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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3: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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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목표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자
본문: 빌립보서 3: 13- 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아프리카에 주로 살고 있는 스프링 벅 이라는 산양은 보통 30마리 정도가 무리 지어 살지만 어떤 때는 갑자기 한 곳에 속속 모여 수천 마리나 되는 큰 집단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도자 격의 큰 양이 앞장을 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양들은 몸을 맞대고 그 뒤를 따르며 도중에 있는 풀은 모조리 먹어치웁니다. 이기심이 많은 산양은 빨리 앞으로 파고 들어가 풀을 더 먹으려고 하지만, 맹수의 습격이 두려워 결코 대열을 떠나 옆에 있는 풀을 먹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자기를 보호하고 게다가 풀을 듬뿍 먹으려고 밀어닥치니 얼마 후에는 친구들을 마구 떠다밀면서 점점 빠르게 전진하게 됩니다. 뒤따르는 양들이 점점 빨라지기 때문에 인도자 양은 자연히 뛰게 되고, 인도자가 뛰니까 뒤에서도 늦을 세라 더욱 뜁니다. 결국 모두가 전속력으로 뛰게 됩니다. 인도자 격인 산양들은 아마 친구들이 늘어났으므로 풀이 많은 새로운 거주지로 데려갈 예정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만 뛰는 것 외에는 생각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돌진합니다. 모래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는 양떼들은 어느 새 사막을 건너 해안에 이릅니다. 그러나 앞선 양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밀어닥치는 무서운 힘에 밀려, 냇물이 바다로 흘러내리듯 많은 산양 떼들이 바다 속으로 밀려들어갑니다. 얼마 후 바닷가엔 가련한 양들의 시체로 가득 메어집니다. 이 양떼들의 죽음의 행진은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낙오자가 되거나 위험한 바깥쪽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데는 필사적입니다. 남보다 뒤지지 않는 좋은 대학, 좋은 차, 좋은 주택,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주하고 있는 목적과 목표는 분명치 않고 결국은 죽음의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윤리교육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했다고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들 왜 사느냐?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대개는 목표가 없고 기껏 대답하는 소리가 먹기 위해서 산다느니, 부자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표들은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 부자는 하나님과 이웃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곡간을 지으려다가 그날 밤 그 영혼이 불리워 갔습니다.
미국 뉴 저지주의 상원 의원인 모르우씨가 뉴욕시를 떠나는 기차를 탔을 때 그는 기차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차표를 제시하기를 기다리던 역무원이 「모로우씨,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상원의원이신데 설마 표를 안 사셨겠어요. 그러나 후에 표를 찾으시면 우편으로 보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모로우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어려움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가는 행선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기차표를 지금 꼭 찾아야만 합니다.」 미상원의원 모로우씨는 정확한 행선지를 모른 채 기차에 탔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의 분명한 목표가 없이, 인생을 아무런 계획성도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세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하면서 살다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개미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개미떼들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그토록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 개미떼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 잠시 사무실 창가에 서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개미떼처럼 저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저렇게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것일까?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을 위해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썩어 없어질 헛된 것을 위해서 일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 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4-25)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목표를 갖지 못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생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정열을 다 바칠 수 있는 목표나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생의 충실감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심령 속에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목표나 방향이 없이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 귀중한 생명이 삶의 목표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만날 때 그것은 더욱 빛나고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푯대는 무엇입니까?
찬송가 359장(통 401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 말아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2. 너 가는 길을 누가 비웃거든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어라
성령이 친히 감화하여주사 저들도 참 길을 얻으리
3. 너 가는 길을 모두 가기 전에 네 손에 든 검을 꽂지 말아라
저 마귀 흉계 모두 깨뜨리고 끝까지 잘 싸워 이겨라
<후렴>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문만 바라보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 있네
한 추장이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 중 하나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기로 했습니다. 추장은 아들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추장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습니다. 그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각각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장남이 먼저 대답했습니다. 『파란 하늘과 나무가 보입니다.』 이번에는 차남이 대답했습니다. 『거대한 나무와 나뭇가지에 앉은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매우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는 뭐가 보이느냐』 그러자 막내가 대답했습니다. 『독수리의 두 날개와 그 사이의 가슴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곳을 향해 화살을 쏘아라』 막내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에 명중했습니다. 그리고 추장직은 막내에게 돌아갔습니다. 막내는 『목적』과 『목표』를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추장이 산에 나온 목적은 사냥이었습니다. 사냥감을 발견한 후에는 독수리의 가슴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 다음에 화살을 쏘았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과 『목표』가 없는 인생은 고단한 여행일 뿐입니다.
이렇게 전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보다 보잘 것 없이 작은 목표라도 가지고 있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것이 성공의 싹이 되어 인생을 보다 살찌우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결코 위대한 성공을 이룩하지 못합니다.
길을 걸어가려면 자기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합리적이고 선량한 생활을 영위하려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와 그리고 타인의 생활을 어디로 이끌어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항해입니다. 목표를 세워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십시오. 그런데 사람들에게 삶의 목표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은 직장 구하기, 새 사업 시작하기 외국어 배우기나 악기 등등을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를 물으면 대부분 우물쭈물합니다.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목표가 없으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목표 달성을 위해 계획을 세우는 일입니다. 『계획을 세우지 않은 목표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 생택쥐페리의 말입니다.
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나서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습니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 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보습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은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플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더니 비로소 똑바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어느 시골노인이 서울 사는 딸네 집을 찾아왔습니다. 몇 년 사이에 어찌나 변했는지 이 집이 저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아서 노인은 당황해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친절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도와드릴 것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딸네 집을 찾아왔는데 도무지 어느 집인지 모르겠다고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젊은이는 주소도 모른다는 노인의 말에 난처해져서 그럼 혹시 딸네 집에 다른 집과 달랐던 무슨 특징이 없었던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이제 됐다.」 싶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있었지, 있었고말고. 내가 그때 기억해 두기를 잘했지. 우리 딸네 집 담장 위에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네.」 노인은 보이는 것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으로 표적을 삼았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비 본질의 것들에 현혹되어 삶의 목표를 그것에 둘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 사랑, 믿음, 소망 그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크리스천 삶의 목표들입니다. 우리가 잘못 된 삶의 목표, 헛된 꿈들은 결국 삶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일 때 다 헛되고 무익한 것입니다.
유동적인 것 움직이는 것, 변하는 것,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 썩어질 것, 일시적인 것을 목표로 하여 시간과 정력을 다 소모하되 얻는 것이 별로 없는 후회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참되게 살려는 사람들은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을 푯대로 정하고 인생의 모험을 실천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한 영국 귀족이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귀족은 그 돈을 가지고 뭐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많은 돈을 돌연변이 쥐를 만드는 일에 모두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마침내 돌연변이 쥐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무익한 일이었습니다. 귀족은 수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돌연변이 쥐를 위해 바쳤고 뭔가 특별한 일을 했다는 만족감에 빠졌지만 그 돌연변이 쥐는 인류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일하다 보면 이 귀족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을 내고 계십니까? 당신이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은 진정 가치 있는 일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특별한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의 결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목표는 예수님과 같이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목표를 향하여 날마다 달려갔습니다. 목표를 항하여 달려가기 위해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첫째,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과거를 말하는데 사도 바울은 과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려고 넘겨주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과거를 생각하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미안했을 것입니다. 과거의 일을 자꾸 생각하면 과거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둘째,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
『앞에 있는 것』은 미래입니다. 사도바울은 마라톤 선수처럼 계속해서 앞을 향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바울의 『푯대』 즉 목표는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화려하고 찬란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순교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 7, 8)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오직 예수님』을 닮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달려갑시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살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여러해 전에 영국탐험대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복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약 700미터 아래에 거점을 마련하고, 그 중 『말롤』과 『얼바인』이 정상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16시간 정도만 올라가면 정복한다는 확신에 차서 출발한 이 두 사람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후에 런던타임즈에 이렇게 실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그들은 정상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어디서 떨어져 죽은 모습이 아니라 앞의 정상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우리도 언제 어디서 하나님이 부르시든지 『그의 마지막 모습은 정상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었다』 라는 은총이 있길 바랍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증언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주일아침 예배시간이었습니다. 수요예배에서 손들고 찬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금요 심야기도회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으며 기도하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그는 본받을 만한 참 크리스천이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25세에 예수를 믿고,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출세의 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대영제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정치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0세에 영국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후로 오직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가 48세 되던 해, 영국의회는 노예무역폐지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노예폐지의 비전을 세운 지 35년 만인 62세가 되던 해에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는 64세에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그의 나이가 72세 되던 해에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해방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예해방법이 통과된 지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오로지 노예제 폐지라는 한 가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나를 일평생 재촉하신 이는 주님이셨다고...당신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가시렵니까? 당신이 소망하고 있는 것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인생의 역사와 교회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사들과 성인(현인)들은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바른 푯대를 향해서 달라간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좌나 우나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것을 잡으려고 일편단심으로 달려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할 사명이 있습니다.(마6:9,10)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눅17:2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곳이고(고후4:5),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17) 그러므로 우리는 의와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온 땅에 전파할 책임이 있습니다.(행28:31)
갈릴리공동체의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갈릴리공동체가 현재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작고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큰 나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8, 19)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아무쪼록 성도여러분 모두가 인생의 목표와 푯대를 정하고 목표에 헌신과 열정을 다하시며 언제나 정상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소망되신 하나님 아버지! 나의 달려갈 목표와 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달려갈 길이 향방 없는 자처럼 내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게 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성과 판단이 흐려져 어리석게 살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날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도록 해주소서. 목표를 향해 서두르지 말고 거기서 돌아서지도 말고 희미한 과거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슬퍼하지도 말고 숨겨진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도 않고 내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기쁨에 찬 마음으로 주님을 푯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해주십시오. 나의 지나간 과거의 잘못을 잊게 하시고 바울처럼 예수님을 향해 앞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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