 집에 오자 엄마는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후 더운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그는 그 여자가 진짜 이모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 후로는 엄마 때문에 그 여자가 다시 동네에 나타나도 감히 놀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목회의 꿈을 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보실 때 사람은 어느 누구도 정상이 아닙니다. 다 치우쳤고 다 미쳤고 다 시궁창 냄새가 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시고 지금도 날마다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어느 누구도 비천하게 보지 말고 연약한 사람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내주신 이모’로 생각하며 섬겨주어야 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최후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최후승리가 보장되었다면 현재 극심한 고난이 있어도 기가 죽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 약속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저는 저희 선교연맹 총회에 참석할 때나 멀리 출타할 때는 먼저 천국에 가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아이들에게 가끔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킵니다. 아빠가 남겨놓은 지적인 자산과 음지의 인맥도 전혀 모른 채 외롭고 서럽고 헐벗은 삶을 살게 될까봐 가끔 이런 말을 미리 해줍니다. “얘들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에 엄마 아빠가 먼저 천국에 갈 수도 있어. 그때는 누구누구를 꼭 찾아라. 그러면 그분들이 아빠가 남겨놓은 것들을 너희들에게 잘 전달해줄 거야. 그것들만 있으면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엄마 아빠가 천국에 가서도 너희들과 함께 할게.”란 말입니다. 그 말을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들었기에 아이들이 절망적인 비상상태에 처할 때는 다른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고 오직 몇 사람의 이름만 기억하고 그분들에게 연락만 하면 됩니다. 그 아빠의 약속은 그저 말로만 용기를 주기 위한 약속이 아니라 실제적인 내일의 축복이 담긴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있기에 얼마나 힘이 되고 평안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성도에게 단순히 용기를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축복이 예비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십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할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앞날은 보장된 것이고 최후 승리는 약속된 것입니다. 그 약속을 생각하면 얼마나 힘이 납니까?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땅에서 당한 모든 어려움은 다 상급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얼마나 희망이 넘치게 됩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천국 소망과 그 소망의 힘이 현재까지 미쳐서 생기는 희망입니다. 일전에 한 선교사님의 기도제목을 해결해드리려고 같이 고민할 때 그 선교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려울 때 이렇게 함께 해주셔서 희망이 생겼습니다. 멋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힘들 때 누군가 힘써 배경이 되어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또한 비전을 세웠는데 누군가 그 비전을 적극 후원해주면 얼마나 희망이 커집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희망은 영원히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힘든 상황에 처해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집에 불이 나도 가정은 깨지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하고 아이가 낙제해도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몸의 한 아프면 다른 부분이 아프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하는 식으로 늘 희망을 노래하며 사십시오.
요새 한국 교회가 세상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잘못도 큽니다. 6개월 속성코스로 연예인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조폭두목, 대도, 희대의 고문경찰 등에게도 목사 안수를 주는 교파가 있는 한 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 받고 무슨 은사를 받았다는데 거짓말은 너무 쉽게 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황당해집니까? 가짜 박사학위를 팔아먹는 아무개 미국 신학교들은 주 고객이 한국 목사님들입니다. 영어도 거의 못하면서 받은 그 박사학위가 ‘실력과 명예의 증표’가 아닌 ‘훔치는 인생의 증표’가 된다는 점은 왜 생각을 못할까요?
어떤 교인은 식당에서 식사할 때 10분 이상 기도합니다. 그러면 “왜 저럴까?” 하는 반감 혹은 극단 신앙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전도의 문이 오히려 막힙니다. 또한 말할 때나 인간관계를 할 때나 거래할 때 믿는 사람인데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처럼 믿음의 외형은 있는데 믿음의 향기는 없는 모습들이 정보화 시대에 인터넷 등을 통해 널리 유포되면서 한국교회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학생과 청년들을 잃어서 믿음의 계승이 끊어지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대형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교회는 3대 이상이 어울려 삶을 나눠야 하는 큰 가정입니다. 자녀들이 주일만이라도 어르신들을 식탁 봉사 등으로 섬기고 어르신들의 기도를 받으면서 자라면 전인적인 믿음과 성품이 생깁니다. 그런 삶은 학생부 예배를 통해 듣는 설교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무언의 최대 교육입니다. 그렇게 교회생활을 하면 그 자녀들에게 그 교회는 힘과 용기와 평안을 주는 영적인 고향이 됩니다.
반면에 교회가 너무 커서 또래 학생들과만 어울리면 어르신들을 섬기거나 대화할 기회조차 없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래 학생들이 대학진학 등을 통해 흩어지면 그들이 가졌던 믿음도 같이 흩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또래 친구들만 어울리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친구를 사귀기 힘든 장애 학생이나 문제 학생의 경우가 아니라면 친구는 세상에서 사귀고 교회는 친구를 사귀려고 오지 말고 3대가 어울리며 삶을 나누려고 와야 합니다. 그런 학생들이 전인적인 믿음과 성품을 체득하게 되고 결국 인물 성도로 자라납니다.
교회의 대형화가 낳은 가장 안타까운 불행은 ‘3대가 어울리는 삶을 통해 무언의 가르침과 도전을 받는 후대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 불행한 모습들 때문에 한국 교회가 지금 많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 숫자가 줄어드는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위기를 잘못 대응하면 유럽 교회들처럼 껍질만 남은 교회가 되겠지만 그 위기를 잘 극복하면 오히려 순금 같은 성도와 목회자와 교회가 더 많아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문제도 긍정적으로 보면 그때부터 문제에서 해방됩니다. 더 나아가 문제 속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하면 하나님도 감동하시면서 환경에도 선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처럼 고난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고난조차 하나님이 주신 은사(은혜로운 선물)로 여겨지게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복된 믿음은 희한한 은사를 받았다고 과시하고 선전하는 믿음이 아니라 고난조차 은사화하는 믿음입니다. 그처럼 고난조차 은사화하는 순금 같은 믿음을 가지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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