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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18일 감자탕교회 이야기 전도지 1면)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아에 가면 키세라라 불리는 세계 최대의 슬럼가가 있습니다.
반기문 UN사무총장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는 백만명으로 추정되는 빈
민들이 참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1988년 11월 18일 생인 프란체스카는 이곳에서 아빠와 삽니다. 엄마는 어린 두 동생
과 함께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삽니다. 도무지 온 가족이 함께 살 수가 없어 이렇게
떨어져 삽니다. 아빠가 먼저 이곳으로 왔습니다. 프란체스카가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될 때가 되자 아버지는 딸을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프란체스카 고향에는 고등학교가
없습니다.
프란체스카 아버지는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어려운 중에도 그녀를 고등학교에 보냈습니
다. 빈민가 중앙에 양철로 지어진 고등학교입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한국선
교사님이 세운 학교입니다. 13년 전 미국으로 이민간 의사 선생님이 선교사가 되어 아
프리카 케냐로 왔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 분이 세운 학교입니다. 지금은 그 분
의 아들이 선교사가 되어 이 땅에 와서 이 학교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빈민가에 있지만 기독교정신으로 열심히 가르칩니다. 프란체스카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케냐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전국에 있는 고등학교 졸업생
들을 대상으로 졸업고사를 봅니다. 그 성적으로 대학을 갑니다. 프란체스카는 이 시험
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서울대학에 해당하는 나이로비대학 의
과대학에 갈 수 있는 성적을 받았습니다.
우리 팀이 전 날 사준 옷과 신발로 단장한 프란체스카(학교 앞에서)
그녀의 소원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도 그녀의 꿈을 좌절되었습니다. 1년에 1500달러나 하는 등록금을 도무지 낼 수 없었
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프란체스카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
다. 9월의 입학 기회를 놓치고 다섯 달이 지난 2007년 2월의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그녀를 급하게 찾았습니다. 한국에서 온 목사님들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녀
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졸업성적표를 봉투에 담아 들고 한국에서 온 목사님들을 만나
러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프란체스카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입학이 좌절되어 울며 드린 이 아이
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국에서 목사님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목사님들 중에 한 명이 저
입니다.
하나님은 프란체스카로 인해 머리가 쭈빗 쭈빗해 지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빈민가에
서 나이로비 대학을 가는 일, 이것은 기적이랍니다. 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해
는 등록금이 없어 못갔습니다. 이제 금년 9월에 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셔서
이 아이의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게 하셨습니다. 프란체스카와 함께하는 동안 하나님께
서는 이 아이 가정을 향한 마음을 더 주셨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로 하여금 일을 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팀은 아프리카 구호금 5만 달러 외에 6백만원을 달러로 바꿔 가지고 왔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와 에티오피아로 구호사역을 떠난다는 광고를 들은 한 성도가 600만원
을 교회로 가져왔습니다. 예수를 아직 믿지 않는 남편이 교회에서 하는 구제 사역에
쓰라고 준 돈이랍니다. 지난 년말에 영등포역에서 노숙하는 이들을 위해 밥차를 만들
때 밥솥을 섬기고 싶었는데 교회서 바로 구입함으로 기회를 놓쳤답니다. 그 후 계속
기회를 찾다 아프리카를 간다는 말을 듣고 가져온 겁니다.
케냐에서 에티오피아로 출발하는 날, 우리 팀들은 프란체스카네 집을 방문하기로 했습
니다. 케냐에 도착해서 공항에 바로 가서 생명의 쌀을 나누었던 키베라를 다시 찾아갔
습니다
프란체스카네 집은 전기도 수도도 안들어 오고 하수도도 없었습니다. 흙 바닥인 그 집
에서 프란체스카 아버지를 만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예수를 영
접하지 않아도 딸을 지원할 것이라 말하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프란체스카 아버지에
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구원받는 것, 이것은 프란체스카의 오랜 소원이었습
니다. 프란체스카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아버지를 둔 딸들의 소원은 세계 어디서나 동일
했습니다. 프란체스카의 소원 하나가 또 이루어졌습니다.
점심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후 6시 20분 에티오피아 행 비행기를 타야 합니
다. 공항에 가서 수속을 해야 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4시간 남
짓. 우리 팀들은 점심을 거른채 프란체스카 아버지의 일터를 만드는 작전에 돌입했습
니다. 전 날 프란체스카를 통해 아버지가 요리사 보조 일을 했다는 얘길 듣고 작은 식
당 하나를 열어줄 계획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 얘길 해보니 구두 만드는 일을 8년
쯤 했답니다. 우리는 구두방을 하나 차려주기로 했습니다. 우리 팀들은 서둘러 구두
를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밀집한 곳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침에도 기도했습니다. 가는 동안에도 기도했습니다. 차 안에서 점포를 얻어 구두방
을 차리는 계획을 세우다 아예 구두방 하나를 통째로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가
서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3-4평짜리 구두방들이 밀집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각 구
두방에서 5-6명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구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들어 그
곳에서 팔았습니다.
장사가 좀 잘되는 가게를 골라 주인을 찾아 이 가게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세
상에 이렇게 황당한 일이. 처음에 그 말을 들은 주인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 멍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신발과 신발 만드는 미싱과 기계 그리고 구두 본과 일하
는 사람들까지 다 한꺼번에 팔라고 했습니다. 노란 옷을 입은 한국 사람이 떼로 나타
나서.
가게 여섯개를 갖고 있는 한 상인과 흥정이 되었습니다. 가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
리나라 돈으로 700만원에 사기로 흥정을 했습니다. 함께 동행한 현지인 스텝들이 그러
는 사이에 다른 가게를 같은 방식으로 흥정 했습니다. 현지인 스텝들이 알아본 가게
주인은 마침 프렌체스카 아버지 고향사람이었습니다. 같은 값을 달라는 것을 흥정을
해서 우리나라 돈으로 5백만원에 모든 것을 다 사기로 했습니다.
이제 결과를 말씀드립니다. 공항으로 그 상점 주인을 불러 계약했습니다. 현지인 목사
님들과 선교사님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계약은 현지인 목사님 명의로 했습니
다. 프란체스카 아버지에게 주는 가게지만 큰 돈을 관리해 본 경험이 없는 프란체스
카 아버지를 돕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프란체스카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계약서
를 작성했습니다. 구두방 문을 새 열쇠로 잠그고 그 새 열쇠를 프란체스카 아버지에
게 주었습니다.
내일부터 프란체스카 아버지는 이 구두방에 나가 구두를 만들어 팔면 됩니다. 일하는
사람들도 4-5명 있습니다. 그들은 신발을 만드는 대로 공임을 받는 방식으로 일을 합
니다. 600만원을 환전해 가지고 간 6200달러를 이 일에 다 썼습니다. 석달치 가게세
를 미리 내고 나니 800달러 정도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구두방 운영자금으로 주었습니
다. 선교사님께 구두방 근처에 시골에 있는 엄마와 두 동생도 데리고 와서 함께 살 집
을 얻어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우리가 월세를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
음부터는 구두방에서 벌어서 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일을 마치고 나니 비행기를 타야할 시간 25분 전이었습니다. 춤을 추며 비행기를
타러 달려갔습니다. 나비 비행기 폼으로 케냐 공항을 달린 하얀 머리 아저씨. 그의 이
름은 행복자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렇게 패키지로 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에게도. 사랑합니다.
글쓴이 조현삼/서울광염교회 담임목사 slsp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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