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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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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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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 인식과 자기인식. 루터의 시편 51편 이해
서평자: 알브레히트 보이텔 튀빙겐 Mohr사 1997, 신학의 해석학적 연구 시리즈 36.
성서 해석사(聖書 解釋史)는 여전히 연구가 미진한 분야로 남아있다. 비록 지난 십여년간 몇몇의 - 대부분이 아주 탁월한 - 특별한 연구들이 간행되기는 했으나 성서해석사의 전체적 분야를 포괄하는 작품은 교회사와 교리사에서 아직도 부족한 채로 남아있다. (이것을 위해서) 전집으로된 종합적 작품이 나올 수 있기 위해서 우선 필요한 것이 구체적 분야의 연구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개개의 성서 텍스트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것들의 길잡이가 되는 성경해석사적 종단면(縱斷面)을 구성해 주는 것들이 필요하다.
잭 E. 브러쉬가 이를 위해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의 연구인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 - 이것은 1993/94년 겨울학기에 츄리히 신학대학이 조직신학 교수자격 논문으로 받아들였다 - 은 어거스틴에서 루터에 이르는 시편 51편의 해석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테마의 선정은 이미 사려깊음과 해석학적 예민성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즉 시편 51편이 카씨오도르(Cassiodor) 이후로 예전학의 성경적 근거를 확고하게 해주는 7개의 참회 시편에 속한다는 이유 뿐만이 아니라 더나아가 이 텍스트가 성경해석사에서 루터와 그 이전 전통 사이에 근본적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한 곳이라는데에서 그렇다:
루터가 처음으로 시편 51편을 참회나 고해성사와 연결시켜 해석하지 않고, 전체 신학의 총체(Summar)로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인식(cognitio dei et hominis)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루터 이전의 성경해석사에 관해서 브러쉬는 개개의 주석들을 기계적으로 섭렵해서 재구성하고 있지 않고(독자에게는 무수히 많은 옛날 해석들을 섭렵하고 해석해야하는 많은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것인), 주제에 따른 독자적 분류 묶음에 따라 전체적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Augustin, 412년 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카시오도르(Cassiodor, 540년 이후), 알쿠인(Alcuin, 8세기), 위(爲)그레고리(Pseudo-Gregor, 11세기), 글로싸 오르디나리아 (Glossa Ordinaria, 12세기),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35/37), 휴고 카르디날리스 (Hugo Cardinalis, 1498-1502), 니콜라우스 데 뤼라 (Nicolaus de Lyra, 1506-08), 페레츠 데 발렌티아(Perez de Valentia, 1512), 파버 슈타플렌시스(Faber Stapulensis, 1509/13)까지 다루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계발적인 것은 우선 이것을 다루면서 이전의 선구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매 경우마다 신학적-교리적 문제상황이 가진 특징을 잘 짚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편 51편의 전체 해석사는 다윗을 그리스도의 참회의 본보기(exemplum)로 해석하는데는 일치하지만, 6절(tibi soli peccavi ... )에 나오는 다윗의 두가지 범죄, 곧 간음과 살인(삼하 11장이하)에다 초점을 맞추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성서주석이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이후로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범주로 들어가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이 이후에는 참회 절차에서 만족할만한 행위가 (이전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된 것과 마찬가지로 시편 해석에서도 롬바르두스가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루터의 시편 51편 해석의 첫 출발점은 파버의 시편 크빈쿠플렉스(Faberschen Psalterium Quincuplex)에서 발견된다. 저자는 철저한 본문 분석을 근거로 루터가 이 책의 여백에 기록해 놓은 기록(1513년부터)에서 이미 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찾느라고 고심했다는 것과, 참회시편 해석에서 이미 전통적인 어휘 범위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부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딕타타 슈퍼 프잘테리움"(Dictata super Psalterium, 1513-16)에서 루터는 (해석의 역사상) 처음으로 관계성에서 해석하고 있다. 관련 용어들과 고전주석들을 분석하므로 저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적 죄 이해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탁월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 초기 단계에서 이미 루터가 죄를 규정적으로(definitorisch)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relational)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페캄 코람 데오"(peccatum coram deo)와 "페캄 코람 호미니부스"(peccatum coram hominibus)(89)의 구별을 통해서 모든 죄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는 개진되고 있다: "루터에 있어 페카툼(죄)이란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불충분함(Versagen)이다"(105).
1517년의 7 참회시편 해석에서 루터는 독자적이고, 전통적인 성서 해석과는 동떨어진 해석을 내어놓고 있다. (이 해석에서) 다윗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시편 51편을 양심의 고통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위로에 자신을 맡겨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훈계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는 교회에서 부과한 (인간적) 참회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양심의 위로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115).
"시편 51편 주석" (1538)은 루터의 성서주석의 백미이다. 이것에서 루터의 주석 작업이 "페카툼"(참회)와 "그라티아"(은혜)의 올바른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에서 루터는 시편 51편을 더 이상 (그 이전의) 전 성서해석사가 하는 것 같이 결의론적으로, 즉 다윗이 한 참회의 본보기로 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율법 위반자를 넘어서 보편적인 교리의 표현이자 핵심으로, 신학적인 부분 개념(후회, 참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즉 전체 신학을 포괄하는 설명으로 해석하고 있다(129).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단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설명이 아니라 "피고인 인간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구별하는 실제적이고 종교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서 올바른 신학이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인식"(cognitio dei et hominis)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시편 51편을 이런 점에다 맞추는 해석은 주요개념인 "뻬카툼"(회개)과 "그라티아"(은혜)가 상관 관계적인 틀로만 이해되어야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즉 "뻬카툼"이 부분적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불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라티아"(은혜)는 또한 인간의 행위 공적을 통한 새로운 것을 받음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189이하).
이러한 연구의 특별한 강점은 저자가 텍스트의 표현과 구조를 깊이 파헤치고 의미를 해석해 내고, 이것을 계속해서 성서해석사와의 본질적 경계를 분명히 노출시키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저자가 자신의 신학 역사적 저술을 위해 제기하고 있는 조직 신학적 필요성에 관해서는 어려움이 있다. 어떤 저자가 연구작업을 하면서 실재론적 진지함을 깊이 느꼈다고 할지라도 때때로 나타나는 "우리"라는 표현 - "(루터)는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고있다..."(222) 등등 - 은 너무 급작스럽다. 또한 저자가 몇번인가 루터의 통찰을 "새시대와 관련하여" (220) 현재화 시키고있지만, 이 역시 "새 시대"라는 단어가 개념과 실체에서 여러 의견 때문에 복잡한 논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현대적인 것에 관련하여 서술하고있는 많은 것이 사상적 깊이와 독창성이 있고, 그래서 심사숙고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 - 예를들어 루터의 독창적 표현인 "급진적 회개"를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과 비교하는 제안 -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치 저자는 자신이 새로운 시대와 관련시키는 것 자체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은 감을 준다: 그가 여기 저기서 불러대는 증인들(예를들어 데카르트, 칸트, 프로이드, C.G.융)은 인명부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서문에서 저자는 그의 연구의 주제에 대해 함축적인 설명을 해놓고 있다: "혹시 조직신학의 과제가 어떻든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이에대한 대답을 그는 독자들에게 남겨 놓고 있다 (VII). 조직신학적 성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철저히 역사적인 연구에서 다양한 사고의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저자와 이 문제를 가지고 대화하지는 뭇한다. 만일 저자가 의식적으로 독자를 스스로 생각하게하는 쪽으로 이끌 의도를 갖고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끝에가서 - 아마도 저자가 의도했던 것보다도 더 많이 - 철저히 새시대의 책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저자/?
제목/ 하나님 인식과 자기인식. 루터의 시편 51편 이해
서평자: 알브레히트 보이텔 튀빙겐 Mohr사 1997, 신학의 해석학적 연구 시리즈 36.
성서 해석사(聖書 解釋史)는 여전히 연구가 미진한 분야로 남아있다. 비록 지난 십여년간 몇몇의 - 대부분이 아주 탁월한 - 특별한 연구들이 간행되기는 했으나 성서해석사의 전체적 분야를 포괄하는 작품은 교회사와 교리사에서 아직도 부족한 채로 남아있다. (이것을 위해서) 전집으로된 종합적 작품이 나올 수 있기 위해서 우선 필요한 것이 구체적 분야의 연구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개개의 성서 텍스트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것들의 길잡이가 되는 성경해석사적 종단면(縱斷面)을 구성해 주는 것들이 필요하다.
잭 E. 브러쉬가 이를 위해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의 연구인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 - 이것은 1993/94년 겨울학기에 츄리히 신학대학이 조직신학 교수자격 논문으로 받아들였다 - 은 어거스틴에서 루터에 이르는 시편 51편의 해석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테마의 선정은 이미 사려깊음과 해석학적 예민성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즉 시편 51편이 카씨오도르(Cassiodor) 이후로 예전학의 성경적 근거를 확고하게 해주는 7개의 참회 시편에 속한다는 이유 뿐만이 아니라 더나아가 이 텍스트가 성경해석사에서 루터와 그 이전 전통 사이에 근본적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한 곳이라는데에서 그렇다:
루터가 처음으로 시편 51편을 참회나 고해성사와 연결시켜 해석하지 않고, 전체 신학의 총체(Summar)로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인식(cognitio dei et hominis)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루터 이전의 성경해석사에 관해서 브러쉬는 개개의 주석들을 기계적으로 섭렵해서 재구성하고 있지 않고(독자에게는 무수히 많은 옛날 해석들을 섭렵하고 해석해야하는 많은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것인), 주제에 따른 독자적 분류 묶음에 따라 전체적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Augustin, 412년 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카시오도르(Cassiodor, 540년 이후), 알쿠인(Alcuin, 8세기), 위(爲)그레고리(Pseudo-Gregor, 11세기), 글로싸 오르디나리아 (Glossa Ordinaria, 12세기),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35/37), 휴고 카르디날리스 (Hugo Cardinalis, 1498-1502), 니콜라우스 데 뤼라 (Nicolaus de Lyra, 1506-08), 페레츠 데 발렌티아(Perez de Valentia, 1512), 파버 슈타플렌시스(Faber Stapulensis, 1509/13)까지 다루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계발적인 것은 우선 이것을 다루면서 이전의 선구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매 경우마다 신학적-교리적 문제상황이 가진 특징을 잘 짚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편 51편의 전체 해석사는 다윗을 그리스도의 참회의 본보기(exemplum)로 해석하는데는 일치하지만, 6절(tibi soli peccavi ... )에 나오는 다윗의 두가지 범죄, 곧 간음과 살인(삼하 11장이하)에다 초점을 맞추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성서주석이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이후로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범주로 들어가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이 이후에는 참회 절차에서 만족할만한 행위가 (이전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된 것과 마찬가지로 시편 해석에서도 롬바르두스가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루터의 시편 51편 해석의 첫 출발점은 파버의 시편 크빈쿠플렉스(Faberschen Psalterium Quincuplex)에서 발견된다. 저자는 철저한 본문 분석을 근거로 루터가 이 책의 여백에 기록해 놓은 기록(1513년부터)에서 이미 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찾느라고 고심했다는 것과, 참회시편 해석에서 이미 전통적인 어휘 범위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부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딕타타 슈퍼 프잘테리움"(Dictata super Psalterium, 1513-16)에서 루터는 (해석의 역사상) 처음으로 관계성에서 해석하고 있다. 관련 용어들과 고전주석들을 분석하므로 저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적 죄 이해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탁월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 초기 단계에서 이미 루터가 죄를 규정적으로(definitorisch)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relational)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페캄 코람 데오"(peccatum coram deo)와 "페캄 코람 호미니부스"(peccatum coram hominibus)(89)의 구별을 통해서 모든 죄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는 개진되고 있다: "루터에 있어 페카툼(죄)이란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불충분함(Versagen)이다"(105).
1517년의 7 참회시편 해석에서 루터는 독자적이고, 전통적인 성서 해석과는 동떨어진 해석을 내어놓고 있다. (이 해석에서) 다윗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시편 51편을 양심의 고통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위로에 자신을 맡겨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훈계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는 교회에서 부과한 (인간적) 참회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양심의 위로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115).
"시편 51편 주석" (1538)은 루터의 성서주석의 백미이다. 이것에서 루터의 주석 작업이 "페카툼"(참회)와 "그라티아"(은혜)의 올바른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에서 루터는 시편 51편을 더 이상 (그 이전의) 전 성서해석사가 하는 것 같이 결의론적으로, 즉 다윗이 한 참회의 본보기로 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율법 위반자를 넘어서 보편적인 교리의 표현이자 핵심으로, 신학적인 부분 개념(후회, 참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즉 전체 신학을 포괄하는 설명으로 해석하고 있다(129).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단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설명이 아니라 "피고인 인간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구별하는 실제적이고 종교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서 올바른 신학이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인식"(cognitio dei et hominis)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시편 51편을 이런 점에다 맞추는 해석은 주요개념인 "뻬카툼"(회개)과 "그라티아"(은혜)가 상관 관계적인 틀로만 이해되어야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즉 "뻬카툼"이 부분적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불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라티아"(은혜)는 또한 인간의 행위 공적을 통한 새로운 것을 받음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189이하).
이러한 연구의 특별한 강점은 저자가 텍스트의 표현과 구조를 깊이 파헤치고 의미를 해석해 내고, 이것을 계속해서 성서해석사와의 본질적 경계를 분명히 노출시키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저자가 자신의 신학 역사적 저술을 위해 제기하고 있는 조직 신학적 필요성에 관해서는 어려움이 있다. 어떤 저자가 연구작업을 하면서 실재론적 진지함을 깊이 느꼈다고 할지라도 때때로 나타나는 "우리"라는 표현 - "(루터)는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고있다..."(222) 등등 - 은 너무 급작스럽다. 또한 저자가 몇번인가 루터의 통찰을 "새시대와 관련하여" (220) 현재화 시키고있지만, 이 역시 "새 시대"라는 단어가 개념과 실체에서 여러 의견 때문에 복잡한 논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현대적인 것에 관련하여 서술하고있는 많은 것이 사상적 깊이와 독창성이 있고, 그래서 심사숙고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 - 예를들어 루터의 독창적 표현인 "급진적 회개"를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과 비교하는 제안 -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치 저자는 자신이 새로운 시대와 관련시키는 것 자체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은 감을 준다: 그가 여기 저기서 불러대는 증인들(예를들어 데카르트, 칸트, 프로이드, C.G.융)은 인명부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서문에서 저자는 그의 연구의 주제에 대해 함축적인 설명을 해놓고 있다: "혹시 조직신학의 과제가 어떻든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이에대한 대답을 그는 독자들에게 남겨 놓고 있다 (VII). 조직신학적 성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철저히 역사적인 연구에서 다양한 사고의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저자와 이 문제를 가지고 대화하지는 뭇한다. 만일 저자가 의식적으로 독자를 스스로 생각하게하는 쪽으로 이끌 의도를 갖고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끝에가서 - 아마도 저자가 의도했던 것보다도 더 많이 - 철저히 새시대의 책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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