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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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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저자/위르겐 몰트만
제목/ 칼 라너와의 대화
신학을 가르치는 자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가 먼저 제기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대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더 진척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그의 인격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을 다하여 그의 삶을 바친 그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격이 지닌 지혜와 선함도 역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신학적 대화를 받아들이게 되면, 실로 하나님의 더 큰 신비 앞에서 인간의 이해력이 한계를 갖는다는 것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 우리의 최상의 사상이라는 것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전체의 불완전한 조각들이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아름다움의 모호한 투영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사상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사상이 갖는 최상의 존엄성이다. 위대하고 거의 완전한 신학적 총람과 체계도, 이것이 이해하고 말하려고 하는 것을 바라볼 때는, 파편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우리의 사상이 틈을 갖는 그곳에서, 계산이 잘 되지 않는 지점에서, 체계 모순의 자유가 엄청나게 커지는 지점에서, 우리의 사상은 더 위대한 것과 오고 있는 것을 지시하기 때문에 빛나기 시작한다. "개념들은 우상숭배를 창조한다. 오로지 놀람만이 그 무엇을 이해한다"고 언젠가 닛싸의 그레고리가 말한 적이 있다. 라너의 저작들 가운데서 사고하는 놀람은 결정적인 곳에서 발견된다.
바로 이것을 많은 제자들은 칼 라너에게서 배웠다. 신학체계를 완성한 많은 신학자들과는 달리 그의 장점은 그가 그의 전제로부터 사고하고 말해야 할 것을 모두 생각하고 말한 다음에 뒤로 물러나 침묵하고 내용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바로 그곳에 놓여 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 앞의 신학적 겸손의 표현만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의 사람들과 또 그와 나란히 같은 길을 걸어갔고 또 걸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신학적 사귐을 나누는 몸짓도 발견한다.
나는 이 논문에서 칼 라너와 하나의 대화를 갖고자 하며, 가능하다면, 그가 몇 년 전에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주목받을 만한 테제를 가지고서 열어 놓았던 대화를 진척시키고자 한다. 그 테제의 신학적 근거설명으로서 나는 그의 논문 중에서 "인간화(人間化)의 신학에 관하여(Zur Theologie der Menschwerdung)"을 덧붙인다. 나는 관심을 이 두 논문에 국한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의도하는 것은 라너 사상의 포괄적 설명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1.그리스도교의 보편성 주장, 교회의 특수한 존재 및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적 현실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은총과 교회의 신학도, 그리고 우리의 현재를 냉정하게 고찰하는 정직한 목회신학도 실로 주제 자체의 긴급성을 회피하거나, 하잘 것이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여기서 라너는 그리스도인됨과 인간됨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원적인 사회와 세계의 서로 다른 문화들과 종교들의 다원주의 안에서 구원의 보편성 주장을 단지 상대적으로 그리고 특수하게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교회의 더 깊은 당혹감 안으로 이 주제를 끌어간다. 그리스도교적 제국 안에서 절대성을 내세우던 교회의 옛 주장은 사라졌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법 4장 1항은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세계관적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하나의 "종교적 실존해석의 가능한 형태"로 삼고 있다. "동일한 권리 때문이든, 심지어는 더 큰 약속 때문이든 간에, 다른 형태들도 나란히 함께 존재하고 있다." 교회가 다른 많은 세계종교들 중의 한 종교가 되어가면 갈수록, 그리고 교회가 아시아의 오래된 문화권에 발을 들여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만이 유일한 종교를 대변한다고 내세우던 교회의 주장은 사라져 간다. 물론 교회는 모든 민족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대개가 주변적인 소수로 존재할 따름이다. 서양에서조차도 교회는 "작은 무리"로 줄어드는 것같이 보인다.
사회와 종교의 외적, 내적 다원주의 안에 있는 교회의 이러한 시대사적 문제의 뒷면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됨의 더 깊은, 즉 본질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절대적인 것,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상대적인 것, 유한하고 제한적이고 인간적인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일반적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보편적인 것,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의 참 인간됨이 어떻게 특수한 것, 그리스도인됨에 의해 일반적으로 대변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에 의해, 보편적인 것이 특수한 것에 의해 설명되고 대변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되더라도 어떻게 절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상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특수한 것이 특수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고, 전자와 후자의 대리적(代理的) 동일성이 해체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당혹감만이 아니고 이미 이스라엘의 당혹감이기도 하다. 선택받은 한 백성이 어떻게 그 자신의 선택을 미화하지 않으면으서도, 모든 민족들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또한 오늘 날의 이른 바 "세계열강"의 이데올로기적 딜렘마이기도 하다. 미국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유와 인권"을 대변하면서도, 어떻게 이것이 아메리카의 서양패권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소련연방의 "최초의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가 "전 인류의 공동체"라는 사회주의를 대변하면서도, 어떻게 이것이 소비예트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라너가 제기하는 문제는 실로 많은 문제영역들을 갖고 있으며, 단지 교회 내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이 해결은 교회와 그리스도교를 넘어서 오늘 날 형성되어 가는 중에 있는, 그리고 생존에 필수적인 범세계적 인류 공동체를 위해 의미를 갖는다.
2. 인간의 자기초월과 하나님의 자기전달
모든 보편성 주장처럼 그리스도교의 구원주장의 보편성도 역시 "이 길 밖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이 없다"는 배타적 요구에 근거해 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확신하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종말론적 주장을 교회론적 주장과 결합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참된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함"에 동의한다. 옛 고백서가 말하듯이, "실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결론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하지만 그의 교회전통과는 달리 그는 "하나의 참된 교회"에 대해 말하지만, 이것을 "로마-카톨릭 교회"라고 분명히 말하진 않는다. "참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설립된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이런 규정은 당연히 로마-카톨릭 교회를 배제하지 않지만, 동시에 정통주의적, 개신교적 교회규정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라너가 확신하듯이, 인간에 대한 결정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고대의 문장은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신앙되는 곳에는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고 신앙된다는 의미에서, 전자는 후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구원주장의 이러한 배타성은 이제 포괄적 보편성과 대립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기"(딤전 2, 4)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너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 그의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무리의 그의 형제들이 무조건 그리고 원칙적으로 그들의 삶의 실현으로부터 배제되고, 영원한 무의미로 심판받는다"고 그리스도인은 믿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믿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고,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지체들이 될수있다"고 믿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가능성(될 수 있다)"이 단순히 가설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것은 "사람이 단지 익명적 '유신론자'만이 아니라 익명적 그리스도인도 될 수 있고(그렇게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실로 "이 익명적 연관성이 분명히 보여질 수 있고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라너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인간의 그러한 연관성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라너가 대답을 주려고 하는 신학적 자리는 스콜라 신학의 "자연과 은총"의 구조이다. 우리는 먼저 대답이 어떠한지 보고난 후, 중세기의 상황과는 본질적인 차이점을 갖는, 앞에서 설명한 오늘 날의 상황에 걸맞는 대답을 주기에는 이 구조가 너무 협소한 것은 아닌지를 묻고자 한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하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능의 덕분에 생존하고 생존할 가능성을 갖는다고 믿는 피조물의 자유로운 자기전달을 전제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피조물에게는 확실히 "자신을 넘어서 계시 속에서 완전히 새로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너는 인간을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제한적으로 열려 있는 존재"라고 부른다. 그에게서 "열려 있음(개방성)"은 한 편으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정의 불가능성(定義 不可能性)"을 의미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영", 즉 "무한한 신비",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존성은 "이 하나님의 세계초월성과 인격성"에 대한 지식 안에서 드러나며, "숨어 있는 그 하나님의 새롭고 가능한, 말씀을 듣는" 능력의 근거가 된다. 전제된 그의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가능성의 힘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는 이러한 경향성을 라너는 "익명적 유신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의 자연적 욕구(desiderium naturale) 이론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토마스는 인간의 이 욕구가 지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본 반면에, 라너에 의하면 이것은 전 인간의 운동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경향성은 인간이 된 하나님, 그리스도와의 결속성(結束性)을 포함하는가? 라너는 긍정적으로 대답하지만, 한 편으로는 양자가 자동적으로 함께 결속된다는 사고를 배제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양자가 순전히 우연히 결합된다는 표상도 배제한다. 그리스도는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 가장 우연한 현실성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분명히 인간과 관련된 현실성의 사실이기도 하다." 라너는 이러한 연결사를 결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불신앙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표명하고 나타낼 때,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 인간의 입장에서부터 말한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자신을 맡길 때 자신으로 돌아오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간화는 "전 인간의 본질실현의 유일회적인 최상의 사례" 이다.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자기초월은 하나님의 자기전달 안에서 성취되며 완성된다. 하나님의 인간화 안에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 라너에 의하면 이 두 관점, 즉 인간 현실성의 본질실현과 하나님의 인간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헌신과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헌신은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라너는 이 두 측면을 "내면적이면서도 외형적으로", "익명적이면서도 명시적으로" 서로 관련시키며, "인간이 자신의 초월 경험 안에서 ... 이미 은총의 선물을 경험하며, 그리스도 안의 말씀 계시는 ... 우리가 항상 이미 은총으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의 명시화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계시는 인간이 그의 존재의 깊이에서 이미 항상 반성없이 경험하는, 은총에 의한 계시의 반성적인 표명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 제공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최상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자기전달"은 "창조 전체의 목표"이다. 이것은 배타적 관점에서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고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포괄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참된 인간이 된다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비주의적 신학으로부터 유래한, 항상 거듭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고의 전환 속에서 라너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즉 자기 자신의 본질에 이르는,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인간은, 알든 모르든지, 그리스도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이미 이 계시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계시는 이미 그 안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긍정 속에서 우리에게 철저히 가까이 다가오는 신비의 은총을 수용한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깊이에서 항상 이미 자신의 가장 본래적인 본질의 실현으로서 경험하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명명한다. 이로부터 다음의 두 명제가 생긴다. 1. 인간은 그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 안에서 익명적 그리스도인이다. 2. 그리스도인은 그의 참된 현실성 안에서 명백한 인간이다.
3."자연과 은총"의 구조 안에 있는 열려진 질문들
우리는 먼저 라너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자연과 은총"의 구조 안에 머물면서, 몇 가지 비판적인 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1. 라너의 인간정의(人間定義), 즉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정의 불가능성", "자기초월"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에 대한 무제한적인 개방성"은 보편화할 수 있는 것인가? "아시아의 고대 문화"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인간"의 정의가 아니라 유럽적이고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인간이해다. 이미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인간의 근본조건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1920년대의 중앙 유럽의 시각에서 인간을 이해한 것처럼, 라너의 존재론적 인간론 안에서도 역시 유럽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특정한 실존의 이상(理想)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불안한 마음 (Cor inquietum)은 물론 창조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성향이지만, 그에게서 그리고 그 이후로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항상 아브라함의 탈출, 이스라엘의 탈출 그리고 히브리서의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통해 규정되어 왔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왔던 수 천년 이전의 종교들, 도교와 힌두교와 불교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종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미래지향적인 불안을 낯설고도 놀랍게 여긴다. 이러한 불안이 어디서나 모든 시대에서 모든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는 주장을 전자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시도로 이해할 것이며, 분명히 유럽적인 이질화(異質化)로 생각하여 거부할 것이다.
실로 라너의 인간규정은 보편적으로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규정은 인간의 정의 불가능성의 규정처럼 가능한 한 가장 큰 자유이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의들을 포함하고 능가하기 때문이다. 긍정에 고착되는 것보다는 불분명하게 부정하는 것이 차라리 동의를 얻기 더 쉽다. 너무 빨리 반박을 자극하는 발언보다는 무한한 신비 앞에서 침묵하는 것에서 더 큰 사귐이 이루어진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공통적인 보편성을 규정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이 규정을 다른 규정들에 맞추려고 하는 주관적인 권리이다. 만약 공통적인 인간성이 있다고 한다면, 만약 하나의 인간적인 세계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면, 누가 그리고 어떤 기구가 이 조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법률들을 공포할 권리를 갖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라너는 그의 논문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분명히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규정하기에, 바로 이와 동시에 인간 안에 "익명적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말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의 보편적인 이면(裏面)과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거꾸로 자신이 유일하고 정통한 인간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요구가 다시금 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계시의 빛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올바로 규정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의 보편적인 요구가 다시금 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가?
2.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우리가 항상 이미 은총으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의 명시화"이고, "인간이 그의 존재의 깊이에서 이미 항상 반성없이 경험하는, 은총에 의한 계시의 반성적인 표명"이라고 하는 라너의 정의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갖는 탁월한 새로움과 특수함을 정당하게 인정하는가? 물론 라너는 그리스도의 사실(Faktum)을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우연한 현실성의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이 사실이 어느 정도로 "가장 명백하게 인간과 관련된" 사실인지만을 해석한다. 인간과의 관련성은 인간 안에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이미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의 "명시화"라고 표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는 실제로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지 않고,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하나님의 신비의 불가해한 가까움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만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명명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계시는 완전히 이러한 "은총에 의한 계시"와 관련되고, 이 계시는 완전히 인간의 피조성과 관련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마땅히 되어야 할 바로 그 존재가 된다. 그는 하나님에게 나아감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라너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철저히 실존적인 해석이다. 루돌프 불트만도 그렇게 보았다: "예수 안에서 나타난 빛은 창조 안에서 이미 항상 빛나고 있었던 그 빛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이 구원계시의 빛 안에서 이해하는 자신은 그가 창조와 율법 안의 계시 안에서 이미 항상 이해했던 것, 즉 하나님의 피조물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계시가 단지 인간성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교 신앙도 인간 안에 있는 은밀한 하나님의 은총의 각성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으로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이 일반적인 인간성의 드러냄, 각성 그리고 그 단순한 확인이 됨으로써, 그 특수성은 이러한 인간성 안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이 인간성의 진리라고 강변된다. 이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까지도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고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낡은 절대주의적 주장이 아닌가?
3. 만약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의 전제로 이해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이 인간이 된다는 사실의 표현과 실현으로 이해된다면, 이러한 사고는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쉽사리 순환구조에 빠진다. 즉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미리 전제되고, 전제된 사실이 차후에 확인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과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마치 그림과 그 그림에 맞춘 틀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특수한 존재의 일반성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일반적인 존재의 특수성이 된다. 그렇지만 이로 인하여 이 특수성과 보편성은 배타적으로 서로 관련된다. 세계관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갖는 국가에서의 종교적 자유의 다원주의와 지구 상의 세계종교의 다원주의를 위한 여지는 사실상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자연과 은총이라고 하는 중세기의 구조는 현대적으로 해석되지만 변경되지는 않는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한다."(Gratia praespponit naturam): 은총은 스스로 수동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자연을 전제한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destruit, sed praesupponit et perficit naturam): 그리스도의 인간화는 창조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은총은 자연을 완성하고 그리스도인은 인간성의 완성이다.
이러한 중세기의 구조는 물론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존재론적 단계와 자연과 은총의 구원사적 관계와 직접 관련된다. 하지만 이 구조는 교회가 세계에 대하여 자신을 "사회의 왕관"과 완전한 사회(Societas perfecta)라고 주장하던 지배권을 반영한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주장은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제국 안에서만 주장될 수 있었다. 6대륙에서 선교해야 하는 열린 상황 안에서는 이 주장이 전혀 고수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이 주장은 교회에게 항상 너무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천년왕국론과 같이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4."자연과 은총"의 구조의 확장
신학 전통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중적이며 이분법적인 사고를 선호해 왔다. 신학전통은 "창조와 구원", "자연과 은총", "필연과 자유", "몸과 영혼" 등에 관하여 말해 왔다. 이 이원론의 맥락 안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명제가 만들어졌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이를 전제하고 완성한다".
나는 이 기본 명제가 첫 마디에서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둘째 마디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은총과 영광, 역사와 창조,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인됨과 완성된 인간됨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구분은 충분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기본 명제는 항상 다시금 종말론적 열광주의에 근거한 승리주의로 귀착된다. 즉 은총 안에는 자연을 완성하는 영광이 이미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약 안에는 이미 창조를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안에는 이미 인간성의 완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광주의는 은총,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은총,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신학적인 기본 명제의 두 번째 마디를 삼중적인 변증법으로 새롭게 표현한다: "은총은 자연을 완성하지 않고,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자연을 미리 준비시킨다. 은총은 자연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세상의 메시아적 준비이다"(Gratia non perficit, sed praeparat naturam ad gloriam aeternam. Gratia non est perfectio naturae, sed praeparatio messianica mundi ad regnum Dei). 이 기본 명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 안에서 계시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이르는 세계의 새 창조의 시작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직까지 창조의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리스도는 바로 이를 위하여 왔다. 바로 이로부터 자연과 은총 그리고 자연과 은총의 관계가 항상 하나님의 미래의 관점 안에서 말해져야 한다고 하는 결론이 나온다. 이 하나님의 미래는 자연만이 아니라 은총도 완성하며,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만든다. 더 나아가 역사적 계약이 아니라 역사적 계약을 통하여 약속되고 보증된, 오고 있는 영광의 나라가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성의 명시화, 진리, 완성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미래의 공동적인 인간실현으로 나아가는, 가능한 유일한 메시야적인 길이라는 결론이 이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메시야적인 길 위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해방되고 영화롭게 된 인간과 하나님의 정의 안에서 일치된 인류에 대한 동일한 희망의 동료와 증인으로서 자신 외에도 유대인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을 억압하지 않고 그에게 의존하며, 그와의 역사적인 사귐 안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본래적인 약속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세계 안에서 다른,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발견한다. 아마도 그는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기 보다는 가난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 병자들 그리고 사로잡힌 자들의 익명성 안에서 현존하는 다가오는 심판의 심판자(막 25장)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존재한다. 교회는 또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일하게 대변한다는 주장을 갖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교회가 "다원주의적인 사회" 안에서 종교적인 신앙의 임의성(任意性)으로 해체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 안으로 확고히 들어간다는것,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과의 유대와 억눌린 자들을 위한 그 "일차적 당파성"을 의미한다.
중세기의 유대교에서는 이방인들을 복음화하는 그리스도교가 -예를 들면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이방세계의 "메시야적 준비"(praeparatio messianica)로 간주되고 존중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러한 유대적-신학적 평가를 수용하며, 이방세계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까지 이를 확장한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에게 주어진 희망의 능력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은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되고 개방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메시야적인 운동 안에서 사고한다면, 큰 신학적 이원론은 그 단순한 대립으로부터 해방되고, 다가오는 더 큰 것을 향해서 상대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이원론은 더 이상 상대방에 대한 상호부정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그 다양한 상관관계 안에서 공통적인 삼자(三者)를 향하도록 결정될 것이다. 그리하여 은총과 자연, 계약과 창조, 그리스도인됨과 인간됨의 역사적 중재는 더 정확히 인식되고, 더 자세히 이해될 것이다.
5. 창조, 인간화 그리고 영광의 나라
"자연과 은총"의 구조를 이렇게 확장하는 이유를 들라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적이 유용할 것이다.
1. 첫 창조보도에 따르면, "창조의 목표"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쉼으로써", 그의 창조를 완성한다. 그래서 그는 일곱 째 날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한다. 하나님의 이 안식일은 "창조의 축제"이며, 창조의 축제로서 또한 "완성의 축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난 즉시 자신으로부터 물러감으로써, 안식일에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며, 안식 안에서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그의 안식 안에서 그의 모든 특별한 말씀과 활동은 끝난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온전히 그 자신으로서 임재한다. 자신의 안식으로 돌아옴으로써, 그는 그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 그의 얼굴 앞에서, 그의 임재와 그의 안식 안에서 피조물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고, 자신의 자유 안에서 자신을 전개시킨다.
창조주는 창조된 모든 것을 무로부터 존재케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무의 위협을 받는다. 모든 것은 다시 무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위협이 미치지 않는 장소와 시간을, "안식처"를 불안하게 추구한다고 우리는 결론내릴 수 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 9 이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단지 인간의 마음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불안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은 이러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첫 창조보도에 따르면, 피조물들이 자기 자신과 기쁨으로 되돌아가는 "안식"은, 영지주의와 신비주의가 가르치듯이, 하늘과 피안적인 하나님의 안식이 아니라 창조 안의 하나님의 안식이다. 하나님의 안식하는 직접적인 임재 안에서 그의 모든 창조물들은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되며, 무의 위협 앞에서 영원한 보호를 받는다. 안식은 모든 창조물들과 모든 창조의 사귐을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의 복으로 채운다. 칼 라너가 그의 모든 논문에서 파악할 수 없지만 너무나 가까운 하나님의 신비라고 그처럼 확신있게 설명한 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안식의 가까움의 조용함과 휴식이 아닌가? 이 안식 안에서 하나님은 말이 아닌 침묵을 통하여, 행위가 아닌 현존을 통하여 자신을 알린다.
2.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인간화는 단지 타락에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에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라고 불리고 있고, 인간이 많은 형제들 중의 맏아들인 그리스도를 "본받게 될"(롬 8, 29) 때,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결정된 그 진리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것을 단지 타락과 태초의 창조에만 뒤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미래에도 연결시켜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 17).
만약 성육신이 그리스도론의 중심에 놓여지면, 그리스도론의 이러한 종말론적 연관성은 너무 쉽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상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헌신,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그의 부활, 그의 새로운 몸의 영광스러운 변모로부터 시작하면, 그리스도론의 종말론적 지평은 즉시 빛난다. 이러한 종말론적 지평이 저 태초론적 지평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창조의 구원과 영광스러운 변모는 태초의 창조의 회복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새 창조"는 "태초의 창조"에 비해 새롭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됨에서 이미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규정된 점을 주목할 때,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인간의 이러한 태초의 규정의 회복으로 간주될 수 있고, 그 참되고 완성된 본질실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의 나라에서의 창조의 변모를 주목할 때,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하나님의 본성에의 완성된 참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간됨을 원초적 성례전(Ursakrament)으로 볼 수 있다. 토마스주의의 성례신학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회상의 표지(signum rememorativum)이고,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과 관련된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또한 기대의 표지(signum progosticon)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일에서의 궁극적인 영화와 관련된다. 두 전망의 통일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역사 안에 있는 현재의 인간들을 위한 은총의 표지(signum gratiae)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간됨이 태초의 일반적인 인간됨을 소급하여 지시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됨의 확실한 완성으로 여겨질 수 있듯이,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자신을 넘어서 모든 인간들을 위한 위대한 미래를 지시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의 길과 통과지점이다. 즉 그리스도는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성육신한 약속이다.
3. 만약 우리가 이러한 다양한 상관관계를 주목한다면, 인간됨을 그리스도인됨의 전제로, 그리고 그리스도인됨을 인간됨의 완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됨은 벌써 그 자체로서 인간됨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됨의 완성을 향해 가는 역사적 길이고 약속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이고 참된 인간됨은 인류의 기원 안에서 가설적으로 추구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역사의 미래에 놓여 있다. 즉 그것은 인간다운 세계 공동체 안의 인간다운 인간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인간론적으로 전개된 것은 실제로 인류의 공동적인 미래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자 하는 기획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인간다운 인간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마도 더 현실적인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의 인류 공동체가 생겨나서, 이 공동체의 일원들이 자신을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들로서 이해하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은 이러한 인간다운 미래를 향한 약속과 길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사실상 이제 "... 은총과 교회의 신학도, 그리고 우리의 현재를 냉정하게 고찰하는 정직한 목회신학도 실로 자체의 긴급성을 회피할 ... 수는 없는" 바로 그 주제를 이미 다소 다르게 평가한 셈이 되었다. 인간됨의 보편주의, 그리스도인됨의 특수주의 그리고 종교들의 다원주의, 이 삼각(三角)은 그 어떤 한 각(角)으로 해체될 수 없다. 이제 종말론적 신학에 따라 교회의 불가피한 특수주의가 인간됨의 보편주의와 종교들의 다원주의를 포용하고 정당화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6.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1. 우리가 역사적 은총과 종말론적 영광의 차이를 문제논의 안으로 진지하게 끌어들인다면, 역사적 교회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차이도 강조되어야 한다. 교회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는 성전도 없고, 그래서 교회도 더 이상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면, 역사적 교회는 보편성을 띠고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도 주장하거나 용인할 수가 없다. 보편적인 것은 새 창조의 나라이지 교회가 아니다. 이 점은 교회와 유대교, 회당과의 관계의 내적인 문제에서 바로 분명해진다. 만약 교회가 자신의 의도와 경향성에서 보편적이라고 한다면, 자신과 나란히 존재하는 유대교를 존중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유대인들의 유일한 미래는 세례와 교회입회가 될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너무나 오랫 동안 대변되고 실천되어 온 이러한 개선주의(凱旋主義)는 로마서 9-11장의 증언에서 이미 좌초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교회와 나란히 여전히 그의 구원소명을 갖고 있으며, 교회와 함께 영광 중에 메시야가 올 날에 대한 공동의 희망을 갖고 있다. 유일하게 참되게 "보편적이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저 미래 안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의 특수한 실존은 멈춘다. 왜냐하면 이들의 특별한 선택은 특별한 봉사를 위해 실현될 것이 때문이다.
2.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차별,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사도적 복음은 예수의 이름 안에서 당파성을 취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위(位)에서 내리쳤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空手)로 보내셨도다"(눅 1, 51 이하). 이 점은 교회 공동체 자체에서도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 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 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 26-29). 부자들, 강한 자들과 높은 자들에 맞서서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의 편을 드는 사도적 복음의 당파성은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도의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폭력적인 세계 안에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증언될 수 없다.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의 편을 드는 그리스도인의 당파성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일에서 필수적인 형태이다. 예수는 의로운 자들, 건강한 자들과 경멸하는 자들도 구원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죄인들, 병든 자들과 문둥병자들의 편으로 향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길에서 이스라엘도 구원하기 위하여 이방인 선교사가 되었다.
만약 이른 바 교회의 특수주의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당파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보편적인 구원주장 때문에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오늘 날의 세계에서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는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보편적인 구원을 주장하는 자신의 특수하고 주변적인 실존이 아니라, 사회가 이데올로기적-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이든지 단일한 형태를 갖든지, 폭력적인 사회 안에서 가난한 대중의 편을 드는 교회의 당파성이다.
만약 교회가 특수성 안에서 자신의 보편적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이 세계의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늘 따르려고 할 것이다. 교회는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를 통하여 이 세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임재를 발견하고, 이 임재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라너가 제기한 주제의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이 세계에서 그리스도교 밖에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가?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바로 마태복음 25장의 가난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 목마른 자들, 병든 자들 그리고 옥에 갇힌 자들이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든 아니든, 그리스도는 이들을 자신의 "형제들과 자매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신앙하든 신앙하지 않든,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는 마태복음 18장의 어린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비와 공의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도 역시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함께 고난받는다는 것과 고난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질문
(1) 칼 라너
"한번 더 십자가의 신학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제 죽음의 기본개념 일반에 관해서 단순히 지적하는 것 이상으로 뭔가를 말해야 한다면, 나의 비(非)-십자가의 신학, 나의 십자가의 신학의 미흡함이 어디에 있는지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이제 공격을 하려고 한다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만이 아니라 아드리엔네 폰 스파이어(Adrienne von Speyr)에게서도(물론 이 사람에게는 훨씬 더 그렇지만), 그리고 또 이들과는 무관하게 몰트만에게서도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을 구상하는 현대적인 경향성(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향성이다)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신학은 근본적으로 영지주의적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한 번 원초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오물과 진흙더미와 절망에서 헤어 나오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 한 번 더 거칠게 말한다면 -, 하나님이 바로 오물 속에 계신다는 것이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물론 알고 있고 또 실로 이미 강조해 왔던 사실대로, 고대의 성육신 이론, 즉 실체적 연합의 신학을 샅샅이 살펴보면, 내가 부인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는 하나의 의미있고 진지한 이론, 즉 하나님이 죽었다는 이론이 존재하고 있으며, 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그렇다고 성부수난설로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약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역사인 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면, 또 그런 한에서, 하나님이 실로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은 내게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 만약 이 말이 대체로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 참되고 진정한 그리고 나를 위로하시는 뜻에서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Deus impassibilis),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Deus immutabilis)이신 반면에, 나는 처음부터 이러한 참혹함 안에서는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몰트만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는 하나의 절대적인모순과 성부수난설의 신학, 아마도 하나님 자신 안으로 분열, 갈등, 무신성(無神性)을 투사(投射)하는 하나의 쉘링적 신학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까? ... 그리고 두 번째로 다음과 같이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 말을 뜻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P. Imhoff/H. Bailonowos, Karl Rahner im Gespr ch Ⅰ, M nchen 1982, 245f.)
(2) 위르겐 몰트만
사랑하는 라너 신부님께
나는 너무 늦게 이 인터뷰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갖는 신앙의 근본문제에 관하여 당신과 개인적으로 말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대로, 만약 죽음과 함께 공간과 시간 속의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당신의 생애의 제한된 시간보다는 하나님의 면전에 계신 이 순간에 당신은 내게 더 가까이 존재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에 관한 인터뷰에서 단지 지나치는 말로 저를 언급하셨습니다만, 나의 신앙과 나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신학의 핵심을 찌르셨습니다. "오로지 고난당하시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게쉬타포의 감옥에서 썼습니다. 1945년에 내가 오물투성이의 포로수용소 안에서 시련을 겪고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아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졌을" 때,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죽어 가는, 시련받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나를 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는 뜻에서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당신의 반대진술은 나의 마음을 동요시켰습니다. 나는 위로와 무감정 사이를 전혀 연결시킬 수가 없으며, 그래서 당신의 하나님 체험과 자기 체험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우리의 수난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수난사 아래 오신 것은 비자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고대교회의 신학자들에게는 오로지 피조물의 비자발적인 고난과 하나님의 본질적인 무감정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셋째 대안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사랑받는 자에 대한, 그리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겪는 사랑의 자발적인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유한한 피조물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방식으로 고난당하시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자신 안에서 무조건 고난당할 수 없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본질은 자비입니다. 나는이 점을 나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년, 214쪽 이하)에서 상세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도 없거니와 느끼실 수도 없습니다. 동정은 그분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들을 위로할 수도 없습니다. 함께 느끼는 자만이 동정적입니다. 감정적인 자만이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본질 상 감정적인 자만이 위로할 수 있지, 무감정한 자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을 나는 인격적인 뜻에서 위로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내게 너무 차갑고 시멘트처럼 무뚝뚝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동요시키고 놀라게 했던 것은 당신 자신의 진술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러한 참혹함 안에서는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잔인하고 찢겨지고 분리되며 운동불가능한 삶처럼 여겨집니다. "시멘트처럼 굳어졌다"고 생각되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며, 그는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생명과 같습니다. 실로 그것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딱딱하게 굳은, 그리고 이미 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독신제도가 하나님을 열광적으로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부과한, 자연적인 생활관계로부터의 격리가 주는 고통입니까?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것"은 예수회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의 의무를 완전히 부정하는 그러한 특별한 경험입니까? 아니면 그것은 육체적 생활이 점점 더 고달파진 한 늙은이의 생활감정일 뿐입니까? 그러나 부유하고 모든 면에서 축복받은 생활의 마지막에 누가 이 생활의 "참혹함"만을 바라보고, 그의 깨어지기 쉬운 미(美)와 유한한 선(善)도 역시 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단 한번 자신의 결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면, 누가 이 제자도(弟子道)의 대가(對價)에 대해 불평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배후에 있습니다. "처음부터"라고 당신은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분명히 인간의 이러한 생활 전체와 당신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지워진 그 어떤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악한 세상입니까, 아니면 숙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입니까? 우리는 "이 지구 상에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속해 있지 않기에, 그것은 당신이 표현 한대로 하나님이 내리신 파멸 덩어리(massa perditionis)라는 저주로부터 느끼는 지옥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처음부터"라는 어법은 이를 주목하는 모든 독자들의 영혼을 짓누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무나 절망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위로받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위로하는 뜻에서 하나님일 수가 있습니까?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애통도, 아무런 슬픔도, 아무런 부르짖음도 더 이상 없다는 것, 우리가 애통과 슬픔과 부르짖음 가운데서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을 뜻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고난불가능성과 그분의 부동성(不動性)과 그분의 사랑받지 못하는 무사랑 안으로 그 나름대로 "시멘트처럼 굳어져" 있다는 뜻은 분명히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하나님은 "불가능하시다"고 말하는 겁니까? 우리가 부정적 신학(否定的 神學)의 부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시멘트처럼 굳어 버리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개인의 자기 경험과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경험은 정확히 서로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부동성과 고난불가능성 안으로 시멘트처럼 굳어져 있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활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표현하신 대로, 하나님도 실제로 우리처럼 "바로 오물 속에 있는" 셈이 될 것이고, 하나님도 인간도 영원히 위로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생각을 끌어가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 당시보다,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더 많이 아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제는 당신 때문에 깊은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
저자/위르겐 몰트만
제목/ 칼 라너와의 대화
신학을 가르치는 자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가 먼저 제기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대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더 진척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그의 인격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을 다하여 그의 삶을 바친 그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격이 지닌 지혜와 선함도 역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신학적 대화를 받아들이게 되면, 실로 하나님의 더 큰 신비 앞에서 인간의 이해력이 한계를 갖는다는 것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 우리의 최상의 사상이라는 것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전체의 불완전한 조각들이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아름다움의 모호한 투영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사상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사상이 갖는 최상의 존엄성이다. 위대하고 거의 완전한 신학적 총람과 체계도, 이것이 이해하고 말하려고 하는 것을 바라볼 때는, 파편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우리의 사상이 틈을 갖는 그곳에서, 계산이 잘 되지 않는 지점에서, 체계 모순의 자유가 엄청나게 커지는 지점에서, 우리의 사상은 더 위대한 것과 오고 있는 것을 지시하기 때문에 빛나기 시작한다. "개념들은 우상숭배를 창조한다. 오로지 놀람만이 그 무엇을 이해한다"고 언젠가 닛싸의 그레고리가 말한 적이 있다. 라너의 저작들 가운데서 사고하는 놀람은 결정적인 곳에서 발견된다.
바로 이것을 많은 제자들은 칼 라너에게서 배웠다. 신학체계를 완성한 많은 신학자들과는 달리 그의 장점은 그가 그의 전제로부터 사고하고 말해야 할 것을 모두 생각하고 말한 다음에 뒤로 물러나 침묵하고 내용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바로 그곳에 놓여 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 앞의 신학적 겸손의 표현만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의 사람들과 또 그와 나란히 같은 길을 걸어갔고 또 걸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신학적 사귐을 나누는 몸짓도 발견한다.
나는 이 논문에서 칼 라너와 하나의 대화를 갖고자 하며, 가능하다면, 그가 몇 년 전에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주목받을 만한 테제를 가지고서 열어 놓았던 대화를 진척시키고자 한다. 그 테제의 신학적 근거설명으로서 나는 그의 논문 중에서 "인간화(人間化)의 신학에 관하여(Zur Theologie der Menschwerdung)"을 덧붙인다. 나는 관심을 이 두 논문에 국한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의도하는 것은 라너 사상의 포괄적 설명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1.그리스도교의 보편성 주장, 교회의 특수한 존재 및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적 현실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은총과 교회의 신학도, 그리고 우리의 현재를 냉정하게 고찰하는 정직한 목회신학도 실로 주제 자체의 긴급성을 회피하거나, 하잘 것이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여기서 라너는 그리스도인됨과 인간됨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원적인 사회와 세계의 서로 다른 문화들과 종교들의 다원주의 안에서 구원의 보편성 주장을 단지 상대적으로 그리고 특수하게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교회의 더 깊은 당혹감 안으로 이 주제를 끌어간다. 그리스도교적 제국 안에서 절대성을 내세우던 교회의 옛 주장은 사라졌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법 4장 1항은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세계관적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하나의 "종교적 실존해석의 가능한 형태"로 삼고 있다. "동일한 권리 때문이든, 심지어는 더 큰 약속 때문이든 간에, 다른 형태들도 나란히 함께 존재하고 있다." 교회가 다른 많은 세계종교들 중의 한 종교가 되어가면 갈수록, 그리고 교회가 아시아의 오래된 문화권에 발을 들여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만이 유일한 종교를 대변한다고 내세우던 교회의 주장은 사라져 간다. 물론 교회는 모든 민족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대개가 주변적인 소수로 존재할 따름이다. 서양에서조차도 교회는 "작은 무리"로 줄어드는 것같이 보인다.
사회와 종교의 외적, 내적 다원주의 안에 있는 교회의 이러한 시대사적 문제의 뒷면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됨의 더 깊은, 즉 본질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절대적인 것,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상대적인 것, 유한하고 제한적이고 인간적인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일반적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보편적인 것,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의 참 인간됨이 어떻게 특수한 것, 그리스도인됨에 의해 일반적으로 대변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에 의해, 보편적인 것이 특수한 것에 의해 설명되고 대변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되더라도 어떻게 절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상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특수한 것이 특수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고, 전자와 후자의 대리적(代理的) 동일성이 해체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당혹감만이 아니고 이미 이스라엘의 당혹감이기도 하다. 선택받은 한 백성이 어떻게 그 자신의 선택을 미화하지 않으면으서도, 모든 민족들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또한 오늘 날의 이른 바 "세계열강"의 이데올로기적 딜렘마이기도 하다. 미국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유와 인권"을 대변하면서도, 어떻게 이것이 아메리카의 서양패권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소련연방의 "최초의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가 "전 인류의 공동체"라는 사회주의를 대변하면서도, 어떻게 이것이 소비예트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라너가 제기하는 문제는 실로 많은 문제영역들을 갖고 있으며, 단지 교회 내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이 해결은 교회와 그리스도교를 넘어서 오늘 날 형성되어 가는 중에 있는, 그리고 생존에 필수적인 범세계적 인류 공동체를 위해 의미를 갖는다.
2. 인간의 자기초월과 하나님의 자기전달
모든 보편성 주장처럼 그리스도교의 구원주장의 보편성도 역시 "이 길 밖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이 없다"는 배타적 요구에 근거해 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확신하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종말론적 주장을 교회론적 주장과 결합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참된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함"에 동의한다. 옛 고백서가 말하듯이, "실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결론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하지만 그의 교회전통과는 달리 그는 "하나의 참된 교회"에 대해 말하지만, 이것을 "로마-카톨릭 교회"라고 분명히 말하진 않는다. "참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설립된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이런 규정은 당연히 로마-카톨릭 교회를 배제하지 않지만, 동시에 정통주의적, 개신교적 교회규정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라너가 확신하듯이, 인간에 대한 결정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고대의 문장은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신앙되는 곳에는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고 신앙된다는 의미에서, 전자는 후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구원주장의 이러한 배타성은 이제 포괄적 보편성과 대립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기"(딤전 2, 4)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너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 그의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무리의 그의 형제들이 무조건 그리고 원칙적으로 그들의 삶의 실현으로부터 배제되고, 영원한 무의미로 심판받는다"고 그리스도인은 믿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믿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고,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지체들이 될수있다"고 믿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가능성(될 수 있다)"이 단순히 가설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것은 "사람이 단지 익명적 '유신론자'만이 아니라 익명적 그리스도인도 될 수 있고(그렇게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실로 "이 익명적 연관성이 분명히 보여질 수 있고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라너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인간의 그러한 연관성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라너가 대답을 주려고 하는 신학적 자리는 스콜라 신학의 "자연과 은총"의 구조이다. 우리는 먼저 대답이 어떠한지 보고난 후, 중세기의 상황과는 본질적인 차이점을 갖는, 앞에서 설명한 오늘 날의 상황에 걸맞는 대답을 주기에는 이 구조가 너무 협소한 것은 아닌지를 묻고자 한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하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능의 덕분에 생존하고 생존할 가능성을 갖는다고 믿는 피조물의 자유로운 자기전달을 전제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피조물에게는 확실히 "자신을 넘어서 계시 속에서 완전히 새로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너는 인간을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제한적으로 열려 있는 존재"라고 부른다. 그에게서 "열려 있음(개방성)"은 한 편으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정의 불가능성(定義 不可能性)"을 의미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영", 즉 "무한한 신비",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존성은 "이 하나님의 세계초월성과 인격성"에 대한 지식 안에서 드러나며, "숨어 있는 그 하나님의 새롭고 가능한, 말씀을 듣는" 능력의 근거가 된다. 전제된 그의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가능성의 힘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는 이러한 경향성을 라너는 "익명적 유신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의 자연적 욕구(desiderium naturale) 이론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토마스는 인간의 이 욕구가 지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본 반면에, 라너에 의하면 이것은 전 인간의 운동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경향성은 인간이 된 하나님, 그리스도와의 결속성(結束性)을 포함하는가? 라너는 긍정적으로 대답하지만, 한 편으로는 양자가 자동적으로 함께 결속된다는 사고를 배제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양자가 순전히 우연히 결합된다는 표상도 배제한다. 그리스도는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 가장 우연한 현실성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분명히 인간과 관련된 현실성의 사실이기도 하다." 라너는 이러한 연결사를 결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불신앙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표명하고 나타낼 때,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 인간의 입장에서부터 말한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자신을 맡길 때 자신으로 돌아오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간화는 "전 인간의 본질실현의 유일회적인 최상의 사례" 이다.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자기초월은 하나님의 자기전달 안에서 성취되며 완성된다. 하나님의 인간화 안에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 라너에 의하면 이 두 관점, 즉 인간 현실성의 본질실현과 하나님의 인간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헌신과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헌신은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라너는 이 두 측면을 "내면적이면서도 외형적으로", "익명적이면서도 명시적으로" 서로 관련시키며, "인간이 자신의 초월 경험 안에서 ... 이미 은총의 선물을 경험하며, 그리스도 안의 말씀 계시는 ... 우리가 항상 이미 은총으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의 명시화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계시는 인간이 그의 존재의 깊이에서 이미 항상 반성없이 경험하는, 은총에 의한 계시의 반성적인 표명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 제공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최상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자기전달"은 "창조 전체의 목표"이다. 이것은 배타적 관점에서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고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포괄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참된 인간이 된다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비주의적 신학으로부터 유래한, 항상 거듭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고의 전환 속에서 라너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즉 자기 자신의 본질에 이르는,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인간은, 알든 모르든지, 그리스도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이미 이 계시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계시는 이미 그 안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긍정 속에서 우리에게 철저히 가까이 다가오는 신비의 은총을 수용한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깊이에서 항상 이미 자신의 가장 본래적인 본질의 실현으로서 경험하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명명한다. 이로부터 다음의 두 명제가 생긴다. 1. 인간은 그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 안에서 익명적 그리스도인이다. 2. 그리스도인은 그의 참된 현실성 안에서 명백한 인간이다.
3."자연과 은총"의 구조 안에 있는 열려진 질문들
우리는 먼저 라너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자연과 은총"의 구조 안에 머물면서, 몇 가지 비판적인 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1. 라너의 인간정의(人間定義), 즉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정의 불가능성", "자기초월"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에 대한 무제한적인 개방성"은 보편화할 수 있는 것인가? "아시아의 고대 문화"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인간"의 정의가 아니라 유럽적이고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인간이해다. 이미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인간의 근본조건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1920년대의 중앙 유럽의 시각에서 인간을 이해한 것처럼, 라너의 존재론적 인간론 안에서도 역시 유럽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특정한 실존의 이상(理想)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불안한 마음 (Cor inquietum)은 물론 창조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성향이지만, 그에게서 그리고 그 이후로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항상 아브라함의 탈출, 이스라엘의 탈출 그리고 히브리서의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통해 규정되어 왔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왔던 수 천년 이전의 종교들, 도교와 힌두교와 불교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종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미래지향적인 불안을 낯설고도 놀랍게 여긴다. 이러한 불안이 어디서나 모든 시대에서 모든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는 주장을 전자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시도로 이해할 것이며, 분명히 유럽적인 이질화(異質化)로 생각하여 거부할 것이다.
실로 라너의 인간규정은 보편적으로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규정은 인간의 정의 불가능성의 규정처럼 가능한 한 가장 큰 자유이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의들을 포함하고 능가하기 때문이다. 긍정에 고착되는 것보다는 불분명하게 부정하는 것이 차라리 동의를 얻기 더 쉽다. 너무 빨리 반박을 자극하는 발언보다는 무한한 신비 앞에서 침묵하는 것에서 더 큰 사귐이 이루어진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공통적인 보편성을 규정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이 규정을 다른 규정들에 맞추려고 하는 주관적인 권리이다. 만약 공통적인 인간성이 있다고 한다면, 만약 하나의 인간적인 세계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면, 누가 그리고 어떤 기구가 이 조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법률들을 공포할 권리를 갖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라너는 그의 논문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분명히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규정하기에, 바로 이와 동시에 인간 안에 "익명적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말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의 보편적인 이면(裏面)과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거꾸로 자신이 유일하고 정통한 인간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요구가 다시금 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계시의 빛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올바로 규정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의 보편적인 요구가 다시금 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가?
2.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우리가 항상 이미 은총으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의 명시화"이고, "인간이 그의 존재의 깊이에서 이미 항상 반성없이 경험하는, 은총에 의한 계시의 반성적인 표명"이라고 하는 라너의 정의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갖는 탁월한 새로움과 특수함을 정당하게 인정하는가? 물론 라너는 그리스도의 사실(Faktum)을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우연한 현실성의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이 사실이 어느 정도로 "가장 명백하게 인간과 관련된" 사실인지만을 해석한다. 인간과의 관련성은 인간 안에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이미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의 "명시화"라고 표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는 실제로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지 않고,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하나님의 신비의 불가해한 가까움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만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명명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계시는 완전히 이러한 "은총에 의한 계시"와 관련되고, 이 계시는 완전히 인간의 피조성과 관련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마땅히 되어야 할 바로 그 존재가 된다. 그는 하나님에게 나아감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라너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철저히 실존적인 해석이다. 루돌프 불트만도 그렇게 보았다: "예수 안에서 나타난 빛은 창조 안에서 이미 항상 빛나고 있었던 그 빛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이 구원계시의 빛 안에서 이해하는 자신은 그가 창조와 율법 안의 계시 안에서 이미 항상 이해했던 것, 즉 하나님의 피조물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계시가 단지 인간성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교 신앙도 인간 안에 있는 은밀한 하나님의 은총의 각성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으로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이 일반적인 인간성의 드러냄, 각성 그리고 그 단순한 확인이 됨으로써, 그 특수성은 이러한 인간성 안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이 인간성의 진리라고 강변된다. 이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까지도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고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낡은 절대주의적 주장이 아닌가?
3. 만약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의 전제로 이해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이 인간이 된다는 사실의 표현과 실현으로 이해된다면, 이러한 사고는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쉽사리 순환구조에 빠진다. 즉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미리 전제되고, 전제된 사실이 차후에 확인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과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마치 그림과 그 그림에 맞춘 틀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특수한 존재의 일반성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일반적인 존재의 특수성이 된다. 그렇지만 이로 인하여 이 특수성과 보편성은 배타적으로 서로 관련된다. 세계관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갖는 국가에서의 종교적 자유의 다원주의와 지구 상의 세계종교의 다원주의를 위한 여지는 사실상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자연과 은총이라고 하는 중세기의 구조는 현대적으로 해석되지만 변경되지는 않는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한다."(Gratia praespponit naturam): 은총은 스스로 수동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자연을 전제한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destruit, sed praesupponit et perficit naturam): 그리스도의 인간화는 창조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은총은 자연을 완성하고 그리스도인은 인간성의 완성이다.
이러한 중세기의 구조는 물론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존재론적 단계와 자연과 은총의 구원사적 관계와 직접 관련된다. 하지만 이 구조는 교회가 세계에 대하여 자신을 "사회의 왕관"과 완전한 사회(Societas perfecta)라고 주장하던 지배권을 반영한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주장은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제국 안에서만 주장될 수 있었다. 6대륙에서 선교해야 하는 열린 상황 안에서는 이 주장이 전혀 고수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이 주장은 교회에게 항상 너무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천년왕국론과 같이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4."자연과 은총"의 구조의 확장
신학 전통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중적이며 이분법적인 사고를 선호해 왔다. 신학전통은 "창조와 구원", "자연과 은총", "필연과 자유", "몸과 영혼" 등에 관하여 말해 왔다. 이 이원론의 맥락 안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명제가 만들어졌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이를 전제하고 완성한다".
나는 이 기본 명제가 첫 마디에서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둘째 마디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은총과 영광, 역사와 창조,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인됨과 완성된 인간됨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구분은 충분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기본 명제는 항상 다시금 종말론적 열광주의에 근거한 승리주의로 귀착된다. 즉 은총 안에는 자연을 완성하는 영광이 이미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약 안에는 이미 창조를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안에는 이미 인간성의 완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광주의는 은총,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은총,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신학적인 기본 명제의 두 번째 마디를 삼중적인 변증법으로 새롭게 표현한다: "은총은 자연을 완성하지 않고,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자연을 미리 준비시킨다. 은총은 자연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세상의 메시아적 준비이다"(Gratia non perficit, sed praeparat naturam ad gloriam aeternam. Gratia non est perfectio naturae, sed praeparatio messianica mundi ad regnum Dei). 이 기본 명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 안에서 계시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이르는 세계의 새 창조의 시작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직까지 창조의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리스도는 바로 이를 위하여 왔다. 바로 이로부터 자연과 은총 그리고 자연과 은총의 관계가 항상 하나님의 미래의 관점 안에서 말해져야 한다고 하는 결론이 나온다. 이 하나님의 미래는 자연만이 아니라 은총도 완성하며,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만든다. 더 나아가 역사적 계약이 아니라 역사적 계약을 통하여 약속되고 보증된, 오고 있는 영광의 나라가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성의 명시화, 진리, 완성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미래의 공동적인 인간실현으로 나아가는, 가능한 유일한 메시야적인 길이라는 결론이 이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메시야적인 길 위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해방되고 영화롭게 된 인간과 하나님의 정의 안에서 일치된 인류에 대한 동일한 희망의 동료와 증인으로서 자신 외에도 유대인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을 억압하지 않고 그에게 의존하며, 그와의 역사적인 사귐 안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본래적인 약속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세계 안에서 다른,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발견한다. 아마도 그는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기 보다는 가난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 병자들 그리고 사로잡힌 자들의 익명성 안에서 현존하는 다가오는 심판의 심판자(막 25장)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존재한다. 교회는 또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일하게 대변한다는 주장을 갖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교회가 "다원주의적인 사회" 안에서 종교적인 신앙의 임의성(任意性)으로 해체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 안으로 확고히 들어간다는것,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과의 유대와 억눌린 자들을 위한 그 "일차적 당파성"을 의미한다.
중세기의 유대교에서는 이방인들을 복음화하는 그리스도교가 -예를 들면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이방세계의 "메시야적 준비"(praeparatio messianica)로 간주되고 존중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러한 유대적-신학적 평가를 수용하며, 이방세계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까지 이를 확장한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에게 주어진 희망의 능력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은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되고 개방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메시야적인 운동 안에서 사고한다면, 큰 신학적 이원론은 그 단순한 대립으로부터 해방되고, 다가오는 더 큰 것을 향해서 상대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이원론은 더 이상 상대방에 대한 상호부정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그 다양한 상관관계 안에서 공통적인 삼자(三者)를 향하도록 결정될 것이다. 그리하여 은총과 자연, 계약과 창조, 그리스도인됨과 인간됨의 역사적 중재는 더 정확히 인식되고, 더 자세히 이해될 것이다.
5. 창조, 인간화 그리고 영광의 나라
"자연과 은총"의 구조를 이렇게 확장하는 이유를 들라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적이 유용할 것이다.
1. 첫 창조보도에 따르면, "창조의 목표"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쉼으로써", 그의 창조를 완성한다. 그래서 그는 일곱 째 날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한다. 하나님의 이 안식일은 "창조의 축제"이며, 창조의 축제로서 또한 "완성의 축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난 즉시 자신으로부터 물러감으로써, 안식일에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며, 안식 안에서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그의 안식 안에서 그의 모든 특별한 말씀과 활동은 끝난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온전히 그 자신으로서 임재한다. 자신의 안식으로 돌아옴으로써, 그는 그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 그의 얼굴 앞에서, 그의 임재와 그의 안식 안에서 피조물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고, 자신의 자유 안에서 자신을 전개시킨다.
창조주는 창조된 모든 것을 무로부터 존재케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무의 위협을 받는다. 모든 것은 다시 무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위협이 미치지 않는 장소와 시간을, "안식처"를 불안하게 추구한다고 우리는 결론내릴 수 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 9 이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단지 인간의 마음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불안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은 이러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첫 창조보도에 따르면, 피조물들이 자기 자신과 기쁨으로 되돌아가는 "안식"은, 영지주의와 신비주의가 가르치듯이, 하늘과 피안적인 하나님의 안식이 아니라 창조 안의 하나님의 안식이다. 하나님의 안식하는 직접적인 임재 안에서 그의 모든 창조물들은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되며, 무의 위협 앞에서 영원한 보호를 받는다. 안식은 모든 창조물들과 모든 창조의 사귐을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의 복으로 채운다. 칼 라너가 그의 모든 논문에서 파악할 수 없지만 너무나 가까운 하나님의 신비라고 그처럼 확신있게 설명한 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안식의 가까움의 조용함과 휴식이 아닌가? 이 안식 안에서 하나님은 말이 아닌 침묵을 통하여, 행위가 아닌 현존을 통하여 자신을 알린다.
2.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인간화는 단지 타락에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에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라고 불리고 있고, 인간이 많은 형제들 중의 맏아들인 그리스도를 "본받게 될"(롬 8, 29) 때,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결정된 그 진리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것을 단지 타락과 태초의 창조에만 뒤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미래에도 연결시켜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 17).
만약 성육신이 그리스도론의 중심에 놓여지면, 그리스도론의 이러한 종말론적 연관성은 너무 쉽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상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헌신,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그의 부활, 그의 새로운 몸의 영광스러운 변모로부터 시작하면, 그리스도론의 종말론적 지평은 즉시 빛난다. 이러한 종말론적 지평이 저 태초론적 지평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창조의 구원과 영광스러운 변모는 태초의 창조의 회복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새 창조"는 "태초의 창조"에 비해 새롭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됨에서 이미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규정된 점을 주목할 때,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인간의 이러한 태초의 규정의 회복으로 간주될 수 있고, 그 참되고 완성된 본질실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의 나라에서의 창조의 변모를 주목할 때,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하나님의 본성에의 완성된 참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간됨을 원초적 성례전(Ursakrament)으로 볼 수 있다. 토마스주의의 성례신학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회상의 표지(signum rememorativum)이고,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과 관련된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또한 기대의 표지(signum progosticon)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일에서의 궁극적인 영화와 관련된다. 두 전망의 통일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역사 안에 있는 현재의 인간들을 위한 은총의 표지(signum gratiae)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간됨이 태초의 일반적인 인간됨을 소급하여 지시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됨의 확실한 완성으로 여겨질 수 있듯이,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자신을 넘어서 모든 인간들을 위한 위대한 미래를 지시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의 길과 통과지점이다. 즉 그리스도는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성육신한 약속이다.
3. 만약 우리가 이러한 다양한 상관관계를 주목한다면, 인간됨을 그리스도인됨의 전제로, 그리고 그리스도인됨을 인간됨의 완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됨은 벌써 그 자체로서 인간됨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됨의 완성을 향해 가는 역사적 길이고 약속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이고 참된 인간됨은 인류의 기원 안에서 가설적으로 추구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역사의 미래에 놓여 있다. 즉 그것은 인간다운 세계 공동체 안의 인간다운 인간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인간론적으로 전개된 것은 실제로 인류의 공동적인 미래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자 하는 기획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인간다운 인간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마도 더 현실적인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의 인류 공동체가 생겨나서, 이 공동체의 일원들이 자신을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들로서 이해하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은 이러한 인간다운 미래를 향한 약속과 길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사실상 이제 "... 은총과 교회의 신학도, 그리고 우리의 현재를 냉정하게 고찰하는 정직한 목회신학도 실로 자체의 긴급성을 회피할 ... 수는 없는" 바로 그 주제를 이미 다소 다르게 평가한 셈이 되었다. 인간됨의 보편주의, 그리스도인됨의 특수주의 그리고 종교들의 다원주의, 이 삼각(三角)은 그 어떤 한 각(角)으로 해체될 수 없다. 이제 종말론적 신학에 따라 교회의 불가피한 특수주의가 인간됨의 보편주의와 종교들의 다원주의를 포용하고 정당화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6.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1. 우리가 역사적 은총과 종말론적 영광의 차이를 문제논의 안으로 진지하게 끌어들인다면, 역사적 교회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차이도 강조되어야 한다. 교회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는 성전도 없고, 그래서 교회도 더 이상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면, 역사적 교회는 보편성을 띠고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도 주장하거나 용인할 수가 없다. 보편적인 것은 새 창조의 나라이지 교회가 아니다. 이 점은 교회와 유대교, 회당과의 관계의 내적인 문제에서 바로 분명해진다. 만약 교회가 자신의 의도와 경향성에서 보편적이라고 한다면, 자신과 나란히 존재하는 유대교를 존중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유대인들의 유일한 미래는 세례와 교회입회가 될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너무나 오랫 동안 대변되고 실천되어 온 이러한 개선주의(凱旋主義)는 로마서 9-11장의 증언에서 이미 좌초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교회와 나란히 여전히 그의 구원소명을 갖고 있으며, 교회와 함께 영광 중에 메시야가 올 날에 대한 공동의 희망을 갖고 있다. 유일하게 참되게 "보편적이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저 미래 안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의 특수한 실존은 멈춘다. 왜냐하면 이들의 특별한 선택은 특별한 봉사를 위해 실현될 것이 때문이다.
2.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차별,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사도적 복음은 예수의 이름 안에서 당파성을 취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위(位)에서 내리쳤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空手)로 보내셨도다"(눅 1, 51 이하). 이 점은 교회 공동체 자체에서도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 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 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 26-29). 부자들, 강한 자들과 높은 자들에 맞서서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의 편을 드는 사도적 복음의 당파성은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도의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폭력적인 세계 안에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증언될 수 없다.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의 편을 드는 그리스도인의 당파성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일에서 필수적인 형태이다. 예수는 의로운 자들, 건강한 자들과 경멸하는 자들도 구원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죄인들, 병든 자들과 문둥병자들의 편으로 향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길에서 이스라엘도 구원하기 위하여 이방인 선교사가 되었다.
만약 이른 바 교회의 특수주의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당파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보편적인 구원주장 때문에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오늘 날의 세계에서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는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보편적인 구원을 주장하는 자신의 특수하고 주변적인 실존이 아니라, 사회가 이데올로기적-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이든지 단일한 형태를 갖든지, 폭력적인 사회 안에서 가난한 대중의 편을 드는 교회의 당파성이다.
만약 교회가 특수성 안에서 자신의 보편적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이 세계의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늘 따르려고 할 것이다. 교회는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를 통하여 이 세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임재를 발견하고, 이 임재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라너가 제기한 주제의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이 세계에서 그리스도교 밖에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가?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바로 마태복음 25장의 가난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 목마른 자들, 병든 자들 그리고 옥에 갇힌 자들이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든 아니든, 그리스도는 이들을 자신의 "형제들과 자매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신앙하든 신앙하지 않든,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는 마태복음 18장의 어린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비와 공의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도 역시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함께 고난받는다는 것과 고난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질문
(1) 칼 라너
"한번 더 십자가의 신학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제 죽음의 기본개념 일반에 관해서 단순히 지적하는 것 이상으로 뭔가를 말해야 한다면, 나의 비(非)-십자가의 신학, 나의 십자가의 신학의 미흡함이 어디에 있는지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이제 공격을 하려고 한다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만이 아니라 아드리엔네 폰 스파이어(Adrienne von Speyr)에게서도(물론 이 사람에게는 훨씬 더 그렇지만), 그리고 또 이들과는 무관하게 몰트만에게서도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을 구상하는 현대적인 경향성(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향성이다)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신학은 근본적으로 영지주의적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한 번 원초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오물과 진흙더미와 절망에서 헤어 나오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 한 번 더 거칠게 말한다면 -, 하나님이 바로 오물 속에 계신다는 것이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물론 알고 있고 또 실로 이미 강조해 왔던 사실대로, 고대의 성육신 이론, 즉 실체적 연합의 신학을 샅샅이 살펴보면, 내가 부인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는 하나의 의미있고 진지한 이론, 즉 하나님이 죽었다는 이론이 존재하고 있으며, 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그렇다고 성부수난설로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약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역사인 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면, 또 그런 한에서, 하나님이 실로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은 내게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 만약 이 말이 대체로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 참되고 진정한 그리고 나를 위로하시는 뜻에서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Deus impassibilis),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Deus immutabilis)이신 반면에, 나는 처음부터 이러한 참혹함 안에서는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몰트만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는 하나의 절대적인모순과 성부수난설의 신학, 아마도 하나님 자신 안으로 분열, 갈등, 무신성(無神性)을 투사(投射)하는 하나의 쉘링적 신학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까? ... 그리고 두 번째로 다음과 같이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 말을 뜻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P. Imhoff/H. Bailonowos, Karl Rahner im Gespr ch Ⅰ, M nchen 1982, 245f.)
(2) 위르겐 몰트만
사랑하는 라너 신부님께
나는 너무 늦게 이 인터뷰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갖는 신앙의 근본문제에 관하여 당신과 개인적으로 말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대로, 만약 죽음과 함께 공간과 시간 속의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당신의 생애의 제한된 시간보다는 하나님의 면전에 계신 이 순간에 당신은 내게 더 가까이 존재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에 관한 인터뷰에서 단지 지나치는 말로 저를 언급하셨습니다만, 나의 신앙과 나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신학의 핵심을 찌르셨습니다. "오로지 고난당하시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게쉬타포의 감옥에서 썼습니다. 1945년에 내가 오물투성이의 포로수용소 안에서 시련을 겪고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아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졌을" 때,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죽어 가는, 시련받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나를 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는 뜻에서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당신의 반대진술은 나의 마음을 동요시켰습니다. 나는 위로와 무감정 사이를 전혀 연결시킬 수가 없으며, 그래서 당신의 하나님 체험과 자기 체험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우리의 수난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수난사 아래 오신 것은 비자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고대교회의 신학자들에게는 오로지 피조물의 비자발적인 고난과 하나님의 본질적인 무감정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셋째 대안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사랑받는 자에 대한, 그리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겪는 사랑의 자발적인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유한한 피조물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방식으로 고난당하시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자신 안에서 무조건 고난당할 수 없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본질은 자비입니다. 나는이 점을 나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년, 214쪽 이하)에서 상세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도 없거니와 느끼실 수도 없습니다. 동정은 그분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들을 위로할 수도 없습니다. 함께 느끼는 자만이 동정적입니다. 감정적인 자만이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본질 상 감정적인 자만이 위로할 수 있지, 무감정한 자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을 나는 인격적인 뜻에서 위로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내게 너무 차갑고 시멘트처럼 무뚝뚝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동요시키고 놀라게 했던 것은 당신 자신의 진술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러한 참혹함 안에서는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잔인하고 찢겨지고 분리되며 운동불가능한 삶처럼 여겨집니다. "시멘트처럼 굳어졌다"고 생각되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며, 그는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생명과 같습니다. 실로 그것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딱딱하게 굳은, 그리고 이미 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독신제도가 하나님을 열광적으로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부과한, 자연적인 생활관계로부터의 격리가 주는 고통입니까?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것"은 예수회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의 의무를 완전히 부정하는 그러한 특별한 경험입니까? 아니면 그것은 육체적 생활이 점점 더 고달파진 한 늙은이의 생활감정일 뿐입니까? 그러나 부유하고 모든 면에서 축복받은 생활의 마지막에 누가 이 생활의 "참혹함"만을 바라보고, 그의 깨어지기 쉬운 미(美)와 유한한 선(善)도 역시 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단 한번 자신의 결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면, 누가 이 제자도(弟子道)의 대가(對價)에 대해 불평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배후에 있습니다. "처음부터"라고 당신은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분명히 인간의 이러한 생활 전체와 당신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지워진 그 어떤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악한 세상입니까, 아니면 숙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입니까? 우리는 "이 지구 상에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속해 있지 않기에, 그것은 당신이 표현 한대로 하나님이 내리신 파멸 덩어리(massa perditionis)라는 저주로부터 느끼는 지옥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처음부터"라는 어법은 이를 주목하는 모든 독자들의 영혼을 짓누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무나 절망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위로받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위로하는 뜻에서 하나님일 수가 있습니까?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애통도, 아무런 슬픔도, 아무런 부르짖음도 더 이상 없다는 것, 우리가 애통과 슬픔과 부르짖음 가운데서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을 뜻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고난불가능성과 그분의 부동성(不動性)과 그분의 사랑받지 못하는 무사랑 안으로 그 나름대로 "시멘트처럼 굳어져" 있다는 뜻은 분명히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하나님은 "불가능하시다"고 말하는 겁니까? 우리가 부정적 신학(否定的 神學)의 부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시멘트처럼 굳어 버리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개인의 자기 경험과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경험은 정확히 서로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부동성과 고난불가능성 안으로 시멘트처럼 굳어져 있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활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표현하신 대로, 하나님도 실제로 우리처럼 "바로 오물 속에 있는" 셈이 될 것이고, 하나님도 인간도 영원히 위로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생각을 끌어가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 당시보다,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더 많이 아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제는 당신 때문에 깊은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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