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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성경고고학] 성경 고고학 이야기

논문신학성경 돌쇠............... 조회 수 4980 추천 수 0 2001.12.26 01: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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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고고학 이야기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성경 고고학의 출발 또는 탄생에도 걸출한 인물들이 여럿 관계되어 있다. 그중에서 미국인 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은 성경 고고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그의 삶과 그의 학자적 여로는 19세기 초반기에 미국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사이에서 성경의 권위를 지키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로빈슨의 학문적 성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기독교계의 업적이었다.

에드워드 로빈슨은 1793년에 커네티컷 주의 싸우씽돈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총명한 재질을 보여 커서 농사 일로 인생을 마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목사이었으나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농사꾼으로 변신한 사람이었으므로 아들의 그런 재질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초등 학교 교사를 하며 약국에서 일하던 로빈슨은 마침내 해밀톤 대학(Hamilton college)에 입학하여 스스로의 재질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더와 수학에 비상한 재주를 보여 대학을 졸업하면서 모교에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행운은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염려할 필요 없는 상황에서 마음껏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되는 교수 봉급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나이 30도 되기 전에 아예 은퇴하여 집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에 시간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7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내가 죽고 그는 많은 재산과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한없이 열려 있는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희랍 고전 일리아드(Iliad)를 새롭게 영어로 번역하고 싶었다. 그는 죽은 아내의 농장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메사추세츠에 있는 엔도버 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로 가서 그리스어를 더 연구하기로 하였다. 엔도버 신학교는 자유주의로 변신하고 있던 하버드 대학(Harvard College)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실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이 세운 신학교이었다.

엔도버 신학교의 교수이었던 모세 스튜어트 목사는 로빈슨이 자습으로 그리스어를 깨우친 것에 경탄하며 그렇게 좋은 재능을 성경연구에 바치면 어떻겠느냐고 그에게 제안하였다. 그래서 로빈슨은 스스로 헬라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다음, 2년동안 시간을 바친 결과 성경 히브리어를 완전히 습득하였다. 이에 놀란 스튜어트 목사는 이제 보수진영을 학문적으로 튼튼하게 할 사람이 나타났다고 기뻐하면서 로빈슨에게 유럽에 가서 그쪽 학문적 기술과 방법론을 배워 오라고 제안하였다. 당시에 유럽에서는 빠리, 괴팅겐, 할레, 베를린에 학문을 추구하는 좋은 대학들이 많이 있었고 빌헬름 게세니우쓰(Wilhelm Gesenius)같은 학자들이 비교언어학과 문법학을 도입하여 고대 문헌들을 연구하는데에 시대를 앞서가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때의 유럽학계는 자유로워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자유주의 사조를 오히려 보수적이라고 보던 시절이었다. 유럽의 풍조가 그렇더라도 거기에서 배울 학문적 방법이 로빈슨은 학자로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스튜어트 목사는 로빈슨을 그리로 가게 한 것이었다. 로빈슨은 유럽에서 1830년까지 44년동안 공부한데다가 어느 독일 교수의 딸을 만나 재혼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당시 미국 보수학계의 학술지었던 The American Biblical Repository에 보수적인 성향이 글을 내기 시작하였다.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이 학술지는 한편으로는 중동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성지에서 겪은 지리적 요건들을 사용하여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역설하며 또 한편으로는 로빈슨의 본문연구로 여러 가지 난해한 부분들을 밝히고 있었다. 중동에 나가 있던 미국 선교사들중에서 특히 일라이 스미쓰(Eli Smith)가 지리적인 사실들을 많이 제공하고 있었다. 1837년에이르러서 로빈슨은 학문적으로 보수주의 진영이나 자유주의 진영을 넘나드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는데 그때 뉴욕시에 새로 생긴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그를 성경 문학의 수석 교수로 초빙을 하였다.

모든 학자들이 부러워하던 이 자리를 그는 받기로 수락을 하였으나 3-4년 부임을 연기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변화하고 연구하는 성경의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연구하고 싶었다. 자기의 모든 학문적 방법론이나 성과 중에서 성경의 지리에 대한 무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이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는 일라이 스미쓰의 도움을 받아서 이 일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스미쓰는 아랍어에 능통하였으므로 그때부터
로빈슨이 새로운 학문의 발판을 구축하는데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당시에 성지를 팔레스타인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이집트가 점령하고 있는 상태이었다. 1837년경에는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터어키를 물리치고 이집트가 6년간 총독 정치를 하고 있었다. 이 때에는 현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이집트의 통치 아래 팔레스타인의 도로들이 정비되고 무역이 일어나며 행정과 치안이 안정을 찾던 때였다. 그래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같은 서양 여러 나라에서 많은 여행객들이나 순례객들이 팔레스타인을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로빈슨처럼 학문적으로 훌륭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로빈슨과 스미쓰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처럼 이집트에서 시나이를 거쳐서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성경의 지리적 요점들을 연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험하고 열악한 여행 환경을 생각하여 아주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나침반 3개,체온계,망원경, 줄자,영어 성경, 원어 성경, 순례객들이 쓴 여행기 몇권, 그리고 여행 안내서 한 권에다가 텐트 한개,권총 두자루,구식 장총을 준비하였다. 음식은 낙타 등에 싣고 가는 쌀과 비스킷이 전부이었다. 그들에게 더욱 소중하였던 것은 여행 증명서와 현지 베두인 안내자들이었다.

그들은 수에즈 쪽에 가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는지 연구하고 시나이 반도 깊숙이 있는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향하였다. 로빈슨은 거기에 있는 시내산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시내산이라는 것을 알리는 증거를 찾고 싶었으나 실망 만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거기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많은 헌금만 여구할 뿐 정작 성경을 연구하는데는 별 도움이 주지 못하였으며,시내산을 올라가긴 하였으나 수도승 안내자는 어디가 어딘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시나이 반도 북쪽으로 올라온 로빈슨 일행은 아카바에서 요르단 동편 (지금은 요러단이라는 나라)으로 돌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로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이집트 관리들의 방해 때문에 포기하고 네게브 광야를 거쳐서 베을세바 쪽으로 올라갔다. 로빈슨은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이삭,야곱,사무엘의 아들들,엘리아 같은 성경 인물들이 이곳을 오고가며 활약했다는 것을 연구하며 벅찬 감격에 빠져들어 갔다. 실로 그것은 편안한 서양 의자에 앉아서 책만 보던 학자에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새로운 충격이었으며 성경은 땅이라는 확실한 무대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며 결코 이솝 우화같은 이야기들의 모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유다 산악 지방으로 올라와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진행중에 말썽 많은 베두인 안내원들을 해고하고 로빈슨과 스미스씨 둘이서 나아갔다.예루살렘의 옛 도성을 보는 순간 로빈슨은 전기에 감전된 듯 하였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많이 듣고 말했던 도시 처음 보아서 낯설어야만 할 성벽이 결코 낯설지 않은 그 이상한 충격! 그는 예루살렘이나 성경의 지명들을 방문할 때에 마치 어린 시절에 알았다가 오랫동안 방문하지 않았던 곳
을 다시 찾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고 나중에 술회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조사를 하였다. 예수를 묶었던 무덤을 덮어 싸게 건설되었다는 교회,성벽들,성문들, 물대는 조직, 예루살렘의 지형,이런 여러가지 것들을 살펴 보고 연구하였다. 로빈슨은 모슬렘 사원인 알 악싸 모스크(은색 원형지붕)와 큰 돌을 덮고 있는 <바위성소>(금색 원형지붕)을 포함하는 하람 에쉬 사리프(Haram ash-Sharif:아랍어로"고상한 성소"라는 뜻)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지방이 바로 옛날 산악 지대에 있던 헤롯이 만든 성전의 기초라는 것을 밝혀 내었다. 그는 또 하람 에쉬 사리프의 서쪽 벽(지금 그 일부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름)의 남쪽 부분에 삐죽하게 나와있는 부분이 바로 신약시대에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일부이었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그것이 무너지고 나서 남은 부분이 삐죽하게 성전 산의 벽에 붙어 있는 것이다. 로빈슨 이전에 이것을 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못하고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다. 그는 신약성경과 요세푸스의 글에 정통하였기에 헤롯대왕이 만든 신전 산에 대한 이 문제를 푼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것을 로빈슨의 아치(arch)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빈슨은 스미쓰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성경 지명들을 찾아내고 그 위치를 지도에 넣는데 공헌하였다. 즉 당시의 아랍어 마을 이름들이 고대 히브리어 성경의 마을 이름들과 언어학적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수없이 많은 예중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산악 지방에서 발견한 중요한 것들 몇 가지만 들어보자(먼저 쓴 이름이 아랍어이로 나중에 나오는 것이 히브리어 이름이다).아나타 - 아나톳(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향) 제바 - 게바(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운 곳),무크마쓰 -믹마스(앞의 것과 같음), 베이틴 - 벧엘(아브라함이 지나간 곳이며 야곱이 꿈을 꾼 곳).엘집 -기브온(여호수아와 솔로몬의 행적에 나오는 곳)등이다.

로빈슨은 사해 부근을 답사하고 엔게디와 마싸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음직한 곳들도 조사하였다. 그들은 사마리아 지방과 갈릴리 지방에서도 지명연구를 계속하였고 고대의 교회터, 회당터, 마을터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였다.

1841년에 그들은 성지 연구를 마치고 각자 일터로 돌아갔다. 스미쓰는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선교 본부로 돌아갔고 로빈슨은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 있는 자기 교수실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1841년)팔레스타인의 주인은 또 한번 바뀌었다. 유럽 강대국들의 힘을 등에 업은 터어키가 이집트를 몰아내고 팔레스타인을 다시 차지한 것이었다.

로빈슨과 스미쓰는 여행 중이나 연구중,매일 자세한 일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풍부한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연구 여행이 끝난 후에 자기들의 연구 성과를 [팔레스타인, 시내산, 아라비아의 페트라에서 한 성경 연구(Biblical Research in Palestine,Mount Sinai and Arabia Petraca)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1841년).이 책은 삽시간에 미국과 유럽의 학계를 뒤흔들었고 어떤 학자는 로빈슨의 연구 여행은 오랫동안 묻혀 있던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라는 하나님의 섭리이었다고 하였다. 이 책의 업적이 인정되어 1842년에 로빈슨은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런던 왕립 지리 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 in London)은 금메달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성지 연구 여행중, 황량한 땅을 지나면서 로빈슨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용광로 같이 달아오른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야들, 나무도 풀도 빈약한 산악 지방, 산업 시설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을과 도시들,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하기 짝이 없는 원주민들, 전쟁의 반복으로 주인 없는 땅이 되어 버린 팔레스타인,이 모든 것이 로빈슨의 뇌리에 지울 수 없게 투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빈슨이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이 어처구니 없는 땅 팔레스타인의 부(富)는 현재에 있지 않고 아득한 과거인 성경 시대에 있다는 것이었다.

로빈슨은 선교 목표나 당시에 보수주의가 열망하던 성경의 진실성 수호를 훨씬 뛰어 넘는 성과를 이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학문적 종교적, 정치적 지평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로 말미암아 성경 고고학(Biblical Archaeology)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선교사를 보내었으나 보수주의 성경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팔레스타인이라는 땅의 영혼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일라이 스미쓰는 두 사업 모두를 위하여 준비된 선교사이었던 것이다
성경 고고학자로 출발하여 간첩,작가,군인,군사전략가,정치가로 변신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삶을 엮어나간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에드 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1888-1935)! 세계 1차 대전 중에 아랍 군대의 선두에서 터어키군을 대파하고 빛나는 전공을 세웠으며 전쟁 후에는 윈스턴 처칠의 고문을 지냈던 영구국 장교 로렌스는 그때에 가장 화려하게 활약했던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이다. 로렌스의 기이한 삶에 대해서는 영화 말고도 50여가지에 이르는 전기가 나와 있어서 그의 행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경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를 가름하게 한다.
우리에게는 1962년에 피터 오툴(Peter O,Toode)주연으로 나온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라는 영화로 알려진 그 사람이 원래는 한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엔 발굴용 흙손을 들고 성지를 탐사하던 고고학자라면 믿을 수가 있겠는가? 로렌스는 실력있는 성경고고학자로서 중동에서 지표조사와 발굴을 실행하였고 지금도 학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책들을 낸 사람이다. 그의 행적은 소설보다도 더 흥미진진하다.

로렌스는 신앙심 깊은 부모 밑에서 아침에 성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경건한 신앙훈련과 복음적인 교회의 성경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로렌스는 어려서부터 고고학적인 것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오래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중세기의 성채,오래된 옷,무서움을 자아내는 동굴, 이끼낀 무덤,의미를 잃어버린 옛 문양 따위를 보고 생각하고 연구하는데에 아주 어려서부터 많은 시간을 바쳤다. 그는 열살이 되기 전에 무덤의 비문에 천을 대고 왁쓰를 문질러서 탁본을 뜨는 일을 취미로 삼았다.그가 열 세살이 되었을 때는 자기 나라 영국을 자전거로 돌아다니면서 옛 성터나 교회들을 찾아보고 연구하였다. 그는 또 1906년과 1908년 사이에 이웃나라 프랑스도 자전거로 돌아 다니면서 그곳의 성채를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가서 성지에 있는 십자군 시대의 성채들을 연구하는 것을 대학의 학위 논문 주제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스물 한살 되던 해(1909년)에 성지를 방문하여 십자군 시대의 성채 설흔 여섯 군데를 답사하고 연구하였다. 그때 그가 다닌 곳들은 지금은 시리아와 레바논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들로 나뉘어져 있다.

옥스퍼드로 돌아 온 그는 논문을 완성하여, "유럽의 군사건축 양식에 십자군이 끼친 영향"(The Influence of Crusaders on European Military Architecture)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하였다. 그 논문은 독창성과 학문성이 특출하다고 하여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 점수를 받았다.

1936년에 그 논문이 출판되었고 근래에도 두 번 찍혀 나왔다. 로렌스는 십자군이 세운 성채들은 서양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그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그때까지 십자군이 만든 성채들은 동양 즉 중동 쪽의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이론이 있었다. 따라서 로렌스의 이론은 신선한 충격으로 평가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로렌스의 의견은 극단적이었으며,십자군의 성채들은 동양적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고 서양적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고고학자로서 발걸음을 딛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일이 잘 되느라 그랬는지, 1910년에 호가르쓰(H.G.Hogarth)가 시리아에 있는 옛 유적지 카르케미쉬(Carchemish)를 발굴할 때에 로렌스를 발굴단원으로 초빙하였다. 여기에서 로렌스는 레오나드 울리(C.Leonard Woolley)라는 동료와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울리는 나중에 아브람 가족이 발원하였던 우르(Ur)를 발굴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카르케미쉬는 기원전 13세기에서 9세기까지 고대 근동(지금의 중동)을 지배하였던 히타이트 족의 도시이었는데 앗시리아 왕 사르곤 2세가 기원전 717년에 파괴한 도시이다. 히타이트는 구약성경에는 "헷 족속"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민수기 13:29).예를 들어 보자.아브라함은 히타이트족인 에프론에게서 막벨라굴을 사들였다(창세기 23장).다윗과 솔로몬은 히타이트 사람들을 용병등으로 고용하였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는 히타이트 사람이었다
(사무엘하11장).솔로몬은 히타이트 여자들을 아내들로 삼았고, 히타이트 왕국에 말들과 전차들을 팔아 이익을 남겼다.
카르케미쉬 발굴 현장에서 일하던 로렌스와 그의 동료 울리는 팔레스타인에서 스튜어트 뉴콤(Stewart Newcombe)대위와 합류하여 고고학 지표조사를 해달라는 전보를 1913년 12월에 받았다. 발신인은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이었다. 이것이 그가 고고학과 군대와 정치 사이를 오가면서 중동의 전화에 밀려 들어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그 이야기의 시말은 이러하였다. 그때에 영국군 공병대의 대위 뉴콤은 팔레스타인의 일부인 브엘세바 남쪽 지역(네게브)에서 여섯 주간 동안 고고학 지표조사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탐사협회](Palestine Exploration Fund인데 약칭으로 PEF라고 함)가 [신광야 탐사](Widerness Zin Survey)라는 명칭으로 성경 시대와 나바티아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고고학적 유적들을 파악한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영국군의 간첩활동이었다. 영국은 영국 지배하에 있던 인도의 상선들이 아프리카를 돌지않고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수에즈 운하에서 150km 정도 북쪽에 있는 팔레스타인에 설치되어 있던 터어키 군사시설들의 위험성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 실상을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그때에는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늘고 있었고 터어키는 독일과 연합하려고 하던 때이었으므로 영국이 이러한 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무척 중요한 단계에 와 있었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던 터어키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영국이 그일에 네게브의 한정된 지역안에서 한정된 기간 안에 하도록 허락을 해 주었다.

팔레스타인의 브엘세바 공관에서 내어 준 허가증을 가지고 뉴콤을 단장으로 로렌스와 울리가 브엘세바 남쪽에 있는 신광야 쪽으로 진행하면서 나바티아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유적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간첩활동도 착실히 수행하면서 허락받은 네게브 지방에 설치된 터어키의 군사방어시설들을 잘 관찰하고 지도에 표시를 해 넣었다. 그들은 터어키기 허락하여 준 지역 밖으로 벗어나 슬슬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 홍해가 맞닿는 시나이반도 북부도 조사를 했다. 그들은 홍해의 북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 아카바(지금은 요르단 소속)와 거기에서 남쪽에 있는 파라오의 섬(Jezirat Faroun 산호의 섬이라고도 함)까지도 조사하였다.

[신광야 탐사]를 마친 뉴콤 일행은 1915년 6월에 카르케미쉬로 철수하여 그 근처에서 독일이 진행하고 있던 철도 부설 현황을 은밀히 조사하였다. 로렌스와 울리는 뭔가 일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탈리아 출신 철도 부설 기사를 구워 삶아서 철도 부설 청사진을 입수하는데까지 성공하였다.
1914년 8월에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할 즈음에 로렌스와 울리는 영국에서 '신광야 탐사]결과를 책으로 만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탐사협회]는 그들의 책을 "신광야(Wilderness of Zin)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물론 이것은 그 협회의 회원들에게 탐사결과를 보고하는 것 외에도 이 탐사가 순수하게 고고학적 목적으로 진행된 것임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탐사에서 얻은 자료로 만든 팔레스타인 남부(네게브)와 시나이 북부의 최신 지도들과 사진들은 출판하지 않고 영국군의 첩보부에 남겼다.
그들은 [신광야 탐사]에서 고고학의 학문적인 성과와 군사첩보적인 성과를 동시에 성취하였다. 학문적으로 보자면 몇가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해서 발간된 그 책[신광야]가 성경 고고학에 공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때에 거쳐간 카데쉬 바네아는 아인 카데이스(Ain Kadeis)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로렌스와 울리는 아인엘 쿠데이라트(Ain el-Qudeirat)가 카데쉬 바네아라고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며 네게브 지방 전문 고고학자인 루돌프 코헨은 아인 쿠데이라트가 구약성경(신명기 1:2,19,2:1, 민수기 13:3-21)이 말하는 카데쉬 바네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네게브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토기들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비잔틴 시대에 네게브에 있던 도시들이 왜 망하고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도 믿을만한 설을 내놓았다. 그때까지는 비잔틴 도시들은 그곳의 기후가 바뀌면서 삶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렌스와 울리는 비잔틴 시대(기원후 4-6세기)와 20세기의 자연조건은 거의 같기 때문에 기후 문제가 비잔틴 도시들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외적인 침입 같은 인간적 조건들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 보다 40년 후에 미국인 넬슨 글뤽(Nelson Glueek)이 이 지역을 탐사하고 얻은 결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들의 조사는 아주 철저하였기 때문에 이론이나 도면도 다 믿을만 하였다. 예를 들면 나바티아 도시 시브타(Shivta)를 그린 도면은 아주 정밀하여 지금도 그 이상의 좋은 자료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신광야 탐사]를 하는 도중에 얻은 터어키의 방어 시설에 대한 지식은 전쟁 중에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우선, 이 고고학 탐사가 끝나고 세계 1차대전이 터졌을 때 영국의 알렌비(Edmund Allenby)장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오자 제일 먼저 함락된 것이 탐사 허가를 내주었던 도시인 브엘세바이고 이것이 알렌비장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올린 첫 전과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터어키가 영국에게 이 탐사를 허가해준 것이 큰 실수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탐사 활동을 하면서 로렌스는 터어키 군대가 설치해 놓은 군사 기지들이 광야나 사막을 움직여 나아가는 적들을 제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이때에 얻은 지식과 통찰로 로렌스는 자신의 독특한 게릴라 전술 이론을 이루어 나아갔다. 나중에 로렌스가 아랍 군대를 이끌고 터어키가 점령하고 있던 아카바를 함락하고 빼앗은 것은 아마도 이때의 탐사와 연구에서 얻은 생각과 자료를 잘 활용한 덕택이었으리라.
이 책[신광야]를 낸 후인 1914년 12월에 로렌스는 카이로에 있는 영국군 군사 정보부로 배치되었다. 그의 임무는 아랍동맹군을 이끌고 있던 지도자들 중에서 터어키의 중동지배를 종식시키고 항쟁을 벌리고 있던 아랍 연맹의 지도자 파이잘(Feisal)족장을 돕는 것이었다. 로렌스는 1918년에 영국군대와 아랍군대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정복할 때까지 그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낙타를 타고 베두인 처럼 능란하게 사막을 질주하면서 전장에 전장으로 옮겨 다녔다. 그는 또 파이잘 가문의 일파인 후세인(Hussein)가족이 중동에 정치적 집단으로 정착하도록 도왔다. 그래서 현재 요르단 나라의 후세인의 할아버지인 아부둘라(Abudulla)가 요르단 동쪽을 평정하고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로렌스는 아랍 군대를 이끌고 홍해의 북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아카바를 점령하여 터어키를 강타하였고 다마스커스를 다스리던 터어키 총독과 은밀히 내통하며 사막을 홀로 통과하여 그를 만나 단독회담을 하기도 하였다. 로렌스는 고고학 탐사와 스파이 활동과 전투의 현장경험으로 얻은 여러 가지를 되새김질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게릴라 전술을 개발하였다. 그는 "치고 도망간다"(hit and run)는 전술이나 적지의 시민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적진을 교란하는 등 여러가지 전술을 만들어서 썼는데 그것들은 지금까지 여러 게릴라 전술가들이 답습하고 있다.
로렌스는 1919년 빠리에서 "빠리 회담"이 열렸을 때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평화협정을 이룩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아랍의 파이잘 족장과 당시 유대인의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하임 와이즈만(Ohaim Weizmann)사이를 오가며 양쪽이 평화공존하기로 하는 협정에 서명을 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맺은 첫 협정이며 1978년에 "캠프 데이비드"협정이 생길 때까지 있었던 유일한 협정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로렌스의 고집과 끊임없는 설득에 힘입은 것이며 또한 양쪽이 그에게 걸었던 신뢰 덕분이었다. 요즈음 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대화가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에서는 로렌스의 업적이 더욱 돋보인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중매장이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에 영국으로 돌아온 로렌스는 자기의 경험을 엮은 [지혜의 일곱 기둥들](Seven Pillars of Wisdom)을 내었다. 이 책은 20세기에 영국에서 나온 자서전들 중에서 백미로 꼽히고 있다. 그는 그 책에서 자기가 네게브와 시나이에서 겪은 탐사 경험들을 신구약 성경 구절들과 엮어가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고 있ㄷ. 그는 이 제목을 잠언 9:1에서 빌려 왔는데 지혜가 집을 짓는 것과 아랍 항쟁이 국가를 건설하여 나아가는 것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로렌스는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의 일곱가지 품격(지혜,이해력,경험,능력, 하나님을 경외함,믿을 만함,뇌물에 매수되지 않음)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신명기 1:13과 출애굽기 18:21).그는 실로 화려한 활동을 펼쳐서,고고학자,스파이,작가,군인,군사전략가,정치가로서 두루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도 그가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게 한 원동력은 그의 성경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어려서 부터 습득한 그의 성경지식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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