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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종 작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채만식 선생 생가로의 이사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그 무렵 나는 이리(지금의 익산)에 살고 있었다. 당시 이리는 교통의 요지였다. 하지만 교회에 열심히 다닌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빗나가기 시작했다. 이리가 교통의 요지인지라 불량배들도 많았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류들과 어울려 다니게 됐다. 자연스레 교회와는 점점 멀어지게 됐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기에, 나는 뭔가 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권투였다. 권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달막한 체구였던 나는 가장 낮은 체급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도(전라북도) 대표로 나가 뛸 만큼 실력도 괜찮았다.
2학년이 돼서 참가한 전국대회, 1차전은 충남 대표와의 일전이었다. 결과는 판정승. 하지만 서울 대표와의 다음 시합에서는 끝내 패하고 말았다. 지방 출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나는 큰 좌절을 겪었다.
그후 이사를 하게 됐다. 6?25 직후였던 그때, 우리가 이사간 곳은 나중에 알게 됐지만, <탁류>를 썼던 소설가 채만식 선생이 살던 집이었다. 우리는 갈 곳이 없어 초가삼간으로 도망치듯 이사간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나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소설가가 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글 쓰는 걸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설가가 살던 집이라 그런지 남아 있는 책이 많았다. 심심해서 한 권씩 꺼내보았다. 처음에는 두 장을 채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렸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여 두 권을 읽게 됐다. 그러자 마치 나는 눈을 다시 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되어서 밥 벌어먹고 살자’는 생각이 든 것도 이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문학이 나를 구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 영혼은 여전히 절망 가운데 있었고, 교회는 나에게 너무나 먼 존재였다. 그런 나에게도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일이 있어 군산을 찾아가는데, 내 귓가에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늘 울리는 종소리가 그날엔 유난히 내 귀를 관통하듯 크게 울리고 있었다. 교회 이름은 신광교회였다. ‘군산으로 갈까? 아니면 교회를 가야 하나’ 내 마음은 갈등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소설 ‘연개소문’ 신문연재로 순풍에 돛단 듯
그날 교회 종소리는 내 마음 깊숙히 파고들었지만, 나는 결국 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교회로 들어가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더럽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 종소리를 잊지 못하고 다음 주일 교회를 찾아갔다. 사람들이 다 들어간 뒤 가장 뒷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를 듣고, 아무 연고도 없이 혼자 불쑥 예배당을 찾아온 나를 눈여겨보신 그 교회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권투가 날 먹여살릴 수 있을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래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문학과 예수님, 이 두 존재가 날 구원했다고 확신한다.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당시 교사 이외에 선생님 소리를 듣는 직업은 의사와 작가 뿐이었다.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나는 갑류 장학생으로 문예창작과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2학년 때 <자유문학>에 출품한 ‘뜻 있을 수 없는 돌멩이’로 신인문학가상을 받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등단했다.
당시 내 작품세계도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대결 의지를 담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이유도 있었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또다시 교회와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훨씬 더 심하겠지만 못살던 시절 작가들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에는 등단 후 10년 안에 일간지에 연재소설을 낸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렇게 두세 편만 히트를 쳐서 출판하기만 하면 남은 인생은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서른셋의 나이로 동아일보에 소설 ‘연개소문’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젊은 작가에게 역사소설을 맡긴 신문사측에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역사소설은 우리의 부정적인 과거만을 들추어내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의 긍지를 내세울 수 있는 소설로 ‘연개소문’을 선택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쿠데타 이미지가 강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눈밖에 나지 않을까 신문사에서는 노심초사했나보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인물은 반체제 인사였기 때문에 그의 주도하에 밀어붙였다. 하지만 재미있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연개소문’의 애독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마 자신을 ‘연개소문’이라 생각하며 소설을 읽었을 터였다.
‘연개소문’의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태’라고 해서 3개월간 신문이 기사 없이 광고만 나왔던 일이 있었는데, 독자들이 ‘연개소문 보는 재미로 신문 본다’고 자비를 털어 동아일보에 항의성 광고를 할 정도였다.
그땐 이미 난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날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내 인생에 비춰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병과 궁핍한 생활, 아니면 역경을 뛰어넘은 성공에 있는 듯 하다.
성경 4번 읽고 집필한 <유다행전>
<연개소문>을 쓰기 전인 20대 후반, 나는 <유다행전>이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때가 아마 1969년이었을 것이다.
요즘 ‘다빈치 코드’니 ‘유다복음’이니 말들도 많았는데 내 소설도 그런 종류였다. <유다행전>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다. 아버지가 목사인 친구가 금마라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 있던 나에게 놀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시골에서 몇 달간 지내게 된 나는 ‘심심한데 성경이나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성경을 읽어 나가면서 가룟 유다에게 주목하게 됐다. ‘은 30이면 그때 향유 한 근 값인데, 그 값으로 스승을 팔다니…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예수님은 그에게 돈을 맡겼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가 그 무리 가운데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성경에서 본 그의 모습은 의심이 많고, 명예욕․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나는 유다의 이런 모습들이 오늘날 현대인들과 가장 비슷하다고 느꼈다.
또 신본주의로 똘똘 뭉쳐 있는 구세주에게 그를 가장 인본주의적으로 바라보는 제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증거는 없지만 나는 그의 아버지가 당시 로마에 맞선 레지스탕스였고, 기밀을 전달하다 처형당했다는 설을 믿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유다의 시선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인간적인 참회의 표시로 봤다. 그렇게 나온 소설이 바로 <유다행전>인 것이다.
나는 당시 성경을 4번이나 통독해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줄줄 꿰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주일예배에서 들리는 설교 말씀이 우습게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무렵 함석헌 선생과 만나게 되면서 그의 무교회주의가 나에게는 꽤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렇게 나는 ‘정신적인 탕자’처럼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모습은 오만의 극치였다. .
거침없이 ‘잘 나갔던’ 1970년대 이후
중편소설 <유다행전>은 1968년 ‘현대문학’ 잡지에 실렸다. 그리고 그 소설로 나는 1969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만 해도 그 상은 소설가에게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었다. 당시 그 상을 받은 후배로는 <별들의 고향>으로 1972년 같은 상을 수상한 소설가 최인호 씨가 있다.
그 상을 통해 일간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도 가능해졌고, ‘연개소문’같은 소설들을 신문에 연재할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돈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그 시절은 국산차 ‘포니’도 나오기 전이었는데 나는 운전기사를 대동해 외제차 ‘포드’를 몰고 다녔을 정도였다.
‘평신도전서’와 ‘참회록’ 등 유다행전을 쓰기 위해 읽었던 책들과 성경 통독으로 인해 교만해진 나는 목사가 우스워보였고, 그 당시 만난 함석헌 선생은 나에게 무교회주의를 소개하며 교회에 가지 말 것을 권했다. 따지고 보면 ‘거만, 오만, 교만’이 내 삶에 깊이 들어온 시기였다.
그 뒤 나는 본격적으로 드라마 극본 제작에 뛰어들게 됐다. MBC가 주최한 2백만원 고료의 수기에 당선됐고, 이후 10년간 드라마 극본에 매달렸다. 방송극본은 다방면에 재주가 있어야 손댈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한 극본을 2-3번 고치는 건 예사여서 녹화 당일 말고는 쉴 수가 없었다. 교회는 갈 수도 없었다.
희곡도 다섯 편을 썼다. 장편인 ‘들불’은 뮤지컬로도 제작됐다. 그러다 보니 집 앞에는 소설 문하생과 배우, 가수, 탤런트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 당시 만난 사람들 중 지금은 한국 가요사상 가장 뛰어난 가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조용필 씨가 있었다. ‘노래 잘 하는 사람이 한명 있다’는 주변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기타를 더 잘 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후 30여년 간 나는 그와 친구로 지내고 있다. 현재 그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서울신화-예술가의 초상’을 집필 중이기도 하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나는 가끔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 한번 가야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내 영혼의 외침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마다 다 잘돼 20년간 순풍에 돛 단듯 했던 내 인생에도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신문연재 중단, 심근경색… 최대의 위기
10년 전이었다. 한국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아직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을 ‘IMF 사태’는 나에게도 뼈아픈 기억이다.
나는 작가였기에 IMF와는 별로 관계없을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경제위기가 닥치자 주요 일간지들은 원고료가 많이 드는 신문 연재소설란을 가장 먼저 없애버렸다. 그로 인해 일정 수입이 없어진 나는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실직자가 된 기분이었다. ‘인기’라는 게 정말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작가가 인기에 연연하면 안되는데…. 당시 나는 심리적 공황상태였다. 신문에 내 이름 석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렇게 스트레스가 될 줄은 몰랐다. 하나님이 나에게 한 방을 먹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가슴에 통증이 왔다. 진땀이 났다. 그 길로 병원에 실려 갔다. 병이 낫고 나서 들은 바로는 30분 안에 손을 쓰지 않았으면 생명이 위험했을 거라고 했다. 심근경색이었다.
나는 쓰러진 후 중환자실에서만 한 달을 보냈다. 그곳은 온통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들뿐이었다. 죽어 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중환자실은 면회조차 잘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 나는 외로움에 떨어야 했다.
그런 나에게 후배인 최인호가 찾아와 기도를 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신앙을 가질 것을 권유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기에,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그 말을 귀담아 듣고 함께 기도했다.
결국 나는 병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퇴원하자 나는 또다시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 살 만해진 것이다. 그렇게 10년을 나는 또다시 하나님과 담을 쌓고 지냈다.
한 목사와의 만남, 그리고 한 할머니와의 만남
하나님의 은혜로 죽었다 살아난 지도 10년째가 흐른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무교회주의자로 살아가던 나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 있는 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연찮게 어떤 모임에서 만난 그 목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를 도와주십시오.” 자신이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는 나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순간 여러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내 아들도 여생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못하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어쨌든 집에 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해서 외면해 온 요나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나를 부르실 때마다 나는 거부와 회피로 일관해 왔다.
나는 그런 이기주의자였고, 늘 하나님 앞에서 오만 불손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하나님은 끝까지 부르셨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께서 나를 베푸는 삶, 봉사하는 삶으로 이끄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대문에 서 있던 나는 문득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한 할머니를 보게 됐다. 그 할머니는 폐휴지를 수집하러 우리 집에 자주 오던 그 분이셨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길을 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보다 백배는 더 행복해 보이는 그 할머니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할머니 한 마디에 찾아간 교회, 그 이후
나는 그 싱글벙글한 할머니에게 다소 퉁명스런 말투로 물었다. “할머니,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할머니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교회 가고 있어.”
“교회 가는 게 그리 즐거우세요?” “얼마나 좋은데, 예수님 한번 믿어봐. 배 먹는 기분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표현이 너무 신선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교회가 얼마나 좋기에 작가인 나도 생각해 내지 못할 그런 말을 할까?’ 나는 드디어 결심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목사를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됐다. 여전히 성경은 다 거짓말 같아 보였다. 자존심도 여전해 교회에서도 나는 늘 뻣뻣했다. 30년이 넘게 최고의 자리에서 살아 온 나에게 자존심을 버리는 일은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였다.
이대로 살기는 싫었다. 버리게 해 달라고 백일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의 삶은 변해갔다. 교회 앞에서 성도들을 향해 90도로 절을 했고, 할렐루야를 의식적으로라도 크게 외치고 다녔다. 나를 아는 내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에 놀랄 뿐이었다.
내가 변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는데, 그중에는 믿지 못하겠다며 교회까지 와서 확인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들이었다. 어쨌든 내가 변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제자가 나에게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위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변화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새벽마다 나는 오늘도 성화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2007. 9. 5. 크리스천투데이)
유현종 작가
194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196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1년 <자유문학>에 ‘뜻 있을 수 없는 돌멩이’가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 이후 한국방송작가협회 상임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학가협회 부이사장, 문학동우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대결 의지를 담은 소설을 발표하다 1975년 동아일보에 ‘연개소문’을 연재하면서 역사소설로 전환, 이후 ‘천년 한’, ‘천산북로’, ‘임꺽정전’, ‘묘청’, ‘대조영’, ‘사설 정감록’ 등을 출간했고, ‘양반전’, ‘우리들의 광대원’ 등 희곡도 썼다. 현대문학상(1969), 한국일보문학상(1976) 등을 받았다. 지금은 서울 임마누엘교회(담임 장요한 목사) 안수집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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