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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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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3절.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인생이 뭔지, 사람이 뭔지, 무엇 때문에 사는 건지, 또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할 것인지? 성경 진리의 말씀으로 저희들에게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바로 깨닫게 해 주시고, 저희들이 잠깐 세상에 있는 동안에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적인 궁극적인 목적대로 구원을 잘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은혜를 깨달음으로 베풀어 주시고, 사건 환경으로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원하옵건대 저희들에게 진리와 명철한 지혜와 총명으로 같이 해 주시고, 사사건건이 모든 생활 속에서 지혜롭게 성화구원을 잘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한 그 성품 그 인격을 잘 닮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말씀에서 큰 깨달음을 허락해주시고 저희들 속의 하나님께서 싫어하고 좋아하고 하는 그러한 성품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패역을 부리지 않고 겸손하여 순종으로 성화구원을 잘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은 인격자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하나님 당신의 내발적인 사랑에서 지극적인 마음과 적극적인 마음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2천 800여 년 전에 요나를 모형계시를 삼은 것이 오늘날 곧 자기인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어떻게 3일 동안 살았을까? 그러니 이게 실화냐, 전설이냐’ 하고 따질 것이 아니라 그 방편만 다를 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혀놓은 성도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역사가 다르고 시간이 다르고 공간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고 모든 사건 환경이 다르지만 성질적으로는 요나와 똑같은 그런 성질이 우리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요나는 목적대립입니다. 그리고 이질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중생시켜 놓은 후에 유기적인 사역을 하시는데, 요나를 붙잡고 씨름을 합니다. 현재 우리에게도 역시 그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성분이 우리 속에 들어 있으니 그 말이지요.
지금 이 성경에서 요나가 니느웨로 가고, 또는 다시스로 가고 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아닙니다. 요나 속에 들어있는 거짓된 자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 하나의 방편으로 나타난 게 다시스로 가는 거라 그 말이요. 요나 속에 거짓된 자기가 들어 있어서 다시스로 가는 것이다. ‘어쨌든 나중에라도 니느웨로 갔으면 문제가 없다’ 그렇게 볼 것이 아닙니다. 다시스로 가는 요나를 니느웨로 가도록 만들어 놨으니까요.
그리고 ‘요나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그러나 이 요나는 자기 할 일은 하나도 하지를 못했습니다. 자원적으로 되는 성화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1차적으로 보면 요나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을 했지요? 2차적으로 보면 요나가 골탕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 성문계시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은밀계시는 순종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으로 되지 못한 것은 다 거짓적인 자기인 줄 알아야 합니다.
중생된 영은 참 자기입니다. 이 참 자기가 현재 주격적으로 자기로 되면 하나님의 원하심이라면 자기 몸이 부서지더라도, 또는 어떤 종별적인 일도 가리지 않고 하게 된다 그 말이요.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대립성만 알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자기가 하나님과 대립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를 위하는 그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립이 없이 순종하는 것 같은 그게 있을 수 있다 그 말이요. 이것도 바로 하나님과 원수인 자기요 거짓 자기요 자기에게도 거짓된 자기입니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보편적일 때에는 자기 속에 거짓 자기가 들어 있는지를 잘 몰라요. 하지만 어떤 사건이 올 때에 거짓적인 자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타인이 자기를 건드렸을 때에 나타나고, 또 세 번째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 좋아하는 것이 거짓된 자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자라난 그 자기는 참 자기입니다.
오늘날 입으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참 자기를 손해 보는 자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나의 거짓된 자기 때문에 니느웨 성 사람들이 손해 본 것은 없습니다. 요나 자기만 손해였지. 요나는 복음을 전하고도 하나님의 은밀계시에 순종이 안 되니까 자기는 유익을 본 것이 없어요. 하나님 앞에 순종이 되면 성화구원이 입혀지는 건데 복음을 전하고도 그게 없다 그 말이요. 마치 뭣과 같은가 하니 심부름을 시키면 억지로 하는 심부름이 있지요? 억지로 하는 심부름에는 칭찬이 없고 상이 없다 그 말이요. 매가 무서워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과 같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사랑에는 질투가 불같이 일어나고 미움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왜 그러냐? 궁극적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궁극적 목적에서 그렇다 그 말이요. 그 목적을 두고 질투를 하고 분을 내신다 그 말이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거룩 된 성품을 입혀주려고 하시는데 요나는 안 입으려고 하니까 애가 탄다 그 말이요.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좋은 옷을 입혀서 좋은 장소로 데리고 가려고 그러는데 자식은 좋은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지를 않고 때 묻은 옷을 안 벗으려고 그런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매를 댈 수밖에 없다 그 말이지.
우리의 이 재세기간은 한정이 되어 있고, 자기 앞에 온 구원을 위한 사건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붙잡고 잘 이용만 하면 그것이 영원한 미래에 전부 다 자기의 영광이요 자기의 능력이 되는 건데 요나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을 못하고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둔다 그 말이요.
시간이 귀중한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시간 속에서 뭐든지 자기 실력으로 만들려고 그러지요? 그러려니 부지런해지는 걸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그러나 시간을 이용 못하는 사람은 마냥 그냥 넘기지요. 그 참 안타까운 겁니다.
자기에게 있는 시간을 어찌하든지 잘 이용하면 그게 자기의 영광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요나는 이걸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분통이 터진다 그 말이요. 요나가 앞으로 대립 없이 순종만 잘 해 나가면 화려하고 무궁한 누림의 세계를 주려고 하는 거라 그 말이요.
행위 활동 이전에 성품이 바꿔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바꿔주려고 하는데 요나는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 나라는 바꾸어진 그 성품만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지 이질성은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 본성적인 것, 본능적인 것을 입어나가는 것이 나의 구원을 입어나가는 겁니다. 이걸 입어나가는 면에 있어서 그 누구도 방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방해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누가 방해를 하고 파괴를 하느냐 하면, 자기의 구원을 입어나가는 그 면에, 자기의 미래적 영광 능력 실력을 만들어 나가는 면에서 누가 파괴자요 방해자냐 하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얼마나 원통하겠어요?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기 때문에 얻어맞았다’ 표면적으로만 보고 대개는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본 겁니다. 또 한 예를 든다면 ‘아버지가 너에게 목회를 하라고 했는데 네가 장사를 하기 때문에 요나처럼 얻어맞는 거다’ 하는 건 잘못 본 거라 그 말이요. 잘못 생각하는 거고. 요나는 외형적 활동적 행동적 이것보다 먼저 근본적인 성품을 바꿔놔야 한다 그 말이요.
성품 바꿔 넣는 이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성품을 바꿔 넣지 못하고 아무리 부흥강사가 돼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자기로 인해서 남은 유익을 봤을 런지 모르지만 자기에게는 성화구원 면에 하나도 없다 그 말이요. 성품이 바꿔져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풍을 바다에 내리쳤지요? 그것은 요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변동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요나를 위해서 동원된 모든 것들은 자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어겨가면서라도 이런 것을 다 동원해서 성도 요나를 바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요.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대풍은 우연히 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으켰다 그 말이요. 요나가 자신의 구원을 중단시킨 그 자기를 숭상하고 그 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니까 하나님께서 대풍을 일으켰다 그 말이요. 요나는 자기 자신 속에서 성화구원을 중단시키는 그 자를 따라갔다 그 말이요. 자기 속의 그 자를 따라가. 그러니까 거짓적인 그 자에게 요나가 따라가고 있다 그 말이요. 현재적 요나가 따라가고 있어. 그러니까 대풍을 일으킨다 그 말이요. 성도에게 오는 사건은 그렇다 그 말이지요.
현재적 자기가 자기 속에 들어있는 거짓적인 자기를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대풍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그 말이요. 사람을 바로 고치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를 인용해가지고 우리의 계시관으로 이 요나를 등용시킨 겁니다. 또한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들어서 계시목적으로 동원시켰다는 것을 알고 패역을 부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요나를 계시목적으로 동원시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요나는 세상에서 그 생활을 하고 그 활동을 하고 그 일을 하고 살아갈 자였더라 그 말이요. 그렇게 살아갈 그 요나를 수많은 사람에게 계시기관으로 삼게 하기 위해서 골라서 선택을 했다 그 말이요.
우리가 그게 있을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등용시켰기 때문에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겁니까, 등용을 안 시켜도 가룟유다는 예수를 팔아먹을 자입니까? 팔아먹을 자다. 그렇다 그 말이요. 그렇게 사는 그 자를 후세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 주려고 등용시켰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후일에 요나가 심판을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아무런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가룟유다도 예수님 앞에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제자로 불렀으니 얼마나 은혜받기 좋습니까? 평소에 자기가 품었던 그 마음을 고칠 수 있는 그렇게 좋은 기회였는데 예수님을 팔아먹었으니 못 고친 그 심판을 당연히 받아야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서 동원시키지 않았다면 내가 그 일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동원시켰기 때문에 내가 계시목적으로 걸어가다 보니 나만 손해가 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심판의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는 변명은 있을 수 없는 거지요. 요나가 고치지 않는 한 요나는 언제든지 그 길을 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요나인 우리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은 성도에게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입히시고자 하는 것이고, 그 성품이 입어지느니만큼 모든 사망성 타락성 죄악성적인 요소가 다 제거가 되는 겁니다. 성품을 입느니만큼 제거가 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부지런히 입자 그 말이요. 진리이치를 바로 깨달아서 자기를 다스려 나가면서 부지런히 바꾸자 그 말이요.
우리의 신앙이란 이 신앙은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도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발전적이고 희망적이고 그렇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는 게 자기에게 엄청나게 좋은 영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요나적인 성분이 전부 다 들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서 이 말을 전하라’ 하실 때에 얼른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서 액면 그대로 전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만족치 않으십니다.
말씀이 임했을 때에 그 말씀의 뜻과 대립이 되는 성질이 우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거짓된 자기입니다. 대립되는 그것이 거짓된 자기라. 이 거짓된 자기를 꺾어서 복종을 시키고, 이성과 몸을 잡아서 다스려야 하고, 그리고 몸 밖에 있는 죄와 세상과 싸워서 이기고 인용하고 선용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요.
작은 씨앗이 큰 식물로 장성하기까지는 폭풍과 싸워서 이기고, 눈보라와 싸워서 이기고, 뜨거운 태양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싸워서 이긴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전부 다 인용을 한다 그 말이요.
생명의 작은 씨앗은 딱딱한 껍질을 깨고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그리고 또 그 뿌리는 땅을 뚫고 내려갑니다. 바위에 틈만 나면 뿌리가 뚫고 들어가지요. 생명은 이렇게 정복을 합니다. 생명은 정복성이 강해요. 생명은 바로 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말씀은 정복을 합니다. 정복될 때에 거짓된 자기가 발견이 되면 먼저 자기 속에서 하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시인을 해야지요. 시인을 하고 바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자기의 것으로 완전히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을 해서 살면 성화구원이 이루어지지요.
그러나 요나는 이것이 이미 다 지적이 되었는데도 고치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 말이요. 고치려고 하지를 않고 도망을 갑니다. 그 말씀에서 도망을 가요. 그 말씀에서 회피를 해요. 속에서 그와 같은 작용이 일어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평생 예수 믿어도 전부는 자기와 대립이 돼버립니다. 그럴 수밖에.
하나님의 목적과 대립이 되면 모든 만물은 자기와 대립이 돼버려요. 왜냐하면 모든 만물은 하나님 편이요 진리 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 돌아갑니다. 성공 혹은 실패 원수 자연계까지, 심지어 마귀까지 하나님에게는 다 호응이에요. 말씀에 의해서 다 움직여 나가니까.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과 대립이 되고, 천국과 대립이 되고, 생명과 대립이 되면 결국 자기는 망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결국 자기는 망해요.
여러분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립성으로 사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걸 보면 고작 해봐야 먹고 마시고 입는 세상 누림성 그것 빼면 없잖아요? 사람들 속에 그 정신 그 소원 그 목적 빼버리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전부 다 하나님과의 대립성입니다. 이런 삶은 결국은 자기가 인격적으로 망하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지요. 다 망한단 말이요. 그러니까 ‘성공한 것인데 심판했기 때문에 망했다’가 아니고 망한 것을 심판이란 말이요.
대립이 되는 대립성을 붙잡고 고치려고 하지를 말고 그것이 자기에게 호응이 되도록 자기가 고쳐나가야 된다 그 말이요. 모든 대립성이 호응이 되도록 자기 속의 자기를 고쳐나가야 된다. 어떤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호응이 되도록 해야지 대립이 되면 안 되겠지요.
우리가 그런 거 많이 볼 수 있거든. 저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과 대립과 마찰과 충돌을 일으키는데 내가 들어감으로써 그게 순화가 되면서 그 사람도 날 좋아하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지요? 내가 고치면 그렇게 된단 말이요. 내가 안 고치면 저 사람의 성질이 나에게 그대로 핍박으로 온다 그 말이요. 대립이 된단 말이요. 이걸 알고 보면 내가 대립이 돼 있어. 그걸 우리가 볼 줄 알아야지요.
저 사람이 암만 대립성을 갖고 있어도 나만 바로 고치면, 다른 말로 하면 그걸 충분하게 이용하고 활용하고 나간다 그 말이요. 대립한들 나에게 유익이 뭐냐 그 말이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호응이 되게 한다는 게 그 자가 하자는 대로 한다는 것보다도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호응이 잘 돼나가도록 건설적인 면으로 깨닫게 하는 것. 사람이 깨달아지면 옳은 것에 머리가 숙여지지요? 대립이 되면 안 되지요. 대립이 되면 안 고쳐진다 그 말이요.
본문에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요나가 하나님의 뜻과 법을 이기고 갔기 때문에 요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보응적 징계가 아닙니다. 보응적 징계로 보지 말아요. 이 사건은 요나로 하여금 지나간 과거처럼 심판거리로 살지 말라고 하는, 이제부터 남은 시간은 진리의 말씀의 인도대로 구원을 입고 살라고 하는 요나를 생각하시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간섭이 올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요나의 불순종에 대한 진노 같이 보이나 이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요 건설목적의 교훈이요 하나님의 인도임인 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공심판에 이르지는 않지만 사심판은 정확하게 받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눈으로 보이는 죄보다 안 보이는 죄가 더 많습니다. 형무소는 들킨 죄인이 들어갑니다. 형무소에 안 들어간 자는 안 보이는 죄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잘 살면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느냐? 죄가 없으니까 징계를 안 받고 잘 사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도시 교역자는 죄가 없어서 자가용 굴리고, 저 시골구석에서 고생을 하는 교역자는 죄가 그렇게 많아서 초라하게 사는 거냐? 그렇지는 않지요.
믿는 우리에게는 받을 심판이 죽음 저 편에 있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심판에 대한 심판 말이요. 이 심판은 아주 정확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붙잡고 살지 말자 그 말이요. 눈에 보이는 것만 붙잡고 속단을 내리지 말자 그 말이요. 눈이 보이지 아니하는 아주 세밀한 심판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 올립시다.
감사합니다. 요나를 볼 때에 우리 속에 요나적인 성분이 들어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이면만 붙잡고 왈가왈부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눈으로 보이는 면만 붙잡고 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신비롭고 더 고상한 것이 있으니 그러한 면을 바로 볼 줄 아는 영의 눈이 밝은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눈에 보이는 사사건건 이 면만 신경 쓰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면을 지혜롭고 영특하게 잘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성화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면에 다 이용하고 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영의 눈이 밝아서 우리 자신 속에 내가 아닌 거짓 내가 있다는 것, 참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참 나로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건설구원 연관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루어 가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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