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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617 추천 수 0 2014.11.04 20: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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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4:22-2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78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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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22-25, 고린도전서 11:23-26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어느 평신도 한분과 성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은 이야기다. 전통 의례인 제사에도 먹을거리가 등장하고 우리의 기독교 의례인 성찬에도 먹을거리가 등장한다. 근데 이 먹을거리가 제사에서는 죽은 이의 혼령을 위한 것인 반면에 성찬에서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제사와 기독교 예배의 차이점이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였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기독교 예배의 성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게 핵심이다. 이런 말이 실감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빵과 포도주가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사물로만 경험된다. 빵의 맛이나 포도주 알코올 도수에만 마음이 간다. 이를 뚫고 들어가서 성찬의 영성을 경험하기 위해서 성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이런 공부는 성찬의 영성으로 들어가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구원 행위를 새로운 시각으로 경험하게 한다.

 

1) 기독교인들의 온전한 일치

성찬대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또는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런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다르고 형편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라는 느낌을 별로 갖지 못하고 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칭의 문제와 비슷하다. 칭의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줄 수 있다. 거기에 의존해서 우리는 의롭다는 인식으로 살아간다.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그 죽음은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는 하나다. 샘터교회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교회에 참여한 이들, 그리고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 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바람은 한국에만 있지 않고 지구 모든 곳에 있듯이 성찬에 임재하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다 하나가 된다.

둘째,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는 하나다. 이게 성찬을 신비한 능력이다. 우리는 2천 년 전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이들과 하나이며, 2천 년 후 이 땅에서 살게 될 기독교인들과도 우리는 하나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나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 실천은 무엇인가?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 대답한다면, 성찬의 일치를 모색하는 것이다. 한스 큉은 <왜 나는 아직도 기독교를 믿는가>(113쪽 이하)에서 리마의식(Lima Liturgy, 리마는 페루의 수도다.)을 거론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성찬일치를 긴급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사물(빵과 포도주)의 영성화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세상의 사물들이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은총의 자리라는 사실을 배운다. 동양의 선승들은 사물의 작은 것에서, 그것의 현상에서 큰 깨우침을 얻었다. 기와 깨지는 소리, 대나무 바람소리, 차 한 잔... 권정생 <강아지 똥>은 가장 하찮게 생각하는 강아지 똥이 어떻게 생명의 토대인지를 깊은 영적 감수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찬대의 빵과 포도주를 다시 직시하라. 그걸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우주 전체와 일치된다. 물리적으로도 사실이고, 신앙적으로도 사실이다. 지구 안의 모든 질료는 서로 서통, 교감된다. 사람 몸의 탄소와 나무의 탄소는 동일한 원소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곧 그것을 하나님의 몸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빵과 포도주가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틀린 게 아니다. 문제는 이런 통찰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래는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 ‘어느 겨울 저녁’다(수련회 소책자 톺아보기 3참조).

 

눈이 창가에 내릴 때

저녁 종이 길게 울리고

식탁은 여럿을 위하여 차려지고

집안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방랑하다가

어두운 오솔길로 문밖에 이른다.

은혜의 나무는 금빛으로 꽃피운다.

서늘한 땅의 물기에서.

 

방랑자는 조용히 들어선다.

고통은 문지방을 돌이 되게 했다.

그 때 순수한 밝음 속에 빛난다.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가.

 

이 시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리는 저녁, 삶의 나그네들이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선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빵과 포도주에 거룩한 빛이 감돈다. 인간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이 사물이 거룩해지는 순간이다. 하이데거는 이 시를 이렇게 해석한다.

 

말하기는 겨울 저녁 시간을 명명한다. 이 명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확정 가능한 대상들과 표상들을 기호표시에다 매다는가? 그 명명은 제목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명명은 부른다! 부름은 불리는 것을 더 가까이 부른다. ... 이리로 부르는 것은 근처로 부르지만 그것은 또한 부름 받은 것을 원처(?處, Ferne)에 내버려둔다. 그것은 이리저리로 부른다. 이리 임재 속으로 그리고 저리 부재 속으로 부른다. 눈내림과 저녁종의 울림은 여기서 우리에게 향하여 말해진다. 그것들은 부름 속에서 임재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결코 지금 여기 이 방 안에 임재해 있는 것 중에 끼지 못한다. 어떤 임재가 더 고차적인가? 여기 방에 있는 것이 더 고차적인가, 혹은 부름 받은 것이 더 고차적인가? ... 부름은 물(物)들을 초대하여, 그것들이 인간에게 ... 관여하게 한다. 눈내림은 인간을 밤 깊이 어두워지는 하늘 밑으로 데려간다. 저녁종의 울림은 사멸할 자들로서의 인간을 신성들 앞으로 데려간다. 집과 식탁은 사멸자들을 땅에 매어둔다. 그러니까 명명된 물들은 부름 받으며 자기에게로 하늘과 땅, 사멸할 자들과 신성들을 회집한다. 이 넷은 본원적으로 하나가 되는 상호향성(相互向性)이다. 물들은 이 넷의 사중자(四重者, Gevierte)를 자기에게 머물게 한다. 이처럼 회집하면서 머물게 함을 우리는 물의 물화라고 명명한다. 물들 속에 머무는 사중자가 세계이다. 명명에서는 명명된 물들이 물의 물화 속으로 부름 받는다. 물들은 물화하면서 세계를 전개한다. 세계 속에 물들이 머문다. ... 물화하면서 물들은 세계를 분만(分娩)한다(오트, 사유와 존재, 204쪽에서 재인용).

 

하이데거에 의하면 물(物)은 사중자(Gevierte)의 회집 사건이다. 지금 내 서재 창문 너머로 빛나는 참나무의 잎에 하늘, 땅, 사멸할 자, 신성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걸 손으로 확인시켜 줄 수는 없다. 그걸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셰익스피어가 유령과 요정을 등장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 종말론적 희망의 현재화

- 복음서가 말하는 종말 표상은 축제다. 교회는 신부, 재림 예수는 신랑이다. 축제에서 함께 나누는 식탁이 중요하다. 성찬은 종말의 축제를 앞당겨 즐기는 종교의식이다.

- 종말이 축제인 이유는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완성되지 않았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과 타락 전승에 따르면 완전했던 생명이 죄로 인해서 그 완전성을 상실했다. 성찬은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극치를 지금 여기서 앞당겨 경험하는 것이다.

- 생명의 완성, 또는 생명의 극치가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있는 한 생명의 완성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다만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약속으로 받았을 뿐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 약속을 회상하고 기억한다.

- 종말론적 희망이 단순히 우리의 희망이며 믿음에 불과하지 실질적인 근거는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지구가 45억 년 후에 없어지면 인간도 없어지고 말 것이며, 더 이상의 생명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이런 질문은 또 다른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성서와 신학이 말하는 종말론적 희망의 내용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게 최선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영적인 시각이 분명해질 것이다.

- 기독교인들은 지난 2천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성찬을 통해서 종말론적 희망을 현재 삶의 역동성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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